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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조코’ 조세형! <4> “저같으면 조지지요, 조지고말고요!” 김승웅
전회에 언급한 텍사스 '광란의 밤' 에 관해 한 마디 하고 넘어가야 순리일성 싶습니다. '조코'와 저는 조지어 주경(州境)을 넘어 텍사스 남부에 있는 ‘샌안토니오’라는 도시에 닿아 일박했습니다. 그날 밤 ‘조코’의 코고는 소리는 특히 심했습니다.
그의 별명 “조(趙)코!”를 낳게 한 코답게, 그 주먹덩이 만한 코에서 터지는 굉음(轟音)은 직접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가히 살인적이었습니다. 코골이는 매일 밤 되풀이 되는 일이었지만, 그날 밤 따라 더욱 참기 힘들었습니다.
슬그머니 호텔을 나왔습니다. 아니, 호텔은 무슨 호텔!... 정확히 말하지요, 모텔이었습니다. ‘조코’는 서울을 떠나며 ‘왕초’ 장기영한테 해외출장비를 두둑이 받아왔음 직 했것만, 그의 돈 씀씀이는 하도 짰던지라, 근 열흘 남짓 밤만 되면 둘은 모텔 신세를 졌습니다. 돈에 관한한 그 코 값을 못 한 것이지요. 그 점, 내겐 불만이었고요.
신문기자를 해서 일까, 아니면 대학시절부터 설까...어느 도시를 가건 나는 지금도 밤에 무척 익숙합니다. 코를 킁킁 대지 않아도 어느 골목 어느 모퉁이를 돌면 무슨 술집이, 또 어느 규모의 술집에, 어떤 급의 작부들이 포진하고 있는지를 본능적으로 파악하는 것입니다.
샌안토니오에 들어서면서 나는 ‘조코’한테 귀띔을 하지 않았지만, 그 도시의 길거리에 한국계 여성들이 미국의 다른 도시에 비해 월등히 많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캐치해 둔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확인된 바지만, 그곳 샌안토니오에는 미군 부대가 위치해 있어 (당시)동두천 기지촌에서 주한미군과 결혼 후, 남편의 귀국 조치에 따라 미국 땅에 함께 발을 들인 한국인 처(妻)들이 많은 곳으로, 그들 거개가 끼리끼리 만나 밤마다 예전 동두천 시절의 향수에 젖어 있었습니다.
좀 시끌법석한 술 집 문을 밀고 들어간즉 아니나 다르랴, 너 댓 명의 한국 여인들이 눈을 번쩍 뜨며 나를 주시했습니다. 양키 손님들도 여러 명 있었지만 까짓 것 대수랴.... 한국 여인들과 나 사이에 몇 차례의 눈짓과 레이저가 오가고...이어 20분이 채 못 돼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나와 여인들은 합석, 이어 부어라마셔라 로 이어졌습니다.
술이 얼근해지니 혼자 방에 잠들어 있을 ‘조코’한테 미안하다는 생각도 들고, 또 초청대학(미네소타 매컬레스터 대학)으로부터 받던, 당시 주급(週給) 80달러의 퍼디엄(장학금)도 술값으로 다 바닥이 났고, 따라서 더 이상 술을 시킬 수도 없는 형편이 된지라, 할 수 없이 ‘조코’가 잠들어있는 모텔 방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내가 직접 전화를 걸지는 않고 합석한 여인 가운데 목소리와 애교가 월등한 사람을 시켰습니다. 그래야 ‘조코’가 놀래 자빠질 것 아닙니까! 열흘 남짓 조수(助手) 짓 하느라 '조코‘한테서 당한 압박과 설움을 극복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조코’를 극복하는 건 당시 그에 비해 ‘새까만’ 쫄병 기자였던 나로서는 오직 그 방법 뿐이었구요.
아닌 밤중에 홍두깨지...한참 꿈속을 달리다 웬 야릇한 한국여인의 전화를 받은 ‘조코’가 얼마나 놀랐을까? 나이도 한창 창창한 마흔 다섯이겠다...왜 갈증이 심하지 않겠는가! 아니나 다르랴, ‘조코’가 전화로 내지르는 “얏호!”비슷한 소리가 내 귀에까지 들렸습니다. 그렇다면 일단 성공이지요. 방으로 와 달라는 신호였습니다.
다섯 명의 여인들이 저마다 사들인 술병들 들고, ‘조코’가 기다리는 모텔 방으로 진격했습니다. 다섯 명의 암 양(羊)떼를 몰고 개선장군처럼 입성하는 나를 보더니 '조코'는 그제서야 처음으로 존경하는 눈빛으로 나를 올려 쳐다보더군요. 장장 열흘 만에 나타난 변화였습니다.
