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브핫 딸들의 바라봄
2024. 10. 13(주일낮예배) 민수기 27:1-12
요즘 여러분의 고민거리는 무엇인가? 소크라테스의 친구인 카에레폰이 델포이의 신전에서 아테네에서 소크라테스보다 더 현명한 사람이 있는가?를 물었다. 그때 델포이의 대답은 아무도 없다 였다. 그만큼 현명했던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사람들이 믿는 신을 믿지 않는다는 이유로 사형언도를 받고 감옥에 갇힌다. 그때 소크라테스의 친구인 크리톤이 찾아와 이런 대화를 나눈다.
크리톤 : 만약 네가 죽는다면 난 친구를 잃을 뿐 아니라, 자네를 돈으로써 구할 수 있었음에도 구하지 못한 사람으로 비난을 받게 될걸세. 또한 네가 탈출하면 바깥 폴리스에서 반겨줄터이니 서둘러 탈옥합세. 더불어 네가 사형을 받아들이는 것은 저들이 원하는 대로 해 주는 것인데다 자네의 자식들만 불쌍하게 남을 터이니 이는 정의롭지 못한 행위가 아니겠는가?
소크라테스 : 왜 그렇게도 대중들의 시선을 신경 쓰는 것인가? 내 소중한 영혼을 다수의 시선에 가두게 된다면 삶은 가치가 없어질 것일세. 그러니 다수가 고려하는 아이들의 양육이나 평판보다는 탈옥하는 것이 과연 정의로운 일인지나 따져봅시다. 다른 나라로 떠날 자유가 있었음에도 평생을 아테네에서 머물고 결혼하였다면 이는 내가 이 나라의 법을 따르기로 약속한 탓이 아닌가? 내가 이 나라에 머무른 것은 자발적인 것일세. 자율적으로 나라와 맺은 약속을 어기고 판결을 부정하면서 법의 효력을 훼손한다면 이는 나라에 큰 해를 끼치게 된다네. 이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당시 아테네는 죄수가 탈옥하는 일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크리톤은 억울하게 독배를 마셔야 하는 소크라테스에게 탈옥을 권유한 것이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탈옥을 거절하고 독배를 마시고 죽었다.
소크라테스는 왜 독배를 마셨겠는가? 소크라테스는 죽느냐? 사느냐? 하는 고민보다 정의에 대한 고민이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독배 앞에서 내가 어떻게 행하는 것이 더 옳은 일인가? 하는 질문을 2번이나 반복하고 있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은 무엇을 고민하고 있는가? 오늘 본문인 민수기는 2번의 인구조사를 기록하고 있다. 민수기 1장은 시내산에서 실행한 1차 인구조사를 기록하였다. 이 말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는 이스라엘 백성의 수를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민수기 26장은 모압평지에서 2차 인구조사를 실행하였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1차 인구조사에 기록된 이름이 2차 인구조사의 이름에는 한 명도 없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1차 인구조사를 통하여 기록된 언약의 백성이 실패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2차 인구조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언약 성취에 대한 기대와 소망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민수기 26장의 인구조사에는 가나안 땅과 싸울 수 있는 20세 이상의 남자 장정의 수가 나오고, 또 그 수를 기준으로 땅을 분배하게 될 것이다는 말씀이 기록되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인구조사가 끝났을 때 슬로브핫의 딸들이 모세와 제사장 엘르아살과 온 회중 앞으로 나아와서 탄원을 한다. 슬로브핫의 5명의 딸들이 무엇을 탄원하는지 본문을 읽기 바란다.
(민 27:3-4) 우리 아버지가 광야에서 죽었으나 여호와를 거슬러 모인 고라의 무리에 들지 아니하고 자기 죄로 죽었고 아들이 없나이다 4어찌하여 아들이 없다고 우리 아버지의 이름이 그의 종족 중에서 삭제되리이까 우리 아버지의 형제 중에서 우리에게 기업을 주소서 하매
슬로브핫의 딸들은 아버지는 광야에서 죽었고, 아들이 없음으로 상속을 받을 수 없게 되었음을 탄원하고 있는 것이다.
이 말씀을 이해하려면 그 당시 문화를 알아야 한다. 열왕기상 9장을 보면 애굽 왕이 게셀을 탈취하여 그 성읍을 자기 딸 솔로몬의 아내에게 지참금으로 주었다(왕상 9:16). 이 말은 고대사회는 시집가는 딸에게 아버지는 큰 재산을 지참금으로 주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아버지가 죽을 때 유산은 주지 않았다. 그러므로 슬르브핫의 딸들은 언약의 땅에서 아버지가 받을 땅을 유산으로 받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왜 민수기 27장에 슬로브핫의 딸들의 요구가 기록되어져 있겠는가? 사실 민수기 26장의 인구조사에도 슬로브핫의 5명의 딸들이 이름이 다 기록되어져 있다. 전쟁에 나가서 싸워야 하는 군인들의 이름도 다 기록하지 못하여 그냥 숫자만 기록하는 인구조사에 슬르브핫의 딸들의 이름이 기록된 것은 아주 특이한 일이다. 그리고 27장에서 그 딸들의 이름을 다시 다 기록하면서 땅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은 대단히 놀라운 것이다.
