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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곡동 오언(吳彦) 장군(將軍) 묘(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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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사학자 이현우의 우리고장 문화유산 이야기 (69)
오언 장군의 위패가 모셔진 연화사.
오언은 고려의 무신으로 생몰(生沒)연대는 미상이다. 본관은 동복(同福). 충익공(忠翼公) 예부상서(禮部尙書) 윤백(允伯)의 셋째아들이다. 문명공(文明公) 개성부(開城府) 좌윤(左尹) 천(蕆)의 손자다. 아들은 오빈이다.
공민왕(恭愍王)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밀직사(密直使), 병마사(兵馬使). 원수(元帥). 도순문사(都巡問使)를 역임했다. 밀직사(密直使)는 1275년 고려 충렬왕 때 몽골의 간섭하에서 왕명의 출납, 궁중의 숙위, 군기의 정사를 맡아보던 관서이다. 병마사(兵馬使)는 고려시대 중앙군의 지휘관이며, 원수(元帥)는 군인장성의 계급중의 하나이다. 도순문사(都巡問使)는 고려시대 군사임무를 띠고 지방에 파견된 관직이다.
오언 묘 문인석.
오언 묘는 안산시 단원구 원곡동 산25번지에 있으며 2004년 종손 오장록의 산으로 양상동에서 천장을 하였다. 오언의 묘는 수차례에 걸쳐 도굴이 된 것이며 묘역의 상석과 문인석, 동자석은 고려시대 것으로 확인된다. 양상동의 산꼭대기에 있었으며 묘비가 유실되어 구전으로 오언 장군 묘라고 전해오던 것이고, 문중의 문서에서도 오언 장군의 묘가 그 곳에 있었음이 확인돼 묘와 석물들을 이전하였다. 오언의 묘갈명은 고려영록대부밀직사판사사오공묘갈명(高麗榮祿大夫密直司判事司吳公墓碣銘)으로 되어있다
오언은 왜구(倭寇)가 창궐하던 시기에 대부분의 시간을 왜구를 맞기 위한 전쟁터에서 보냈다. 문신으로 개경(開京)에 있으면서 나라가 망하는 것을 볼 수 없다 하고 왜구 토벌을 자청하여 출정한 것이다. 고려사(高麗史)에서 그의 전적을 보면.
1379년(禑王 5) 경상도 원수 우인열(禹仁烈), 배극렴(裵克廉), 박수경(朴修敬), 병마사 오언(吳彦)이 사주(泗州)에서 왜적을 크게 격파하였다. 또 그 해에 왜적이 방성현을 침범하여 확산(確山) 꼭대기에 올라 목책(木柵)을 세워 방비하고 있는 것을 우인열, 박수경, 오언이 합세하여 포위 공격하여 이를 탈환하였고, 또 왜적이 광주(光州)와 능성(綾城:화순) 두 현을 침범하니 원수 최공철(崔公哲), 김용휘(金用輝), 이원계(李元桂), 정 지(鄭 地), 오 언(吳 彦), 왕승보(王承寶), 도 흥(都 興)등이 역전(力戰)하여 격퇴했다.
함양사근산성(咸陽沙斤山城)은 경상남도 함양군 연화산(해발443m)의 세 봉우리를 중심으로 능선을 따라 장방형 석재로 품자형(品字形)으로 쌓은 석성인데, 1380년(禑王 6) 8月, 왜선 5백척이 진포에 정박하고 倭將(왜장) 아지발도(阿只拔都)가 3천여명의 군사를 이끌고 경북 상주를 유린한 후 호남지방으로 진출하기 위하여 군사 요충지인 사근산성을 침략했다. 오언은 배극렴, 김용휘 지용기, 정지, 박수경, 배언, 도흥, 하을지 등 9명의 장수와 함게 5백여 군사와 사력을 다해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박수경, 배언 두장수와 5백여 군사는 전멸하였으며 이때 함양감무 장군철도 함께 전사했다.
함양사근산성.
양광도 도순문사(陽廣道 都巡問使)가 된 오언은 함부로 침범해온 왜적을 두 번에 걸쳐 크게 무찔렀으니 한 번은 1381년(禑王 7) 이산수(伊山戍)에서였고, 또 한 번은 그 다음해 임주(林州)에서였다.