이어 '조코'와 저 그리고 여자들 모두 침대위에 올라앉아 모두 '쫙벌남' '쫙벌녀'들로 바뀌어 밤새껏 술을 퍼마셨습니다. 어디선가 기차의 기적소리가 들렸습니다. 텍사스의 광란의 밤은 그렇게 깊어갔구요.
그리고 보면, 그날 밤 샌안토니오에서 보낸 텍사스의 화끈한 밤은 내게 비친 언론인 ‘조코’의 마지막 모습이었습니다. 내가 귀국 후 반년쯤 지나 ‘조코’는 편집국장이 되어 편집국에 얼굴을 나타냈지만, 내 발로 국장실을 노크해 본 기억은 없습니다. 내가 뭐 특별히 교만해서가 아니라 그와 미국서 쌓은 즐겁고 유익했던 교분이 남한테 자칫 개인적인 친분과시로 비치거나, 허다 못해 내가 평소 출입하고 싶었던 정치부 외무부 출입 기자가 되기 위한 발판으로 잘못 악용(惡用)될까 봐 저 스스로를 경계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내가 정치부 외무부 출입기자로 바뀐 것은 그 ‘조코’가 편집국을 떠난 후 그 후임 편집국장이 되신, 엊그제 인사동에서 서예전을 여신 권혁승 편집국장 시절이었으니, 나의 위 증언(?)에 하등 거짓이 없음이 입증 될 것입니다. 나는 병적으로 솔직한 편이거든요.
오늘 글의 주제는 ‘조코’ 조세형에 관한 네 번째 글로, 그가 남긴 어록에 관해 쓸 차롑니다. 고인(故人)에 관해 지금까지 세 차례에 걸쳐 쓴 글은 그와의 작별이 서러워 울고불고 쓴 조사(弔辭)가 결코 아닙니다.
그렇다면 왜 썼느냐. 굳이 핑계를 대자면, 내게 남긴 그의 어록(語錄)을 되살려 놓기 위해섭니다. 어록이라 해서 명사들의 어록 집에 실릴 무슨 거창한 명언(名言)도 아니고, 평소 신언서판(身言書判) 소리 들을 만큼, 글보다 오히려 말이 더 뛰어났던 ‘조코’ 입장에서 굳이 나 혼자 듣도록 작심하고 남긴 말이라기보다는 미 조지어 주 카터네 땅콩 농장을 돌며 조수석에서 툭하면 꾸벅꾸벅 졸아대는 나를 깨우려고 (조수가 졸면 운전자도 졸게 마련이지요!) 들려 준, 시덥잖은 말일 수도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나 아닌 다른 누구를 조수로 태웠더라도 똑 같이 되풀이 될 수 있는 말들의 연속이었는데.... 한 가지 지금껏 두고두고 뇌리에 남는 것은, 그리고 이처럼 별도로 그의 어록으로 남겨두고 싶은 이유는,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되 왠지 ‘조코’의 입을 통해 터져 나왔다는 그 이유 하나로 그 발언의 진가가 더욱 돋보였다는 점, 그리고 좀 과장되게 말해서, 그렇게 말 하는 사람을 나는 왠지 또 다시 만날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정감이 돌고, 어휘 하나하나가 문사철(文史哲) 요소를 듬뿍 간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야, 김승웅이, 너 고향이 금산(錦山)이랬지?” ‘조코’가 불쑥 물었습니다. 내가 또 졸았나 봅니다. “예? 맞는 데요... ” 느닷없이 금산 이야기는 왜 꺼내나 싶어 내가 졸린 눈을 치켜뜨자 ‘조코’는 서울서 야당출입시절의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금산 출신 유진산이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정치인이었다.” “그래서요?” “어느 날 유진산과 기자 여럿이서 인터뷰를 마친 날이었어. 그 전날 나와 단둘이 만나 나눴던 이야기와 다를 바 없기에 뭔가 새 기사거리를 들고 신문사로 돌아 가야하는 내 입장에서 ‘이런 젠장!’ 소리가 나온 모양이야. 기자의 그 사정 너도 잘 알잖아? 인터뷰 마친 후 바둑을 두고 있던 유진산이 그 소리를 들었는지 ‘어이 조군!’하고 나를 별도로 부르는 거야”
“뭣땀시요? 촌지 좀 주려고 했던 모양이지요?” “아냐, 좀 더 들어봐. 나를 부르더니 유진산이 한다는 말은 ‘조군, 자네 춘부장을 내가 잘 알고 있다네... ’ 였어. 그 후부터는 유진산을 조지는 이야기를 쓸 수가 없더라. 유진산... 한 마디로 사람을 다룰 줄 아는 정치인이었단 말이다. 내 아버지 이야기 꺼내는 사람 조지기가 어디 쉬운 일이냐? 너 같으면 조지겠냐구?” “조지지요. 조지고말고요! 더 조지지라!”
그가 나를 또 깨웠습니다. 카터 출장을 마치고 워싱턴 DC를 향해 일로 차를 몰던 중이었습니다.
