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一蠹先生續集卷之四 / 附錄 / 世系源流
0汝昌
1希卨。
2孫彥男,
3曾孫大民,
4玄孫弘緖,
5五世孫光漢,
6六世孫世杓,
7七世孫煕章,
8八世孫胤獻,
9九世孫鎭華,
10十世孫德濟。
11十一世孫東老。
12十二世孫煥輔。
13十三世孫在箕。
14十四世孫直鉉。
15十五世孫淳元。
16十六世孫近相。
0鄭汝昌
1鄭希卨
2鄭彥男
3鄭大民
4鄭弘緖
5鄭光漢
6鄭世杓
7鄭煕章
8鄭胤獻
9鄭鎭華
10鄭德濟
11鄭東老
12鄭煥輔
13鄭在箕
14鄭直鉉
15鄭淳元
16鄭近相
.........................
함양 열녀 밀양박씨 지려 咸陽烈女密陽朴氏之閭
분야 종교/유교
유형 유적/건물
지역 경상남도 함양군 함양읍 운림리 349-1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동연
[정의] 경상남도 함양군 함양읍 운림리에 있는 조선 후기 임술증의 처 밀양박씨의 정려.
[위치] 함양군 함양읍 운림리 349-1번지 상림공원 역사인물공원에 있다.
[변천] 1797년(정조 21)에 세워졌다. 비문은 일두 정여창의 10대 x7대손인 정덕제(鄭德濟)가 지었다. 정려비는 원래 함양향교 입구에 있었으나 1932년에 도로 확장공사로 함양군 함양읍 백연리 111-69로 옮겨졌다. 이후 2009년 2월에 상림공원 내에 역사유적공원이 완공되면서 다시 이건되었다.
[형태] 석재의 돌기둥 4개에 가첨석을 올려 비각을 만들었다. 비명은 ‘열녀 학생 임술증 처 유인 밀양박씨지려(烈女學生林述曾妻孺人密陽朴氏之閭)’이다.
[현황] 역사인물공원으로 이건되고 난 후에도 후손들에 의해 상당히 잘 관리되고 있어 비석의 보존 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1997년 1월 30일에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40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정려비 옆에는 경상남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다는 표지석과 밀양박씨의 행적에 대한 기록이 별도의 비석에 새겨져 있다.
[의의와 평가] 함양 열녀 밀양박씨 지려는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1737~1805]이 안의현감으로 있을 때 한문소설화한 『열녀함양박씨전(烈女咸陽朴氏傳)』의 주인공인 임술증(林述曾)의 처 밀양박씨의 정려비이다. 『열녀함양박씨전』은 연암의 12편 한문소설 중에 실존 인물을 소설로 쓴 것 가운데 남겨진 유일한 작품이다. 연암 외에도 윤광석(尹光碩), 이학전(李學傳), 이면제(李勉齊), 승려 응윤(應允) 등이 「박열부전(朴烈婦傳)」을 저술하여 그의 정절을 기렸다. 동시대 여인의 정절을 유교와 불교 측에서 모두 기렸던 것을 볼 수 있다.
.......................
鄭德濟 1742 1815 河東 明叔 鍾巖
정덕제(鄭德濟, 1742~1815?)로, 본관은 하동(河東), 자는 명숙(明叔), 호는 종암(鍾巖)이다. 일두 정여창의 후손으로 청하 현감(淸河縣監)을 지냈다.