고려 말 조신 간에 신구대립(新久對立)이 격심하였을 때, 그는 이색(李穡), 변안열(邊安烈), 최영(崔瑩), 우현보(禹玄寶)등 구세력에 속하여 신세력인 이성계(李成桂), 정도전(鄭道傳), 조준(趙俊)등과 대립하였다. 1392년(恭讓王 4) 정몽주(鄭夢周)가 선죽교(善竹橋)에서 격살되고, 그 해 7월 이성계가 추대되어 조선왕조를 개국(開國)하자 출사(出仕)를 거절하고 안산(安山)에 은거하여 여생을 보내다가 이 곳에서 졸서(卒逝)하였으니 동복오씨(同福吳氏) 안산파(安山派)의 종조(宗祖)이다.
[참고문헌]
『안산지역 비지정문화재 조사Ⅲ』 (안산향토사연구소 2016)
- 박영희의 글에서 부분전재 -
반월신문 webmaster@banwo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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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양하씨(晉陽河氏),진양하씨시조,하공진,진양하씨유래,진양하씨조상인물
하윤린(河允潾) 순흥부사 봉익대부 예의판서 역임 충근익대 보조수의 협찬공신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으로 진양 부원군
하윤구(河允丘) 문과 급제 통정대부 부윤
하을지(河乙沚) 1344년에 문과 장원 1366년 전공정랑으로서 홍건적을 개경에서 격퇴하고수복한 공으로 1등 공신에 책록 되었다 1375년 전라도 도원수 겸 도안무사가 되었고 청천군에 책록 되었다
하을숙(河乙淑) 한림원 학사 정용량장 비순위 지미사 배향
하을부(河乙桴) 참판 군기감
하을순(河乙洵) 문하시중을 지내다.
[진양하씨] 하을지(河乙沚)
고려시대, 1344년에 문과 장원 1366년 전공정랑으로서 홍건적을 개경에서 격퇴하고수복한 공으로 1등 공신에 책록 되었다 1375년 전라도 도원수 겸 도안무사가 되었고 청천군에 책록 되었다
하을지 河乙沚
고려후기 수복경성1등공신에 책록된 공신.
인물/전통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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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으로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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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후기 수복경성1등공신에 책록된 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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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은 진주(晉州). 1344년(충혜왕 복위 5) 지공거(知貢擧) 박충좌(朴忠佐)가 주관한 과거에서 급제하였다. 1363년(공민왕 12) 전공정랑(典工正郎)으로 앞서 홍건적의 침입 때 개경을 수복한 공로로 1등공신이 되었다.
1373년 강화만호가 되었을 때 왜구가 양천(陽川)을 노략질하고, 한양부(漢陽府)에 이르러 가옥을 불태웠는데도 방비하지 못한 데 대한 책임으로 장형(杖刑)에 처해졌다. 1376년(우왕 2) 전라도원수 겸 도안무사(全羅道元帥兼都安撫使)가 되었으나, 재주도 없고 행실도 바르지 못한데 권귀(權貴)에게 뇌물을 주어 원수직을 얻었다는 비난이 있었다.
또, 이 때 군적(軍籍)을 편성하면서 연호군(煙戶軍)과 별군(別軍)을 정원 외로 편성한 죄로 파직되었는데, 후임 원수인 유영(柳濚)이 부임하기도 전에 전사(田舍)로 돌아갔다. 이 틈을 이용하여 왜구 20여 척이 나주에 들어와 병선과 병영 및 민호를 태우고 노략질을 하였으나 막을 사람이 없었다.
그 죄로 순위부(巡衛府)에 체포되어 장형 100에 처해지고 하동현에 유배되었다. 곧 석방되어 계림원수(鷄林元帥)로 기용되었는데, 일본해도포착관(日本海道捕捉官) 박거사(朴居士)가 계림에 침입한 왜구에게 고전하는 것을 방관하여 대패하게 하였다.
참고문헌닫기
- 『고려사(高麗史)』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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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도씨(星州都氏)
성주도씨(星州都氏)의 시조에 대해서 "경술보(庚戌譜)"수성시조(受姓始祖) 편에 보면 시조가 도 계(都稽)라고 한다.
그는 기원전 110년 한무제때 중국 남월(南越)의 재상인 여가(呂嘉)가 왕건덕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을 때 복파장군(伏波將軍)으로 여가를 사로잡고 반란을 토평한 공으로 임채후(臨蔡侯)에 봉해지고 도씨(都氏)로 수성(受姓)함으로써 도씨(都氏)가 비롯되었다고 한다.
