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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용 위임목사 주일 오전예배 설교
2020.3.15. - 마태복음의 말씀(11) 깨어있으라 기억하고 있으라
마태복음 24장 36-51절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그 때에 사람이 밭에 잇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그러므로 깨어있으라 어느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 주인이 도적이 어느 경점에 올 줄을 알았더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뇨.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의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저에게 맡기리라.
만일 그 악한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동무들을 때리며 술친구들로 더불어 먹고 마시게 되면 생각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의 바는 율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어느 아이가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새 학기에 학교도 가지 못하고 밖에도 나가지 못하니 힘들게 있다가 집 안에서 뉴스를 보고 벽을 치고 엉엉 울더랍니다. 엄마가 '왜 우니?' 라고 물었더니, 이 아이가 이렇게 얘기합니다. 코로난지 코브란지 걔는 밖에 마음대로 나가면서 사람들 다 접촉하는데, 왜 나는 밖에 못 나가냐고 그렇게 벽을 치고 울더랍니다.
아마도 지금 이 상황에서 가장 답답하고 힘든 사람이 누굴까 생각해 보면 이미 개학을 했는데 학교에 가서 뛰어놀아야 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는 우리 아이들이 아닐까 라고 생각해 봅니다. 그렇게 학교 가기 싫어하는 아이들도 요즘에는 학교 가고 싶다고 얘기합니다. 제 자녀들도 학교 가기를 그렇게 싫어하는데 요즘에는 학교 언제 가냐고 물어봅니다. 아마도 우리 아이들이 지금 상황이 가장 답답할 것 같습니다.
어제 새벽 말씀처럼 아직은 어둡고 절망스럽지만 반드시 우리 주님께서 저 끝에서 우리를 향한 등불을 들고 우리를 향해 오신다 라고 저는 믿습니다. 우리 마음에 시련과 역경이 있어서 여전히 어둠 속에 있을지라도 우리 주님께서 저 먼 곳에서 위로와 평안의 가지고 우리를 찾아오신다 라고 믿습니다.
조금만 더 참아내십시다. 포기하지 말고 버텨내십시다. 우리 성도님들 주중에 전화로 sns 로 심방하면 3분의 1밖에 되지 않은 매출, 또한 계속해서 계약했던 것들이 캔슬되고 또 3, 4월에 가장 피크로 많은 일들을 해야되는데 전혀 하지못하는 그런 상황들을 심방하며 들으며, 굉장히 저 또한 마음이 괴롭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포기하지 마십시오. 버텨내시고 참아내십시다. 끝내 하나님께서 회복시켜 주시고 우리를 돌봐주시리라 믿습니다. 곧 주님께서 회복을 주시리란 믿음으로 한 주를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마태복음의 말씀 11번째 '깨어있으라 기억하고 있으라' 라는 사순절 세번째 말씀을 함께 나눠보고자 합니다.
어느 술 취한 사람이 늦은 밤에 전봇대 가로등 아래에서 계속해서 뭔가를 비틀 비틀거리면서 찾고있는 것입니다. 그러다 길을 가던 행인이 그 술 취한 사람에게 '도대체 뭘 찾고 계십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술 취한 사람이 '열쇠를 잃어버렸습니다' 라고 얘기 합니다.
그래서 그 행인이 그 술 취한 사람과 함께 그 가로등 밑에서 열쇠를 열심히 찾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도 열쇠가 없습니다. 행인이 다시 묻습니다. '아저씨, 여기서 열쇠를 잃어버린 게 맞습니까?' 그러자 술 취한 사람 이렇게 얘기합니다. '열쇠는 집 앞에서 잃어버렸죠'
어이가 없어서, 다시 행인이 묻습니다. '그런데 왜 여기서 열쇠를 찾습니까?' 그러자 그 술 취한 사람이 이렇게 얘기합니다. 집 앞 골목은 너무 어둡기 때문입니다. 술 취해 정신이 없으니깐 그냥 아무 곳에서 열쇠를 찾는 겁니다. 열쇠 찾는 일만 그러겠습니까? 술 취해서 정신없고 깨어있지 않으면 다양한 일에서 이런 일들을 겪습니다.