剛齋先生集卷之九 / 墓表 / 鍾巖鄭公墓表
一蠧先生鄭文獻公後孫。綿延累世。不甚繁昌。識者疑之。至鍾巖公諱德濟。子姓振振。科第蟬聯。此固先生餘慶。而亦豈非公之厚德克享完福也耶。公字明叔。鍾巖其號也。鄭氏。系出河東。譜自贈密直副使諱國龍。六世而至文獻公。倡明道學。贈右議政。從祀文廟。公其十代孫也。高祖諱世杓。縣監。曾祖諱煕章。察訪。祖諱胤獻。當英廟戊申逆亂。率宗族倡義。贈吏曹參議。考諱鎭華。奉事。妣晉山姜氏。公齊女。以崇禎再壬戌三月七日生公。幼深沉厚重。不妄言笑。見者期以遠到。甫冠。奉事公歿于京邸。公千里戴星。奉櫬歸鄕。攀擗號痛。幾絶者數。以不得侍湯終孝。爲沒身恨。戊子。除厚陵參奉。移南部奉事。以事遞。又除昌陵參奉。移司甕奉事。司圃直長。忤上官棄歸。蓋公雖不辭世祿。不苟去就。未幾。又除肇慶廟參奉。移典牲奉事。陞司圃直長。禮賓主簿。肇慶廟令。出爲淸河縣監。縣土瘠民貧。賦稅煩重。公首蠲官用。火卜三十結。又減官屯稅穀,木炭元價。且以邑小吏多。害必及民。汰吏額三之二。蘇殘去瘼。隨事盡心。依文獻公安陰故事。春秋行養老禮。方伯寘中考。物論寃之。公夷然。卽束裝還家。杜門掃軌。更無進取意。詩酒優遊。以娛餘年。五子分日供奉。如陸賈故事。敎訓諸子。或不可意。對案不食。輒如萬石君之爲。家庭之內。肅如也。今上二十五年乙亥三月十七日。考終。葬郡西松坪南山丙坐原。配海州鄭氏。緯臣女。忠毅公文孚後。有梱範。事姑孝。承祀敬。處夫黨御婢僕。曲有恩義。後公二年生。先公二十九年卒。五男東老縣監,東民參奉,東蓍,東耉,東翊。女適崔寬賢,李頤鎭。李進士。曰東運,東彥。側出也。東老五男。煥輔進士,煥義司書,煥奭,煥祖生員,煥弼。一女適姜鍊。東民三男。煥忠,煥琦,煥震。伯仲進士。二女適宋觀洙,李克聞。宋參奉。東蓍三男。煥奎,煥斌,煥斗。二女適沈有述,黃得榮。東耉二男。煥道,煥文。三女適愼在中,金東昇,閔致惇。東翊一男。煥載。崔三男。李二男一女。東運五男。東彥四男。曾孫男在箕,在斗。女林觀洙。煥輔出。在修女李稷鉉。煥奭出。在璣女徐愚淳。煥祖出。其餘未冠笄者。不能盡錄。嗚呼。公以大賢嗣孫。有淳姿篤行。克承先徽。備享福履。天之報施。可謂無憾。而人猶有惜其屈於一縣。未獲究施者。斯可以知公矣。煥道,煥弼。久從余遊。今以其親命。持示姜大諫泰重所爲狀。而求墓表。余以不文辭。不獲。遂強病爲之櫽栝如此云。
강재집 제9권 / 묘표(墓表) / 종암 정공 묘표〔鍾巖鄭公墓表〕
일두(一蠧) 선생 정문헌공(鄭文獻公 정여창(鄭汝昌))의 후손은 여러 세대를 면면히 이어왔으나 그다지 번창하지 못하여 식자들이 의아하게 여겼는데 종암공(鍾巖公) 휘 덕제(德濟)는 자손이 많고 과거 급제자도 줄줄이 이어졌다. 이것은 참으로 일두 선생이 남긴 복이며 또한 공이 후덕하여 온갖 복을 누리는 것이 아니겠는가? 공의 자는 명숙(明叔), 종암(鍾巖)은 호이다. 정씨는 선계가 하동에서 나왔고, 계보는 밀직부사로 추증된 휘 국룡(國龍)에서 시작되었다. 6대를 내려와 문헌공이 도학(道學)을 앞장서서 밝혀 우의정으로 추증되었으며 문묘에 배향되었는데, 공이 그의 10대손이다. 고조 휘 세표(世杓)는 현감을 지냈으며, 증조 휘 희장(熙章)은 찰방을 지냈다. 조부 휘 윤헌(胤獻)은 영조 무신란 때 친족을 이끌고 의병을 일으켜 이조 참의에 추증되었다. 부친 휘 진화(鎭華)는 봉사(奉事)를 지냈으며, 모친 진산 강씨(晉山姜氏)는 공제(公齊)의 따님으로 숭정 두 번째 임술년(1742, 영조18) 3월 7일에 공을 낳았다. 어려서는 침착하고 중후하여 함부로 말하거나 웃지 않아 보는 이들이 높은 벼슬에 오를 것이라고 기대하였다. 겨우 약관에 부친 봉사공이 서울 집에서 작고하였다. 공은 천 리 길에서 밤을 새워 달려가 관을 메고 고향으로 돌아왔으며, 가슴을 치며 통곡하고 기절한 것도 여러 번이었다. 약시중을 들면서 임종을 보지 못한 것을 평생의 한으로 여겼다.
