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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숙자의 수필에 나타난 순환의 원리와 어머니상
-<때때로 찍는 쉼표>의 세계
1. 들어가며
문학은 인간의 삶을 언어로 표현하는 예술의 한 형태이다. 문학은 작가의 특유한 창조적 상상력에 의해 인간의 삶 속에 감추어져 있는 사상과 감정을 아름다운 언어로 표현해 독자에게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인간은 문학을 통해 삶을 이해하고 즐기며, 더욱 풍요로움을 갈망하며 살기를 소망한다.
문학 장르 중에서도 인간의 삶의 형태가 가장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 수필이다. 수필은 삶의 현장에서 글감을 사냥하여 그것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찾아내는 작업에 의해 완성된다. 일상 속에 산재해 있는 글감을 찾아 자신의 삶을 토대로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수필 창작과정이다. 그래서 같은 글감이라 해도 바라보는 작가의 시각에 따라 다른 의미를 함유하게 된다. 문학작품에 있어서 문장은 창작과정이 겉으로 드러난 형식에 불과하다. 우리는 그 문장을 통하여 글 속에 숨어 있는 메시지를 찾아내어 작가의 삶을 이해하고 즐기게 되는 것이다.
수필을 봄으로써 작가를 바로 알고 이해할 수 있는 소이가 여기에 있다. 독자는 한 작가의 작품을 통해 그 작가의 됨됨이와 추구하는 세계를 이해하게 된다. 더 나아가서는 작가가 추구하는 세계에 몰입하여 감흥을 느끼기도 한다. 여기에 수필을 읽는 묘미가 있다. 한 작가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따라가며 동질의 경험을 하기도 한다. 그것이 남다른 것이고, 새로운 해석이면 독자는 신바람이 나기 마련이다.
작가 박숙자에 있어서도 예외일 수는 없다. 작가 스스로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의미가 변질될 수 있음을 자각하고 있다. 그의 작품 <아름다운 청년>에서처럼 문신의 의미는 죄에 대한 형벌이 될 수도 있고, 두 연인의 사이에서는 연비(聯臂)일 수도 있다. 지울 수 없도록 죄인의 팔에 죄목을 새겼던 것과 사랑의 정표로 서로 몸에 아로새겨 간직했던 연비와는 사뭇 다르다. 죄의 대가로 새겨 영원히 그 죄를 지울 수 없도록 벌했던 문신은 소(牛)에게 걸었던 멍에보다도 더한 것이었지만, 연인들 사이에 새겨두어 변치 않는 영원한 사랑을 간직하려던 것은 오히려 아름답고 처절하다. 장길산이 묘옥의 가슴에 새겼던 연비는 저승에 가서도 간직하고 싶었던 그들의 사랑의 혼불이었다.
같은 대상이라 해도 사용의 용도에 따라 이렇게 의미는 다르다. 이러한 다름은 작가의 시각에 의해 더욱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되는데, 훌륭한 작가의 경우 다른 사람이 전혀 찾아내지 못하는 것을 찾아내고,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 일상 속에서 접하게 되는 모든 것들은 우리에게 새로운 뜻으로 인식되기를 소망하며 빛나고 있지만, 범속한 사람은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작가의 빛나는 눈이 있기에 그것을 드러나고 비로소 세상에 얼굴을 내밀게 되는 것이다. 일상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의미는 작가에 따라서 이렇게 판이할 수 있다.
또 <떠도는 원혼(冤魂)>에서도 사물을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 새로운 해석이 가능함을 보여주고 있다. 외국에서 구입한 가방과 북에서 내려온 가방 수선공은 제 고향을 맘대로 갈 수 없는 처지이다. 또 그러한 처지를 바라보는 남편은 조부의 실향 아픔을 알기에 측은히 여겨 유독 가방에 애정을 쏟는다.
유독 가방에 애정을 갖고 있는 남편의 여린 마음을 알지 못하던 저자가 그 사연을 이해해 가는 과정이 섬세하게 그려져 있는 이 작품에서는 사물의 인식은 작가의 눈에 의해 극명하게 다를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래서 끝내 고향을 가지 못하고 타향에서 생을 마친 가방 수선공의 마지막을 바라보면서 저자는 가방과 시조부의 실향의 아픔까지도 이해하게 된다.
