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산성지성당-
-성당 앞 성모상-
진산사건(1791)... 윤지충과 권상연이 제사문제와 관련하여 신주를 불태웠다 하여 전주 남문 밖에서 참수
순교한 성지가 존재하는 지방리 공소(신부님이 상주하지 않는 성당)는 나의 신앙의 뿌리가 자란 곳이기도 하다. 참으로 아름다운 성당이었다. 성당
안은 늘 신자들로 가득하고 하루에 세 번씩 꼭 종이 울려(삼종) 시간을 가늠했던 그 추억의 고향..
이곳은 윤지충의 순교
이후부터 신자들의 피난처가 된 곳이기도 하다. 우리가문은 정확하게 언제부터 신앙을 가졌는지 알 수 없으나 병인박해(1886) 이전부터일 것으로
추정된다. 원래 증조부 송주옥(요한)은 1879년생으로 대전 삼성동의 백골이라는 곳에 사시다가 박해를 피해 무주에서 잠시 머물다 다시 이곳으로
1903년을 전후한 14살 나이로 홀홀단신 와서 살던 중 2대공소 회장인 이의규의 딸 이데레사와 결혼하여 성가정을 이루며 건강한 삶을 사시다가
97세로 하늘나라로 가셨다.
증조부께서는 기골이 장대하고 성격이 곧을 뿐아니라 자기관리가 철저한 분이셨다. 97세로 돌아가실
때까지 텃밭을 가꾸며 늘 움직이신 부지런함의 대명사였다. 때 이외에 간식을 가져 오면 불호령을 내릴만큼 철저히 규칙적인 삶과 소식으로 장수를
누리셨다.
할아버지 송순용(요셉)은 7대 공소회장을 지내셨고 자격증 없는 한의원이셨다. 돈을 절대 받지 않은 선행으로 수 많은 사람들을 치료해
주셨다. 우리집은 늘 환자들로 가득했고 돈을 받지 않은 고마움을 술로 대접하고, 농사지은 것들을 가지고 왔다. 증조부와 달리 성격이 온순하고
너그러워 많은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마음이 유하신데다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 술 대접 하는 것을 사양 못하셔서 건강을 해치는 바람에
증조부 보다 먼저 돌아가시는 불효를 하셨다.
9대 공소회장을 지낸 아버지 송영무(바오로)는 1928년 생으로 천주교 집안인 어머니
정정택(세시리아)과 중매로 만나 21세로 결혼하여 현재 81세로 고향을 지키고 계신다. 아버지는 6척 장신에다 힘이 장사로 각종 운동 특히
씨름으로 명성을 날리시며 스케일이 크시고 모든 것을 덕으로 다스리시는 분이다. 잔정이 없고, 잔일은 절대로 하지 않으신다. 책읽기를 좋아하시고
특히 종교서적을 독파하여 종교, 역사, 성경해석등을 웬만한 사람은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박식하고 신앙이 깊은 분이다.
어머니
정정택은 1929년 생으로 기억력이 비상하고 냉철하며 사리가 분명하여 기도문을 한 두번만 들으면 다 외우신다. 어려움이 있을시 동네분들이
어머니의 자문을 많이 청한다. 어머니 친정에 외삼촌이 신부고, 외사촌이 수녀며 외조카가 신부로 성가정을 이루고 있다. 친정 조카들이 제일 우러러
보며 따르고, 수시로 방문 인사차 찾아온다. 정도 많으시고 늘 큰 살림을 하여선지 손도 크시다.
이곳 가새발은 진산사건 이후로
1876년에는 선교사의 방문이 있었고 1885년 이후 박해를 피해 이사를 온 신자들로 교우 수가 증가하면서 확실한 위치를 잡아가고 있었다.
마침내 1928년에 현 성당이 건립되어 새로운 신앙의 증폭제 역할을 하게 된다. 건립된 이듬해인1929년 5.25일 본당으로 승격되고 초대신부로
이성만(이냐시오)이 임명되었다.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세계 교회가 외국인 선교사 중심에서 현지인 성직자들에 의해 교회를 운영해
가는 방향으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그런 과정에서 외국인 신부들이 본국으로 철수함에 따라 내국인 신부의 부족으로 '지방리 본당'은 2년여의 짧은
기간으로 다시 공소로 전락되는 아픔을 겪는다.
60년대 어려운 시절에 미국의 구호물자가 천주교를 통하여 전달될 때, 수 많은
옷가지와 버터 분유등이 들여와 그것을 배분하는 과정을 지켜보며 자랐다. 그 때 그 구호물자를 타기 위해서 천주교를 믿는 신자들이 늘어나는 현상을
보이기도 했다.
