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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솜 포레스트 제천이 조성중인 제천에는 제천10경이라는 아름다운 절경이 있습니다.
지금부터 제천10경에 대한 설명을 드리려 합니다.
리솜 포레스트 제천에 방문하시면 꼭 한번 둘러보세요^^
제1경 의림지
삼한시대에 축조된 김제 벽골제, 밀양 수산제와 함께 우리나라 최고의 저수지로 본래 "임지"라 하였습니다.
고려 성종 11년(992)에 군현의 명칭을 개정할 때 제천을 '의원현' 또는 '의천'이라 하였는데, 그 후에 제천의 옛 이름인 '의'를 붙여 의림지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호반둘레 약 2km, 호수면 158,677m2, 저수량 6,611,891m3, 수심 8~13m의 대수원지로 몽리면적은 289.4정보이며, 보수 당시 수구를 옹기로 축조한 흔적이 발견되어 삼한시대 농업기술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고 합니다.
현재는 수리시설보다는 유원지로서 그 명성을 더해가고 있는데 경승지로 호수 주변에 순조 7년(1807)에 새워진 '영호정'과 1948년에 건립된 '경호루' 그리고 수백년을 자란 소나무와 수양버들, 30m의 자연폭포 등이 어우러져 풍치를 더하고 있습니다. 특히, 겨울철 및 해빙기에 잡히는 공어(빙어)는 담백한 맛의 회 어로 각광받고 있는 명물이며, 순채는 임금의 수라상에 올릴 만큼 유명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 3대 악성의 한분이며 가야금의 대가인 "우륵"선생이 노후에 여생을 보낸 곳으로도 알려져 있으며 가야금을 타던 바위 우륵대(일명 제비바위, 연암, 용바위)와 마시던 "우륵정"이 남아 있습니다.
제2경 박달재
제천시 봉양읍과 백운면을 갈라놓은 험한 산을 박달재라 한다. 조선조 중엽 경상도의 젊은 선비 박달은 과거를 보기 위해 한양으로 가던 도중 백운면 평동 리에 이르렀다. 마침 해가 저물어 박달은 어떤 농가에 찾아 들어가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그런데 이 집에는 금봉이라는 과년한 딸이 있었다. 사립문을 들어서는 박달과 눈길이 마주쳤다.
박달은 금봉의 청초하고 아름다운 모습에 넋을 잃을 정도로 놀랐고, 금봉은 금봉대로 선비 박달의 의젓함에 마음이 크게 움직였다. 그날 밤 삼경이 지나도록 잠을 이루지 못해 밖에 나가 서성이던 박달도 역시 잠을 못 이뤄 밖에 나온 금봉을 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는 선녀와 같아 박달은 스스로의 눈을 몇 번이고 의심하였다. 박달과 금봉은 금 새 가까워 졌고 이튿날이면 곧 떠나려던 박달은 더 묵게 되었다. 밤마다 두 사람은 만났다. 그러면서 박달이 과거에 급제한 후에 함께 살기를 굳게 약속했다. 그리고 박달은 고갯길을 오르며 한양으로 떠났다. 금봉은 박달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사립문 앞을 떠나지 않았다. 서울에 온 박달은 자나 깨나 금봉의 생각으로 다른 일을 할 겨를이 없었다. 그래서 금봉을 만나고 싶은 시만을 지었다.
난간을 스치는 봄바람은
이슬을 맺는데
구름을 보면 고운 옷이 보이고
꽃을 보면 아름다운 얼굴이 된다.
만약 천등산 꼭대기서 보지 못하면
달 밝은 밤 평동으로 만나러 간다.
과장에 나가서도 마찬가지였던 박달은 결국 낙방을 하고 말았다. 박달은 금봉을 볼 낯이 없어 평동에 가지 않았다. 금봉은 박달을 떠나보내고는 날마다 성황당에서 박달의 장원급제를 빌었으나, 박달은 돌아오지 않았다 .
