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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제4회 목포문학상 수필부문 당선작 2편] 및 심사평
본상
도라지꽃 / 장미숙
보랏빛 옷자락을 바람결에 헹구는가. 이른 아침, 베란다에 남보랏빛 향기가 가득하다. 다섯 겹 치마폭에, 진한 남색 줄무늬가 선명한 도라지꽃이 가느다란 꽃대에도 흔들림 없이 꼿꼿하게 삶을 지탱하고 있다. 밤을 밝히는 등불처럼, 작은 꽃잎하나가 회색빛 도시를 환하게 밝힌다. 화려하고 아름답다기보다는, 청초하고 수수해서 더 정이 가는 꽃을 가만 바라보면 문득 낯익은 풍경하나가 그림처럼 떠오른다.
지난 가을 어느 날, 허리를 수그리고 삽질을 하던 어머니, 동그랗게 등이 굽은 어머니를 둘러싸고 있던 도라지꽃은 고향 산밭 한 모퉁이에 무리지어 피어 있었다. 긴 산 그림자의 옷자락이 덮고 있던 그곳은 밭이라기보다는 비탈에 가까웠다. 언뜻 보기에는 밭두렁 같기도 했지만 꽤 넓어서 풀들이 무성히 자라던 곳이었다.
개울을 끼고 있어서인지 다른 곳에 비해 풀이 더 잘 자랐지만 그곳은 돌이 많아 산 아래쪽인데도 불구하고 한동안 내버려둔 곳이기도 했다. 그곳에 언제부터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났는지는 잘 모르겠다. 어느 날부터인가 산밭에 가면 가장 먼저 보고 싶은 곳이 되어버린 그곳에는 도라지꽃이 푸른 멍처럼 피어 있곤 했다.
도라지꽃이 내게 봉숭아처럼 친숙하게 느껴진 건, 아주 어렸을 적부터 보고 자란 덕분이었다. 어렸을 때는 별 관심 없이 지나치던 꽃이 어느 날 갑자기 내게 의미 있는 꽃으로 자리 잡기 시작한건 오랜 세월이 지난 뒤였다.
가만 생각해보면 우리 집에는 예전부터 도라지꽃이 여기저기 피어 있었던 것 같다. 지금은 대문 옆 감나무 밑에만 있는데, 어렸을 적에는 장독대근처와 뒤란에서도 도라지꽃을 본 기억이 난다. 하지만 집에 있는 도라지꽃은 그저 두어 송이 피어 있었을 뿐, 산밭 도라지꽃처럼 무리지어 피진 않았다.
그래서였을까. 지난해 가을, 어머니랑 산밭에 도라지를 캐러 간 날, 꽃잎을 활짝 열어버린 꽃무리를 본 순간, 울컥 가슴에서 푸른 눈물이 솟아오를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여든을 앞두고 있는 어머니의 지난한 생이 가분재기 푸른 멍이 되어 가슴을 두드린 탓이었다.
어머니는 뭉툭한 손으로 삽자루를 잡고 땅속깊이 삽을 꽂고 있었다. 꽃무리 속에서 도라지뿌리를 캐기 위해 몸을 수그린 늙은 어머니가 내 가슴에 도라지꽃이 되어 망울망울 피어났다. 도라지는 가느다란 몸매와 슬프도록 어여쁜 꽃에 비해 뿌리는 끈질긴 생명력으로 존재한다. 지구의 중심을 꽉 잡고 땅속 깊숙이 제 몸을 비틀며 생명을 이어가는 도라지는 다름 아닌 어머니의 사랑을 닮아 있었다.
삽을 내리꽂으면 둔탁한 소리가 삽의 진로를 가로막았다. 도라지의 잔뿌리처럼 흙속에는 수많은 돌이 박혀 있었다. 그 돌 속에서도 도라지는 뿌리를 통통하게 키우며 뻗어가고 있었다. 삽조차 들어가지 않는 흙속에서 생명을 부지하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 끊어진 몸에서 흘러나온 쓰디쓴 액이 혀끝을 아릿하게 했다. 도라지 뿌리를 보며 나는 속으로 삼킨 눈물이 사리가 되어버린 어머니의 세월을 보았다.
어머니에게도 사랑이란 게 존재할까. 자식들을 향한 무조건적인 사랑이 아닌, 여자로서 한 남자에게 사랑받고, 보호받고 싶은 그런 사랑이 존재할까 하는 생각을 해본 건, 오륙년 전 여름 날, 어머니의 전화를 받고 난 뒤부터였다. 어머니의 목소리는 더운 날씨보다도 달떠 있었다.