사진 하나 보시지요. 제 구두 사진입니다. 자세히 보시면 구두가 서로 다릅니다. 짝짜기이지요. 제가 미국에서 한참 개척을 하고 교회를 섬길때 새벽기도 부터 나가서 그날 아침에 또 심방하고 성경공부 준비하고 저녁에 성경 공부하고 저녁 늦게 계속 일을 반복하면서 개척교회 사역을 했습니다. 다른 관리하시는 분도 계시지 않고, 아침에 저 혼자 세콤 (자체 보안장치)을 키고, 그곳에 청소도 하고, 정리도 하면서 하루종일 사역을 하다 돌아가면 몸이 지칩니다.
하루는 제가 그렇게 하루종일 사역을 하고 있는데, 제 아내가 저를 막 부릅니다. 그리곤 제게 사진을 보여 주는데 바로 이 사진입니다. 제가 새벽에 나갈 때 정신이 없어서 서로 다른 구두를 신고 나갔다는 겁니다.
여러분 정신없고 깨어있지 못하면 열쇠를 집에서 잃어버리고, 다른 곳에서 열쇠를 찾게 됩니다. 저처럼 구두 짝짝이로 신고서, 정작 본인이 성도들에게 정신 차리십시오, 새벽을 깨우십시오 하고 설교하고 전도해야 되는데, 본인이 짝짜기 신고 나가서 짝짝이 된 구두를 신은 채 그렇게 잘못된 설교를 하게 되는 입장을 갖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이렇게 증거합니다 우리 42절 말씀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의 주가 임할지는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깨어있으라 이 중한 때에 이 종말의 때에 믿음의 사람들은 깨어있어야 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종말의 신앙, 이 중한 종말의 때, 종말의 시간은 무엇일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3일 후에 부활하시며, 40일 동안 그의 제자들과 함께 계시다가 승천하시면서, 내가 이대로 이 모습 그대로 다시 내려오겠다 라고 말씀하시지요. 그리고 예수님의 다시 오심, 곧 예수님의 재림을 소망하면서 살아가는 신앙을 우리는 종말 신앙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정말 신앙을 사는 저와 여러분은 항상 이 땅의 역사가 처음과 끝이 존재한다 라고 믿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저 먼 곳 어딘 가에는 우리가 죽은 후에 가면 하나님의 나라 천국에 있다 라고 확신하며 살아가지요. 그리고 공의로 오신 하나님께서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기준대로 알곡과 가라지, 양과 염소를 나누는 최후의 심판이 있다고 믿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이루지 못한 에덴 동산의 목적을 마지막 때에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이루시기를 원한다 라는 것, 그것을 확신하며 살아가는 것을 종말의 신앙이다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종말의 신앙의 기준대로 본다면 우리의 신앙은 게으를 수 없습니다. 태만할 수 없습니다. 언제 주님이 오실지 모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따라서 운동 경기에서 후보 선수가 된 것과 매우 비슷합니다. 예를 든다면 축구 경기에서 후보가 된다면 경기 시작 때부터 축구장에 주전 선수처럼 뛸 수가 없습니다. 후보 선수가 된 것은 벤치에 앉아서 경기를 시작하는 것을 말합니다.
후보선수 라고 해서 벤치에 앉은 관중들과 똑같은 모습을 가지면 안되지요. 관중은 한 2시간 경기가 진행되는 동안에 팝콘도 먹을 수 있습니다. 화장실도 다녀올 수 있습니다. 재미 없으면 옆에 있는 관중과 함께 얘기도 나눌 수 있습니다. 때론 바쁜 일이 생기면 그냥 집에도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후보 선수는 그럴 수 없습니다. 벤치에 앉아서 경기를 지켜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라는 것입니다. 경기 시작부터 후보 선수들은 경기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봐야합니다. 그 경기를 뛰고 있는 주전 선수 중에 내가 들어간다면, 누구 대신 뛰게 될 것인지. 또한 상대편은 어떤 전술로 임하고 있는지, 마치 경기장에서 뛰는 주전선수와 똑같은 마음으로 벤치에 앉아서 경기를 지켜보는 사람이 후보선수입니다.
