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차 안동 역사기행답사 4편은 지부상소를 하고 동방의 예학과 이학理學을 계승한 역동 우탁 선생의 묘소를 찾았다.
리학理學(역학,정주학=정이와 정주형제의 학문=주역에서 점보는 것을 빼고 학문으로 발전시킴)의 시조라는 뜻이다.
참고로 한국 유학의 발달사는 아래와 같다.
안향이 원에서 성리학을 수용--역동 우탁과 백이정- 이제현,문제공 박충좌,이곡-이색-정몽주,권근,정도전(영주 삼백당 출생),변계량으로 전수되었다.
정몽주-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정여창,김일손,손중돈-조광조-이언적-이황-조목,김성일,류성룡,한강 정구
문제공 박충좌는 나(필자)의 선조이다.퇴계 이황 선생께서 제자인 우성전에게 우탁 선생을 모시라고 당부하여 역동서원을 세우자, 문제공 치암 박충좌공도 함께 모셨다.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엇다가 다시 복구하였고, 현재 안동대 구내에 역동서원이 있으나 향사되지 못하고 1984년에 예천 금당실마을 금곡서원을 설립하여 향사를 모시고 있다.
예천 금곡서원은 요기참고- http://cafe.daum.net/gaetuel/Td3b/51
역동 우탁 선생
[개설]
본관은 단양(丹陽). 자는 천장(天章) 또는 탁보(卓甫·卓夫), 호는 백운(白雲)·단암(丹巖). 세상에서 ‘역동선생(易東先生)’이라 일컬어졌다. 시조 우현(禹玄)의 7대손으로, 남성전서문하시중(南省典書門下侍中)으로 증직된 우천규(禹天珪)의 아들이다.
[생애와 활동사항]
1278년(충렬왕 4) 향공진사(鄕貢進士)가 되고, 과거에 올라 영해사록(寧海司錄)이 되었다. 이 무렵 영해에는 팔령(八鈴)이라 이르는 신사(神祠)가 있었다. 백성들이 그 영험을 믿고 팔령신(八鈴神)을 극진히 받들고 있었으며, 자주 제사지내고 재물을 바쳐 폐해가 막심했는데, 팔령신을 요괴로 단정하고는 신사를 과감히 철폐하였다.
1308년(충선왕 즉위년) 감찰규정(監察糾正)이 되었고, 충선왕이 부왕의 후궁인 숙창원비(淑昌院妃)와 통간하자 백의(白衣)차림에 도끼를 들고 거적자리를 짊어진 채 대궐로 들어가 극간을 하였다. 곧 향리로 물러나 학문에 정진했으나 충의를 가상히 여긴 충숙왕의 여러 번에 걸친 소명으로 다시 벼슬길에 나서서 성균좨주(成均祭酒)로 치사하였다.
벼슬에서 물러난 뒤에는 예안(禮安)에 은거하면서 후진 교육에 전념하였다. 당시 원나라를 통해 새로운 유학인 정주학(程朱學)이 수용되고 있었는데, 이를 깊이 연구해 후학들에게 전해주었다. 정이(程頤)가 『주역』을 주석한 『정전(程傳)』은 처음 들어왔을 때 아는 이가 없었는데, 방문을 닫아걸고 연구하기를 달포 만에 터득해 학생들에게 가르쳐주었다.
경사(經史)에 통달했고, 『고려사』 열전에 ‘역학(易學)에 더욱 조예가 깊어 복서(卜筮)가 맞지 않음이 없다.’고 기록될 만큼 아주 뛰어난 역학자였다. 또한 시조 2수와 몇 편의 시가 전하고 있다.
[상훈과 추모]
조선조에 와서 이황(李滉)의 발의로 1570년(선조 3) 예안에 역동서원(易東書院)이 창건되었으나, 1871년(고종 8)에 훼철당했다가 1966년 복원되었다. 또 다른 서원인 구계서원(龜溪書院)은 영남대학교 구내로 옮겨졌다. 시호는 문희(文僖)이다.
지부상소指斧上訴를 최초로 하신 분이 바로 역동 우탁 선생이다.
백이정-우탁,신현 등
위는 단양 우씨 문중 설단
위 내용중 일부는 단양 향토문화연구회 지성룡님의 자문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