시조 도 계의 후손으로 도 조(都祖)가 한나라 성제때 사람인데 고구려로 건너와 유리왕을 도와 공을 세우고 정착하면서 우리나라 도 씨(都氏)의 가계가 시작되었다.
우리나라 도씨의 시조 도조의 후손으로 백제 개루왕 때의 재상 도 미(都彌),그리고 통일신라 때의 도 유(都儒)는 신라에서 김유신을 도와 백제군을 격파하는 등 여러 공을 세워 상천후(尙川侯)에 봉해졌다고 한다.
출처 : 디트NEWS24(http://www.dtnews24.com)
도 흥(都興)은 공민왕때의 무신으로 명성을 날렸으나 상원수(上元帥)로 전라도도순문사(全羅道都巡門使)가 되어 재직중에 왜구의 침입을 잘 막지 못해 한때 파직되었다가 다시 기용되어 왜구 방어에 공을 세웠다. 1392년 정몽주가 이방원 등에 의해 살해된 뒤 그의 일파로 몰려 유배를 당했다.
출처 : 디트NEWS24(http://www.dtnews24.com)
고려 때의 도씨(都氏)인물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사람은 도효안(都孝安)의 아들 도홍정(都洪正)이다. 그는 공민왕 때 시중(侍中:고려때 국정을 총괄하던 대신으로 종1품 정승)에 오르면서 정계의 중심 인물로 활약했다. 역사도서 찾기
그의 아들 도길부(都吉敷)는 우왕 때 찬성사(贊成事:문하부의 정2품)를 역임한 무신으로 당시 세도가 이인임(李仁任)의 인척이었다.
도길부(都吉敷)는 1380년 왜구가 대거 침입 해 충청.전라도지방이 큰 화를 입게 되자 이성계등과 함께 충청도에서 전투를 시작하여 지리산에서 왜구를 완전히 격퇴했다.
이것이 황산대첩(荒山大捷)이다. 그러나 이인임(李仁任)이 실각하는 정변에서 그 일파로 몰린 그는 죽음을 당하고 일족은 풍비박산 곳곳으로 흩어지게 됐다. 도(都)씨들은 이 참변을 <기사화변(己巳禍變)>이라 부르고 있다.
도길부(都吉敷)의 아들 청송당(靑松堂) 도 응(都膺)은 고려말을 대표하는 도(都)씨의 인물로 찬성사(贊成事:문하부의 정2품 벼슬)를 지낸 그는 이성계와 가까운 사이였다.
기사화변(己巳禍變)때 장인 우인열(禹仁烈)의 덕으로 화를 면하였고 고려가 망한 후에는 홍주 노은동(魯隱洞)에 은거하였는데 태조 이성계가 상장군(上將軍;정3품최고지휘관)에 임명하고 두 번이나 예물을 보내 출사를 권했으나 뿌리쳤다.
그 뒤에도 이성계가 다섯 차례나 불렀지만 끝내 응하지 않고 불사이군(不事二君:한 사람이 두 임금을 섬기지 아니함)의 지조를 지켰다. 이에 감복한 이성계는 청송당(靑松堂)이라는 호와 송절시(頌節詩)를 내려 그의 절의를 기렸다고 한다.
이때의 왕지(王旨) 4점과 왕명 1점이 보물 724호로 지정돼 충남 연산의 보호각에 소장되어 있다. 도 응은 고려말에 절의를 지킨 두문동(杜門洞)72현의 한사람이다. 가이드북읽기
출처 : 디트NEWS24(http://www.dt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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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정씨,하동정씨시조,정도정,정응,정손위,하동정씨본관,하동정씨조상인물
정지(鄭 地) : 고려(高麗) 호는 퇴암(退菴) 시호는 경열(景烈) 금성군(錦城君) 성(盛)의 아들 사마시(司馬試)와 문과(文科) 예의판서(禮儀判書) 전라도 순문사(巡問使)로 여러 차례 왜구를 격파하고 해도원수(海道元帥)가 되어 많은 전함을 건조하고 화포(火砲)를 실전에 활용 여러 차례 왜구와 왜적함선을 격파 대승하였다. 큰 공으로 양광,전라,경상,강릉도 도지휘처치사(楊廣,全羅,慶尙,江陵道 都指揮處置使)에 오르고 문하평리(門下評理)에 제수되었다. 광주 경열사(光州景烈祠)에 배향되고 우리나라 해군(海軍)의 아버지로 일컫는다.