그러다가 중간쯤 감독은 후보 선수에게 몸을 풀라고 얘기합니다. 몸을 푸는 것은 그저 땀 좀 흘리고 좀 왔다갔다 뛰는 것을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당장 주전 선수와 교체가 되어도 이 경기에 똑같은 선수처럼 뛸 수 있는 지를 보여주는 것이 몸풀기입니다.
저는 그리스도 인들이 바로 이런 스포츠 경기에 후보선수와 같은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아직 천국이라는 본 경기장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감독과 같으신 우리 주님이 보시기에는 저희들이 훈련이 부족하고 기술이 부족하면 능력이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고 보셨기 때문에 아직 벤치에 앉아있는 후보로 저희를 앉히셨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관중들처럼 편하게 아니라 그렇게 긴장도 없고, 아무 생각없이 경기를 지켜만 봐도 될까? 후보가 관중과 똑같은 마음자세로 경기를 지켜본다면 절대로 중간에 투입되는 선수가 될 수 없습니다.
신앙도 이와 똑같습니다. 깨어있지 않고 정신을 바로 차리고 있지 않으면 절대로 우리는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천국을 선포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깨달을 수 없다 라는 것입니다. 깨어있지 않으면 본 경기에 낄 수 없는 것입니다.
야구를 보면 구원투수라고 하는 보직을 가진 선수가 있습니다. 영어로 클로저 Closure 라고 합니다. 마무리를 하는 투수입니다. 곧 9회까지 경기인데 마지막 8회 또는 9회에 경기가 이기고 있을 때 그 경기를 승리로 지켜주는 투수를 말합니다. 그러니 투수들은 마지막 8회나 9회에 나오게 되니, 그 전까지는 편하게 밥도 먹고, 잠도 자고 푹 쉬다가 마지막에 공 몇 개 던지고, 경기를 마무리 하는 투수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제대로 하는 구원투수는 경기 시작 때부터 타자 한 사람 한 사람을 지켜봅니다. 그리고 본인도 계속 손으로 공을 쥐고서 감각을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아직 경기장에 나가지 않았는데도, 마치 경기장에서 계속 공을 던지는 선수처럼 땀을 흘리고 호흡을 조절하고 그 경기 흐름에 맞는 감정을 계속해서 가져갑니다. 그러다가 진짜 경기에 투입되면, 마치 경기를 막 뛰던 선수처럼 공을 던지고 그 경기를 지켜내는 투수가 바로 구원투수 클로저, 마지막 마무리하는 투수입니다.
영적으로 깨어있다 라는 것은 바로 야구의 구원투수처럼 준비하고 있는 자를 이야기합니다. 언제 어디서 무엇을 위해 우리 주님의 오실 지는 모르나 우리 주님이 오실 그때를 준비하고 예배하고 있는 신앙의 삶을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깨어있는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니 '깨어있으라' 라는 그 권면을 위해서 우리 주님께서 몇가지 말씀하신 것이 있습니다. 40절과 41절의 말씀입니다.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그 때에 사람이 밭에 잇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종말의 때에 밭에 있는데 한 사람은 들려올림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을 데려간 거죠. 그리고 한 사람은 남겨져서 버려지게 되었다. 두 여인이 맷돌질 하는데 한 사람은 들려올림을 받고, 한 사람은 남겨져 버림을 받게 됐다 라는 설명입니다. 바로 이와 같은 종말의 때에 나타나는 현상을 휴거 携擧라고 합니다. 들려 올릴 '휴' 자에 들 '거' 자를 쓴 것입니다.
기독교의 휴거란 세상 끝날 날이 다가오면 40절과 41절의 표현대로 누군가는 하늘에 먼저 올라가고 누군가는 땅에 남아서 심판을 받게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휴거로 종말이 이루어진다 라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휴거로 잘못된 종말론을 보여줬던 사건이 있었습니다. 1992년 10월 28일에 이제 곧 종말이 왔어. 휴거가 일어날 것이라고 얘기하는 다미선교회 이장림목사입니다. 그 사람들이 자기 교회에 사람들이 오면, 그 사람들이 이제 휴거를 받게될 것이다. 10월 28일 날, 딱 12시가 되면 우리는 다 하늘로 올라갈 것이라고 얘기했습니다.
