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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고대의 취락 聚落과 주거住居
一. 머 리 말
주거와 취락은 인간의 일상생활이 이루어지던 가장 기초적인 공간이다.
휴식과 취침, 취사 등의 소비활동, 혼인, 祭儀, 각종 생산활동은 주거와 취락을 단위로 영위되었다. 뿐만 아니라
외부의 힘, 예컨대 국가권력이 침투해 올 때에도 취락은 중요한 단위가 되었다.
이런 점에서 주거와 취락은 생활사 뿐만 아니라 정치사, 사회경제사, 제도사, 사상사 등 여러 분야가 만나는 무대
이다. 특히 사회의 기초적인 조직을 분석해내려 할 때에는 주거와 취락에 대한 분석에서 출발하여야 한다.
이런 점에서 본 발표는 주거의 구조적 특성이나 취락의 景觀 등 물리적 측면보다는 기초 사회조직의 성격과 변화
양상, 인간과 인간, 집단과 집단 간 사회적 관계에 중점을 두고자 한다.
二. 개념과 연구사
1. 약간의 개념정리
1) 住居와 世帶 :
住生活이 이루어진 거처를 주거나 가옥이라고 부른다면 그 흔적으로 남아 있는 유구를 주거지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하나의 주거에서 거처하였던 인간집단을 어떻게 부를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이를 손쉽게 가족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으나 하나의 주거에는 하나의 가족만이 아니라 非혈연자가 포함될 수도
있고, 하나의 가족이 여러 주거에 나뉘어 살 수도 있기 때문에 주거=가족이란 등식은 성립될 수 없다.
따라서 본 발표에서는 하나의 가옥에 거처한 인간집단을 世帶(household)라고 부르고자 한다.
이 개념은 혈연적인 요소가 아니라 거처를 함께 한다는 점에 중점을 둔 것이다. 따라서 세대와 가족은 서로 일치
할 수도 있을 것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포괄하는 범위가 불일치하고, 혹은 하나의 개념이 다른 개념을 포함하는
경우도 있다.
이렇듯 가족이란 개념의 사용에 신중을 꾀하는 까닭은 우리나라 원시·고대사회의 가족구성에 대한 연구가 매우
미진한 형편이기 때문이다.
2) 聚落·集落·村落 :
일반적으로 널리 사용되고 있는 村落이란 용어는 연구자에 따라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聚落, 集落, 마을 등의 용어와 혼용되기도 하고 연구자 마다 서로 지칭하는 대상이 다른 경우마저 있다.
이럴 경우 지리학적 연구에 의존할 수 밖에 없으나 그쪽에서도 聚落과 村落을 엄밀히 구분하는 것 같지는
않으며 村落이란 용어를 都市에 대한 반대개념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 같다.
고고학계에서는 聚落이란 용어와 集落이란 용어가 자주 사용되고 있다.
이중 集落이란 용어는 聚落의 일본식 代替語에 불과하다. 문제는 聚落과 村落의 관계인데
국내 고고학계에서는 聚落을 村落(마을)과 都市를 포괄하는 개념으로 보는 견해가 개진된 바 있다.
반면 일본 학계에서는 村落=集落+耕地+α(林野, 水路, 道路, 寺社)로 이해한다.
이러한 혼란은 영어의 settlement의 번역과도 관련될 것이다. 본 발표자는 “村”이란 용어가 가지고 있는 역사성
때문에 村落이란 용어 대신 聚落이란 용어만을 사용하여 왔으나 三國志 北沃沮관련 기사에도 “村落”이란
용어가 사용되고 있는 만큼 일반적인 의미로 사용하여도 큰 문제는 없다고 판단된다.
이 부분에 대한 정리는 앞으로 관련학계의 합의에 맡기기로 하고 일단은 종전처럼 聚落이란 용어만 사용하기로
한다.
2. 연구경향 약술
1) 고대사학계 :
계급발생과 국가의 형성과정을 추적하는 작업에서 사회적 기초단위의 내용과 변화양상을 추적하는 작업은
긴요하다. 따라서 국가 형성사와 관련하여 많은 연구업적이 축적되었어야 마땅하지만 이와 관련된 연구성과는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친족집단에 대한 관심은 높은 편이었으나 이러한 관심이 주거와 취락으로 연결되지는 못하였던 셈이다.
三國志의 邑落, 三國史記의 谷·那(고구려), 夫里(백제), 伐(신라) 등에 대한 관심을 기초로 약간의 논의
가 이루어져 온 것에 불과하다.
반면 신라 中古期 村과 통일기 村落文書에 대한 관심은 매우 높아서 많은 연구성과가 축적되었으며 80년대 이후
한국 고대사연구를 주도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2) 고고학계 :
소규모 발굴로 시종했던 학계의 사정으로 인해 聚落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가 이루어진 것은 극히 최근의 일이다.
종전에는 개별주거, 특히 주거지의 형식과 구조에 관심이 머물러 있었다. 80년대 이후 대규모 토목공사에 수반한
구제발굴이 활발해지면서 취락 전체, 혹은 많은 부분을 조사할 기회가 증대되었고, 그 결과 개별 주거를 넘어서서
취락에 대한 관심이 일어났다. 1994년도 한국고고학전국대회의 공동주제가 “마을의 考古學”으로 설정된 사건은
한국에서 “聚落考古學”이 태동하였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三. 聚落의 입지와 존재방식
취락의 입지는 기초적인 생활조건에 좌우된다. 특히 식료획득(생산), 用水, 방어 등이 주된 변수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나라 원시·고대 취락의 입지상의 변화는 취락민들의 경제활동, 그리고 이에 수반되는
군사활동과 연관된다.
1. 신석기시대
신석기시대의 취락이 해안이나 河岸의 평지에 입지하는 것이 주요한 특징임은 널리 인정되고 있다.