정경(鄭 耕) : 고려(高麗) 경열공 지(地)의 아들 문과(文科) 전라도 도절제사(都節制使)를 위시 의주,안동,전주 등 7개도 관찰사를 지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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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극렴 裵克廉
고려 후기에, 진주·상주의 목사, 합포진첨사 등을 역임한 문신·공신.
증평 배극렴 묘소
이칭
인물/전통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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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극렴은 조선전기 개국1등공신에 책록된 공신이자 문신이다. 1325년(충숙왕 12)에 태어나 1392년(태조 1)에 사망했다. 고려말 왜구의 침략을 물리치는 데 큰 공을 세워 밀직부사에까지 승진했다. 1388년 이성계의 휘하에서 위화도회군을 도왔으며, 이어 3군도총제부의 중군총제사가 되어 도총제사 이성계의 병권 장악에 일익을 담당했다. 1392년 문하우시중으로 조준·정도전과 함께 공양왕을 폐하고 이성계를 추대, 조선 건국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 공으로 문하좌시중이 되어 두 왕조에 걸쳐 정승에 올랐으나 그 해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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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후기에, 진주·상주의 목사, 합포진첨사 등을 역임한 문신·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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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은 경산(京山). 자는 양가(量可), 호는 필암(筆菴) · 주금당(晝錦堂). 문음(門蔭) 출신. 아버지는 위위시소윤(衛尉寺少尹) 배현보(裵玄甫)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닫기
고려 말 진주 · 상주의 목사(牧使)와 계림윤(鷄林尹) · 화령윤(和寧尹) 등 외직을 담당할 때 선정을 베풀었다.
1376년(우왕 2)에는 진주도원수(晉州都元帥)로 진주에 침략한 왜구를 반성현(班城縣)에서 크게 격파하였다. 이듬해에는 우인열(禹仁烈)을 대신해 경상도도순문사(慶尙道都巡問使)가 되어 왜구 방어에 공을 세웠다.
이 때 병영이 있는 창원 인근의 합포(合浦)에 왜구 방어를 위한 축성을 주관, 완성했는데 조선시대 경상우도병마절도사영(慶尙右道兵馬節度使營)의 번성(藩城)이 그것이다.
한편 1378년 경상도원수로서 욕지도(欲知島)에서 왜구를 대파하고, 겨울에는 경상도도순문사로서 하동과 진주에 침략한 왜구를 추격, 사주(泗州)에서 크게 이겼다.
이듬해에는 진주 반성현의 대혈전(大血戰), 울주전투와 청도전투 · 사주전투 등에서 크게 활약하였다. 그 뒤, 정치적 성장을 거듭, 1380년에는 밀직부사(密直副使)에 올랐다.
1388년의 요동 출병 때 우군의 조전원수(助戰元帥)로 우군도통수(右軍都統師)인 이성계(李成桂)의 휘하에 참여,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을 도와주었다. 1389년(창왕 1) 7월에는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의 요직을 맡았다. 그 해 10월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로 승진하고, 하정사(賀正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390년(공양왕 2)에는 평리(評理)로서 회군공신(回軍功臣)에 추록되었으며, 같은 해에 양광도찰리사(楊廣道察理使)가 되어 한양 궁궐의 조성을 감수하였다. 이어 삼군도총제부(三軍都摠制府)의 중군총제사(中軍摠制使)가 되어 도총제사(都摠制使) 이성계의 병권 장악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같은 해에 판삼사사(判三司事)가 되어 개경의 내성(內城)을 축성하는 총책을 맡고, 1392년에는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에 올랐다. 그 해 7월 문하우시중(門下右侍中)으로 조준(趙浚) · 정도전(鄭道傳)과 함께 공양왕을 폐하고 이성계를 추대, 조선 건국에 중요한 소임을 담당하였다.
이어 1등 개국공신이 되고 성산백(星山伯)에 봉해졌으며, 문하좌시중(門下左侍中)이 되었다. 1392년 11월 세상을 떠났으며 고려와 조선 두 왕조에 걸쳐 정승에 올랐다.
