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2023. 9. 24(주일오전예배) 빌립보서 4:4-7
인터넷에 우산천사를 치면 지난 8월 29일 기사가 나온다. 비오는 날 손수레를 끌어야 했기에 우산을 쓸 수 없는 한 할아버지를 분홍색 작은 우산을 든 여성이 씌워드리는 내용이다. 분홍색 작은 우산으로 할아버지를 씌워 드리느라 자신의 어깨는 비에 젖어버린 여성은 1Km 남짓 우산을 씌워드렸다. 그리고 마트 근처에서 할아버지를 기다리게 한 여성은 3만원이 담긴 봉투를 드렸다, 비가 와서 점심먹으러 가는 길에 이 여성을 만난 할아버지는 그 봉투를 받고 연신 감사를 표현하였다.
<사진 보기>
이 사진은 한 기자가 우연히 촬영하여 기사화 되었다. 그래서 언론사는 이 여성을 찾아 인터뷰를 하려 하였는데, 여성은 극구 사양하여 인터뷰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그 여성이 인터뷰를 사양하면서 한 몇마디의 말이 있었다.
자신은 자녀를 둔 엄마이고, 또 교육계에 종사하는 사람으로 자신의 행동이 자연스러운 것은 아마도 기독교 신앙이 있어서 그런 것같다.
어떤 분은 이 기사와 사진을 본 이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진이라고 평가를 한다.
그런데 지금 저와 여러분의 삶에 이런 아름다운 사진이 있는가? 오늘 본문에는 법정용어인 관용이라는 단어가 나온다. 이 관용은 재판의 결과가 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음에도 흔들리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그래서 어떤 목사님들은 이 관용을 바다로 설명한다. 쉽게 설명하면 백천귀해(百川歸海)라는 말이 있듯이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흘러간다. 그렇게 강물이 바다로 흘러갈 수 밖에 없는 것은 바다는 낮은 자리에서 1급수만이 아니라, 3급수도 다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관용이란 겸손하여 모든 사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고 설명한다.
또 어떤 목사님은 관용을 유연성으로 설명한다. 그래서 어린 나이 때는 넘어져도 유연성을 가졌기 때문에 다치지 않는다. 그런데 유연성을 잃어버린 성인은 넘어지면 크게 다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람과의 관계를 유연성을 가지고 대함으로 상처가 없이 만날 수 있는 것을 관용이라 말한다.
지금 우리에게 이러한 관용의 모습이 있는가? 오늘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5절)고 명령하고 있다. 그런데 바울의 이 명령은 순종하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빌립보서의 기록연대를 사도 바울이 1차 로마감옥에 투옥된 61-62년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2-3년이 지나면 로마대화재가 발생하고, AD 68년 네로가 죽을 때까지 엄청난 박해를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바울은 너희의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고 하였지만, 곧 박해로 인하여 고통가운데 자신을 괴롭히는 사람을 받아들이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아니 요즘 많은 신학자들은 빌립보서의 기록연대를 67년으로 보기도 한다. 그런데 만약 빌립보서가 67년에 기록되었다면 이미 빌립보교회 성도들은 많은 박해로 인하여 지치고 힘들어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한 때에 바울은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이 알게 하라고 하였다면 그 말을 듣는 사람들은 언제까지? 라고 하면서 불평과 원망을 토로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는가? 그런데 시대적 상황을 말하지 않아도 빌립보교회는 관용을 말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3절을 보면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바울은 말한다. 바울이 이렇게 빌립보교회의 지도자였던 유오디아와 순두게에게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권하는 이유는 그들이 다른 마음을 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회 안에는 분열과 분쟁이 있었다. 그러한 때에 내 편에 있는 사람에게 관용을 베풀 수 있지만, 상대편의 사람에게도 관용을 베푸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왜 관용해야 하는가? 이제 오늘 본문을 보시기 바란다.
(빌 4: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빌립보서의 주제는 기쁨이다. 로마 감옥에 갇힌 바울은 여러 가지 어렵고 힘든 가운데 기쁨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그 기쁨을 어떻게 이룰 수 있는가? 고대 인도의 창조 설화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신은 제일 먼저 조개를 만들었다. 그래서 조개는 깊은 바다에서 하루종일 입을 열었다 닫았다를 반복하며 자기 배를 채웠다. 생존을 위하여 필요한 먹잇감이 곁에 있었기에 조개는 꼼짝도 하지 않고 입을 벌렸다 닫았다 하면서 생존하는 것이다. 그 후 신은 힘찬 날개를 가진 독수리를 만들었다. 그런데 독수리 주위에는 먹잇감이 없었다. 그래서 독수리는 힘차게 날개짓하며 먹잇감을 사냥하며 살아야 했다.