-미사집전하는 경갑룡 주교-
박해의 시대를 마감하고 다시 산업화 사회로 접어들면서 교통의 요충지를 중심으로 발전해 나가면서
어려움을 겪게 된다. 금산은 이렇다할 신자들이 존재하지 않았지만 그곳을 중심으로 성당건립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1935년에 성당부지가 매입되고
이성만 신부가 부임해 옴에 따라 금산본당의 기틀이 세워지게 된다.
모태신앙으로 태어난 나는 선택의 여지 없이 혹독한 신앙을 강요
받았다. 철저한 기도와 주일 미사는 생활의 족쇄처럼 무겁게 짓누르고 모든 행동에서 제약을 받는등..믿음이 부족하다 느끼면 부모님으로부터 크게
꾸지람을 들어야만 했다.
신부님은 어린마음에 동경과 경외의 대상이었고, 부모님은 신부가 되기를 은근히 바라기도 하였다. 장래
희망이 무엇이냐고 물을 때 '신부님이 될래요'하면 그렇게 기뻐하셨다.미사는 늘 라틴말로 해서 알아듣지 못하고 그 형식에 따라 맞추었다.
미사시간은 엄격하고 위엄이 있었지만 어린나이로 감당하기엔 힘들었다.
공소예절(신부님이 안계신 공소에서의 예절)은 마루바닥에서
무릎꿇고 예배를 드리는데 그 절차가 너무도 어렵고 힘들었다. 신부님이 오시는 날엔 10리밖까지 마중을 가서 신부님을 영접했고 그것을 그렇게
기쁘게 생각했다.
그 아름다운 시간들이 지금은 그리운 추억으로 남아 고향을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차오른다. 그 고향 공소가
젊은이들이 다 떠나가 어려운시기를 오랜동안 지속하더니 지금은 사제관이 들어서서 은퇴하신 경갑룡 주교님과 네분의 신부님, 두분의 수녀님이
상존하면서 매일 새벽미사가 주교님 집전으로 이루어지고 주일은 공소에서 주교님 집전으로 미사가 이루어져 많은 신자들이 운집하는 새로운 도약의
계기로 탈바꿈하고 있다.
-미사후 밝은 표정들-
고향을 찾을 때마다 늘 공소 공동체에서 한 형제들을 만난다. 젊은이들이 다 떠난 고향은 어르신들만이
굳건하게 지키고 있고 더러 외지에서 들어온 신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처음 신축된 성당은 목조건축물로 참으로 아름다웠다. 종각엔 참새들이
집을지어 살고 성당 울타리는 탱자나무로 그 운치 아름다웠고 낭만이 존재하였다.
그 아름다운 성당이 80년대 대대적인 보수로
형태자체가 바뀐 것은 아쉬운 대목이다. 내부의 모습은 옛모습을 그런대로 지키고 있지만 외부의 형태는 변형되어 아름다운 모습을 찾아보기 어려운
실정이고 도로확장으로 울타리마저 바뀌어져 운치 또한 사라졌다.
2005년도에 다시 수리되어 유지 되고 있는 역사적인 가치가 있는
성당이다. 한국교회 최초의 순교자인 윤지충과 권상연이 성장한 곳에 위치한 '지방리 공소'는 1886년 병인박해 시절 김영삼, 1877년에는
동생인 김요한, 1878년에는 김춘삼이 가사발 마을에서 잡혀 순교하기도 했다.
이 순교 성지에서 자라난 것에 신앙인으로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어린시절엔 이 오지에서 태어나 자라는 것을 원망도 해본적도 있지만 지금은 조상 대대로 신앙인의 가정에서 태어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이 성지가 새로운 요충지로 발돋움 되어 이곳을 찾는 신앙인들이 순교의 정신을 새기길 바랄 뿐이다.
위안을 받는다. 내
마음이 괴로울 땐 불쑥 부모님이 계신 이곳으로 달려온다. 부모님의 품과 하느님의 품이 너무 따뜻해서다. 그 품 속으로 들어가면 어느덧 평화가
찾아온다.
오늘이 그런 날이다. 어머님이 큰 아들인 필자의 생일 잔치를 해 주시겠다고 고향으로 불러들였고 형제들이 다 모였다.
때를 맞추어 첫째 아들이 카나다 연수를 마치고 7.3일 귀국 하였고, 둘째 아들이 7.5일 필자의 생일에 맞춰 휴가를 와서 온 가족이 미사를
봉헌하고 부모님의 따뜻한 사랑을 받은 내 고향... 그 성지에서 맞은 생일은 내 일생에 오랫동안 기억될 것이다.
-미사시작 전 결이와 할머니-
-성당 뜰에서 어머니와 며느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