이러한 입지는 식료획득에서 漁撈가 차지하는 비중이 높았음을 보여주며 이외에 植物採集도 중요한 위치를
점하였을 것이다. 반면 수렵의 비중은 그다지 높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석기시대 취락의 또 하나의 특징은 취락을 보호하는 방어시설이 없다는 점이다.
앞으로 새로운 자료가 나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으나 지금까지의 정보로 판단컨데 우리나라 신석기 취락은
방어시설이 불필요한 단계였던 것 같다. 이는 신석기시대에 이미 많은 수의 방어취락이 알려진 유럽이나 중국
과는(그림 1) 다른 현상이다. 그렇다면 앞에서 살펴 본 平地性 입지는 식료의 종류와 관련될 뿐만 아니라
집단 간 긴장의 不在 내지 저조를 반영하는 증거이기도 하다.
이러한 상황은 농업의 발달이 미진했던 우리나라 신석기시대의 특수성에서 말미암을 것이다.
2. 청동기~초기철기시대
청동기시대에 들어오면 상황은 급변한다. 1990년 울산 검단리에서 環濠가 발견된(그림 2) 이후 木柵, 土壘 등의
방어시설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고 실제로 발굴조사에서 방어시설을 갖춘 취락의 사례는 급증하고 있다.
부여 송국리, 창원 덕천리, 대구 팔달동유적 등이 그 예이다. 인공적인 방어시설을 갖추지 않았더라고 일상적인
거주에 불리한 高地(山上)에 위치한 취락의 방어적 측면도 적극 고려되기 시작하였다.
대표적인 예가 여주 흔암리(해발고도 123m), 보령 교성리(188m), 파주 심학산(193m), 대전 보문산유적(426m)
등이다.
여기서 주목되는 점은 청동기시대의 전기 내지 중기에 해당되는 흔암리와 송국리는 쌀농사를 영위하던 취락
이란 점이다.
그렇다면 방어시설의 출현과 山上立地는 농업, 특히 쌀농사와 밀접히 관련된 것으로 볼 수 밖에 없다.
결국 취락의 입지는 농업조건에 좌우되었으며 방어시설이나 방어적 측면의 고려는 농업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청동기시대에 들어와서 취락 사이의 관계는 우호적이건 적대적이건 보다 긴밀해졌을 것이다. 쌀농사의 경영과
관련된 인구의 증대로 인해 취락은 공간적으로 확대되었으며, 인구부양력이 한계에 달할 때 분리되었을 것이다.
이 때 분리된 취락들은 原聚落과 母-子 관계를 맺게 되었을 것이다. 쌀농사와 관련된 水利灌漑施設의 축조와
유지는 소 취락 단위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아울러 한발·수해 등의 자연재해나 약탈행위로 인해 식량이나
種穀을 확보하지 못한 경우 취락 간 공동협조는 불가결하였을 것이다. 한발 더 나아가 공동의 적에 대한 방어의
필요성에서 취락 간의 연대도 자주 일어났을 것이다. 이럴 경우 당연히 母-子 관계에 있는 취락들이 기본적인
단위가 되었을 것이다.
이상의 과정을 통하여 우세하고 대규모인 母村的 聚落과 열세하고 소규모인 子村的 聚落들은 하나의 단위체를
형성하였을 터인데 이러한 聚落群을 일단 邑落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송국리유적을 石城川流域共同體의 “中核集落”으로 간주하는 견해도 이러한 점에서 맥이 통한다.
검단리유적은 검단들이란 좁은 산간분지 주변 구릉에 분포하는 여러 취락 중의 하나로서 취락들은 상호 긴밀한
관계를 맺었을 가능성이 높다.(그림 3) 이러한 관계는 농업, 특히 쌀농사의 비중이 증대되고 취락 간 긴장이
고조되는 추세에 비례하여 더욱 긴밀해져 갔을 것이다.
취락 간 利害가 상충할 때에는 중심 취락이 조정역을 맡았을 것이다.
청동기 후기 내지 초기철기시대에 접어들면 취락들의 山上立地가 전단계보다 더욱 현저해진 점이 주목된다.
지역에 따른 편차가 있기는 하지만 파주 심학산, 서울 응봉, 양주 수석리, 보령 교성리, 대전 보문산 등 중서부
지방의 청동기 후기~초기철기시대 취락은 山上立地가 주요한 공통점이다.
일본 彌生時代 高地性集落에 대한 연구성과를 참조할 때 우리나라 山上聚落의 발생요인은 집단 간 긴장의
고조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며 그 배경에는 쌀농사의 비중 증대로 인한 可耕地와 用水를 둘러싼 갈등이 도사
리고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집단 간, 취락 간 전쟁을 증명하는 자료의 확보가 절실히 요구된다.
화재로 소실된 주거지·취락·방어시설, 무기의 증대와 개량, 살해된 인간 등이 그것이다.
3. 삼국시대
삼국시대에 해당되는 일반 취락의 조사례는 그리 많지 않다. 삼한단계에 해당되는 사례는 제법 축적되어 있으나
4세기 이후의 예로는 대구의 時至지구와 漆谷지구 정도에 불과하다.
삼국시대 취락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지배집단의 거처이며 官衙가 밀집된 平地城과 방어를 목적으로 한 山城의
등장이다. 서울 몽촌토성, 경주 월성, 대구 달성 등의 축조시기는 현재 명확치 않다.
주목할 사실은 대규모의 노동력이 투여된 平地城이 존재하는 시기에 아무런 방어시설이 없는 일반 취락이 병존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방어체제가 변화하였음을 말해주며, 하나의 정치체를 형성한 집단 간의 정치사회적 지위의 차가 심화되었
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우세한 집단, 혹은 취락은 삼한단계에서는 國邑이란 형태로 존재하였으며 점차 國都
로서의 위상을 갖추게 되었을 것이다.