엄청난 사건이었죠. 방송국이 생방송을 해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 이후로도 여러 번 여러 나라에서 또 이런 휴거 종말에 대한 이야기들이 온다고 이야기 했지만, 여러분 우리가 이제 기억해야 하는 것은 더 이상 세상이 교회에서 그렇게 얘기하는 종말, 휴거의 종말, 또한 심판의 때, 예수님의 재림을 이제는 믿지않는 상황이 되버렸습니다.
여러분 세상은 교회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상당수 거짓말하는 양치기 소년처럼 생각하는 그런 상황이 되버렸다 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앞에 함께 읽은 종말에 대한 본문을 잘못 또는 왜곡 해석에서 영적으로 온전하게 깨어있지 않은 신앙을 보여줬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성경을 잘못 해석하고, 말씀 묵상을 제멋대로 하는 교회가 되다 보니 교회도 성도도 그리고 우리를 통해 깨어있어야 할 세상도 깨어있지 않은 곳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40절과 41 절에서는 휴거를 이야기하는 듯합니다. 밭에 있다가, 맷돌질하다가 하나는 들려 올라가고, 다른 하나는 버려진다 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다음에 나와 있는 42 절에서는
'그러므로 깨어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다' 라고 기록합니다.
휴거 곧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올라가는 것이 구원이라면 42절에서는 휴거받은 이들을 맞이하시는, 환영 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나오거나, 그렇지 못해 땅에 버려진 사람들은 심판하는 하나님의 모습이 나와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42 절에서 증거하는 것은 휴거로 하늘에 올라온 사람들을 활용하거나 땅에 남은 사람들은 심판하는 그런 내용이 있는 것이 아니라 깨어있으라 어느날 주님이 이 땅에 오실지 모른다 라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40절과 41 절을 보면, 누가 더 신앙이 좋은지, 누가 믿음이 더 좋은지, 누가 더 신실한지, 누가 더 하나님께 인정 받았는지 나오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40절과 41절을 보면 구원과 심판 종말의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알곡과 가라지로 나눈 것은 하나님께 권한이 있는 것이지 우리가 어떻게 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인간의 행위, 인간의 공로, 인간의 종교적인 어떤 모습으로 우리가 휴거를 받거나 구원받고, 종말의 때,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다 라는 것입니다.
종말, 심판은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에 대한 우리 믿는 자들의 건강한 신앙의 태도는 잠자다가 내 가족들은 휴거되서 하늘나라 올라가고 나는 여기에 남게 되는 그 두려움과 공포 때문에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 종말 그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주관 가운데 있음을 깨달아서 우리는 그저 깨어있고 예배하고 준비하는 자로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서 깨어있는 그리스도 인의 모습을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내가 그저 이렇게 살아가다가 휴거가 될까 고민하는 것이 종말의 신앙이 아니라, 마지막 때에 종말의 때에 모든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권한 가운데 하나님의 주관 가운데 그 심판과 구원이 이루어질 것을 늘 겸손한 마음으로 기다리는 거, 그것이 참된 종말의 신앙입니다.
이에 대해서 바바라 로싱이라는 성서학자는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종말과 휴거에 대한 진정한 메시지는 인간이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끌려올라간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 내려 오신다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이 세상을 저버리고 다른 곳으로 가시지 아니하시며 우리도 다른 곳으로 보내지 않으십니다. 마지막 때에 하나님은 우리가 있는 이곳에 내려 오십니다. 여러분, 종말은 우리가 휴거 받아서 그렇게 들림을 받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내가 이렇게 승천한 대로 다시 이 모습 그대로 내려오신다 라는 것 그것을 기다리는 것이 진정한 종말의 신앙입니다.