이와 같이 사물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그 인식은 판이할 수 있다. 작가의 눈을 통해 바라본 세상이 특이할수록 독자의 쾌감은 크다. 작가가 다른 사람이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세계를 찾아 보여줄 때에 독자는 글을 읽는 기쁨을 얻게 된다. 그리고 새로운 세계를 바라본 여운이 오래 남아 그 작가도 기억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결과는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긴 세월을 두고 고통스러움을 참고 견뎌낸 고뇌의 결과에서 얻어진 것만이 가능하다. 그러면 작가 박숙자에게 있어서는 이런 고뇌의 흔적이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를 살펴보자.
2. 피할 수 없는 길, 순환의 원리
인간은 태어나서 삶을 영위하며 변하는 자연의 순리를 거역할 수가 없다. 어리석은 사람만이 그것을 거역하고 감히 도전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이 제 아무리 지혜가 있고, 만물의 영장이라 해도 자연의 순환 앞에서는 나약하기 그지없다. 오히려 그러한 현상을 정확히 파악하고 슬기롭게 대처하는 것이 현명하다.
이 순환의 현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사람에 따라 현저하게 다르다. 어떤 사람은 자연의 순환에 몰입하는가 하면, 혹자는 사람들 자신이 변질되어가는 모습에 더 날카로운 시선을 보내기도 한다. 그것은 작가의 삶에 대한 해석에 따라 다분히 다를 수 있다. 작가 박숙자의 경우는 인간은 어쩔 수 없이 늙게 되고 병들게 됨에 맞추어져 있고, 외로움을 감내해야 함을 스스로 받아들이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그것에 거역하고 도전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슬기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강한 듯해도 나약하기 이를 데 없는 작가의 모습이며, 현실을 직시하고 바로 받아들이는 작가의 슬기이다. 이 슬기는 삶의 연륜 속에서 얻어진 결과일 것이다.
한때는 영웅호걸의 기상도 가졌고 젊음의 뒤안길에서 몸부림도 쳤을 조금 전의 할아버지가 ‘약을 느십시요’를 ‘약을 드십시오’로 잘못 듣고 낭패를 보지 않았나. 할아버지를 보고 남의 일처럼 웃고 있었다니.
병원 문을 밀치고 나오며 괜스레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새 길동무로 생겨난 ‘노안’이란 것과 아직은 친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나는 안다. 가까운 시일 안에 ‘노안’과 서로 잘 사귀어 보자고 악수를 청해야 할 것 같은 사실을.
그리고는 다시 예감의 세월을 유추해 본다. ‘이 눈약은 꼭 눈에 넣으십시오.’라는 의사의 말이 나에게도 들려오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음을. -<눈약은 눈에 넣으시오>에서
아무리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인간이라도 자연의 순환에서는 자유로울 수는 없다. 나이가 들어 귀의 기능이 허약해진 할아버지가 눈약을 먹었다는 얘기를 듣고 바로 자신에게 내려진 노안이란 진단에 작가는 오진이길 기대한다. 아직은 젊고 세상사의 한 가운데에 있다고 생각했는데 노안의 진단에 당혹해 하는 것이다. 그리고 좀 전에 할아버지의 눈약 사건을 조소했던 자신에게 채찍을 가한다. ‘가까운 시일 안에 노안과 서로 잘 사귀어 보자고 악수를 청해야 할 것 같은 사실에’ 순응하게 된다. 아무리 강건한 사람도 늙음 앞에서는 무력하다는 진실에 눈을 떠가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오랜 세월 가족 같던 피아노가 차츰 짐스러워지기 시작했다. 훌쩍 커서 어른이 된 두 아들들은 컴퓨터와 친구가 되어버렸고. 세상이 좋아지다 보니 다양한 악기들이 피아노 자리를 대신한다. 어느새 피아노는 새로운 물건에게 자리를 내주고, 온기 없는 장식품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거실에 덩그러니 놓인 피아노를 보는 심사가 편치 않다. 젊은 날, 나와 아들에게 얼마나 기쁨을 주었던가. 변치 않을 것 같던 정이 옮아가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처음과 끝이 같지 않은 내 마음의 변덕에 머리를 흔들었다. -<그때가 그립다>에서
역시 순환에 순응하는 인간의 모습이 잘 그려져 있다. 처음 피아노를 살 때에는 마음 조리며 남편의 꾸지람도 감수하며 구입했지만, 세월이 지나자 애물단지로 변하는 것이다. 그토록 귀중했던 물건도 세월 앞에서는 도리가 없다. 영원히 변치 않을 거 같던 정이 옮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작가 스스로 변하는 세상을 원망하던 세월에서 벗어나 스스로 앞장서서 변화를 도모한다. 그토록 아끼던 물건 때문에 고민하다가 눈 딱 감고 시설기관에 기증하고는 피아노를 내보냈다고 실토한다. 남에 의해 소외시킨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이별을 선택한 것이다. 자의적으로 순환의 원리에 순응하는 작가의 모습이 확연히 드러난다. ‘패인 흔적과 고운 먼지를 남기고, 그가 떠난 것이 아니고 내가 보냈다.’라는 구절에서 우리는 작가의 감정을 절감하게 된다.