금봉은 그래도 서낭에게 빌기를 그치지 않았다. 마침내 박달이 떠나간 고갯길을 박달을 부르며 오르내리던 금봉은 상사병으로 한을 품은 채 숨을 거두고 말았다. 금봉의 장례를 치르고 난 사흘 후에 낙방거자 박달은 풀이 죽어 평동에 돌아와 고개 아래서 금봉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땅을 치며 목 놓아 울었다. 울다 얼핏 고갯길을 쳐다본 박달은 금봉이 고갯마루를 향해 너울너울 춤을 추며 달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박달은 벌떡 일어나 금봉의 뒤를 쫓아 금봉의 이름을 부르며 뛰었다. 고갯마루에서 겨우 금봉을 잡을 수 있었다. 와락 금봉을 끌어안았으나 박달은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져 버렸다. 이런 일이 있는 뒤부터 사람들은 박달이 죽은 고개를 박달재라 부르게 되었다.
중봉 하봉 두 형제 거느린 영봉 ....
월악산은 네 개의 얼굴을 갖고 있다. 송계 쪽에서 보면 영봉, 중봉, 하봉으로 이어지는 암봉의 행진이 장엄하다. 맨 오른쪽 영봉은 특히 백여 미터는 족히 될 법한 깎아지른 벼랑을 그대로 드러내면서 중봉과 하봉, 두 형제를 아우른다. 특히 4월이면 한수면 민박마을에서 바라보는 영봉은 활짝 핀 벚꽃 가로수 위로 떠 있는 한 척의 거대한 범선으로 다가온다.
덕주골로 해서 덕주사와 마애불 거쳐 오른 능선 상에서 만나는 영봉은 또 다른 모습이다. 점점 가까이 다가갈수록 이 봉우리는 사람들을 단번에 압도하는 힘을 뿜어낸다. 헬기장 지나서 능선 안부에 이를 때쯤이면 누구나 영봉을 우러러볼 수밖에 없다. 하늘을 향해 끝없이 수직으로 솟은 듯 한 봉우리, 영봉을 제대로 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수시로 쏟아지는 낙석은 가까이 갔던 이들을 혼비백산하게 만드니 그만큼 위협적인 봉우리도 드물다.
해질녘 신륵사 길을 벗어나 덕산 쪽에서 느긋하게 만나는 영봉은 전혀 색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 거대한 바위기둥으로 오롯이 솟은 검은 실루엣. 혹자는 발기한 젖꼭지 같다고도 하지만 영봉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표현은 못된다. 그곳에서 영봉은 둥글둥글한 수십 개의 능선을 거느리고 마치 하늘을 향해 마련된 신성한 제단처럼 솟아 있기 때문이다.
보는 위치 따라 얼굴도 여럿 ....
월악교 지나 36번 국도로 가다보면 등나무 쉼터가 나온다. 여기서 보는 월악산은 이제 막 먼 바다를 향해 출항하려는 듯 한 거함의 선수(船首)와도 같다. 봄날 저녁 호수는 잔잔하고 수면부터 정직하게 솟아오른 산은 더더욱 높아 보인다. 백두대간 대미산에서부터 서쪽으로 달려온 큰 줄기가 마골 치에서 갈라져 북서쪽 만수 봉으로 그 도도한 정기를 이어갔으니 동달 천과 광천이 합류하여 빚어내는 둥우리막대머리 강가에서 월악은 정녕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난다.
그렇게 여러 개의 얼굴을 가진 월악산이라 해도 최소한 제천 사람들의 기억 속에는 가장 정다운 모습으로 다가오곤 한다. 청풍 지나 봉화재 넘을 무렵쯤이면 산 너울 위로 둥두렷이 솟은 자태가 바로 그것이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모습이라 곰곰이 생각하니 김포나 일산, 효자리 쪽에서 보는 삼각산과도 흡사하다. 누워 있는 미인의 옆모습처럼 콧날 오뚝하게 솟은 영봉이며, 입술과 턱 선으로 선명한 중봉, 하봉은 보는 이로 하여금 정다운 마음을 갖도록 하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정작 덕산이나 한수 땅에 들어서면 그러한 자취는 감쪽같이 사라지고 만다.