“야, 김승웅이, 너 중2때 담임 이춘영이 어땠냐? 내 중학-고등학교 동기라는 거, 너 알고 있지?” “저를 무척이나 칭찬하시고 아껴주셨어요. 그 때 제 성적도 최고로 올랐구요”
나는 좀 울먹이며 대답했습니다. 날 그토록 미친 듯이 때리고 괴롭혔던, 중1, 중3시절, 두 번씩이나 나의 담임을 맡았던 ‘싸이코’ K(알고 보니 ‘조코’의 중 고교 2년 선배였습니다 그려!)가 떠올랐기 때문이지요. K에 관한 악몽을 떨구느라 한 참을 뭉그적대다 이번에는 내가 물었습니다.
“중 고등학교 동기들은 자주 만나세요?” “네가 중2시절 니네 담임했던 춘영이는 오랫동안 못 만났다. 걔는 지금 아마 전주에 살고 있을 걸...자주 만나는 건 서울서 지금 함께 기자하고 있는 최정호, 임홍빈 등 동기들과 1년 후배 되는 정경희, 그리고 몇몇 선배를 자주 만나지”
그 선배라는 분이 (훗날 동아일보 편집국장과 시사저널 주필을 차례로 역임한) 박권상, 그리고 당시 청와대 대변인으로 들어간 임방현을 말하는 게 아닐까... 혼자 생각했습니다.
“술도 자주 마시겠네요?” “동기 중에 아직도 장가 안 간 놈이 하나 있어. 그래서 매번 술 마실 때마다 그 놈 걱정이 돼서 내가 여럿 앞에서 ‘저 자식, 빨리 헐레를 붙여야 쓰겄는디...’ 하고 걱정을 한다만, 본인도 이제 만성이 돼놔서 덩달아 웃기만 해”
“박정희로부터 외무장관 하라는 요청 들어 왔을 때...덜컥 받아들이지 그랬어요?” “......... ” “왜 덜컥 받아들이지 않았냐구요?”
한참을 뜸들이던 ‘조코’는 내가 뭘 물어봤는지도 희미해 질 때가 되어서야 뜬금없이 한 마디 했습니다.
“이 정권 오래 못 간다. 두고 봐, 두고 보라고... 지금 뭣 모르고 다리 들이밀 생각해선 안 된단 말이다” “...... ”
이번에는 내가 침묵 했습니다. 누굴 두고 한 말인지.... 언뜻 짐작은 갔지만, 그의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너무 쭈볏했던지라 말문이 막힌 것이지요. 당시로서는 무서운 예단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예단은 정확히 3년 후 ‘궁정동 사건’으로 입증된 셈이지요.
궁정동 사건이 터지던 당시 조코는 한국일보 편집국장을 채 1년도 채우지 않고 사임, 성북구 출신 야당의원으로 변신해 있던 때인지라, 그에게는 뱃지 단지 겨우 8개월 만에 들이닥친 날벼락이었던 것입니다.
그가 모는 차는 어느덧 워싱턴 DC에 들어와 있었습니다. 만 7년간 특파원으로 워싱턴 DC바닥을 누볐던 까닭일까, 그는 DC지리에 훤하더군요. 허나 근 1년 반 만에 되돌아 온 DC였던지, 이따금 길을 헤맸고, 그때마다 지나가는 행인한테 방향을 물었습니다. 옆에 앉은 나를 기죽이려는지, 그는 애써 세련된 영어를 구사하려는 듯 했습니다.
행인한테 “이 길로 똑 바로 가면 백악관에 닿습니까?”하고 물으면서그는 ‘닿는다’는 영어 reach나 get 대신 꼭 hit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If I go straight, can I hit the White House?"... 뭐 이런 식이었습니다. 그런 ‘조코’가 참 좋았습니다.
“전주고등학교 영어 뻔한데...영어는 언제 그리 했다요?” “뭐여? 너, 내가 고등학교 영어 선생 했던 거 모르냐?”
그는 6.25가 터지고 나서(가만히 역산해보니, 그는 6.25나던 그 해 3월 서울대 문리대 독문과에 입학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대학이 문을 닫자, 고향인 김제에 내려와 김제여고 영어선생을 했다고 말했습니다.
“고3 영어를 가르쳤다고라? 여학생들하고 나이 차가 별로 없었을 텐데...별 일 없었지라?” 내 말의 의중을 알아차린 듯 그는 껄껄 웃더니 “야, 김승웅이, 누구한테 말하지 말거라! 실은 내 와이프가 그 때 나한테 영어를 배웠지” “내고여... 그러니까 스승~제자 관계였다.... 이 말이다요?” “그렇다 이놈아!”
<계속>
2009년 10월 20일 글방 저장함 재록(再錄)
그리스 음악의 대사 Mikis Theodorakis 의 연주곡 - Magic Night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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