그로부터 수십 년의 세월이 흘렀다. 대량 생산과 유통과정의 혁신으로 전국 어디에서나 산더미 같이 쌓인 밀감상자를 보며 격세지감을 느낀다. 이젠 양보다 질로 승부를 할 때가 된 것 같다. 들리는 말로는 유통과정 중 과다한 농약처리와 색을 예쁘게 내기 위해 열처리를 한다고 한다. 그 결과 나무에서 딸 때보다 맛이 상큼하지가 않고 잘 상하기 때문에 상자를 열어보면 보통 몇 개씩은 썩어 있기 마련이다. 이런 저런 이유들로 인해서 소비자들로부터 옛날보다 환영을 덜 받고 있다. 급기야 귀한 나무를 잘라내는 지경에 이르렀나 보다.
우리 주변에 밀감이 너무 흔해졌고 많은 사람들이 밀감을 덜 먹는다 할지라도, 수학여행 때 나의 혀끝을 자극했던 그 밀감을 잊을 수가 없다.
-<밀감유감>에서
대학나무라 할 정도로 사랑을 받던 밀감나무가 과잉 생산으로 인하여 값이 헐값으로 떨어지고, 많은 사람들에게서 멀어지게 됨을 안쓰러워하고 있다. 귀하고 천함의 거리는 얼마나 될까. 똑같은 것을 가지고 어떠한 처지에 놓여 있느냐에 따라 그 가치는 달라지는 것이다. 본래 인간은 쾌락을 즐기며 살기를 소망한다. 그러나 그것은 적당히 현실 사회가 제어하고 있다. 이 제어가 무너지면 우리의 사회는 무너지고 만다. 즉, 누가 피해를 보든 말든 내 욕심대로 재화를 취득하고 싶은 마음은 쾌락원칙에 연결된다. 그러나 이러한 쾌락원칙은 현실 원칙에 의해 제어를 당해야 이 사회는 존재하게 된다. 똑같은 물건이라 해도 그것을 갖고 싶어 하는 욕망보다 수효가 많으면 그것은 죄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수효는 적은데 욕망이 많을 때에 임의로 대가를 치르지 않고 취득하면 그것은 범죄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원칙은 오히려 인간들에게 소지하고 싶은 마음을 충동하게 되고 마침내는 범죄를 저지르는가 하면 그것의 소지가 행복으로 간주되게 하는 착각을 갖게도 한다. 바로 이런 것에 근거하여 인간들의 마음이 흔들리고 있음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밀감 경작을 처음 할 때는 귀했지만, 수효가 많아지자 과수를 베어내는 처지가 되고 만다. 여기에도 역시 순환의 원리에 순응하고야 마는 인간의 나약한 모습을 그려주고 있다.
‘서로 사랑하며 따뜻하게 살자’는 작은 쉼표를 내 맘속에 찍어 본다. 삶에 적당한 쉼표는 때로는 내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는 것 같다. 쉼은 우리를 숨 가쁘게 밖으로 내몰지 않아서 편하다. 삶 속에서 때때로 찍는 쉼표는 후회 없는 마침표를 찍게 하는 큰 힘이 되리라.……<중략>……코스모스, 들국화, 억새풀, 추수가 끝난 들녘, 나뒹구는 낙엽, 감나무에 매달린 까치밥, 모락모락 피어나는 굴뚝의 연기, 파란 하늘, 순간 내 귀로 몰려오는 바람소리. 이 바람소리는 벌판을 휘돌아 여기까지 왔겠지. 모든 것들이 너무도 소중하다. -<때때로 찍는 쉼표>에서
이 책의 표제가 된 글이다. 수필이란 일상적인 생활에서 글감을 취하여 작가의 삶을 토대로 해석해 내는 작업이다. 그래서 수필에는 그 사람의 삶의 모습과 태도가 자연히 드러나기 마련이다. 이를 말하기 좋게 고백의 문학이라고 한다. 어쩌면 수필을 쓴다는 것은 자신의 지나온 세월을 반추해 보는 데에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늘 같은 세상을 살아오면서도 순간 가던 걸음을 멈추고 자신을 되돌아보는 행위, 이는 바로 수필쓰기일 것이다. 우리가 흔히 접하기 쉬운 주변의 들꽃과 바람에 굴러가는 낙엽 하나에도 작가의 눈은 예사롭지 않다. 그래서 작가에게는 이러한 물상들이 소중한 것이다.