삼국시대의 취락 역시 고립적으로 존재하지 않아서 인근 몇 개의 취락이 결집된 상태였을 것이다.
고구려의 谷이란 단위는 복수의 자연취락이 결집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른바 斯盧六村을 구성한 개별 村들,
部와 部內部의 관계 등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나라 고고학계의 연구경향이 이제 막 개별주거에서 취락으로 발전하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취락과 취락의
관계, 혹은 聚落群에 대한 관심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住岩댐 수몰지구에 대한 발굴과 지표조사 결과 寶城江 水系에 연해서 유사한 성격의 취락들이 분포하고 있으며
그 중에는 공간적 위치와 규모면에서 우세한 中核的 취락과 열세한 취락들이 공존함을 알 수 있다.
전자의 예로는 대곡리 도롱, 후자의 예로는 낙수리를 꼽을 수 있다. 한편 직접적인 취락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
지만 斯盧國 단계의 경주지역 埋葬유적들의 분포양상은 개별취락과 聚落群(邑落, 六村의 村)의 존재양태를 반영
하고 있다. 대구(多伐國?)나 경산(押督國), 김해(狗邪國) 등지에서도 개별 취락들이 결집된 보다 확대된 단위의
존재양태를 확인할 수 있다.
청동기시대와 마찬가지로 삼국시대에 들어와서도 개별취락 단위의 자립성이 높지 않았던 이유는 몇 가지로
추론해 볼 수 있다.
우선 개별 취락에 속한 인구수가 그리 많지 않았다는 점이다. 물론 다수의 주민을 포괄한 대규모 취락의 예도
많지만 일반 취락은 10기 미만의 주거로 구성되었을 것이다. 전면발굴이 이루어진 순천 낙수리의 경우 중복된
주거지를 포함하여 13~15기 정도, 천안 장산리유적이 8기 이하에 불과하다(그림 4).
개별 주거에서 2명의 성인이 동원되더라도 이 정도의 인원만으로는 대규모 토목공사, 예컨대 耕地開墾, 水利
灌漑 등을 감당할 수 없다. 게다가 철제 農土木具의 보급이 상대적으로 미흡한 단계에는 확대된 노동편성이
더욱 요구되었을 것이다. 철제 農土木具의 보급이 확대되는 추세에 비례하여 개별 취락의 자립도는 증대되어
갔을 것이다.
四. 住居와 住居群
1. 住居와 世帶
하나의 가옥에 거주한 사람들은 혈연적인 관계를 기초로 부부와 미혼자녀가 기본단위였을 개연성이 높다.
문제는 바닥 면적을 알 수 있는 수혈주거의 경우 몇 사람 정도를 수용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한 사람이 차지하는 평균 공간이 어느 정도인가가 실마리이지만 그 수치에 대해서는 아직껏 합의를 이루지
못하였다.
국내에서는 櫛文土器(신석기)시대에는 4.5㎡, 無文土器(청동기)시대에는 5㎡라는 견해가 유일하다.
반면 북한과 일본 학계에서는 3㎡로 추정하고 있다. 어떤 수치가 사실에 부합하는 지는 알 수 없다.
각각의 계산법이 상이하지만 서울 암사동 신석기 주거지의 평면적을 추산해 본 결과 대개 5~10인 정도의
수치를 나타낸다. 한 쌍의 부부와 미혼자녀로 구성된 개별가족의 범위를 약간 넘어서는 수치이다.
한편 공열토기가 출토되는 細長方形 주거지는 바닥 면적이 50㎡를 초과하는 예가 다수이다.
특히 중서부지방에서 현저하여 하남 미사리 한양대 5호 84.2㎡, 고려대 034호 100.3㎡,
천안 백석동 A-6호 89.6㎡, A-9호 74.8㎡, 보령 관산리 004호 118.3㎡, 013호 120㎡에 달하며 동해안에서도
속초 조양동 2호는 76.8㎡에 달한다. 평면적이 120㎡일 경우 거주인수는 최소 24인, 최대 40인이 된다.
細長한 평면 위에 가설된 상부구조가 어떤지는 불분명하지만 장방맞배형, 출입구는 단벽 중 한쪽에 위치하였을
것이다.
이 유형 주거지의 또 하나의 특징은 내부에 복수의 爐가 설치된다는 점이다. 대개 2~3개, 규모가 큰 경우는
4~5개이며 등간격으로 배치되는 경향이 강하다. 이러한 주거지를 공공집회용의 특수시설로 볼 수도 있으나
그러기에는 사례가 너무 많다.
관산리 004호의 경우 내부가 등간격의 4개의 공간으로 분할되고 각각 하나씩의 爐가 배치됨이 확인되었다.
(그림 5) 따라서 爐를 공유하는 개별가족이 몇몇 결집된 확대가족이 하나의 주거에서 생활하며 하나의 세대를
이룬 일종의 연립가옥(複室住居, 집합주택)으로 이해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중국 仰韶文化期 취락에서 이러한
예가 자주 발견되며(그림 6·7) 보르네오, 북·남미, 인도 등 세계 각처에서 보고되고 있다.
반면 송국리형 주거 단계에 접어들면 상황은 급변한다. 주거면적은 대개 20㎡ 이하이며 최대급이라도 40㎡를
벗어나지 않는다. 細長方形 주거지 내에서 爐를 공유하던 단위(개별가족)들은 따로 분리되어 각각 하나의
가옥에 거처하며 개별세대를 이룬 셈이다. 이제 주거와 세대, 개별가족은 그 범주가 일치되었다.
개별가족의 자립도가 증대된 상황으로 이해되며 주거지의 평면적으로 보는 한 이러한 경향은 삼국시대에도
계속된다.
2. 住居群의 기능과 성격
하나의 취락을 구성한 개별 주거는 무작위적으로 분산된 것이 아니라 몇 개의 작은 단위를 이루면서 취락을
구성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중국이나 일본의 경우 신석기문화단계부터 관찰된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신석기 취락의
전모가 밝혀진 바가 없어 불분명하지만 미사리 신석기 취락에서 그 가능성이 엿보이고 있다.
