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 소총회가 유엔위원단이 활동 가능한 남한 지역에서 총선을 실시할 것을 가결하여 역사적인 제헌의원 선출을 위한 총선거가 5월 10일로 확정된 가운데 단독 선거를 둘러싼 갈등이 격화되었다. 이승만과 한국 민주당 등은 총선거 준비에 들어갔지만, 남북 협상에 참여했던 김구, 김규식 등이 이끄는 중도우파에서는 5·10선거에 불참하였다. 특히 좌익 계열을 통합하여 결성한 남조선 노동당(남로당)은 선거를 저지하기 위하여 폭력 수단을 통해 총선거 방해공작을 하였다. 이 과정에서 군경과의 유혈 충돌이 다수 발생하였다. 제주도 3개 선거구 가운데 2개에서 남로당 제주도당이 폭동으로 인해 투표율이 과반수 미달로 무효처리가 되었다. 전국의 200개 선거구중 제주도의 북제주군 갑·을구 2개 선거구를 제외한 198개 선거구에서만 제헌국회의원이 탄생했다는 역사적인 기록을 남겼다.
**사진 설명: 남로당 제주도당은 예하 조직인 마을별 자위대를 가동해 선거 직전에 주민들을 강제로 인근 숲이나 산으로 올려 보내 며칠을 머물다가 선거가 끝난 후에야 귀가하도록 하여 선거 당일 투표를 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제주 4.3사건은 이런 와중에 발생한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위한 선거를 반대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위한 구국투쟁 차원에서 일어난 것으로 1948년 4월 3일 남남로당제주도당 세력이 무장폭동과 반란을 일으키자, 미군정과 대한민국 정부는 군경을 동원하여 선무공작과 진압에 나섰다. 정부 수립 이후까지 진압 과정에서 많은 제주도민이 희생되었다.
**사진설명: 1948년 10월 19일 발생한 '여순 사건'에 가담한 14연대 반란군들을 색출하기 위해 진압군인들이 마을에 숨어있는 반란군을 찾아내고 있다.
1948년 10월 19일 발생한 '여순 사건'은 당시 여수·순천 일대에 주둔 중이던 국군 제14연대의 일부가 제주 4·3사건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거부하고 무장 반란을 일으킨 사건이다. 당시 반란은 남로당 소속 김지회, 지창수 등을 주축으로 이뤄졌으며, 국군의 진압 과정에서 최대 1만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현대사의 비극이기도 하다.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양측의 충돌이 여수, 순천, 지리산 일대로 확산되어 수많은 민간인이 희생되었다.(여수·순천 10·19사건).
**사진설명: 대한민국 진압군인과 14연대 반란군인들과 구분하기 위해서 철모에 흰때를 둘렀다고 전한다.
**사진설명: 여수·순천 10·19사건 당시 지리산에서 군경토벌대에 붙잡힌 14연대 반란군 빨치산 게릴라이다. 뒤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기인 홍남오각기가 보인다. 이 국기를 직접만들고 고안한 사람은 독립운동가인 해공 신익희 선생의 동생인 신해균화백이 창안하고 고안한것으로 밝혀진다.
※자료제시(1/4분 쪽 할당)
‘제주 4.3 사건의 비극과 치유’
내용 : 희생자의 규모 서술, 진상규명, 국가적 사과
사진자료 : 노무현 대통력의 추모제 참석해서 묵념하는 장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