그래서 삶은 앞만 보고 부지런히 달려갈 때보다 느닷없이 발을 멈추고 자신을 반추해 보는 시간이 더 값진지도 모를 일이다. 이것은 분명 커다란 의미를 가지고 우리 인간들에게 중요한 새김을 요구하고 있다. 작가 박숙자에게 있어서 되돌아보는 작업은 자신의 성찰의 수단이며, 삶의 지혜이다. 눈을 뜨면 들어오는 일상에서 그는 순환의 모습을 읽어내는 능력을 견지한다. 작가 자신이 긴 세월 속에서 터득한 삶의 지혜가 분명하다.
3. 영원한 고향, 어머니의 품속
사람들은 자신이 태어난 고향을 잊지 않는다. 잊은 듯이 보여도 어느 때든 유추되는 사건이나 사물을 만나면 즉시 반응한다. 어린 날 자신의 고향을 떠나 도회지에 와서 수학한 사람이라도 나이 들어 고향 친구를 만나면 옛 사투리가 입에서 툭 튀어나오는 것은 바로 이런 모습의 발현이다.
이보다도 더 현저하게 나타나는 것이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다. 이런 현상은 어느 때, 어느 곳을 가리지 않고 불쑥 불쑥 고개를 내밀어 눈물을 흘리게도 한다. 아무리 눈물을 흘려도 속이 허전한 것이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다. 이런 체루현상은 인간이기에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어린이든 어른이든 가림 없이 나타난다. 이것은 장소도 가리지 않고 체면 불구하고 나타난다. 그래서 우리의 영원한 고향은 어머니의 품속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작가는 여기에 머문다면 너무나 평이하다. 한발 더 나아가 그것이 어떤 힘을 발휘하고 있는가를 찾아나서야 한다. 또 자신에게서는 어머니의 품속이 어떤 의미로 남아 숨쉬고 있는가, 도대체 어머니의 품속은 무엇이기에 우리를 체루하게 만드는가를 깊이 고뇌한 흔적이 있어야 한다.
이제 겨울이다. 가지가 휠 것 같은 이파리나 꽃들도 이젠 제 갈 길들로 다 갔다. 모두 떨쳐버리고 앙상한 나목이 되어 알몸으로 남아 있다. 겨울나무는 추위를 견디며 그 자리에 의젓하게 버티고 있다. 꾸밈이 없는 겨울 숲이다. 겨울 산은 말이 없다. 이따금 윙윙거리는 바람소리만이 겨울 산을 흔들고 지나갈 뿐 침묵 속에 빠져 있다.
작년에 큰아들을 결혼시키고 처음에는 엄벙덤벙 몰랐다. 그저 바람직한 가장이 되고 지어미의 남편이 되고, 제 본분을 지키면서 사회에 이바지하는 사람이 되면 이 어미는 바랄 것이 없겠노라고 아들을 장가보내기 전 입버릇처럼 말했다. 그런데 이 무슨 조화속인가. 시간이 갈수록 허전하고 마음속이 휑해지는 것은. 마치 가슴속 한 귀퉁이가 무너진 것 같은 허전함이 들기 시작한다.
-<겨울 산에서>에서
겨울 산행에서 헐벗고 서 있는 나목을 보며 허전에 떠는 자신을 발견한다. 품안에 넣고 키우던 자식을 결혼시켜 떠나보낸 허전함을 빗대고 있는 것이다. 여름의 풍성함을 그리며 겨울을 참아내는 산은 어쩌면 우리네 어머니의 상일 것이다. 자식들의 숨소리가 그립도록 늘 허전해 하면서도 너무 그러면 갈등의 소지가 됨을 자각한다. 이미 한 가정을 이루어나간 자식에 대한 욕심이 크면 고부간의 갈등이 됨을 염려한다. 그래서 허전한 마음을 스스로 위로하며 겨울 산을 바라보는 것은 작가 박숙자의 오늘의 모습이다.