무자년(1768, 영조44)에 후릉 참봉(厚陵參奉)으로 임명되었고, 남부 봉사(南部奉事)로 옮겼다가, 어떤 사건 때문에 교체되었다. 또 창릉 참봉(昌陵參奉)으로 임명되었고, 사옹 봉사(司甕奉事)로 옮겼다. 사포 직장(司圃直長)으로 있을 때 상관의 뜻을 거스려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대체로 공이 나라의 녹봉을 사양하지 않았지만 비굴하게 처신을 하지 않았다. 얼마 되지 않아 또 조경묘 참봉(肇慶廟參奉)으로 임명되었으며, 전생 봉사(典牲奉事)로 옮겼다가 사포 직장으로 승진하였으며 예빈 주부(禮賓主簿)와 조경묘 영을 거쳐 청하 현감(淸河縣監)으로 나갔다. 현은 토지가 척박하고 백성은 빈한하였는데 부역과 세금이 번거롭고 무거웠다. 공은 제일 먼저 관가 비용과 화전(火田) 30결(結)에 대한 세금을 줄이고 또 관에 소속된 토지를 경작하고 내는 세곡(稅穀)과 목탄(木炭 숯) 원가를 경감하였다. 또 고을은 작은데 아전이 많으면 폐해가 반드시 백성에게 미친다고 하여 아전 3분의 2를 내보냈다. 피폐한 백성들을 소생시키고 폐단을 제거하였으며 일에 따라서 마음을 다하였다. 문헌공이 안음(安陰)에서 행한 고사를 따라 봄가을에 양로례(養老禮)를 행하였다. 관찰사가 인사고과에서 ‘중고(中考)’를 매기자 여론이 빗발쳤다. 공은 태연하게 곧장 짐을 꾸려 집으로 돌아갔다. 문을 닫아걸고 세속 사람들과의 교제를 끊고 다시는 관직에 나가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시와 술로 느긋이 지내면서 만년을 즐겼다. 아들 다섯이 날을 나누어 봉양하였는데 마치 육가(陸賈)의 고사 같았다. 자식들을 가르칠 때 간혹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밥상을 앞에 두고 먹지 않고 번번이 만석군(萬石君)같은 행동을 하였으며, 가정에서는 엄숙한 모습을 하였다. 금상 25년 을해년 3월 17에 작고하였다. 군(郡) 서쪽 송평(松坪)의 남산(南山) 병좌(丙坐) 언덕에 안장하였다. 부인 해주 정씨(海州鄭氏)는 위신(緯臣)의 따님이며 충의공(忠毅公) 문부(文孚)의 후손이다. 부녀자의 법도가 있어 시어머니를 효성으로 섬겼고, 경건하게 제사를 모셨으며, 남편 친척을 대할 때나 비복을 부릴 때는 은근히 은혜와 의리가 있었다. 공보다 2년 늦게 태어나 공보다 29년 먼저 작고하였다.
5남 3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현감 동로(東老), 참봉 동민(東民), 동시(東蓍), 동구(東耉), 동익(東翊)이고, 딸은 최관현(崔寬賢), 이이진(李頤鎭), 이진사(李進士)에게 시집갔다. 동운(東運)과 동언(東彦)은 측실 소생이다. 동로는 5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진사 환보(煥輔), 사서(司書) 환의(煥義), 환석(煥奭), 생원 환조(煥祖), 환필(煥弼)이고, 딸은 강련(姜鍊)에게 시집갔다. 동민은 3남 3녀를 두었는데, 이들은 환충(煥忠), 환기(煥琦), 환진(煥震)이며 첫째와 둘째는 진사이다. 딸은 송관수(宋觀洙), 이극관(李克聞), 송참봉(宋參奉)에게 시집갔다. 동시는 3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환규(煥奎), 환빈(煥斌), 환두(煥斗)이고, 딸은 심유술(沈有述), 황득영(黃得榮)에게 시집갔다. 동구는 2남 3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환도(煥道), 환문(煥文), 딸은 신재중(愼在中), 김동승(金東昇), 민치돈(閔致惇)에게 시집갔다. 동익의 외아들은 환재(煥載)이다. 최관현은 3남, 이(李)는 2남 1녀를 두었다. 동운은 5남, 동언은 4남을 두었다. 증손자는 재기(在箕), 재두(在斗)이고, 증손녀는 임관수(林觀洙)에게 시집갔다. 환보는 양자로 나갔는데, 아들은 재수(在修), 딸은 이직현(李稷鉉)에게 시집갔다. 환석은 양자로 나갔는데, 아들은 재기(在璣), 딸은 서우순(徐愚淳)에게 시집갔다. 환조는 양자로 나갔다. 그 나머지 미성년자이어서 모두 기록하지 않는다.