왜 슬로브핫 딸들이 땅을 요구하는 것을 기록하였겠는가? 지금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을 점령하여 그 땅을 분배하던 때가 아니다. 40년 광야 길을 걸어서 모압평지에 도착하여 군사의 수를 헤아린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은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을까? 하는 근심을 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슬로브핫의 딸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그 땅에 대한 기대와 소망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재미난 것은 슬로브핫의 딸들이 이야기 후에 모세의 죽음에 대한 기록이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네 형 아론이 돌아간 것같이 너도 조상에게로 돌아갈 것이다(13절)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그때 하나님이 먼저 하신 말씀이 12절이다.
(민 37:1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 아바림 산에 올라가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준 땅을 바라보라
하나님은 죽음을 향하여 느보산으로 올라가야 하는 모세에게 무덤을 보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준 그 땅을 바라보라고 하였다. 그래서 모세는 하나님이 주신 그 소망의 땅을 바라보고 죽음의 길을 걸었는데, 슬로브핫의 딸들이 바로 그 땅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은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가? 지금 우리가 고민해야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내가 하나님이 약속하신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고 있는가? 하는 것을 고민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내가 사는 세상이 우리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는데 유익한가? 하는 것을 고민해야 한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고 있는가?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고 있는 사람은 자신의 이름과 성공을 고민하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됨을 이루는 거룩한 삶에 대하여 고민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자녀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볼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하여 헌신하며 사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이 이러한 세상이 되고 있는가? 하나님은 이 땅에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다고 말씀하였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생물학적 성별(섹스)과 사회적 성별(젠더)을 구분한다. 그래서 우리가 생물학 시간에 배운 것처럼 생물학적 성별로 여자는 XX 염색체를 가지고 있고, 남자는 XY염색체를 가진다고 배웠다.
그런데 요즘 학생들은 사회적 성별이라는 것을 배운다. 사회적 성별이란 내가 XY 염색체를 가진 남자로 태어났지만, 나의 사회적 성정체성은 여자라고 주장하면 그 사람이 여자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호르몬 주사를 맞고, 또 성전환 수술을 받기도 한다.
그러면 성전환 수술을 받은 사람은 남자인가? 여자인가? 남자와 여자를 나타내는 유니코드라는 것이 있는데, 원래는 두 개였다. 그런데 지금은 그 유니코드기 수십개가 있다. 그리고 요즘 자주 듣는 말이 성차별 금지이다. 그래서 외국에 가면 성차별 금지로 인하여 화장실도 같이 사용한다.
혹시 남자 화장실에 여자가 들어오는 경험을 해 보았는가? 제가 프랑스에 여행을 갔을 때 베르사유 궁전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때 화장실에 여성이 들어올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들어가서 볼일을 보고 있는데, 주현이보다 어린 여성이 화장실에 들어오는데, 제가 얼마나 놀랬는지 모른다. 머리로 아는 것과 실제로 경험하는 것에는 엄청난 차이가 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성평등인가? 남성인 수영선수가 자신의 성정체성은 여성이다하여 여자선수 라커룸을 사용하게 된 사건은 우리 모두 잘 아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번 프랑스 올림픽에서 알제리 칼리프 선수는 남자로 태어났지만, 여성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여 여자 66Kg급 경기에 출전하여 금메달을 땄다.
이것이 정상적인 모습인가? 지금 우리나라는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발의되어져 있다. 그런데 포괄적차별금지에 대하여 기독교가 제일 강하게 반대한다. 이에 대하여 세상은 교회가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살자는 것에 대하여 왜 교회가 반대하는지 의아해 한다. 그런데 교회가 반대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동성애 때문이다. 쉽게 말씀드리면 차별금지는 개별적 차별금지와 포괄적 차별금지로 구분해야 한다. 그래서 사회적 약자인 장애인과 여성에 대한 개별적 차별금지는 반드시 시행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동성애자를 위한 차별금지는 허락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해야 하지 않겠는가? 영상을 보시겠지만, 지난 7월 18일에 대법원에서 동성애자의 배우자에게 의료보험을 적용이 허락되었다. 우리 사회는 동성애자의 결혼을 허락하지 않는데, 대법원에서 동성애자의 배우자에게 의료보험을 허락했다는 말은 이들을 가족으로 인정한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곧이어 국회는 동성애 결혼을 허락하는 법을 가결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10월 27일 종교개혁기념주일에 맞추어 한국교회는 광화문에 200만 연합 대 기도회를 준비 중에 있다. 우리 교회는 행복나눔축제로 한 영혼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예배로 준비하고 있기 때문에 참석하지 못하지만, 동성애에 대한 우리의 신념은 정당과 지역을 넘어 동일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대치되는 죄악이고, 또 우리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는 일에 걸림돌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저와 여러분의 고민은 무엇인가? 저와 여러분의 고민이 점점 더 악해져가는 이 세대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는 하나님의 백성의 삶에 대하여 고민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의 자녀들과 함께 꿈꾸는 대한민국을 만들어 가는 복된 성도가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