“오메, 나가 오늘 참말로 기분이 좋단 말다. 느그 아부지가 날 생각할 줄도 알더랑께. 나는 느그 아부지가 영영 바보가 되야버린 줄 알았등만, 그건 아닌갑써. 나 묵으라고 면에 가서 막걸리를 사왔드라니께. 나가 시키지도 않았는디 말이여. 참말로 사람이 오래 살다봉께 이런 날도 있는 갑다. 잉~~~”
그날, 어머니의 흥분된 숨결에서 나는 어머니의 마음을 엿보았다. 어머니에게 아버지는 남편도, 가장도, 아이들의 아버지도 아닌 ‘웬수’였다.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를 원했고, 아버지가 건네주는 음식 한 조각 받아먹어보는 게 소원이었다.
하지만 어머니의 그런 소박한 소원은 가능성이 별로 없는 어머니만의 바람에 불과했다. 아버지는 삼십대에 얻은 병으로 인해 평생 당신만의 세계에 갇혀버렸기 때문이다. 아버지를 세상으로 나오게 하려고 어머니는 이십년이란 세월을 홀로 사셨다. 한창 젊었던 시절, 아버지를 병원에 보내놓고 어머니는 새벽마다 정화수 앞에서 두 손을 모으셨다.
푸른 새벽녘처럼 어머니도 젊었을 때는 꼿꼿한 등과 부드러운 속살을 가진 여자였다. 한 남자의 사랑을 갈구한 젊은 여자였던 것이다. 하지만 흙이 덮어버린 도라지 뿌리처럼 어머니의 하얗고 매끄럽던 피부는 남루한 옷 속에 감춰진 채 시들어갔다.
수많은 계절을 맞이하고 보내면서 어머니의 사랑은 희망에서 절망으로, 절망에서 체념으로, 그리고는 연민과 동정으로 변했을지도 모른다. 아버지가 지워준 짐의 무게에 눌려 어머니는 깊은 신음조차 제대로 토해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때마다 어머니의 삶을 붙들어준 건 무엇이었을까.
어머니는 아버지를 ‘웬수’라 불렀지만 그 말 속에 들어 있는 끈끈함이 실은 어머니를 지탱해준 힘은 아니었을까. 겉으로는 아버지를 원망하면서도 어머니의 시선은 늘 아버지에게로 향하고 있는 걸 나는 보았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사랑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변치 않은 영원한 사랑이라는 걸 나는 지금에야 깨닫는다.
고통의 순간들은 자칫 뿌리를 썩게 해서 끝내는 줄기와 꽃잎까지 병들게 한다. 하지만 어머니가 마음속에 간직한 사랑의 뿌리는 흔들리지 않았다. 어머니는 오히려 비바람에도 악착같이 생명의 뿌리를 더욱더 키워나갔다. 그 힘의 근원이 자식이라 말할 수도 있겠지만 어머니에게 아버지는 결코 포기할 수도, 마음속에서 꺼내놓을 수도 없는 존재였던 것이다.
아무도 돌보지 않는 산속 돌밭에 도라지를 심으며 어머니는 잃어버린 젊은 날의 꿈을 회상했을지도 모르겠다. 그건 어머니의 숨은 사랑이었고, 그 마음이 꽃으로 피어났으리라 생각하니 어머니의 사랑이 흐드러진 그 가을날이 내 안에서 다시금 파랗게 살아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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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상
밤의 한가운데서 / 이은옥
모로 누운 허리께가 불편한 느낌이 들어 뒤척이다 눈을 뜬다. 벽에 걸린 시계가 조도 낮은 비상등 속에서 세 시쯤에 머무르는 것이 어렴풋이 보인다. 몸을 똑바로 누이고 다시 눈을 감는다. 병원에서의 잠은 지속성이 없다. 겨우 한 시간 남짓 지난 것이다. 벌써 세 번째 뜨는 눈이다. 성인 한 사람이 바로 누워 옴짝달싹 못하는 크기의 직사각형 보호자용 의자는 편치 않다. 아니, 그가 누구이든 입원환자를 곁에 두고 자는 잠이 결코 달지는 않으리라. 의자 탓이겠는가.