팽이형토기 관련유적인 송림 석탄리의 경우는 3기의 주거가 하나의 단위(住居群)를 이룬다고 보고된 바 있다.
공열토기 관련 細長方形 주거지는 群을 이루는 현상이 현저하지 않지만 앞에서 보았듯이 하나의 주거 자체에
복수의 단위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에 맥락은 동일하다. 송국리형 주거지의 경우는 群을 이루는 현상이 현저
하여서 대개 3~4채가 하나의 단위를 이룬다. 이 단위를 世帶共同體, 혹은 世帶複合體라고 부를 수 있다.
세대공동체는 주거는 세대별로, 생산과 소비는 공동으로 행하던 일종의 확대가족이었을 것이다.
이는 취사와 창고운영이 개별 주거(세대)가 아닌 住居群 단위로 이루어졌음에서 유추된다.
취사행위는 신석기시대 이후 송국리형 단계까지도 개별가족단위를 뛰어 넘는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특히 송국리형 주거지의 경우 야외취사의 가능성이 누차 언급된 바 있다. 최근 산청 묵곡리에서는 5기의 송국
리형 주거지가 각각 2기, 3기로 나뉘어 두개의 住居群을 형성하고 住居群 사이에는 高床倉庫群이, 住居群
하나에는 野外爐址가 부속된 형태의 취락이 발견되었다.
창고의 운영은 취락 단위로, 취사는 住居群 단위로 이루어진 증거이다.
청동기 후기 내지 초기철기시대 취락에 대한 자료는 그리 많지 않다. 다만 상대적으로 선진지역이라고 할 수
있는 中西部의 교성리에서는 주거 단위의 屋內爐가 마련된 빈도가 높은 반면 삼천포 늑도에서는 그렇지 않은
현상이 대비된다. 개별주거 단위로 취사가 이루어지는 경향이 증가하면서 지역적 낙차가 있지 않았을까 예측
된다.
삼한 주거지에서는 거의 예외 없이 屋內爐가 마련되며 그 기능은 조리를 주로 하는 일종의 부뚜막임이 주목
된다. 개별주거에 거주하는 개별가족은 최소한 취사라는 측면에서는 자립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별주거가 群을 이루는 현상은 여전하다. 대곡리 도롱 취락에 대한 상세한 분석결과가
참고된다(그림 8).
개별주거가 群集하는 현상은 鐵製 農土木具의 보급이 미진한 점과 관련될 것이다.
따라서 생산활동의 최소단위는 住居群(세대공동체)이며 창고의 운영 역시 세대공동체를 단위로 하였을 것이다
(낙수리의 예). 신석기시대 이후 삼국시대까지 창고의 소유 및 운영단위는 전체 취락 → 취락 내의 소집단
(세대공동체, 혹은 세대공동체군) → 세대의 순서로 축소되었을 것이다. “無大倉庫 家家自有小倉 名之爲桴京”
이란 고구려의 상황은 동시기 삼한의 상황보다 일보 진전된 상태를 반영한 것이다. 桴京은 벽화고분에 자주
등장하는 高床倉庫로 생각되며 주된 보관물은 種穀이고 소비용 식료는 수혈식 창고에 보관하였을 것이다.
고구려와 삼한지역의 발전수준의 낙차는 주거지의 배치양상에서도 드러난다.
하남 미사리유적에 대한 분석 결과 세대공동체의 家長 내지 취락의 首長은 주거의 평면형과 규모, 소유 철제품
의 종류와 양, 기타 威信財의 소유 등에서 일반 성원을 능가하고 있지만 자신만의 居住域을 따로 만들지는 않고
일반 성원의 주거와 混在하고 있다. “居處雜在民間”하는 不耐濊王과 유사한 상황이다.
宮室·倉庫·牢獄이 있는 부여, 良田이 없어 힘들여 佃作하여도 口腹을 채우기에 부족하여 節食하면서도 “好治
宮室”하는 고구려와는 엄연히 다른 것이다.
삼한지역에서도 성곽의 축조가 행해졌던 만큼 지배계급이 그들만의 주거공간을 갖추어나가는 방향으로 진행
되었음은 분명하다. 이 점에서 토성의 始築시기를 파악하는 작업은 중요하다. 이와 함께, 3~4세기 이후 일반
취락 차원에서는 聚落 首長이나 豪民級 인물들이 그들만의 거주공간을 어떻게 만들어나갔는가, 그리고 세대
공동체를 이룬 개별세대의 자립도는 어느 정도까지 신장되었는가 하는 점이 밝혀져야 한다.
이런 점에서 현재 발굴조사가 진행중인 경산 임당유적이 주목된다. 이 유적은 墓域과 주거공간을 엄격히 구분
하고 있으며, 木柵으로 둘러싸인 주거공간, 溝로 구분된 작은 주거공간 등이 발견되고 있다. 4세기 이후 취락에
대해 많은 정보를 제공할 것으로 기대된다.
3. 취락 내외 시설물
지금까지의 취락 조사는 주로 竪穴住居에 초점을 맞추었지만 생활의 다양한 측면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각종
시설물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특히 창고의 소유 및 관리형태의 변화는 사적소유의 진전과정을 보여주는
주요한 자료이다. 우물의 존재방식,
예컨대 住居群 단위로 우물이 존재하는가, 취락단위로 존재하는가 하는 점도 풀어야 한다.
석기, 토기, 기와, 청동기, 유리, 철기 등의 물품을 제작하던 생산유구의 조사는 기술사적측면 뿐만 아니라
노동편제방식, 취락 내외간 물적교류와 분업의 실상을 밝히는 데서도 긴요하다. 취락민의 결속을 꾀하고,
지배자의 권위를 과시하며, 新年의 풍요를 기원하고, 死者를 葬送하는 각종 祭儀가 이루어진 祭場의 조사는
취락민들의 정신세계를 이해하는 데에 필요한 자료를 제공할 것이다.