“복권 한 장으로 벼락부자 될 생각은 아예 없다. 한 장 사서 내가 당첨되면 좋고 십시일 반으로 모아 남이라도 되면 그 양반 도와 줘서 잘 됐지 뭘 그러냐?”
우리들은 수박을 원 없이 먹었으니 이젠 복권 사는 것을 끝내시라고 했지만, 별로 귀담아 듣지 않으셨다.
내가 어머니 나이가 되고 보니 알 것 같다. 어머니께서는 꼭 당첨을 기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한 장의 복권은 가난한 시절 어미노릇을 해야 했던 어머니의 외롭고 힘든 마음을 지켜준 희망의 부적이었다는 것을. 윗돌 빼서 아랫돌 괴고 아랫돌 빼서 윗돌 괴며 팔남매를 대학 교육까지 시킬 때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런 현실에서 어머니를 지켜준 행운의 마스코트. 복권 한 장이 가져다 준 든든함과 추첨을 기다리는 긴장감을 어머니는 즐기신 것 같다. -<어머니의 꿈>에서
사람이 꿈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 꿈에 너무 집착하면 그 삶은 피곤하다. 하물며 그 꿈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해도 다른 사람에게 빛이 될 수 있는 일이라면 충분히 가치가 있다는 논리이다. 이러한 견해는 긍정적으로 삶의 역경을 수용하는 자세가 없이는 얻을 수 없는 일이다. 복권을 사고 추첨하는 날을 기다리는 것이 절망의 끝이 보이지 않는 팍팍한 삶에서는 유일한 낙이었고, 살아가는 힘이 되었던 것이다. 복권이 가져다 줄 여유를 기대하며 자식들에게 실컷 한번 해 주고 싶은 마음을 키우는 것도 나름의 즐거움이었다. 그래서 좀 소득이 오면 그것으로 재투자하는 것이 아니고, 그 즐거움을 온 가족과 나누고 만다. 궁핍한 가계로 팔남매 대학 교육을 다 시켰으니, 언제인들 여유가 있어 자식들에게 수박 한통 제대로 먹여 보겠는가. 이렇게 복권이라도 당첨되면 눈 딱 감고 온 가족과 즐거움을 나누어 보는 것이 어머니의 모습이다. 그러니까 작가의 어머니에게 있어서 복권은 자식 사랑의 유일한 통로였을 것이고, 어렵게 사는 현실의 돌파구였던 것이다.
여러 옹기그릇들을 구경하다 이 자배기를 보니 무척 낯익은 느낌이었다. 어렸을 때 보았던 자배기, 한번쯤 그 속에서 장난을 쳐 보았던 느낌마저 주는 자배기. 눈에 익숙해서 낯설지가 않다. 모든 것을 다 안아주고 받아 주는 넓은 품, 그것은 어머니의 품이었다. 자배기에서 어머니를 만난다. 자식들에게 젖을 먹이며 꼭 끌어안아 주었던 따뜻한 품속, 그런 품을 자배기가 갖고 있다.
대가족을 거느린 주부의 관록인가, 앞뒤로 펑퍼짐하게 나온 어머니의 몸매는 가히 한말들이 저 자배기와 닮았다. 부드럽게 흘러내린 어머니의 어깨선은 크면서도 품위를 잃지 않은 자배기와 많이 닮아 있다. 자배기가 낯설지 않은 이유를 알았다. 닮은 모양뿐만 아니라 그 안에서 만들어진 음식으로 우리들이 살았다는 것까지도. 한말들이 자배기로 각인되는 어머니의 삶이였다면……. 그럼 나는 어떤 형태의 그릇으로 각인되어질까. -<자배기>에서
그릇 중에는 여러 종류가 있는데, 작가의 눈은 자배기에 머문다. 왠지 모르게 정이 가는 물건이다. 한참을 자배기의 너그러움에 빠져있던 작가는 그곳에서 어머니를 만난다. 어느 물건이든 너그럽게 담아내고, 후덕하게 제 모습을 지키고 있는 자배기를 보며 작가 박숙자는 어머니를 만나는 것이다. 종지처럼 얄팍한 마음이 아니라, 언제나 풍요롭게 느껴지는 그 모습은 영락없는 어머니인 것이다. 언제나 자식들에게 베풀기만 하던 어머니.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내색함이 없이 술술 자식들에게 가슴을 풀어헤치고 사랑을 베풀던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리게 되는 것은 영원한 고향처럼 어머니의 품속은 따뜻하기 때문이리라. 결국 작가에게 있어서 자배기는 어머니의 품속인 것이다. 어디 하나 드러나게 예쁜 곳은 없어도 부드럽게 흘러내린 어머니의 어깨선은 영락없는 자배기의 선이다. 모든 자식들을 안아주고 받아들이던 어머니의 그 사랑의 품속은 어른이 된 지금에도 그리운 고향인 것이다.