아, 공은 대현(大賢)의 봉사손으로 순박한 자질과 독실한 행실로 선대의 아름다운 행적을 잘 계승하였다. 복을 마음껏 누렸으니 하늘이 보답으로 내려준 것도 유감이 없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고을 하나에 국한되어 가진 재주를 마음껏 발휘하지 못하였다고 애석히 여기는 사람이 있으니 여기서 공을 알 수 있다. 환도와 환필은 오랫동안 나를 따라다니면서 공부하였다. 지금 부친의 명으로 대간(大諫) 강태중(姜泰重)이 지은 행장을 가지고 와 보여주면서 묘표를 지어주기를 부탁하였다. 나는 글재주가 없다고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마침내 병을 무릅쓰고 글을 지었는데 대강 위의 글과 같다.
[주-D001] 정공 : 정덕제(鄭德濟, 1742~1815?)로, 본관은 하동(河東), 자는 명숙(明叔), 호는 종암(鍾巖)이다. 일두 정여창의 후손으로 청하 현감(淸河縣監)을 지냈다.[주-D002] 안음(安陰)에서 행한 고사를 : 일두 정여창이 1495년(연산군 원년)에 안음 현감으로 재직시에 선정을 베풀었으며 봄가을에 노인들에게 양로연(養老宴)을 베푼 것을 말한다.[주-D003] 육가(陸賈)의 고사 : 육가는 한 고조 유방을 도운 참모이다. 아들 다섯을 두었는데 자신의 재산을 나누어 주면서, 자기가 찾아 갈 때에는 대접을 잘 하라고 부탁을 했다고 한다. 《漢書 卷43 陸賈傳》[주-D004] 만석군(萬石君) : 한(漢)나라 때 만석군(萬石君)으로 일컬어졌던 석분(石奮)이 자손 중에 과실을 범한 자가 있으면 굳이 말로 꾸짖지 않고 식사를 하지 않음으로써 스스로 잘못을 깨달아 고치게 했다는 고사가 있다. 《史記 卷103 萬石君列傳》[주-D005] 금상 25년 을해년 : 금상은 순조를 말한다. 순조 25년(1825)은 을해년이 아니라 을유년이다. 순조 을해년은 순조 15년(1815)이다. 착오가 있는 듯하다.[주-D006] 송평(松坪) : 경남 함양군 병곡면(甁谷面) 송평리를 말한다.[주-D007] 이(李)는 : 사위 이이진(李頤鎭), 이진사(李進士)인데, 두 사람 다 이씨로 누구를 지칭하는지 확실하지 않다.
ⓒ 한림대학교 태동고전연구소 | 임재완 (역) | 2016
..................
