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역에는 1번 출구가 2곳
수원 화성 <탐방>을 위한 집결지를 어디로 할까 고심하다 결국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는 수원역(1번 출구)으로 잡았다. 그런데, 수원역에는 1번 출구가 1층 역사에 한곳, 그리고 지하도로 연결되는 먼 1번 출구가 따로 있다는 사실을 서울 촌놈들(?)은 몰랐다. 필자를 비롯 허홍, 장원, 근국은 역사 1번 출구에서, 복구, 건종은 멀리 지하도 1번 출구에서 기다리고 있어서 핸드폰이 없었더라면 상당히 애를 먹을 번했다. 며칠전 영철이 코치해준 대로 걸어서 수원산성(팔달산)으로 이동하는데, 생각보다 걸이가 길고 오르막이라 翁들의 푸념이 적지 않았다. 산성을 눈앞에 둔 지점에서 수퍼에 들러 아이스케키를 사서 먹으며 땀을 씻고는 산성 정상을 향해 발길을 재촉했다.
정상의 서장대로 부터 <탐방>은 시작되고
수원을 그냥 수도권에 위치한 큰 도시라든지 사람들이 복작거리기만 하는 특색없는 곳으로만 여겼는데, 산성 정상에서 내려다 본 성곽과 행궁은 이런 생각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수원 화성은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 팔달산 정상의 방어진지 서장대에서 화서문, 장안문, 행궁, 그리고 팔달문으로 이어지는 <탐방>은 흘린 땀이 전혀 아깝지 않았다. 특히 행궁에서 해설자와 함께한 시간은 정조대왕에 대한 흠모의 정을 더욱 깊게 했다. 여기에는 수원 화성의 주요한 건축물 사진 몇점과 간단한 설명, 그리고 행궁에서 해설자에게 들은 단편적인 이야기를 생각나는 대로 두서없이 올린다.
서장대(西將臺)
팔달산 정상 서장대에 오르는 길. 이곳은 화성의 중요한 방어 진지로 성곽과 화성행궁 그리고 수원시내 내려다 보인다.
화서문((華西門)
정조 18년(1794년) 화성을 지을 때 함께 세운 서쪽의 문. 좌우 성벽에 연결되는 석축에 무지개 모양의 문(紅霓門)을
내고 그 위쪽에 단층의 문루를 세웠다. 옹성 위에는 안팎으로 낮은 담을 쌓고 가까운 곳과 먼곳을 겨냥할 수 있도록
2종류의 총구를 내고 벽에는 적을 살펴 볼수 있는 구멍(懸眼)을 뚫어 놓았다. 장안문이나 팔달문 보다는 낮은 등급임.
보물 제 403호
장안문(長安門)
화성의 정문이자 북문인 장안문. 정조 18년(1794년) 착공하여 1796년 완공었는데, 기존의 화강암으로 쌓던 방식 대신
벽돌로 쌓았다. 축성공사에 정약용이 고안한 거중기가 사용된 것으로 유명하며, 군사적인 목적과 도시의 기능을 함께
고려한 실용적인 구졸로 동양 성곽의 백미로 평가받고 있다. 현재 건물은 6.25 전란시 파괴되었다가 개축된 것이라 함
팔달문(八達門)
화성의 남문으로 서울의 南門인 숭예문과 많이 닮은 아름다운 건축물이다. 정조 18년(1794년) 축성되었는데 6.25 전란
중에도 피해를 입지 않아 보물로 지정되었다(보물 제402호). 지은지 2백년이 지난 근래에 문루 1,2층에 이상변형과
손상이 나타나 문화재연구소의 진단에 따라 대대적인 보수작업(2010년)이 이루워져 금년(2013년) 5월 3일 중건 준공,
일반에 공개되었다(우리나라 남문들에 재앙이 함께 나타난 것인지?)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
화홍문 옆에 자리한 방화수류정은 1794년(정조 18년)에 세워졌다. 연못(龍淵)과 어우러져 아름다운 경관을 지닌 조선의
대표 정자로 손꼽힌다. 건물이 아름답고 조각이 섬세해 근세 한국 건축 예술을 대표하는 정자로도 손색이 없다고 한다.