보령 관창리(청동기시대), 광주 신창동(마한), 하남 미사리(백제), 부여 궁남지(백제), 무안 양장리(백제), 창원
가음정동(가야) 등 농업관련 유적의 조사는 농업기술사적인 측면과 함께 취락민들의 생산활동을 파악하는
데에 긴요하다. 경작유구와 함께 각종 水利灌漑施設에 대한 조사가 시급하다.
死者의 취락이라고 볼 수 있는 墓地에 대한 조사도 취락과 연계되어 진행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취락의 내부
조직구성, 계층화의 정도, 친족관계 등 다양한 과제를 해결할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五. 맺음말
사실 고대 취락과 주거에 대한 연구는 이제부터가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연구의 대상이 될 고고학적 자료가 극히 일부나마 축적되기 시작하였고, 해당 연구의 중요성을 고대사연구자
들이 절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부적인 과제는 수도 없이 많지만 앞으로의 연구방향을 전망해 보기 위해 이 방면에 많은 연구성과가 축적된
일본 학계의 상황을 참고해 보자. 일본 학계에서 원시·고대 村落에 대한 관심은 70년대 이후 고조되었는데
이에 대한 원인분석이 내려져 있다.
첫째, 明治 이래 고대사연구의 주요 대상이었던 제도사 연구가 제도를 낳은 사회적 실태에 대한 관심으로 발전
하여 그 구체적 대상을 村落으로 삼았던 점,
둘째, 終戰 이후 활발해진 共同體論이 이론적 논쟁으로 시종하였던 데에 대한 반성으로서 공동체를 구체적인
村落으로서 실증하려는 시도로 발전하였던 점,
셋째, 고고학에서 ‘集落遺蹟’의 조사와 연구가 진전되면서 커다란 자극을 받았던 점,
넷째, 역사지리학의 측면에서 條里制·集落景觀에 관한 연구가 축적되었던 점, 다섯째, 민족학 내지 인류학의
발달에 의하여 세계 각지의 현존하는 “未開社會”의 조사·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그 성과가 고대사연구에
풍부한 이미지를 주었던 점 등을 꼽고 있다.
그중 첫째는 그간 우리 학계에서 신라 中古期의 村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였던 과정과 맥이 통하며,
셋째는 우리 고대사학계에서 최근 취락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게 된 외적 배경과 동일하다.
다섯째는 70년대 북한학계에서 이루어진 원시사회연구가 민속학 내지 민족학자료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말의 유사성을 찾을 수 있다.
반면 둘째, 넷째의 동인은 아직 우리 학계에서 본격적으로 대두하지 않고 있다. 한·일 양국의 취락과 주거생활의
전개과정이 동일하지는 않겠지만 앞으로 다방면에 걸친 풍부한 논의가 필요한 우리 상황에서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이런 점에서 대규모의 전면발굴도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관련 연구자
들이 다양한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론을 개발하는 것이 급선무일 것이다.
1).洪慶姬, 1985 村落地理學 法文社 pp.23-27.
2).集落은 聚落과 동일한 의미로서 2차대전 후 일본 문부성이 정한 상용한자에 “聚”字가 제외되는 바람에 의미가
상통하는 “集”字로 대신한 결과 만들어진 新造語이다(後藤和民, 1982 「繩文集落の槪念」 繩文文化の硏究8
雄山閣). 따라서 “聚”字가 통용되고 있는 우리 실정에서는 굳이 集落이란 생소한 용어를 사용할 필요는 없다.
3).秋淵植, 1994 「聚落考古學의 世界的 硏究傾向 -韓國 취락고고학연구의 전망에 대신하여-」 마을의 考古學
p.46
4).木村礎, 1992 「日本村落史を考える」 日本村落史講座1 雄山閣 p.4 이때의 集落은 居住域에 한정된 개념
이다.
5).
三國志 魏書 烏丸鮮卑東夷傳 “北沃沮---冬月冰凍 船道不通 乃下居村落”6).이런 점에서 聚落과 墓地의 분석을 토대로 사회적 기초단위의 변화과정을 추적함으로써 원시공동체의 변질과 국가의
성립과정을 추적한 북한 고고학자 황기덕의 일련의 연구성과는 매우 선구적이다. 황기덕, 1978 「조선에서의 농업공동체의
형성과 계급사회에로의 발전」1·2 력사과학1978-3·4-----, 1987 「우리나라 청동기시대의 사회관계에 대하여」1·2
조선고고연구1987-2·4
7)李賢惠, 1976 「三韓의 “國邑”과 그 成長에 대하여」 歷史學報69
盧重國, 1989 「韓國古代의 邑落의 構造와 性格」 大丘史學38
金杜珍, 1984 「三韓時代의 邑落」 韓國學論叢7
8)尹善泰, 1996 「촌락구조와 민」 한국역사입문① 한국역사연구회 pp.204-205
9).李宇泰, 1991 「新羅 中古期의 地方勢力 硏究」 서울大學校 박사학위논문
李銖勳, 1995 「新羅 中古期 村落支配 硏究」 釜山大學校 박사학위논문
朱甫暾, 1995 「新羅 中古期의 地方統治와 村落」 啓明大學校 박사학위논문
10).李仁哲, 1993 「新羅의 村과 村民支配에 관한 硏究 -正倉院 所藏 新羅帳籍을 중심으로-」 精文硏 한국학대학원 박사
학위논문.李喜寬, 1994 「統一新羅 土地制度硏究 -新羅村落帳籍에 대한 검토를 中心으로-」 西江大學校 박사학위논문
李仁在, 1995 「新羅統一期 土地制度 硏究」 延世大學校 박사학위논문
11).순천(구 승주) 대곡리와 낙수리, 울산(구 울주) 검단리, 경주 황성동, 하남 미사동(구 미사리), 부여 송국리유적 등이
대표적이다.