이렇게 조개와 독수리를 만든 신은 마지막으로 사람을 만들었다. 그리고 신은 조개와 독수리의 삶을 보여 주고 사람에게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를 물었다. 사람은 모든 것이 갖추어진 환경에서 생동감 없이 살 수도 있고, 독수리의 날개를 펼치며 먹잇감을 얻기 위하여 하늘을 나는 삶 중에 하나를 선택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지금도 조개와 독수리의 삶 중에 하나를 선택하며 살 수 있다.
여러분은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 이 이야기는 보도 섀퍼가 쓴 이기는 습관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사람은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느낄 때 기쁨과 행복을 가질 수 있다. 그런데 그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는 방법은 모든 것이 갖추어진 상태에서 입만 벌렸다 닫았다 할 때가 아니라, 목적이 있고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비상하여 성장할 때 살아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바울이 말하는 기쁨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이 바로 이와같지 않는가? 아무런 문제가 없어서 기뻐하는 것이 아니다. 많은 환란과 역경이 다가오지만, 그러한 역경 가운데 내가 성도다는 것이 느껴지는 것이다. 아니 성도로 내가 성장하고 있음이 깨달아 질 때 참된 기쁨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저와 여러분에게 이런 기쁨이 있는가? 사도 바울은 그 기쁨을 소유하기 위하여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5절)고 명령한다. 여기서 모든 사람은 내가 지지하는 유오디아 편의 사람만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지지하지 않는 순두게 편의 사람에게도 나의 관용을 알게 하라는 것이다. 아니 로마시대 엄청난 박해 속에서 나를 위로하고 돕는 사람에게만 관용을 알게 하라는 것이 아니라, 나를 박해하고 힘들게 하는 그 사람에게도 관용을 알게 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모든 사람이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나의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어떻게 알게 할 수 있겠는가? 제가 한빛교회에서 사역할 때 사모구역이 있었다. 그래서 교역자 가정을 돌아가면서 구역모임을 하였는데, 우리 집에서 구역모임을 할 때 가끔씩 제가 방청소를 하였다. 걸레를 들고 방을 닦고, 또 집을 정리하였다. 그리고 구역모임이 마치고 나면 나는 담임목사님 사모님에게 우리집에서 구역모임 할 때 바닥에 광이 나지 않던가요? 하고 물었다. 그러면 담임목사님 사모님은 목사님이 닦으셨나 보네요 하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구역모임은 일년에 한번이 아니라, 여러번 한다. 그리고 제가 방을 닦으면 꼭 담임목사님 사모님께 이번에도 라고 하며 표현했다. 그렇게 몇 번이 반복되었을 때 담임목사님은 공목사님은 청소한번 하면 온 동네 소문 다 낸다 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이것이 모든 사람에게 관용을 알게 하는 방법이겠는가? 예수님은 당시 어떤 사람들은 구제를 할 때 사람이 많이 모이는 회당과 거리에서 나팔을 불면서 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아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마6:3)고 하였다. 그런데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바울이 나팔을 불면서 관용을 베풀라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면 모든 사람에게 어떻게 나의 관용을 알 수 있게 하겠는가? 그것은 남들이 알아주던 알아주지 않던지 간에 지속적으로 끊임없이 행하여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모든 사람이 나의 관용을 알게 되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모든 사람에게 우리의 관용을 알게하는 방법은 드러냄이 아니라, 들켜짐이다. 내가 이러한 용서와 용납과 사랑을 베풀었다고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누가 알아주던지 알아주지 않던지 주님의 날이 가까워졌음을 알아서 내가 해야 할 일을 묵묵히 할 때 들켜짐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다.
이것이 가능한 일인가? 바울은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기 위한 한가지 방법을 알려주고 있다. 그 방법이 바로 6-7절이다. 함께 읽기 바란다.
(빌 4:6-7)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우리의 힘으로는 나의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할 수 없다. 그래서 바울은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는 것이다. 그렇게 감사함으로 아뢸 때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심으로 우리는 관용의 삶을 살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지금 저와 여러분의 삶에 관용이 있는가? 우리의 신앙에 참된 기쁨을 가지려면 관용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내가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고, 내가 분노해야 할 때에 평안을 누리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성장이라는 기쁨을 가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 관용으로 그 기쁨을 가지기를 원한다면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뢸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저와 여러분에게 이 관용의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신앙의 성장함이 느껴짐으로 기뻐함으로 신앙생활하는 복된 성도가 될 수 있기를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