가늘게 코고는 소리가 귀에 거슬린다. 옆 침대의 50대 여자는 고혈압 환자다. 어떤 때는 문풍지를 펄렁이는 삭풍처럼 고막을 터트릴 듯 코를 고는데 자신만은 잠을 잘 잔다. 게다가 수다도 많아 한번 말을 시작하면 상대가 두통을 일으킬 정도로 이야기를 이어간다. 비교적 포커페이스인 나는 내색 않고 들어준다. 들어주면서 그녀를 미워한다. 그리고 나의 이중성에 냉소를 품으면서도 끝까지 인내심을 발휘한다. 반응이라도 보여주면 새로운 소재를 첨가해 말 길이가 더 길어지기 때문이다.
복도로 나와 본다. 환하다. 복도 중앙에 있는 간호사실의 당직 간호사들이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차트정리를 하고 있다. 병실로 들어가 책을 들고 다시 나온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고개를 쳐든 간호사 한 명과 눈이 마주치자 나는 반사적으로 미소를 띄어준다. 순간, 나의 미소가 사회생활에서 단련된 일종의 기계적인 아첨이라는 것을 느낀다. 사실 나는 무표정하고 싶다. 마음도 몸도 찌뿌듯해서 간단한 근육조차 움직이고 싶지 않다. 그러나 병원에 있는 동안 간호사는 나의 상대역이다. 간호사는 입 끝만 살짝 움직여 목례를 한다.
바람이 몹시 분다. 매체에선 초대형 태풍 상륙을 예고 중이다. 종합 병원 앞마당에 심어져 있는 붉은 칸나가 꺾어질 듯 둔각으로 왕복하는 메트로놈처럼 휘청거린다. 편하게 수발을 들려고 입고 온 남방의 긴 자락이 펄럭이며 엉덩이와 허벅지에 감긴다. 올려 묶은 머리칼의 남겨진 가닥들이 얼굴을 훑는다. 어두운 허공에서 무형의 어지런 바람이 복수를 작정한 마왕처럼 격렬하다.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의 ‘폭풍의 언덕’이 떠오른다. 그들의 격정적이고 어두운 사랑. 그럴 계제도 아닌데 슬며시 감미로운 기분이 든다. 어쩌면 인간의 감정은 완전한 순도로 현재에 몰입할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심장이 나빠 응급실을 거쳐 온 노모를 병실에 두고 나는 너무도 가까운 곳에서 나만의 은밀한 관능을 느낀다.
새벽 세 시의 지방 도시는 폭풍전야 속에서도 정적에 잠겨있다. 밤을 방해하는 네온사인도 별로 없다. 차량 없는 넓은 도로는 비로소 휴식을 취한다. 멀리 세워놓은 자동차를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하루 주차료가 너무 비싸 주변 건물의 이면 도로에 세워 놓은 터다. 아파서 힘든 사람들을 상대로 잇속을 챙긴다고, 입원 환자한테는 적어도 대폭 편리를 봐줘야 하는 것 아니냐고 고혈압 여인이 한바탕 불만을 터뜨렸다. 아마도 병원 운영 효율을 위해 주차 시스템은 아웃소싱을 해서 그럴 거라고, 말하려다 관뒀다. 사실 나도 영 못마땅했다. 크든 작든 일상의 다반사가 통제 권리를 가진 권력들이 기획한 시스템에 의해 인식도 하지 못하는 사이에 조종되고 있다고 친구에게만 열을 올리는 소시민 의식의 발로였다.
카 라디오를 켠다. 언제나 고정돼 있는 클래식 채널에서 흘러나오는 첼로 선율이 밤의 색채와 더불어 유현하다. 멀리 어느 방위의 하늘인지 암운 사이로 희미한 별 빛들이 몇 개 존재의 신호를 보낸다. 이미 존재하지 않는 것의 존재성. 젊은이 시든 뒤 어느 자리에서건 내 가 남들보다 이채(異彩)를 띄지 못할 거라는 남모를 공포에 시달려왔다. 내 존재성의 미미함에 대한 지나친 예민함으로 편안하지 않았고, 때론 가슴을 저리는 회한 때문에 고통스러웠다. 아마도 젊은 시기에 갖게 되는 세상에 대한 오만과 교만이 세월과 더불어 겸손해지지 않은 탓일 것이다. 찬란한 과거를 잊지 못하는 늙은 여배우의 회억(回憶)처럼 서글픔과 체념도 묻어있었다. 살아온 세월과 살아갈 세월이 비슷해진 나이의 기로에서 그렇게, 오랜 풍상에 마모되다가 주변의 초목마저 닮은 이정표를 하나 발견했었다.
