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환자 대부분 ‘가난病’에 신음
최초 1년 동안의 의료활동 보고서
처음 서울 재동 홍영식의 집터에 자리 잡았던 제중원은 1886년 가을에 구리개(현 서울 을지로2가 인근)로 이전한다. 재동의 제중원 건물은 6·25전쟁까지 존재했다.
제중원이 1년 동안 의료활동을 펼친 내용은 모두 첫 보고서에 상세하게 기록돼 있다. 우리 근대사에서 이런 보고서나 자료를 체계적으로 편집 및 보관했다는 것만으로도 제중원의 공헌은 막중하다. 미국 필라델피아 역사관이나 프린스턴대에는 초기 선교사들의 보고서와 개인 편지, 메모조차도 완벽하게 보관돼 있다. 자료 수집과 작성 및 그 보관에서 선교사들은 눈부신 공헌을 남긴 셈이다. 그 자료에는 초기 선교사들의 생활과 선교, 그리고 한국 사회 상황이 생생하게 살아남아 숨 쉬고 있다.
제중원, 한국의 전통 의료활동을 폄하하지 않아
제중원의 보고서를 보면 제중원은 옛날부터 있어온 한국의 전통의원 곧 혜민서나 전래의 진료방법을 절대로 폄하하지 않았다. 이는 기독교가 한국 사회에 대해 가졌던 아주 신중한 자세를 보여주는 것이다. 선교는 대상이 되는 사회의 재래문화나 생활을 함부로 건드리지 말아야 하며 오히려 존중해 주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처음 광혜원을 개원하던 날에도 요란한 의식이나 행사를 하지 않았다. 한국 사람들이 초기 선교사들을 반길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여기 있다.
한국의 전래 치료법
물론 한국 전래의 치료방법 중에는 알렌이 때때로 ‘넌더리나서 말도 못할’ 것이라고 했던 것들도 몇 있었다. 소독하지도, 닦지도 않은 바늘로 쿡쿡 찌르는 침술은 매우 위험했다. 한번은 환자의 목에 침을 잘못 놓아 골수까지 뚫는 바람에 즉사하게 한 일도 알렌은 직접 목도했다. 공수병(광견병)을 치료한다며 호랑이 두개골 가루를 타 먹고, 상처 난 곳에 마늘을 갈아서 바르고 천을 감고 있기도 했다. 종기에는 암소의 배설물을 짓이겨 상처에 발랐고, 기관지염에 송충을 짓이긴 것을, 정신착란에 구더기를 쓰는 일도 목격됐다.
가끔 어린아이들 가슴에 뜸을 뜨기도 했다. 염병에 걸리면 역신의 침입이라 해서 환자를 메 동네 밖에 내버리고, 거기서 죽게 하기도 했다. 하지만 알렌이 이런 전통방법들을 폄하한 일은 없다. 오히려 희랍의 히포크라테스가 한국의 옛 의원들과 대담을 했다면 편했을 것이라고 점잖게 머리를 끄덕인 적은 있었다.
치료는 상하 계급 관통
알렌의 의료활동 대상이 위로 고종 임금이나 고관들부터, 아래로 걸인이나 나환자들에까지 이르고 있었다는 사실은 가슴 찡하다. 이는 한국 사회 혁신의 첫 상징이요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대역사가 아닐 수 없었다. 기독교의 참 모습이 이런 데에서 실천적으로 나타났다면 알렌의 공헌은 칭송받아 마땅하다. 실제로 교회가 처음으로 나병원을 대구에 설립했다. 당시 일왕도 한국에 온 선교사들이 나병치료에 끼친 공로를 큰 상패로 치하한 일이 있다.
한국 사람이 제일 많이 앓은 병
제중원 보고서에는 당시 한국인에게 어떤 질병이 많이 있었는지 나와 있다. 한국인의 위생상태가 엉망이었고 술을 많이 마시는 것이 질병의 원인이라고 한 부분이 눈길을 끈다. 가령 우물은 큰 돌로 쌓아 내렸지만 바로 옆이 시궁창이었다. 걸레를 빨고 요강의 배설물을 버리면 그 오물이 다 우물 안으로 스며들었다. 쥐들이 밤새 천장에서 뜀박질하며 다니는 상황이었으니 질병이 만연했고 종류도 많았다.
당시 가장 많이 앓던 질병은 학질이었다. 진료한 사람들의 10%가량이 이 병에 시달린 것으로 돼 있다. 다음이 위장계의 질병이다. 가난한 백성들은 배고픔에 뭐든지 먹으려 했고, 기회가 닿으면 폭식했기 때문이다. 매독과 성병도 가공할 정도로 많았다. 그렇게 폐쇄된 사회인데도 성병이 만연했다는 것은 의아한 일이다.
결핵 환자도 많아 제중원에서는 해마다 증가하는 결핵 환자 탓에 결핵부를 따로 두어야 하는 형편이었다. 이 밖에 구순구개열, 그리고 탈장이라 해서 변 볼 때에 내장이 항문 밖으로 쏟아져 내리는 병, 머리 부스럼과 각종 피부병, 기생충, 안질, 백내장 그리고 나병 등이 흔했다고 한다. 대부분 가난 때문에 오는 질환들이었다.
천연두는 ‘마마’
정말 치사율이 높은 질병은 천연두였다. 천연두는 아주 흔해서 어린이들 대부분이 걸렸고, 그 병을 앓지 않은 어린이들은 이름조차 지어주지 않았다. 그 병을 앓고 나아야 비로소 사는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당시 한국인 사망률의 절반가량이 천연두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만큼 치사율이 높았다. 성인 대부분이 천연두 자국을 가지고 있었을 만큼 누구나 한번은 걸리는 병이었다.
그런데 당시 천연두는 ‘마마’라고 부를 정도로 상감처럼 모셔졌다. 당시 백성들은 마마를 ‘마마님’처럼 여겨 무당의 굿을 통해서 잘 모시고 대접해야 병이 떠난다고 믿고 있었다. 때문에 제중원에도 잘 찾아오지 않았다. 실제 보고서에는 알렌이 1년 동안 천연두 환자를 단 2명만 진료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출처] [한국선교 130년 최초 선교사 알렌 이야기] (11) 제중원에서 1년 동안 한 일|작성자 뱅갈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