휴거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심판과 종말은 하나님의 손 위에 있다. 하나님의 권한이다 라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래서 앞에서 말씀드린 깨어있는 신앙이라는 것은 휴거 신앙이 두려워서, 시한부 종말론이 무서워서 깨어있는 것이 아니라, 저와 여러분이 여전히 목사이지만, 여전히 장로와 권사와 집사이지만 여전히 예수 믿는 성도라고 하지만 부족하고 여전히 모자라고 여전히 연약한 죄인이기에 마지막 때 어떻게 주님 앞에 우리가 설지를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는 신앙이 바로 깨어있는 시간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 말씀을 지금 코로나 사태로 고통을 겪고 있는 지금 우리의 삶에 적용해 보고자 합니다. 잘못된 종말론의 휴거 신앙으로 지금 사태를 보면, 이 전염병의 우리 믿는 자들은 들림을 받아야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교회는 모여서 예배드리고 전과 똑같이 모임을 가져도 아무 문제가 없어야지요.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많은 장소에서 전염병이 돌고 있습니다. 죄송하지만 교회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리스도 인들도 더 나아가 목회자들도 전염병에 쓰러져가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것은,
'왜 휴거 신앙이 맞지 않을까? 아직 그런 종말이 오지않은 것일까? 전염병은 하나님이 지켜주시니 교회 모여 예배를 드리는 것이 교회를 지키는 것이 아닐까? 신앙을 지키는 것이 아닐까?' 라는 식의 유아기적인 신앙의 판단이 아니라 이런 종말의 현상 가운데 우리 교회는 어떻게 하면 더 복음적인 교회가 될 수 있을까. 이 종말의 상황 가운데 우리의 신앙을 어떻게 하면 더 선교적인 교회가 될 수 있을까 선교적인 신앙의 삶을 살 수 있을까 그것을 고민하고 기도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면 이번 사태로 이 슬픔과 비통에 빠져있는 사람들과 세상을 향해 어떠한 공공의 소망을 줄 수 있을까? 그동안 우리는 나의 꿈 내 안에 있는 비전 그것만 바라봤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우리의 계획들 그러면 이제 이 사태를 통해서 우리는 공공의 소망을 생각해야 합니다.
교회밖에 우리 교회는 어떤 소망과 어떤 비전을 줄 수 있을까? 우리는 교회 안에서 교회 안에서만 적용되는 소금과 빛의 삶을 이야기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세상을 향한 소금과 빛의 삶을 이야기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소중하게 여겼던 주일성수를 교회에서는 드리지 못할지라도 내가 가장 소중히 여겼던 그것을 버리고 이웃과 세상을 살리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이는 것, 그것이 지금 이 순간 우리 한국 교회가 바로 깨어있는 신앙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침묵' 이란 소설 아시죠? 엔도 슈사쿠 일본 소설가가 쓴 책입니다. 마틴 스콜세지가 사일런스 Silence 라고 하는 영화로 최근에 만들기도 했습니다. 이 소설을 보시면 16세기에 포르투갈 예수회의 유명한 선교사가 일본에 갔는데, 멀리서 오는 소문이 그가 배교를 했다는 소문이 오는 것입니다.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주인공 신부가 몰래 일본에 들어갔습니다. 몰래 일본의 들어가 한 마을에 사역을 하며, 사목을 하며, 많은 사람들을 전도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일본 관리에게 들통이 났습니다.
그래서 그 주인공 신부는 어느 한 집에 숨습니다. 그리고 그 일본 관리는 그 전도 당한 그 마을에 있는 사람들을 고문하기 시작합니다. 잔인하게 고문합니다.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아 놓고 귀에 상처를 냅니다. 그럼 피가 한 방울씩 떨어져 가면서 피가 말라 죽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신음 소리를 내는데, 그 신음 소리를 계속해서 이 신부가 숨어서 듣게 됩니다.
밀물과 썰물이 올 때 바로 해수면에 딱 맞는 십자가를 만들어서 그 곳에 그 천주교 신자들이 마을 사람들을 매달아 넣었습니다. 물이 차오르면 계속해서 익사해서 죽는 소리가 곳곳에서 들립니다. 그 소리를 들어가면서 신부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주님 뭐하고 계십니까? 그들을 구원해 주십시오. 공의를 드러내주십시오. 심판해주십시오.'
그러나 하나님은 침묵하십니다. 끝내는 자기도 더이상 자신이 전도한 마을 사람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볼 수가 없어서 자수하게 됩니다.