그러나 또다시 새벽을 앞에 두고 의구심이 든다. 단순과 반복이라는 무자극의 삶. 반복은 화젯거리를 낳지 않는다. 항상 유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수도 줄어든다. 청각이 심하게 퇴화된 노모와의 대화는 에너지를 소모시킨다. 그래서, 그러면 안 되는 것이지만, 되도록 필요한 말만 하게 된다. 그래서 말수가 적어진다. 이러다가 소설이나 영화에서 늘 매력 없고 부정적인 캐릭터로 나오는 침울하고 강퍅한 노처녀와 완전한 싱크로율을 발휘할 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그처럼 획일적으로, 무감각하게 캐릭터를 반복 재생산하는 작가나 창작자에게 꿈틀거리는 저항감을 느낀다. 정말 그들과 처지가 같다는 듯이.
지병이 많은 노모와 같이 하는 시간은 힘들었다. 자신이 살아온 방법에 대한 집요한 아집,
그 방식으로 하지 않으면 끊임없이 만화 주인공 ‘니모’처럼 기억을 잃고 반복되는 타박과 잔소리. 그녀 앞에 나는 중년을 넘어가는 딸이 아니라 함부로 부려도 되는 한갓 드난살이 하는 사람으로 비치는 것이 아닐까 섭섭한 적도 많았다. 먼 거리의 자식들이 찾아와 두어 시간 놀다가는 시간에도 그녀는 찾아와 준 자식들의 피곤함은 안쓰러워하면서, 인생의 시간을 쪼개어 자신 곁에서 노동하는 내게는 변함이 없었다. 찾아온 형제들을 위한 나의 봉사를 당연시하는 태도로 이것저것 주문이 많았다. 그래서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는 속담은 자식차별을 한 부모들의 불편함이 만들어 낸 알리바이라는 생각을 했다. 대체로 부모가 되고 부모를 모셔 본 주변인들의 의견도 비슷하다. 그래서 ‘부모 자식’이라는 견고한 신화에 얽매이지 않기로 한다. 그들도 호불호(好不好)의 감각을 지닌 인간인데 어찌 기계적인 공평함을 바라겠는가. 그저 내가 자식의 마음으로 그들에 대한 성심을 다하면 되는 것이라고, 의도적인 쿨(cool)함으로 무장한다. 하루 세 끼를 꼬박 준비하고 보살피는 행동들의 사이사이로 시간들은 소리 없이 빠져나간다. 며칠을 병원에서 새우고 있는 이 밤들 때문에 내 삶의 그 다음 순서가 정체(停滯)돼 있다. 노모는 그것을 모르고 어쨌든 지금은 곤히 잠들어 있다.
병실로 돌아오니 노모가 일어나 앉아있다. 다리가 저려 파스를 붙이려는데 입구가 너무 꽉 물려 있어 못 열고 있단다. 편리를 위해 고안된 비닐 지퍼마저도 열 힘이 없는 무력한 육체.
손등의 검버섯들이 박명 속에서도 시야에 박힌다. 먼 별빛들의 사라진 존재성을 목격하고 돌아온 망막에 반갑지 않은 침입자들의 존재가 들어차고 있다. 아주 작고 희미한 기미(幾微)가 저토록 커다란 검은 흔적으로 들어찰 때까지 그녀는 오랜 세월을 견디며 살아내 왔겠지. 아무리 서운한 마음이 구석 자리에 웅크리고 있어도, 사회경제적으로 좀 나은 시대를 살아온 내가 서운함 하나로는 어림하지 못할 파란과 굴곡이 그 반점 속에 옹이진 것이리라. 파스를 붙여야 하는 지점을 가리키느라 헐렁한 옷소매가 팔 위쪽으로 조금 밀린다. 그녀가 무수히 지나왔을 고단한 길들처럼 툭툭 불거진 혈관 들이 손등과 팔목으로 푸르스름하게 번져있다. 내 맘을 알아주지 않는 그녀를 애증하는 나는, 그녀의 마음을 다 안다 할 수 있을까.