동서남북 기점 등산로 넷 ....
월악산은 동서남북 네 방향에 산행들머리가 있다. 동쪽으로는 덕산면 월악리 덕산매표소에서 신륵사 거쳐 오르는 길, 서쪽으로는 한수면 소재지 부근 동창교 탐방지원센터에서 오르는 길, 남쪽은 덕주골 덕주사와 마애불 거쳐 오르는 길이다. 이 세 곳은 산불예방 기간 중에도 개방되는 등산로다.
만수휴게소에서 만수 봉에 올랐다가 암릉을 거쳐 월악산 960봉까지 이어지는 길은 대단히 험하나 흡사 설악산 공룡능선의 축소판 같아서 등반의 묘미가 있다. 그러나 장장 7시간 이상 걸리는 힘든 코스라 로프 등 적절한 안전장비를 갖추고 암릉 등반 경험자가 꼭 함께 가야 한다.
월악산 등산로 가운데 가장 쉬운 길은 동창교탐방지원센터에서 능선 안부까지(2시간 40분) 올랐다가 영봉에 오른 후 신륵사로 하산하는 코스다. 동창교∼신륵사 코스는 변화는 별로 없지만 계단이 대부분인데다 급경사를 이룬 덕주사 쪽보다는 편하게 오르내릴 수 있어서 좋다.
영봉 오르는 길은 백여 미터 이상 90도로 치솟은 암벽을 한 바퀴 돌아서 오르는 급경사 계단의 연속이다. 영봉 일대의 암벽은 낙석이 잦은 편이므로 주의를 요한다. 안전을 위해 높은 철망을 튼튼하게 둘러놓았지만 암벽 아래를 지나는 길은 가급적 빨리 통과하는 게 좋다.
제4경 청풍문화재단지, 호반
정부의 4대강유역 종합개발계획으로 충주다목적댐 공사가 1978년 6월부터 시작하여 1985년 10월준공되기까지 수몰지역내의 산재되어 있는 문화유산을 1983년부터 3년여에 걸쳐 1만 6천평의 부지위에 원형대로 이전 복원하여 1985년 12월 23일 개장하였습니다.
청소년 역사의 산교육장으로 매년 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있으며, 지금은 8만 5천평의 규모로 확대 개발되어 우리시의 가장 대표적인 문화관광지로 발돋음하고 있습니다. 보물 2점(한벽루, 석조여래입상), 지방유형문화재 9점(팔영루, 금남루, 금병헌, 응청각, 청풍향교, 고가4동), 지석묘, 문인석, 비석등 42점과 생활유물 2천여점이 보관되어 명실상부한 옛 남한강 상류의 화려했던 문화의 산실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곳 문화재는 직접 생활하거나 사용하던 것으로써 타 지역과 차별화되고 있으며 계속하여 놀거리, 볼거리, 먹거리장을 보완하고 있습니다.
제5경 금수산
퇴계 이황 선생이 지어준 '금수산'
금수산(錦繡山) 1,015.8m의 원래 이름은 백운산이었다. 그러나 조선 중기 단양 군수를 지낸 퇴계 이황 (1501∼1570)이 단풍 든 이 산의 모습을 보고 ‘비단에 수를 놓은 것처럼 아름답다'며 감탄, 산 이름을 금수산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금수산 남쪽 마을 이름이 백운동인 것도 옛 산 이름의 흔적이다.