일성록 > 정조 > 정조 21년 정사 > 7월 10일 > 최종정보
정조 21년 정사(1797) 7월 10일(정축)
○경상 감사 이형원(李亨元)의 계본에,
“경주 부윤(慶州府尹) 유한모(兪漢謨)는 포폄 제목(褒貶題目)이 ‘폐단을 막을 생각을 하지만 어찌 옛 제도를 따르지 않는가.〔雖念防弊 盍遵舊制〕’이고, 성주 목사(星州牧使) 조영경(趙榮慶)은 ‘자신의 단속에 더욱 힘써야 하지만 다스림은 진실로 힘이 있다.〔約宜益勉 治固有力〕’이고, 영덕 현령(盈德縣令) 이노수(李潞秀)는 ‘바다의 폐단은 속히 바로잡아야 하지만 일을 처리하는 능력은 충분하다.〔亟矯海弊 才足剸理〕’이고, 신녕 현감(新寧縣監) 이귀석(李龜錫)은 ‘간리(奸吏)를 더욱 살펴야 하지만 잘못은 용서할 만하다.〔奸宜益察 過有可恕〕’이니, 모두 중(中)입니다. 의성 현령(義城縣令) 정재중(鄭在中)은 ‘창고를 어찌 문란한 대로 내버려 두며 조세도 어찌 살피지 않는가.〔倉胡任紊 稅亦未察〕’이고,
청하 현감(淸河縣監) 정덕제(鄭德濟)는 ‘남장에 대하여 신칙했는데 또 어찌 횡렴을 한단 말인가.〔旣飭濫杖 又何橫斂〕’이니, 모두 하(下)입니다.”
하였다.
강 : 開拆嶺南殿最
목 : 慶尙監司 李亨元啓本慶州府尹 兪漢謨雖念防弊盍遵舊制星州牧使 趙榮慶約宜益勉治固有力盈德縣令 李潞秀亟矯海弊才足剸理新寧縣監 李龜錫奸宜益察過有可恕竝中義城縣令 鄭在中倉胡任紊稅亦未察
淸河縣監 鄭德濟旣飭濫杖又何橫歛幷下
鄭德濟 1742 1815 河東 明叔 鍾巖
......................
東野遺稿 鄭相虎 (1680~1752) 善甫(선보) 東野(동야) 海州(해주) 거주지 : 晋州 佳谷(진주 가곡)
東野遺稿卷之二
附錄 墓碣銘 幷序
鄭氏之貫首陽者世多聞人有以倡明斯文扶植綱常爲己 任可以有辭於後世者東野處士諱相虎字仲善是已景 廟壬寅兇徒竊國柄誣殺諸大臣舘儒金範甲乘時跳踉發 通三南搜罰州鄕善類德標亦方設㐫䟽上侵母后下搆 名賢收一路名帖公誡勑子弟儕友使之據理嚴斥羣㐫甚 恚加公以不測之科削籍停擧一門偏被其禍公嘆曰橫逆之 來當順受而已已而與從兄萍軒公尙說倡義抗䟽請兩宋 先生從享其略曰祖述堯舜憲章文武者孔子也祖述孔
:: 0104 ::
孟憲章周程者朱子也祖述程朱憲章靜栗者兩宋也又 曰今日國賊之得罪於殿下者皆得罪於兩賢者也殿下 之討賊雖以明義理正倫常爲先討之以不討欲使二心之 徒媿服是固天地之仁也而臣恐明義正倫之方猶不得 其本也擧兩賢之從祀以示萬世之標準則倫常自正義 理自明詖淫邪遁不敢螮蝀於太陽之下上特優批以奬 之盖向後準請克擧縟儀公䟽實啓其端云丙子一鏡雖誅 而䟽下六賊尙未伏法公又慨然曰春秋之法亂臣賊子人得 以誅之遂與同志設請誅六賊䟽主倅鄭必寧搆誣公禍將 不測道伯兪公拓基爲辨其誣事得已愼後三代必寧而來
:: 0105 ::
爲弼顯泰徵所嗾駭機甚張未幾希亮叛一路靡然從 逆公持心益固不少撓奪亂已公記辛壬戊申事及論議 源流俾子孫尋得一箇是是爲公樹立始終也公以英廟 壬申三月二十一日卒距其生肅廟庚申十月十五日壽 七十三葬于固城梧方山子坐之原公性度剛毅氣宇俊爽 夙有才諝業功令策對騈儷靡不敏麗孝友篤至養親志物 兩至有色憂夜不交睫爲七日而不少懈前後喪持制甚嚴 與伯氏不忍暫離內憂時伯氏有疾公勸以滋味伯氏不聽 曰汝其先也公亦不聽曰無病者豈可先於病者乎及伯氏不 淑常以不先嘗肉以盡調護爲罪言及必垂淚拊育孤姪逾