박숙자에게 있어서 어머니는 사랑의 보고이다. 언제나 자신에게 힘을 내게 하는 활력의 근원지이다. 그래서 작가 박숙자의 어머니는 자식들에게 베풀기만 하는 한국의 어머니상을 대변하는 매체로 등장한다. 그 사랑이 있었기에 자식들은 자라서 사회의 동량이 되었던 것이다. 그 어머니의 사랑은 베푸는 당시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자식의 가슴에 남아 힘들 때마다 부추겨주고 이끌어 준다. 어머니의 품속은 영원한 작가의 고향인 것이다.
4. 사랑 속에서 뜬 눈, 비판의 가시
사회에 대한 비판을 볼 때마다 사람들은 반골을 떠올린다. 그러기에 가끔은 그런 행동에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기 일쑤이다. 그것은 비판을 위한 비판이 너무 흔하게 자행되었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다. 진정한 의미의 비판은 그 사회에 대한 애정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그래야 그 비판이 정당성을 획득하고 사람들의 가슴에 영향을 주어 변화를 이끌어낼 수가 있다.
박숙자의 글에는 더러 이런 면이 보인다. 역시 잘못 판단하면 성급한 결론이라고 탓하게 되는데 그럴 필요가 없다. 충분한 사려와 깊이 있는 애정에서 비롯된 것이어서 전혀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세상 그 누구보다도 이 사회에 대해 애정을 가지고 있고, 비판의 기저에는 밝고 명랑한 사회를 소망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작가는 자신이 기거하는 세상에 철저하게 관여하며, 그 예리한 눈으로 어두운 곳을 밝혀내는 임무에도 게을러서는 아니 되는 것이 아닐까. 그래야 사회도 자각하고, 각성하며 좀더 나은 세상으로 옮겨가는 계기가 마련될 것이다.
작가 박숙자에게 있어서 이런 면은 확연히 드러난다. 밝은 사회를 희구하는 마음이 작품의 여기저기에 묻어 있다. 이것은 작가로서는 반드시 겸비해야 할 덕목인 것이다.
이런 의구심은 서류를 제출하던 날 창구직원의 한 마디 말이 비수가 되어 내게로 달려들었다.
“아주머니는 법무사에게 맡기지 왜 이 고생을 합니까?”
서류를 내려고 하면 시선조차 주지 않던 그 직원의 표정이 단지 바빠서만은 아니었구나 하는 느낌이 들자, 내가 돌팔매로 골리앗을 상대한 기분이 들었다. 중간에서 포기하고 싶은 생각도 여러 번 들었지만 근 보름 가까이 소비한 시간이 너무 아까웠다.
언젠가 타고 온 비행기에 짐이 실리지 않은 적이 있었다. 쩔쩔매는 나에게 따뜻한 미소와 눈빛으로 안심시키며 곧바로 짐의 위치를 확인하고, 호텔로 정확히 배달해준 L.A공항의 직원이 생각났다. 말이 통하는 내 나라의 행정관서에서 일처리하기가 오히려 말이 통하지 않는 타국에서보다 힘들었다는 것을 생각하니 마음 한 구석에서 섭섭함이 고개를 치밀었다. -<골리앗과의 싸움>에서
불의에 참지 못하면서도 오기로 뭉쳐져 견뎌낸 작가의 시련의 시기가 한 눈에 들어온다. 이것이 박숙자의 본 모습이다. 본인이 옳다고 판단하면 어떠한 장애가 놓여도 결코 굴하지 않고 밀고 나가는 것이다. 그렇게 강력히 밀고 나갈 수 있는 것은 작가만이 가지고 있는 자신감이기도 하다. 또 그 자신감은 무모한 것이 아니라 타당성을 견지한다. 단순히 하나의 사건을 보고 분개하는 것이 아니라 앞서가는 외국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자신의 주장에 근거로 삼는다. 그러나 혹자는 작가를 불만으로 똘똘 뭉쳐진 사람으로 오해할 수도 있다. 그런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객관성을 유지하며, 그 사회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 토대가 되어 이루어지고 있다. 작가 박숙자는 언젠가 찾아올 밝은 사회에 대한 소망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곳곳에 열린 행정이란 현수막이 바람에 펄럭인다.’고 기술함으로써 작가의 사회에 대한 사랑 속에서 간절한 소망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희망을 갖게 해 준다.