그러면 더 이상 사람들이 고문당하지 않겠지 라고 생각했는데, 그 관리는 계속해서 그 마을 사람들을 고문합니다. 그러면서 그 주인공 신부에게 이렇게 제안을 합니다. 만약 당신이 마을 신자들 보는 앞에서 예수의 성화를 밟고 지나가면, 당신을 비롯해서 마을 모든 사람들을 살려주겠소. 예수의 얼굴을 밟고 지나가시오.
여러분, 신부는 평생 하나님만 모시고 사는 자이지요. 하나님과 결혼하며 살아가는 자입니다. 성화를 밟는다는 건 배교하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성화를 밟지 않으면, 자기가 전도한 사람들이 다 죽어 갑니다.
그런데 그때 그렇게 기도할 때마다 침묵을 지키던 하나님께서 그 신부에게 이렇게 얘기하십니다. '내 얼굴을 밟아라. 나는 너희에게 밟히기 위해 이 땅에 왔다. 기꺼이 밟아라'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요즘 코로나 사태로 그동안 우리가 너무도 안일하게 너무나 편안하게 신앙생활하는 모습을 되돌아 보고 반성하며 기도하던 중에 엔도 슈사쿠의 침묵 이란 이 소설을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이런 전염병이 들어와서 예배를 교회에서 드리지 못하느냐? 믿음이 없는 거 아니냐? 이럴 때일수록 더 모여서 기도하고 교회와 성도는 하나님이 지켜주심을 보여줘야지 전염병을 싸워서 이기는 걸 보여 줘야지' 라고 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예배 드리는 거 주일 성수를 지키는 것, 성도의 교제를 함께 나누는 것, 기도하고 찬양 집회를 하는 거 너무 소중하죠. 저도 너무나 하고 싶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너무나 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하십니다. 이젠 교회가 아니라 세상을 보아야 한다. 지금은 내 얼굴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예배만 드릴 것이 아니라, 내 얼굴을 밟고, 이웃과 세상을 살려야 한다. 나를 밟아라. 나는 너에게 밟히기 위해서 이 땅에 왔다.
예배를 이 성전에서 드리지 못하는 것에 피눈물이 납니다. 예, 마치 주님의 성화를 밟고 지나가는 침묵의 소설의 그 주인공 신부처럼 가슴이 찢어지고 눈물이 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상황에 누가 더 아프시겠습니까? 교회 처소에 모이지 못해 예배를 제대로 드리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우리 인간이 아프겠습니까? 아니면 전염병으로 고통받는 온 세계와 온 인류를 바라보시는 우리 주님께서 아프시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이 시대에 깨어있어야 합니다. 누구 때문에 예배를 드렸는가? 맷돌질 하다가 휴거를 받고자 거짓된 마음으로 주일 성수를 율법적으로 드린 내가 아니었는가? 마지막 때에 나만이라도 천국에 가겠다는 영적인 이기심과 영적인 욕심으로 이 주일 예배를 지킨 것이 아니었는가?
우리 주님은 하루도 거짓된 예배 위선적인 주일 성수를 밟고 지나가라고 지금 이 상황을 우리에게 겪게 하신다 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주일에 함께 예배를 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진정으로 영과 진리로 예배 드리는 참된 예배가 지금 우리 가운데 있는가? 그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는가?'
그렇게 깨어있는 것을 아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말씀에 제목을 깨어 있으라 그 곳에 더 붙여서 기억하고 있으라 라고 함께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훗날 이 종말의 사태로 주일 예배를 성전에서 드리지 못한 이 때를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다시 깨어있는 신앙으로 살 수 있고 깨어있는 주일 성수를 지킬 수 있으며 깨어있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혼란한 때이지요 믿는 자들은 깨어있어야 합니다. 물론 지금의 이 어려운 상황들 분명히 이것 또한 지나가게 되리라 믿습니다.
여러분 바로 이때를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의 성화를 밟고 지나갔던 그때를. 주님의 날 처소에 모여 함께 예배 드리지 못했던 바로 이 때를 우리가 반드시 기억하여 항상 깨어있는 신앙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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