12).최근 금릉 송죽리, 청도 오진리, 청주 쌍청리 등 내륙지역에서도 신석기시대 유적이 자주 발견됨으로써 신석기시대
취락이 해안에만 입지하지는 않았던 것이 밝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河岸立地라는 경향성이 감소된 것은 결코
아니다.
13).權五榮, 1996 「三韓의 ‘國’에 대한 硏究」 서울大學校 박사학위논문 pp.19-20
14).都出比呂志, 1983 「環濠集落の成立と解體」 考古學硏究 29-4 pp.22-24
15).崔鍾圭, 1993 「東洋의 防禦 集落」 松菊里Ⅴ 國立公州博物館
崔鍾圭, 1996 「한국 원시의 방어집락의 출현과 전망」 韓國古代史論叢8 pp.16-17
鄭漢德, 1995 「東아시아의 環濠聚落」 蔚山檢丹里마을遺蹟 釜山大學校博物館 pp.436-445
16).崔鍾圭, 1996 「한국 원시의 방어집락의 출현과 전망」 韓國古代史論叢8 p.33
17).훗날 斯盧國 단계까지도 취락 입지가 “分居山谷之間”이었던 까닭은 水利灌漑術과 농업기술의 한
계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18).鐵製 農土木具가 보급되기 전에는 대규모의 노동편성이 요구되었을 것이지만 소규모 취락 단위에서 배출할 수 있는
노동력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母聚落에 대한 의존도는 높았을 것이다.
19).일본 학계에서 사용하는 소위 “據點集落”, 혹은 “中核集落”에 해당된다.
田中義昭, 1976 「南關東における農耕社會の成立をめぐる若干の問題」 考古學硏究22-3
酒井龍一, 1990 「據點集落と彌生社會」 日本村落史講座2 景觀Ⅰ 雄山閣
20).後藤直, 1995 「靑銅器時代の集落と靑銅器副葬墓 -立地環境と地域的統合-」 東아시아의 靑銅器文化 -묘제와 주거-
p.27
21).釜山大學校博物館, 1995 蔚山檢丹里마을遺蹟 pp.3-7
22).발굴조사된 검단리유적이 중핵적인 취락이었는지 여부는 속단하기 어렵다.
23).종전에는 이 시기에 해당되는 環濠聚落의 예가 없었으나 현재 발굴 중인 대구 팔달동유적으로 인해 공백이 메워지게
되었다. 영남매장문화재연구원 진성섭선생의 후의로 견학할 수 있었다.
24).權五榮, 1996 「中西部地方의 初期鐵器文化와 ‘衆國’의 대두」 釜山史學31
25).都出比呂志, 1974 「古墳出現前夜の集團關係」 考古學硏究20-4
佐原眞, 1979 「彌生時代の集落」 考古學硏究25-4
森岡秀人, 1986 「高地性集落性格論」 論爭·學說 日本の考古學4 彌生時代 雄山閣
26).
남해안지역에서는 소위 金海期 패총의 입지가 高地性이며 일본의 高地性集落과 동일한 성격임이 이미 주장된 바 있다.
崔鍾圭, 1989 「金海期 貝塚의 立地에 대해서」 古代硏究2
27).청동기시대 주거지의 화재원인에 대해 농경의 발전, 재산의 축적, 취락의 거대화, 계급발생 등을 지적한 견해가
(金正基, 1981 「靑銅器文化 -住居址」 한국사1 국사편찬위원회) 이미 발표된 바 있다. 최근에는 송국리유적에서
木柵을 둘렀던 方形住居址 21기 중 19기가 화재로 폐기되었음을(金吉植, 1994 「扶餘 松菊里遺蹟의 發掘調査 槪要와 成果」
마을의 考古學 第18回 韓國考古學全國大會 發表要旨 p.186) 지적하면서 무문토기(청동기)시대 중기 이후 화재로
폐기된 주거지의 빈도가 증대되며 이는 동일 지역 내에서 동일문화를 공유하고 있는 경쟁집단 간 갈등관계의 산물이란
견해가(宋滿榮, 1995 「中期 無文土器時代 文化의 編年과 性格 -西南韓地方을 中心으로-」 崇實大學校 석사학위논문) 제기
된 바 있다. 물론 三國志에 나타난 濊의 경우를(三國志 魏書烏丸鮮卑東夷傳 “多忌諱 疾病死亡輒損棄舊宅 更作
新居”) 보더라도 주거지 화재의 모든 원인이 집단 간의 분쟁은 아닐 것이다. 화재유형별 분류와 가재도구의 잔존상태 등을
면밀히 검토하여 종합할 필요가 있다.
28).삼국시대 이전에 이미 성곽이 존재하였음은 위만조선의 왕검성의 예에서 알 수 있다. 그밖에 낙랑군의 縣治로 사용된
토성들은 대개 위만조선시기부터 존재하였을 것이다.
29).서울의 몽촌토성과 하남 미사리유적이 그러한 예에 속한다.