금수산은 북쪽으로는 제천시내까지, 남쪽으로는 단양군 적성면 말목산(720m)까지 뻗어 내린 제법 긴 산줄기의 주봉이다. 주능선 상에는 작성산(848m), 동산(896.2), 말목산 등 700∼800미터 높이의 산들이 여럿이고, 중간마다 서쪽으로 뻗은 지릉에도 중봉(885.6m), 신선봉(845.3m), 저승봉(596m), 망덕봉(926m) 등 크고 수려한 산들을 거느리고 있다.
남쪽 어댕이골과 정남골이 만나는 계곡에는 금수산의 절경 용담폭포와 선녀탕이 숨어 있다. 용담폭포와 선녀탕은 ‘옛날 주나라 왕이 세수를 하다가 대야에 비친 폭포를 보았다. 주왕은 신하들에게 동쪽으로 가서 이 폭포를 찾아오라 했는데 바로 그 폭포가 선녀탕과 용담폭포였다고 한다. 상탕, 중탕, 하탕으로 불리는 선녀탕에는 금수산을 지키는 청룡이 살았다. 주나라 신하가 금수산이 명산임을 알고 산꼭대기에 묘를 쓰자 청룡이 크게 노하여 바위를 박차고 하늘로 승천했다'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제천시와 단양군의 경계에 있는 금수산은 대부분 단양군 적성면 상리 상학마을을 들머리로 삼아 오른다. 그러나 이는 오직 교통의 편리함 때문이다. 정상까지 오르는 가장 짧은 등산로지만 단조로운 능선길이 전부다.
그러나 제천 수산면 상천리 백운동에서 오르는 금수산은 그 시작부터 예사로운 풍경이 아니다. 청풍호반을 끼고 들어서는 상천리 백운동 마을은 봄철 산수유로 유명하다. 늙은 산수유 나무가 빼곡한 백운동 마을에서 올려다보는 금수산은 북쪽의 망덕봉에서 오른쪽으로 이어져 능선 끝 지점에 머리를 치켜 든 사자처럼 뾰족하게 치솟았다. 망덕봉으로 이어지는 가파른 암릉 여기저기에는 푸른 소나무가 자라고 있다. 단풍이 들면 그 이름처럼 과연 비단에 수놓은 듯한 경치가 펼쳐진다. 또한, 적성면 상학마을로 오르는 길과 달리 산자락에 시원한 계곡과 폭포를 지니고 있어 여름철 산행지로도 제격이다.
제6경 용하구곡
제천시 덕산면 월악리에서 신륵사 쪽으로는 월악산 정산을 오르는 길이 있고, 억수리 쪽으로는 두 갈래 골짜기로 갈라져서 용하수 골짜기와 수문동 골짜기를 이루고 있는데 곳곳마다 16km의 계곡에는 원시림과 천하의 절경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용하구곡의 제1경인 수문동 폭포의 장관부터 시작하여 병풍폭포, 수곡용담이 자연의 신비를 연출하고 8km물길의 비경인 관폭대, 청벽대, 선미대, 수룡담, 활래담, 강서대 등과 신륵사 위편의 수렴선대가 비경의 극치를 더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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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이 35m, 길이 100m 가량되는 폭포가 천연동굴 위로 쏟아져내리며, 겨울철에는 물이 얼어 얼음산을 이루고 있어 장관을 연출합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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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굽이가 마치 용이 꼬리를 튼 모양을 이루고 있고, 용이 솟았다하여 용초라고도 한다. 가물 때 개를 잡아 기우제를 지내던 곳으로 개의 생피를 바위에 바르면 비가 왔다고 합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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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관찰사로 있던 오도일이 암벽에 "관폭대"라 새겨놓았고, 주위에 큰바위가 있는데 치성을 올리던 아들 바위라 합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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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개의 큰 암석이 층계를 이루고 맑은 물이 소를 이룬 절경인데 구한말 당시 박의당 선생이 제자와 같이 글을 짓던곳입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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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선녀가 내려와 목욕을 했다는 곳이며, 산이 깊어 주변 숲속에는 송이 버섯과 독사가 많기로 유명합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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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녀자가 많이 찾아와 몸을 청결히 하던곳이며 이곳에서 산능선으로 약간 올라가면 부처바위가 있는데 산모가 치성을 드리면 득남을 하였다합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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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시와 경계가 되는 깊은산 계곡으로 산삼이 많아 예로부터 심마니의 왕래가 잦은 곳이며 원조라는 희귀조가 서식하였다합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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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선비들이 글을 읽고 쓰던 유서 깊은곳입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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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륵사에서 500m위 넓은 바위위로 흘러내리는 폭포로 장관을 이루고 있습니다 |
