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주님이 계십니다. 주님은 나의 주인이십니다. 오늘도 나는 주님을 나타내는 그릇으로 살아갑니다.”
-오늘의 말씀-
은혜의 세계에 눈을 뜨라
02/13화(火)행 9:1-22
“사울은 더욱 더 능력을 얻어서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증명하면서”(행 9:22).
주님이 내 인생에 들어오신 것이 구원입니다. 이렇게 주님이 삶의 주인으로 오실 때 은혜에 눈이 떠지게 됩니다. 은혜에 눈이 떠지면 모든 것이 감사할 뿐입니다. 사도 바울과 같이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오늘의 내가 되었습니다. 나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는 헛되지 않았습니다. 나는 사도들 가운데 어느 누구보다도 더 열심히 일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한 것은 내가 아니라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고전 15:10)의 고백을 할 수 있습니다.
은혜의 세계에 눈뜨는 길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은혜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입니다.
예수 믿게 된 것이 가장 큰 축복입니다. 내가 주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나를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 나는 선택 받은 사람입니다. 그것은 우주적 통치자가 내 안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내 주권적 의지가 (죽었다 살아남을 통해) 꺾여야 주님이 비로소 주인으로 오십니다. 내가 할 일은 주인이 원하는 대로 순종하는 일입니다. 바울의 하나님에 대한 열심은 하나님을 핍박하는 일이었습니다. 그것을 알게 된 바울은 충격을 받아 눈이 멀게 되었습니다. 육적인 눈이 멀게 되었고, 비늘이 벗겨지면서 영적인 눈이 떠진 것입니다.
▣은혜의 세계로 들어가면 성령 충만으로 거듭남의 체험을 하게 됩니다.
의지가 상한 바울이 다른 사람의 손에 끌려갔다는 것은 바울의 주권적 의지가 꺾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강제적 개입으로 눈을 멀게 한 것은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행 9:8). 바울은 사흘 동안 금식하며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환경 속에 바울을 몰아넣고 기도하게 하신 후 영적 눈을 뜨게 하십니다(행 9:9). 성령 충만은 나의 지·정·의가 성령의 다스림을 받는 것입니다. 영의 지배를 받으면 거듭나게 됩니다. 거듭날 때 예수 생명이 들어옵니다. 영적인 눈이 떠지면 예수님이 보는 것을 나도 보게 됩니다.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은혜의 세계)를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나니아가 떠나서 그 집에 들어가 사울에게 손을 얹고 형제 사울이여 그대가 오는 도중에 그대에게 나타나신 주 예수께서 나를 보내셨소. 그것은 그대가 시력을 회복하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도록 하시려는 것이오”하고 말하였다“(행 9:17).
▣은혜의 세계로 들어가면 사명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은 은혜의 세계로 인도하여 나를 이 세상에 보내신 이유를 알게 하십니다. 그것이 사명을 깨닫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하는 일이 주님이 시키신 일이라는 것을 알게 하십니다. 은혜에 눈뜨면 내게 주신 일을 찾게 됩니다. 하나님은 사도 바울을 이방인과 여러 왕들을 위해 택하셨습니다.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가거라 그는 내 이름을 이방 사람들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가지고 갈 내가 택한 내 그릇이다”(행 9:15)
And...
성도는 은혜의 세계에 눈을 떠야 합니다. 은혜의 세계에 눈을 뜨지 못하면 흑암을 구별하지 못합니다. 은혜의 세계에 눈이 떠져야 내 삶의 어둠에서 나올 수 있습니다.
어둠을 구별하려면 먼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내 마음(거짓 자아)은 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음이 ‘나’라고 생각하면 속은 것입니다. 내 마음이 원하는 것과 반대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내 마음이 시키는 대로 살 거야’, 이렇게 살면 속은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성령이 주는 마음과 사단이 주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고 깨달아진다는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주님의 주권적 역사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눈앞이 캄캄해지는 일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이런 일이 오는 것은 주님이 내 안에 오시겠다는 신호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으로 나를 죽였다 살리는 사건을 통해 역사하십니다. 사도 바울의 눈이 멀었다 다시 떠진 것과 같은 사건을 통해 주님이 오십니다. 이런 사건을 통해 내 뜻대로 하려는 의지를 꺾으십니다. 우리의 주권적 의지가 꺾일 때 순종하게 됩니다. 내 뜻대로 안 되고, 주님의 뜻대로 된 것이 은혜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예수 믿는다’ 이때는 아직 주님이 밖에 계십니다. 이때는 아직 은혜에 눈뜨지 못한 것입니다. 주님이 내 속에 주인으로 들어오시면서 은혜에 눈뜨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예수 믿는 자들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었습니다. 그것이 가장 잘 믿는 것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다메섹에서 주님의 강권적인 개입으로 그의 주권 의지가 꺾이게 되었습니다. 그의 율법 신앙에서 은혜 신앙으로 넘어가는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 사도 바울은 영안이 열립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보다 더 깊은 은혜를 체험하게 됩니다.
은혜의 세계에 눈 뜨면 사명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명은 주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일입니다. 그것을 이루는 일은 주님의 일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주님께 그 뜻을 묻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을 이루실 주님이 나에게 알려 주셔야 합니다. 주님의 뜻은 영혼을 구원하는 일, 즉 하나님 나라의 확장입니다. 내가 있는 그곳이 하나님 나라가 되게 하는 것, 그리고 내가 만나는 사람들이 하나님 백성이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일은 내가 할 수 없습니다. 내 안에 계신 주님이 하실 일입니다. 그런데 그분은 몸이 없기에 나의 몸을 통해 그 일을 하십니다. 내 팔과 다리, 그리고 입술 내 모든 기관을 사용하셔서 구원의 일을 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몸으로 일을 잘 수행하려면 그분의 뜻에 순종해야 합니다.
내 생각, 의지를 다 버려야 그분의 뜻에 순종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싸움은 천국 가는 그날까지 계속됩니다. 우리가 싸워야 할 것은 나(옛사람의 나)에게 속지 않는 것입니다. 나는 절망스러운 존재입니다. 주님의 몸으로 살 때만 거룩하고 의로운 자입니다. 나에게 절망하는 사람만 주님의 은혜의 세계로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흑암의 문을 열지 않으려면 은혜의 세계로 밀려가야 합니다.
직장암 4기에 걸린 어느 여자분의 고백입니다. “나는 의사가 얼마 살지 못한다고 이야기했을 때 전혀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절망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은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신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이 병이 낫는 것이 내게 최선이라면 고쳐 주실 것이고, 죽는 것이 더 좋다면 나를 천국으로 데려가실 것입니다. 이 땅에서도 예수님과 함께 살고, 죽어서 천국에 가도 예수님과 함께 살 것입니다. 그러니 죽을병에 든 것이 나에게 절망할 일은 아닙니다.” 이 사람은 은혜의 세계에 눈이 뜬 사람입니다.
우리는 사나 죽으나 주님의 것입니다. 은혜의 세계에 눈 뜨면 이러한 자유함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딜레마인 죽음에서 자유한 사람은 일체의 비결을 배우게 됩니다. 그러니 모든 것이 감사할 뿐입니다. 은혜의 세계에 눈을 떠 세상에서 자유한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나 죽으나
https://youtu.be/ziQoNnitI-0?si=ZgDceWdviSytJfcj