權五榮, 1996 「渼沙里聚落과 夢村土城의 비교를 통해 본 漢城期 百濟社會의 斷面」 韓國古代史論叢8
30).崔鍾圭, 1996 「한국 원시의 방어집락의 출현과 전망」 韓國古代史論叢8 p.35
31).林起煥, 1995 「高句麗 集權體制 成立過程의 硏究」 慶熙大學校 박사학위논문 p.121
32).李宇泰, 1981 「新羅의 村과 村主」 韓國史論7 서울대 국사학과 p.74
33).盧泰敦, 1975 「三國時代의 ‘部’에 關한 硏究」 韓國史論2 서울대 국사학과
34). 權五榮, 1996 「三韓의 ‘國’에 대한 硏究」 서울大學校 박사학위논문 pp.86-87
35).李鍾旭, 1982 新羅國家形成史硏究 一潮閣. 李賢惠, 1984 三韓社會形成過程硏究 一潮閣
김재홍, 1996 「신라(사로국)의 형성과 발전」 역사와 현실21 한국역사연구회
36).朱甫暾, 1996 「新羅國家形成期 大邱社會의 動向」 韓國古代史論叢8
37).金龍星, 1989 「慶山·大邱地域 三國時代 階層化와 地域集團」 嶺南考古學6
38).李賢惠, 1996 「金海地域의 古代 聚落과 城」 韓國古代史論叢8
39).이러한 단위는 훗날 신라의 지방제도가 정비되는 과정에서도 중요한 단위로 기능하였다.
40).崔夢龍·李盛周·李根旭, 1989 「洛水里 낙수 住居址」 住岩댐 水沒地域 文化遺蹟發掘調査報告書Ⅵ
41).李康承·朴淳發·成正鏞, 1996 天安長山里遺蹟 忠南大學校博物館·公務員年金管理公團
42).낙수리의 경우 철제품은 단 2점에 불과하다. 낙수리보다 훨씬 규모가 큰 대곡리 도롱유적에서도 철제품의 출토량은
보잘것 없다. 이러한 현상은 상대적으로 철기문화의 농도가 옅은 보성강유역 만의 특수한 상황이 아니라 한강유역의
미사리유적에서도 마찬가지이다(權五榮, 1996 「渼沙里聚落과 夢村土城의 비교를 통해 본 漢城期 百濟社會의 斷面」
韓國古代史論叢8 p.67).
43).金正基, 「無文土器文化期의 住居址」 韓國史論文選集 先史篇 一潮閣 p.103
44).다만 일본 학계에서는 노지의 평균면적 3㎡를 빼고 계산하기 때문에 북한 학계에서 추정하는 인원수보다 항상 1인이
적은 수치가 도출된다.
45).한편 기계적인 방식에 반대하며 주거면적에서 입구부, 土間(봉당), 부뚜막구역을 뺀 수치에 일인당 橫臥面積을
나누는 계산법이 현실적이라는 견해가 있다.
和島誠一·金井塚良一, 1966 「集落と共同體」 日本の考古學古墳時代 下 河出書房 p.175
都出比呂志, 1975 「家とムラ」 日本的生活の母胎日本生活文化史 1 p.111
부뚜막과 寢所가 명확히 판명되는 주거의 경우에는 이 방법이 타당할 것이다.
46).權五榮, 1996 「渼沙里聚落과 夢村土城의 비교를 통해 본 漢城期 百濟社會의 斷面」 韓國古代史論叢8 p.46의
〈표 1〉참조
47).관산리 004호의 경우 118㎡-12㎡(노지면적:3㎡×4개)=106㎡(총 거주면적). 106㎡÷3㎡(추정 1인당 거주면적)=35인.
이 수치는 출토된 확인가능한 토기저부가 약 33개체분인 것과 유사하다. 토기를 개인용 식기로 환언시키면 주거 면적
에서 유추되는 거주인수와 식기 개체수를 비교할 수 있는 자료가 될 것이다. 앞으로 보다 많은 자료의 집적이 요망된다.
48).尹世英·李弘鍾, 1996 館山里遺蹟(Ⅰ) 高麗大學校·(株)大宇 p.17
49).鄭漢德, 1995 「東아시아의 環濠聚落」 蔚山檢丹里마을遺蹟 釜山大學校博物館 pp.443-445
50).大林太郞, 1971 「繩文時代の社會組織」 季刊人類學2-2
スチュアト·ヘンリ, 1984 「北米大陸北西沿岸インデイアンの集落」 季刊考古學7
洪慶姬, 1985 村落地理學 法文社 p.59·175 한편 이러한 가옥구조를 根莖栽培와 火田 등 저급한 농업기술단계에 대응
시키는 견해(小山修三, 1996 「食料採取時代の家族·親族」 考古學による日本歷史15 家族と住まい p.20)도 있다.
51).林永珍, 1985 「움집의 分類와 變遷」 韓國考古學報17·18 pp.155-156
宋滿榮, 1995 「中期 無文土器時代 文化의 編年과 性格 -西南韓地方을 中心으로-」 崇實大學校 석사학위논문 pp.74-75
52).공열토기가 출토되는 細長方形 주거지에서 松菊里型 주거지로의 변화의 배후에는 농업조건의 차이가 깔려 있음이
이미 지적된 바 있다.李康承·朴淳發·成正鏞, 1996 天安長山里遺蹟 忠南大學校博物館·公務員年金管理公團 p.10
53).三國志 魏書 烏丸鮮卑東夷傳 韓條의 “居處作草屋土室 形如冢 其戶在上 擧家共在中 無長幼男女之別”에서의
“家”와 同書 倭人條의 “妻子”가 개별세대(개별가족)에, 倭人條의 “門戶”나 烏丸鮮卑條의 “落”이 세대공동체(확대가족)에
해당할 것이다. 왜인조에서 “父母兄弟臥息異處”라는 것은 세대공동체가 세대별로 주거를 달리 하고 있는 상황을 표현한
것으로 추측된다.
54).리기련, 1980 석탄리유적발굴보고 과학·백과사전출판사
반면 5~6기의 주거가 하나의 단위를 이루면서 2개 이상의 단위가 존재하였을 것으로 추정한 견해(崔鍾圭, 1990 「廣場에
대한 認識」 歷史敎育論集13·14 pp.105-107)도 있다. 두 견해 모두 복수의 주거가 群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간주하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55).신석기 주거지의 屋內爐는 조리보다는 난방, 조명, 습기제거용일 개연성이 높으며 취사에 이용된 屋外爐가 자주
발견되고 있다. 細長方形 주거지의 경우 아직 屋外爐의 분명한 실례는 없으나 屋內爐가 조리용이 아님을 주목해야 한다.