제7경 송계계곡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를 거쳐 충주시 상모면 미륵리까지 이어진 8㎞의 송계계곡은 수안보와 단양의 중간인 제천에 위치해 있으며 깊은 골짜기와 맑고 시원한 물, 월악산 등의 크고 작은 봉우리와 사찰, 절터 등 유물이 산재한 여름 피서지의 보고입니다. 송계계곡은 8개의 계곡으로 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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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악산의 최고봉(1094m)으로 기암괴석의 묘가 극치에 달했고 소박하면서도 장엄한 남성적이고 실로 걸작의 예술품이라 할 수 있으며, 영봉, 중봉, 하봉의 삼봉 거암으로 형성되어 있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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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계계곡 첫 입구에 소재 한 곳으로 맑은 계곡물과 넓은 암반, 깊은 소가 있어 어디에 못지 않은 경승지 입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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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m의 3단폭포, 자연휴식년제로 입산이 금지되어 있고 신라시대에 창건했다는 월광사가 있었는데 임진왜란시 소멸되어 터만 남았고 이곳의 돌 거북과 비석은 경복궁으로 옮겨서 보존되고 있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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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시대부터 월악신사를 설치하고 제천하던 곳입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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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쌍의 학이 월악산을 오가며 살았다는 곳으로 마애불로 오르는 산행길에 등산객이 쉬어가는 유일한 안식처 이기도 합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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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주산성 남문과 한쪽맥이 이어져 있는곳으로 기암줄바위와 고무서리계곡을 굽이도는 맑은물과 어울린 절벽입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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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이 승천하였다고 하며 수심 5m의 깊은 웅덩이 가까이에 사자빈신사지석탑이 소재하고 있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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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여평의 화강암 반석위로 맑은 물이 흐르고 있는 곳으로 옛날 하늘나라 공주가 하강하여 목욕을 했다고 전해지는 곳입니다. |
제8경 옥순봉
김홍도의 병진년화첩에 등장
월악산국립공원에 속해 있는 옥순봉은 제천시 수산면 괴곡리에 있다. 제천 10경 중 8경에 속하는 옥순봉은 지리적인 이유로 구담봉과 함께 단양 8경에 속하기도 한다.
옥순봉은 조선 초 청풍군(현 제천시 청풍면)에 속해 있었다. 단양 군수로 부임한 퇴계 이황 선생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단양 태생의 기녀 두향이 아름다운 옥순봉의 절경을 보고 단양군에 속하게 해달라고 청하였다.
그러나 청풍군수가 이를 허락지 않았다. 그러자 이황 선생이 단애를 이룬 석벽이 마치 대나무 순이 솟아 오른 것과 같다하여 옥순봉(玉筍峰)이라 이름 짓고, 석벽에 <단구동문>이라 새겨 단양의 관문이 되었다고 전한다.
이 외에도 조선시대 문신 탁영 김일손은 <여지승람>에서, 청화자 이중환은 <산수록>에서 옥순봉의 아름다움을 극찬하였다. 또한 구한말 의병장 유인석과 함께 왜군 소탕에 앞장섰던 정운호는 당시 제천 8경을 노래하며 이 곳 옥순봉을 제7경으로 꼽았다.