그것도 잠시 십이 월 마지막 날을 이틀 남겨놓고, 불도저와 한 떼의 인부들이 산에 나타났다. 아침부터 진눈개비가 쏟아지던 날이었다. “텅텅 텅텅” 산등성이 이곳저곳을 사정없이 파헤치고 밀어붙이며 몇 십 년씩 된 나무들을 베기 시작했다. 굵은 나무들이 잘린 몸을 이기지 못하고 여기저기 나뒹굴며 엎어진다. 산등성이가 황토색 속살을 드러낸다. 자식을 잃은 어미 꼴이 되었다. 알몸으로 눈바람을 맞으며 떨고 있다.……<중략>……엄마 심부름으로 고모 집엘 갔다. 고모 방에 들어가니 울었는지 눈이 빨갛게 부어 있고, 화가 몹시 났는지 깎인 머리를 감추지 않고 움푹움푹 아무렇게나 잘린 상태로 누워 있었다. 예쁜 고모는 없고 선머슴 같은 미운 사람이 퉁퉁 부어 있었다. 나는 저러다 고모가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잘려 나간 나무 밑동거리는 고운 머리채를 뭉텅 잘리고 울던 고모의 모습과 똑 같아 보였다. 고모한테 느낀 불쌍함과 못 볼 것을 본 당황스러움이 주체하기 힘든 분노로 다가왔다. 우리가 해도 참 너무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 산은 우리가 죽였다. -<그 산은 우리가 죽였다>에서
인간의 편리를 위하여 자연을 파괴하는 것은 어쩔 수 없이 감수해야 할 일이다. 하지만 그것이 전시효과를 노리는 행정가나 정치가의 사심에 찬 생각에서 빚어진 일이라면 다시 한번 고려해 보아야 한다. 멀쩡한 숲을 해 바뀜 이틀 전에 들쑤셔놓고 장기간 방치하는 행정은 잘못된 행정이다. 그것이 단순한 일이어도 아니 되는데, 우리의 삶의 터전인 자연을 마구잡이로 일구어 버렸다면 죄악이다. 작가는 이렇게 절개되어 나가는 숲을 바라보며 절규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서 숲이 절개되던 날 쏟아진 진눈개비는 단순한 일기현상이 아니다. 적어도 자연이 파괴되는 것을 바라보아야 하는 작가의 가슴으로 차갑게 내리는 아픔의 진눈개비인 것이다.
그렇기에 작가는 숲의 파헤쳐짐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가슴이 헤쳐지는 아픔을 느낀다. 자연은 언제나 공존해야 하는 동반자적 위치에 서 있어야 하는데, 인간들은 자신이 맘껏 활용해도 되는 소유적인 것으로 인식하는 데서 파괴된다. 그러한 인식을 보여주기 위해 작가는 자연 파괴의 아픔을 가장 가까웠던 고모의 머리 깎임에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작가의 자연과 인간의 동반자적 사고가 깊이 깔려 있다. 작가가 ‘고모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기술이나 ‘그 산은 우리가 죽였다’는 고백은 그래서 서로 무관하지 않고, 아주 긴밀히 연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선 나 자신도 큰 일 큰 물건 큰 것에는 대단하게 생각하고, 작은 일 작은 물건 작은 것에는 대수롭잖게 여겨서 적당히 넘어간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작은 것에도 성의와 예의가 담겨야 우리가 덜 피곤할 것 같다. 그래서 덤으로 얻는 작은 기쁨이 큰 행복의 씨앗이 되지 않을까. 기차 안에서 본 그 남자의 행동이 타산지석이 되어 남은 내 생애에 한줌의 소금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기차 안에서>에서
박숙자의 수필에는 잔잔히 흐르는 비판정신이 있다. 성미가 급한 아이처럼 마땅치 않은 일에 대해서는 참지 못한다. 그것은 단순한 나무람으로 귀결되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삶으로 승화되는 과정을 수반한다. 본래 비판이란 그 대상에 대하여 진정한 애정이 없으면 불가능한 것이다. 기차 안에서 젊은이를 바라보아도 자신의 아들과 같은 처지로 생각하고, 무례한 행동을 하는 사람을 보아도 자신이나 자신의 주변 사람이 당한 것으로 인식하려 한다. 그것은 사회에 대한 애정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자신에게로 돌아와 타산지석으로 삼으려 한다.