:: 0106 ::
於己出見鄕俗椎魯思有以易之刱修黌序增廣學䂓克 殫心力晩年卜築琴湖爲藏修計山水淸絶花葯紛列翛 然有出塵想左右書史鑽硏名理尤肆力於洛建書時與士 友辯論太極圖洪範傳啓蒙大衍皇極經世律呂新書及先 後天朞三百等義開發蘊奧者多爲文章簡古而宏暢至 於趯勒亦甚精遒有遺集若干卷藏于家公以高麗侍中肅 爲始祖入我朝貞度公易知中樞忠碩直提學忱漁隱希儉 忠毅公文孚尤顯忠毅高祖也曾祖諱大榮生員贈執義 虜變後潔身不仕祖諱有禎贈左承旨號鳳岡尤庵宋先 生稱其孝友梅山洪先生撰狀考諱楫進士號四無齋亦
:: 0107 ::
以文行名妣安東權氏參奉克有其考也配晉陽河氏灦之 女慈良靜肅先公三十五年戊子十二月二十六日歿繼配 達城徐氏監役命新之女後公三十一年壬寅四月十九日 歿幷祔公墓凡三男四女男經臣緯臣女適金鍊采者河 氏出男綸臣女適河載大白東顯金洵者徐氏出績臣側出 也經臣男行毅世毅女適宋錫璟朴馨澈諱臣男元毅亨 毅女適金弼文郡守鄭德濟綸臣男晉毅宅毅觀毅泰毅 益毅咸毅女適姜遂大噫公之行治如彼其盛而沈屈阨窮 不少槩見固爲可惜然其秉執義理與辛壬士類同歸斯 可以百世不朽又何憾乎公後孫世敎來謁牲石之文竊有
:: 0108 ::
所曠感爲之銘銘曰
嗟公德行兼有文雅蘊而莫施知者盖寡明義斥㐫曰 吾所荷毅然不怵彌天之禍先立其大餘可略也梧水湯 湯梧山峨峨有侐堂斧有欝松檟有來百世有過此者 毋敢不式尙識其爲東野歟
崇禎五丙子五月日嘉善大夫吏曹參判大司憲兼經 筵官書筵官世子侍講院左諭善成均舘祭酒西河任 憲晦撰
.....................
老栢軒先生文集卷之四十六
行狀 聾窩李公行狀
公諱頤鎭字稚養號聾窩星山之李以麗太祖佐命
:: 0076 ::
功臣封星山君諱能一爲始祖至諱汝良官左正言 麗亡罔僕中世有諱廷賢號月峯師事寒岡鄭先生 得聞爲己之學不幸短命官至承文正字是於公爲 六世祖諱爾膺有志早世碩九號東溪文科執義敏 修通德郞是爲曾祖若祖若考也妣善山金氏寧野 翁履遠之女久庵文簡公之后也公以正廟己亥 五月十七日生于星州大浦里第自幼性謹厚儀度 沈靜就傅自能力學通德公學于渼湖金文敬先生 敎訓有法度公敬承允蹈其爲學務本實而刊枝葉 世俗芬華塗澤泊如也十五丁母憂哀毁而謹禮如
:: 0077 ::
老成人附身附棺之節誠信靡有悔三十七中純 廟乙丑增廣試生員自是不復求聞達惟讀書史訓 子姪爲事手寫經傳至於諸子百家葺要成編至百 餘卷藏之家晩寓安陰之花林洞狎泉石友猿鶴囂 囂然樂而忘憂簻軸爰得其所而猶不禁攀柏之感 敬梓之心往往發於篇章癸卯十二月七日考終于 寓第壽六十五始葬靈覺村麓後四十年癸未返葬 于故里牛峴負兌原公孝順天得也學以成之左右 就養愉愉翼翼未嘗違志竭力供甘旨不計家窶葬 祭以禮要盡己誠每臨祭鼎爼籩豆之實必在視致
:: 0078 ::
潔平居晨起拜廟非甚病不敢廢律己以敬動止整 肅待人以恭言溫而氣和門族鄕黨莫不依仰矜式 謂公庶幾於望儼卽溫者矣公娶縣監鄭德濟之女 一蠧先生之裔也婦德備夫子在而爲良相夫子歿 而爲嚴君焉子姪有過不少假貸閨門整肅人咸稱 之後公十四年丙辰八月九日卒墓同封祔左有二 男一女男長源一以文學聞次源萬壻權秉直孫男 龍相女愼椀九鄭在元長房出男喜相女張近灝朴 鎭奭朴次房出龍熙權之繼子冡曾孫哲熙草 公行錄屬不佞序次爲狀不佞非其人屢辭不獲則
:: 0079 ::
竊嘗有觀感於長公者可以追想公典型謹櫽▼(括+木)而 第錄之如右遺文爲六丁下收收拾於燼餘僅一冊 在箱惜也
....................