단원 김홍도는 정조의 초상화를 잘 그린 공로로 충청도 연풍의 현감에 임명되었다. 이 때, 1796년 <옥순봉도>를 남겼다. 이 그림은 김홍도의 대표작인 <병진년화첩(丙辰年畵帖)> 중의 한 폭으로, 현재 보물 제782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처럼 옥순봉의 산세는 청풍호와 어우러져 뛰어난 경관을 자랑한다. 해발 283미터의 낮은 산이지만 정상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아찔함마저 느낀다. 확 트인 정상부는 너른 안부와 암릉으로 이루어져 있어 쉬어가기 좋다. 또한 노송이 운치를 더해주니 그 옛날 선계가 부럽지 않을 곳이 바로 이 곳이라 하겠다. 산행과 더불어 유람선을 타고 옥순봉과 구담봉의 멋들어진 석벽을 조망하는 것도 추천할 만하다.
옥순봉은 높이가 낮은데다 등산로도 정비가 잘 되어 있어 쉽게 오를 수 있으니 1시간 산행이면 충분하다. 그러나 구담봉을 연결해 산행할 경우에는 약 4시간은 잡아야 한다. 구담봉으로 가려면 옥순봉 정상에서 되내려와 왼쪽으로 난 길로 가야 한다. 정상부까지는 깎아지른 바위산으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옥순봉-구담봉 산행 중에는 식수를 구할 수 없으므로 산행 시작 전 미리 준비해야 한다.
제9경 탁사정
강원도 원주에서 제천을 들어오는 국도 5호선 변에 자리하고 있는 제천근교의 유일한 유원지이며 여름 피서철 많은 인파가 모이는 곳입니다.
배론 성지는 한국 천주교 전파의 진원지로 천주교사의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성지로 1801년 신유박해때 많은 천주교인이 배론 산골로 숨어들어 살았는데 그들은 옹기장사로 생계를 유지하였고 황사영이 당시의 박해상황과 천주교 신도의 구원을 요청하는 백서를 토굴 속에 숨어 집필한 지역이며 1855-1866년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교육기관인 성요셉신학교가 소재했던 지역이고, 우리나라 최초의 유학생중의 한명인 김대건 신부에 이어 두 번째 신부가 된 최양업의 분묘가 소재한 지역이다. 아울러 1866년 병인박해의 첫 순교자인 남종삼 묘소가 배론 성지와 인접한 학산 리에 있다.
* 배론 이란? - 배론 이란 지명은 골짜기가 배 밑 바닥 같다 고하여 한자 새김으로 주론(舟論) 또는 음대로 배론(排論)이라고도 합니다.
- 가로 62cm, 세로 38cm되는 흰 명주 비단에 한줄에 110자씩 122행 13,384자로 작성되었으며 원본은 로마교황청 문서보관소에 보관중입니다.
첫댓글 쩡이 숨 넘어갔씀고요
씨구라웃음소리가 너무 크잔여 ...조용.
딴 사람들어
쩡이 깨어났네 재밋당
넘 좋아하지 마시게하지말고
넘거워서 엔돌핀이 팍팍 솟구치는데 어냐 칭구야
다행이징
역시 제천에 계신소리님 제천소식 넘 멋집니다..
온라인상으로 이렇게 좋은정보 공유하게되니
충북일보 클린마운틴 카페가 좋긴좋군요...
울 지기님이 열심히 잘 지켜주셔서 그렇지요
힘이 팍팍 생겨요.
저두 기쁜 마음으로 이렇게 찿을 수 있고,힘을 주기도,받기도 하니 일석
뻘뻘거리고 싸돌아다닐때
의림지 올갱이국 맛있게 먹었는데 훌쩍 20년이 지났네요.
즐감
의림지 올갱이국맛있나>
나두 먹고 싶은데...
함 놀러오세요
제천에 볼것이 없는줄 알았더니 정말 멋진 곳이 많군요...
오늘은 값자기 추어탕이 땡기네...
추어탕요 버들님 생각하며
오늘 점심은 추어탕으로 할까
난 오늘점심 윤박사님이랑 두부한마당 먹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