송국리형 주거지의 경우는 애당초 屋內爐가 존재하지 않는 점이 큰 특징이다.
56).李健茂, 1992 「松菊里型 住居分類試論」 擇窩許善道先生停年紀念韓國史學論叢
安在晧, 1992 「松菊里類型의 檢討」 嶺南考古學11
김재홍, 1995 「농경사회의 형성과 고대의 촌락」 역사비평봄호(계간28호) 역사비평사
57).경남대학교박물관, 1996 「山淸黙谷里遺蹟」 지도위원회의 및 현장설명회 자료
58).高床倉庫에 접하여 대형 주거가 존재하고, 주거지 출토품이 다른 주거를 능가할 경우, 그 주거는 지배자의 가옥으로
판단되며, 고상창고가 住居群에서 떨어져 있는 경우에는 취락에 의한 공동관리로 판단된다고 한다.
石野博信, 1975 「彌生·古墳時代の高倉管理形態とその變遷」 創立三十五周年記念橿原考古學硏究所論文集 吉川弘文
館 p.69
59).李弘鍾, 1993 「부뚜막施設의 登場과 地域相」 嶺南考古學12
60).우리의 부뚜막에 해당되는 일본의 カマド가 개별 주거 내에 일반적으로 마련되는 것은 古墳時代 後期부터라고 한다
(石野博信, 1990 日本原始·古代住居の硏究 吉川弘文館 p.14). 이러한 시간적 낙차는 개별가족의 자립도란 측면에서
유의할 만한 대목이다.
61).Kim, Seung-Og, 1996 「Political Competition and Social Transformation: The Development of Residence,
Residental Ward, and Community in the Prehistoric Taegongni of Southwestern Korea」 Univ. of Michigan
62).權五榮, 1995 「三韓社會 ‘國」의 구성에 대한 고찰」 三韓의 社會와 文化韓國古代史硏究10 신서원 p.35
63).三國志 魏書 烏丸鮮卑東夷傳 高句麗條
64).麻線溝 1호묘에 그려진 桴京의 지붕 위에 표현된 두 마리 새는 穀靈으로서, 알이 부화하듯이 種穀이 발아하여 풍작을
이루기를 기원하는 관념의 산물이다. 새와 穀靈의 관계에 대해서는 다음의 글이 참고된다.
金哲埈, 1971 「東明王篇에 보이는 神母의 性格」 柳洪烈博士華甲記念論叢
三品彰英, 1973 古代祭政と穀靈信仰 平凡社
65).李賢惠, 1996 「金海地域의 古代 聚落과 城」 韓國古代史論叢8 p.164
66).일본의 경우 彌生時代에는 首長層과 일반성원의 주거가 혼재하다가 古墳時代에 들어가면서 “首長層 居宅”은 별도의
공간에 마련된다고 한다. 都出比呂志, 1983 「環濠集落の成立と解體」 考古學硏究29-4 p.30
武末純一, 1990 「北部九州の環溝集落」 乙益重隆先生古稀記念九州上代文化論集 pp.229-230
67).嶺南埋藏文化財硏究院, 1995 「慶山 林堂遺蹟 發掘調査-F地區-」 現場說明會資料4
嶺南埋藏文化財硏究院, 1996 「慶山 林堂遺蹟 發掘調査-F·G·H·I地區-」 現場說明會資料7
68).대구 時至地區와 漆谷地區에서 많은 수의 우물이 발견된 바 있다.
69).각종 생산활동이 취락 차원에서 이루어졌는가, 聚落群 차원, 혹은 보다 높은 차원의 정치권력에 의해 조직되었는가
하는 점이 밝혀져야 할 것이며 전업적 工人集團의 유래와 존재양태 등도 규명되어야 한다. 진천 석장리, 경주 황성동 등의
철기제작관련 유적의 중요성은 주지의 사항이고 이외에도 琉璃范이 출토되는 유적에도 주목하여야 할 것이다.
최근 그 중요성이 다시 강조된(朱甫暾, 1997 「韓國 古代의 土器銘文」 유물에 새겨진 古代文字 부산광역시립박물관
복천분관 pp.57-58) 서울 사당동 窯址出土 토기명문 중의 “ 縣器村”의 “器村”이 陶工의 집단거주지인가 하는 점도
규명해야 할 과제의 하나이다.
70).최근 祭祀遺蹟의 조사가 잇따르고 있다. 특히 鳥文靑銅器가 祭祀遺構에서 출토된 고성 동외동유적, 완성·미완성의
각종 옥제품이 출토된 산청 묵곡리유적 등의 성격규명이 기대된다.
71).吉田晶, 1980 日本古代村落史序說 塙書房 pp.8-9
72).사회과학원 력사연구소, 1979 조선전사1 원시편의 서술방식이 특히 그러하다.
73).앞으로의 연구방향에 대한 고고학자의 문제제기로 다음의 글이 있다.
崔夢龍, 1983 「住居生活」 韓國史論13 韓國의 考古學Ⅱ·上 國史編纂委員會
李健茂, 1994 「先史時代 住居址考古學 現況」 마을의 考古學第18回 韓國考古學全國大會 發表要旨
權鶴洙, 1994 「역사시대 마을고고학의 성과와 과제」 마을의 考古學第18回 韓國考古學全國大會 發表要旨
74).이런 점에서 아래의 글들은 많은 점을 시사해 준다.
秋淵植, 1994 「聚落考古學의 世界的 硏究傾向」 마을의 考古學 第18回 韓國考古學全國大會 發表要旨
Kim, Seung-Og, 1996 「Political Competition and Social Transformation: The Development of Residence,
Residental Ward, and Community in the Prehistoric Taegongni of Southwestern Korea」 Univ. of Michigan
權 五 榮(동아대)
(이정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