老栢軒先生文集卷之四十六
行狀 求我齋李公行狀
公諱源一字子綏姓李氏系出星山生員聾窩頤鎭 之子通德郞敏修之孫執義東溪碩九之曾孫一蠧 祀孫縣監鄭德濟之外孫上系詳聾窩公狀公生于 星之大浦里第實純廟乙丑十二月十二日也生 有異質儀貌岐嶷幼穎悟七歲讀通鑑授潘氏史論 文甚汗漫而一再過誦不錯一字聾窩公大奇愛之
:: 0080 ::
敎之有定矩鄭夫人閨範亦嚴公濡染服習德器早 就攻苦力學蕭寺巷塾多公啖薺處兼治擧業程文 各體無不嫺習精詣一時輩流皆讓一頭地然志氣 淸介言議亢直未嘗詭隨於人而爲世俗乞墦態以 故累擧而不利於有司旣而曰吾半生所營乃求於 人是求有命焉盍求諸我是求無不可得以求我名 齋族兄尙書公源祚爲之記所居安峽是聾窩公棲 遯之地而有花林猿鶴之勝公登臨嘯詠婆娑自適 居則兄弟對晤塤篪湛和出則朋友相酬律呂宣暢 悠然有林下之趣扶溪田公秉淳學於梅山洪文敬
:: 0081 ::
公而居相接日夕與之講討墳典樂飢忘貧不知年 數之不足焉今上丙寅十一月十八日考終于新 坪寓舍年六十二公仁善其德超越其才風神氣宇 昭朗有出塵之像篤於孝友事親而極其怡愉愛弟 而盡其和悅家素淸貧而喪祭之節克遵先法勿之 有憾先公幽宅寄在寓鄕罔保彼安求葬師而不憚 修程風雪竭誠緬襄觀者感嘆焉以公識趣之高氣 槪之峻俛首黽勉於公車之業蓋亦爲立揚顯親而 無時無命知其不可求則反以求之於內益究傳家 之學觀於齋扁其所存可見矣至季年喪子孤寓窮
:: 0082 ::
匱益深而未嘗有慽慽容望實俱邵遠近士友皆欽 慕之載圭嘗從芝窩鄭公奎元赴試同館鄭公聞公 至卽往拜之載圭竊視之執禮之恭致意之重迥異 於他人之高年富文者權公泰成於公爲友壻也性 亢於輩流無致禮者而對公則斂容肅敬其見重於 士友者如此公之歿侑誄之作甚盛而其族姪寒洲 公震相一句語爲寫眞也貌如霽月開金鏡心似淸 氷貯玉壺後之欲知公者於此可以得其七分矣始 葬寓鄕後戊寅卒襄于故山大浦東十里吾道艮坐 之原而夫人鄭氏祔焉鄭氏載圭叔祖弘民之女性
:: 0083 ::
度貞潔純淑配德無違六親稱誦之先公二年甲子 就幽一男龍相二女適愼椀九鄭在元龍相亦一男 哲熙愼四男炳禮炳義炳準炳斗二女呂翔鎭閔致 佑鄭一男璋鉉哲熙謬以狀行謁載圭載圭文拙何 敢顧念公委禽吾門與先子懼而軒相善嘗曰某也 內符於外行勝於文載圭每拜床承晤纚纚無倦意 而仁愛之發藹若春噓心竊識之今於賢孫之托有 不敢辭第惟公一子先亡一孫尙弱而平日行義宜 有耳目之不逮者且屢經鬱攸遺文盡入灰燼其緖 論不可考則今據哲熙所草錄而序次之只是鄕黨
:: 0084 ::
士友之所誦慕者曷足以狀公云哉然泰芒豹斑知 者亦可以推之用以吿于世之君子
:: 0085 ::
老栢軒先生文集卷之四十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