訪花隨柳亭' 꽃을 찾고 버들을 따라간 정자 라는 멋들어진 이름에서 이곳의 빼어난 풍광을 짐작케 한다.
(이번 <탐방>시 아쉽게도 시간이 없어 가보지 못한 곳. 다음에라도 가봐야 할텐데...)
수원행궁엔 정조대왕의 숨결이..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이 있었던 봉수당 전경
-화성행궁은 1정조 13년(1989년) 수원읍치를 원래 있던 화산에서 팔달산으로 옮기면서 관아로 사용하였으며 당시는 54칸의 규모였다. 사도세자의 묘를 화산(현재 융건릉 자리)으로 옮긴 후 원행 시에는 행궁으로 사용하면서 필요한 건물들을 증수한 것인데, 1794년 화성 축성이 시작될 때에는 112칸, 화성 축성이 완성된 1796년에는 총 576칸으로 증수되어 장대한 규모를 이루었으니 궁궐로도 손색이 없다 할 것이다.
-화성행궁의 정당 건물인 봉수당(奉壽堂)은 평상시에는 수원유수(시장)의 집무공간이지만 왕이 행차하면 왕의 거처로 사용되었고, 이곳에서 혜경궁홍씨의 회갑연이 이루어지게 되고 남낙헌에서는 양로연이 베풀어졌다.
-노인들을 초청하여 베픈 양로연에서는 한 사람당 한상의 음식을 차려 주고 노인들에게 지팡이 하나와 보자기를 하사하셨는데 남은 음식은 이 보자기로 쌓가라는 배려였다고 한다. 이때 대접한 음식은 정조대왕이 드시는 것과 똑같았다고 한다.
-행궁은 지방에 별도의 궁궐을 마련하여 임시 거처하는 곳을 말하며, 그 용도는 크게 세가지로 볼 수 있다. 전쟁과 같은 국가 비상시 위급함을 피하고 국사를 계속하기 위해 마련된 행궁, 즉 강화행궁, 의주행궁, 남한산성 행궁이 그것이며, 휴앙을 목적으로 한 온양행궁, 능원을 참배하기 위한 대표적인 행궁으로 화성행궁이 그것이다.
-정조의 화성행차시에는 당시 워낙 원행이어서 중간 중간에 작은 규모의 행궁을 설치하였는 바 과천행궁, 인양행궁, 사근참행궁(과천 길로 원행 할 때 거처로 사용), 시흥행궁, 안산행궁(과천길이 너무 멀어 시흥길을 만들면서 행궁을 만듬. 말하자면 곡선길을 직선길화 시킨 것임)이 있다. 지금의 1번국도는 정조대에 만들어진 셈이다.
-정조대왕 붕어후에 순조에 의해 세워진 화령전은 정조의 어진(군복 차림)이 모셔진 곳으로 제례도 함께 이루어지는 전각이다(원래 어진은 전란중 잃어버리고 지금 모셔진 것은 2005년도에 새로 제작한 것임) . 이곳에 있는 우물(御井)에서는 항시 물이 흘러나오고 있다.이곳의 수라간은 대장금 촬영시 사용된 곳이라는데 생각보다 규모가 작았다. 대장금이 해외에서도 인기라서인지 많은 외국인들이 즐겨 찾는다고 하며, 이날도 홍콩 관광객 일행이 열심히 해설을 듣고 있었다(행궁의 여러 곳에 이영애의 사진과 조형물을 볼 수 있음)
군복차림 정조대왕의 어진 (2005년 제작) / 유립 촬영
*탐방이 끝난 후 팔달문 부근의 진동시장 안에 있는 먹거리가에서 순대몪음탕, 모듬안주로 만찬을 즐겼다. 술까지 모두 1인당 딱 1만원으로 참 저렴한 편이다. 저녁식사 후 수원에 사는 복구가 입가심으로 생맥주를 쐈다. 길도 안내해주고 아이스케키도 벗에게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