“당신들만 자연 보호하는 줄 아쇼?”
결국 옥신각신 큰소리가 난 것이다. 여자들이 종내는 ‘더럽게 잘난 체 하네’로 싸움은 마무리되었다.
시간이 지나도 이 상황이 머리에서 지워지질 않는다. 그들의 말대로 더러운 잘난 체가 이런 거라면, 그들이 생각하는 깨끗한 잘난 체는 어떤 것일까.
‘네’ 한마디면 서로가 즐거운 소풍길이 될 걸. 단풍은 붉어지면 아름다운데, 자만심과 독선으로 붉어진 여인들의 얼굴은 조금도 예쁘지가 않았다. 여하튼 한바탕 소동은 지나갔다.
폭포는 여전히 흰 비단 폭을 늘어뜨리며 물보라를 만든다. 인간들의 욕설, 시비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내 소리도 네 소리도 폭포 속에 다 끌어안는다.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인간의 아집도 폭포는 굳이 탓하지 않는다. 스스로 깨달을 때까지 기다리겠노라는 의연함만 내 비친다.
-<목에 걸린 생선가시>에서
자연은 언제나 의연하다. 욕심에 찬 사람이 찾아오든, 골짜기 물처럼 깨끗한 사람이 찾아오든 가리지 않는다. 세상이 밝게 견디지 못하는 것은 욕심과 이기에 찬 인간들 때문이다. 그리고 자연이 파기되는 근원은 인간의 자연 소유의식 때문이다. 자연은 인간이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인간과 공존하는 것이다. 인간의 이기가 고개를 들어 자연을 자기 것으로 만들려들면 반드시 그것에는 엄청난 대가가 따르게 된다. 스스로 자연과 공존하려는 의식만 가지고 산다면 인간의 삶의 환경은 지극히 윤택해질 것이다.
작가는 강천산에 갔다가 쓰레기로 옥신각신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치졸한 인간의 얼굴과 의연한 산의 기품을 그려주고 있다. 그러면서 인간들의 그늘진 모습에 시각의 선을 세우고 있다. 여기에 작가 박숙자의 비판 정신이 있다.
작가 박숙자의 비판 정신은 철저하게 미래 지향적이다. 단순한 험담에 머무르지 않고 언제나 사회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 바탕에 깔려 있다. 그러기에 독자는 그의 비판 정신 앞에 숙연해지는 것이다.
5. 나가면서
박숙자의 수필세계는 자연의 순환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며 인간의 그것을 예리하게 파악하는 지혜가 번뜩인다. 뿐만 아니라 그 순환에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도 정확히 제시하고 있다. 또 따뜻한 어머니상도 그려주어 영원한 고향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이러는 과정에서 세월의 흐름을 거역하지 않고 스스로 그 속에 자신을 투영하여 의미를 찾아 나서고 있다. 박숙자에게는 사회에 대한 비판이 깊은 사랑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그래서 그 비판은 가치를 얻게 되는 것이다.
지난 해 말에 “수필과 비평” 신인상을 수상하여 데뷔와 동시에 수필집을 발간한다 하여 남의 말을 즐기는 사람은 한마디 할지 모른다. 그러나 박숙자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일찍이 여섯 해 전에 “호서문학”으로 문단에 나와 활동을 하던 작가이다. 그가 새삼스레 다시 “수필과 비평”으로 문단에 나온 것은 나름대로 고심한 결과에서 행한 것이다. 활동은 해 왔지만 지방에서 미미하게 하다가 이제는 좀더 각오를 새롭게 하고 왕성한 활동을 하기 위한 다짐이기 때문이다.
이번 수필집의 발간에는 작가의 길을 꿋꿋하게 걸어가겠다는 문단사회에 대한 공개적인 약속의 의미도 있다. 그 동안 창작해 놓은 바를 정리하여 지난 세월의 흔적을 추스르고 새로운 출발을 하기 위한 몸부림인 것이다. 그런 면에서 작가에게 거는 기대가 크기도 하다.
지금까지의 작업을 정리한 작가가 앞으로는 어떻게 깊이 있는 삶을 일구어낼지 자못 궁금하다. 분명 이번 수필집에서 보인 점들이 깊이를 더하여 훌륭한 작품집이 계속 나오리라 믿는다. 우리는 느긋한 마음으로 다음 작품집이 나오기를 기다리면 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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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