창 밖에선 좀 전보다 더한 횡포로 바람이 포효한다. 어떤 일이라도 제발 일어나기만을 바라는 시골 소녀의 동경처럼, 권태로운 결혼 생활 한 가운데서 욕망을 채워줄 일탈을 고대하는 ‘마담 보바리’처럼 폭풍의 전령이 내 마음을 흔든다. 설레게 한다. 무섭지 않다. 땅 위에 박혀 이동하지 못하는 초목들에게 자유의 광포한 즐거움을 알려주겠다는 듯 거침없는 저 바람이, 마초기질을 가진 건장한 사내가 연약한 연인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듯, 가라앉아 있던 내 심장 박동을 부추긴다. 그런데 정작 밤의 한가운데서 회의와 자탄에 빠져 곤두세워졌던 내 촉수들은 다시 부드러워져 유연하게 내려앉는다. 여명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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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회 목포문학상』수필부문 심사평
수필부문 본심평
예심위원 임인택(수필가) 김수기(수필가)
신인들의 52편의 출품원고를 대할 때 가장 두드러진 수필작법의 오류는「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가 확연하지 않아 결국 글의 내용이 무엇을 말하려는지 불확실하다는데 있다.
글쓰기의 기본인 원고지 쓰기의 기초기법을 숙지해야 했고, 글의 생명인 주제 살리기에 힘써야 했다. 문장 서술에도 적절한 의미의 분절이 필요했고, 수필과 설명문, 보고서의 혼돈 사례가 적지 않았다. 가장 큰 위험은 수필문장의 구성에서 필자의 생각을 길게 쓰기위한 사고와 자기생각 키우기의 능력이 우선 되어야겠다.
신인들의 출품원고 가운데 <밤의 한가운데서>, <누에의 꿈>, <폐가>, <상처 있는 영혼이 상처 난 꽃을 알아본다>, <종이접기를 하면서> 5편을 최종에 올렸다.
한 30년 자전거를 탄 사람이 손놓고 자전거를 타도 바퀴가 제 알아서 굴러가듯, 억지 부리지 않고 꾸밈없이 써진 읽은 후 가슴에 남는, 그런 담백한 얘기들. 적어도 문학상에 도전하는 작품들은 뭔가 남 달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본상 후보로 <기차, 노을동화>, <도라지꽃>, <호리병박>, <운두령>, <감나무보살>, <곶감>, <출가> 7편을 최종에 올린다.
『제4회 목포문학상』수필부문 본심평 / 본심위원 김정오(수필가)
연암 박지원은 글을 지을 때 낯설게 하기를 주장했다. 그것을 법고창신(法古創新)’이라 한다. “옛것을 본받되 변화를 알고 새롭게 하라”는 뜻이다. 참된 문학정신은 변화를 바탕으로 하는 창조적인 글이어야 한다. 그것은 진실한 마음으로 대상을 항상 새롭게 그려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틀에 박힌 표현이나 관습적인 문체가 아닌 오직 자신만의 글을 써야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것이 참신성이다. 그런 글은 무량한 심미적 창조의 결정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그러나 그런 경지에 이르기 까지는 매우 깊은 사고(思考)와 함께 고뇌와 아픔이 있어야 한다. 쉽지 않은 글상(文想)을 문혼(文魂)으로 승화 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일찍이 프랑스의 평론가 알베레스는 수필의 성격을 “지성을 바탕으로 하는 환상적 이미지의 문학” 이라고 정의 했다. 그 말은 인간의 본능을 이지(理知,intelect)로 그려내는 문학, 즉 지성을 바탕으로 하는 정서적인 글이라는 뜻이다. 정서란 아름다운 감성을 말한다. 그것은 비장미와 처절미 그리고 장엄미와 정적미까지를 함께 아울러야 한다. 그것은 지은이의 직간접적인 체험에서 비롯된다. 수필을 자조(自照)의 문학이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삶에 대한 체험은 엄밀히 선택되고 새롭게 구성되어야 한다. 수필도 분명한 예술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 편의 수필을 쓰기 위해서는 사실상의 체험과 또 다른 체험의 세계 즉 상상력이 하나로 이어져야 한다. 그것을 승화(昇化)된 세계 즉 환상적인 이미지라 할 수 있다. 모든 예술은 이 환상적 기법의 소산이다. 구성상의 환상을 소설 형식의 허구(虛構,Fiction)라고 한다면 체험에 의해 이루어진 정적(情的)인 환상을 수필의 형식이라 할 수 있다.
예심을 통과하고 최종심으로 올라온 목포문학상 응모 작품들은 기성 작가 7명 신인 5명 등 총 12명이었다. 그런데 기성문인들이나 신인들을 막론하고 그 작품들의 수준들이 매우 높았다. 그러나 고심 끝에 본심은 번호 11번의「도라지꽃」과 「모과」를 최종 당선작으로 선하였다. 「도라지꽃」이나 「모과」의 작품은 예사롭지 않은 관찰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특히「도라지꽃」에서 ‘지난한‘ 이라든지 ‘가분재기’ 등 순수한 우리말을 알맞은 자리에 알맞게 안배해 놓은 점도 돋보인다. 그리고 문장이 딱딱하거나 지루하지 않고, 부드럽고 재미가 있다. 이를테면 「도라지꽃」에서
“다섯 겹 치마폭에 진한 남색 줄무늬가 선명한 도라지꽃이 가느다란 꽃대에도 흔들림 없이 꽃꼿하게 삶을 지탕하고 있다. 밤을 밝히는 등불처럼 작은 꽃잎 하나가 회색빛 도시를 환하게 밝힌다.”라든지
“꽃잎을 활짝 열어버린 꽃무리를 본 순간 , 울컥 가슴에서 푸른 눈물이 솟아오를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여든을 앞두고 있는 어머니의 지난한 생이 가분재기 푸른 멍이 되어 가슴을 두드린 탓이었다. (중략)꽃무리 속에서 도라지 뿌리를 캐기 위해 몸을 수그린 늙은 어머니가 내 가슴에 도라지꽃이 되어 망울망울 피어났다. 도라지는 가느다란 몸매와 슬프도록 어여쁜 꽃에 비해 뿌리는 끈질긴 생명력으로 존재한다. 지구의 중심을 꼭잡고 땅속 깊숙이 제 몸을 비틀며 생명을 이어가는 도라지는 다름 아닌 어머니의 사랑을 닮아 있었다.” 라는 구절 등은 눈길을 끌만하다. 그것 말고도 많은 글귀들이 신선한 감동을 주고 있다., 훌륭한 작가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라 사료되어 당선작으로 추천한다. 또 하나의 작품 「모과」는 평을 생략한다.
[신인 작품평]
신인들의 작품들도 좋은 작품들이 많았다. 작품마다 특색이 있어 수상작을 고르는 데 고심을 많이 했다. 그러나 접수번호 103번의 「밤의 한가운데서」를 당선작으로 선하였다. 함께 제출한「모서리」도 수준작이다. 먼저 「밤의 한가운데서」의 작품은 몸이 불편한 노모가 병원에 입원하고 있는데 병원에서 병수발을 들고 있는 딸 자신의 모습을 심리묘사까지 곁들여 그린 글이다. 문장이 세련되고 병실과 병원 복도에서 있었던 일 그리고 병원 앞마당에서 있었던 일들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글이다. 뿐만 아니라 바람이 심하게 불고 방송 매체에서는 초대형 태풍 상륙을 예고하는데 병원 앞마당에 심어져있는 붉은 칸나가 꺾이어 질 듯 둔각으로 왕복하면서 휘청거리는 모습까지 실감나게 묘사 하였다. 그러나 쓰지 않아도 될 외래어를 자주 쓴 것이 옥의 티라 할 것이다.
“그녀 앞에 나는 중년을 넘어가는 딸이 아니라 함부로 부려도 되는 한갓 드난살이 하는 사람으로 비치는 것이 아닐까 섭섭한 적도 많았다.” 라든지
“ 먼 별빛들의 사라진 존재성을 목격하고 돌아온 망막에 반갑지 않은 침입자들의 존재가 들어차고 있다. 아주 작고 희미한 기미(幾微)가 저토록 커다란 검은 흔적으로 들어찰 때까지 그녀는 오랜 세월을 견디며 살아내 왔겠지(중략) 그녀가 무수히 지나왔을 고단한 길들처럼 툭툭 불거진 혈관들이 손등과 팔목으로 푸르스름하게 번져있다. 내 맘을 알아주지 않는 그녀를 애증하는 나는 그녀의 마음을 다 안다 할 수 있을까.”
라는 구절 등은 읽는 이의 마음에 공감을 일으킬 수 있는 글이다. 앞으로 노력하면 매우 역량 있는 작가로 성장할 수 있다고 사료되어 추천한다. 「모서리」의 작품 평을 생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