그러나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 강씨(神德王后康氏) 소생인 이방석(李芳碩)이 세자에 책봉되는 데 관여했다는 이유로 뒤에 태종에 의해 폄하(貶下)되었다. 아들이 없어 누이의 외손인 안순(安純)이 주상(主喪)이 되었다. 시호는 정절(貞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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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산성주배씨,성산배씨,성주배씨시조,배위준,성주배씨조상인물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 무적(武迪)의 6세손 극렴(克廉, 위위소윤 현보의 둘째 아들)은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진주 ․ 상주의 목사(牧使)와 계림(鷄林) ․ 화령(和寧)의 부윤(府尹)을 지내고 우왕(禑王) 때 경상도 도순문사(都巡問使)가 되어 양백연(梁伯淵) ․ 우인렬(禹仁烈) 등과 함께 진주와 사근역(沙斤驛 : 경산부)에 침입한 왜구를 격파했으며, 조전원수(助戰元帥)로 이성계(李成桂)를 도와 위화도(威化島) 회군을 결행하고 우시중(右侍中)에 올라 조선 창업에 공을 세워 개국일등공신(開國一等功臣)으로 성산백(星山伯)에 봉해져서 크게 명성을 떨쳤다.
배극렴(裵克廉) 1325(충숙왕 12) ~ 1392(태조 1) 자는 양가(量可), 호는 필암(筆菴) ․ 주금당(晝錦堂), 시호는 정절(貞節). 공민왕 (恭愍王) 때 문과에 급제, 진주(晋州) ․ 상주(尙州)의 목사(牧 使), 계림(鷄林) ․ 화령(和寧)의 부윤(府尹), 합포진 첨사(合浦鎭 僉事) 등을 역임, 1376년(우왕 2) 경상도 도순문사(都巡問使) 로 양백연(梁伯淵) ․ 우인렬(禹仁烈) 등과 진주에 쳐들어 온 왜 구를 반성현(班城縣)에서 대파하고, 1378년 삼도원수(三道元 帥)로 경산부 사근역(京山府 沙斤驛)에서 또다시 왜구를 격파했 다. 이후 이성계(李成桂)의 휘하에서 여러 차례 왜구를 토벌하 고 1388년(우왕 14) 조전원수(助戰元帥)로 위화도(威化島)에 서 이성계 등과 회군(回軍)을 결행, 구세력을 추방했고, 이듬해 평리(評理) ․ 양광도 찰리사(陽廣道 察里使) 등을 역임, 1390년 (공양왕 1) 중군총제(中軍摠制) ․ 판삼사사(判三司事)를 거쳐 수 문하시중(守門下侍中)에 올랐다. 1392년 우시중(右侍中)으로 조 준(趙 浚) 등과 모의, 공양왕(恭讓王)을 폐하고 이성계(李成 桂)를 추대하여 개국공신 1등이 되고 성산백(星山伯)에 봉해졌 으며 문하좌시중(門下左侍中)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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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성배씨(達城裵氏),달성배씨시조,배운룡(裵雲龍),달성배씨유래,달성배씨조상인물
배균(裵 均) 자(字)는 호익(虎翼), 호(號)는 율헌(栗軒). 1380년(우왕 6) 원사(元師) 배극렴(裵克廉)과 정 지(鄭 地) 휘하에 있다가 함양 사근역 전장(咸陽沙斤驛戰場)에서 왜구를 맞아 많은 공(功)을 세우고 순절하였다.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추증(追贈)되었다.
공민왕(恭愍王) 때 과천(果川)에 침입한 홍건적(紅巾賊)을 토벌하다가 아들 광유(光裕)와 함께 순절한 성경(成慶)은 밀직부사 정지의 맏아들로, 그의 아우 천경(天慶)․함경(咸慶)과 더불어 가문의 중추적(中樞的)인 인맥(人脈)을 형성하였다.
신유당옥(辛酉黨獄)으로 아버지 정지가 무고를 받아 유배되자 대신하여 수형(受刑)할 것을 간청했던 천경(天慶 : 성경의 아우)은 공민왕을 호종하여 단성강절공신(端誠康節功臣)으로 금자숭록대부(金紫崇祿大夫)에 올라 달성군에 봉해졌으며, 그의 아우 함경(咸慶)은 맏형인 성경과 함께 홍건적을 토벌하는 데 공을 세워 정충효절공신(貞忠效節功臣)으로 검교장군(檢校將軍)에 올라 명성을 떨쳤다.
성경의 손자 균(均 : 광유의 아들)은 우왕(禑王) 때 함양(咸陽)의 사근역(沙斤驛)에서 왜군과 맞서 싸우다가 순절하여 의절(義節)의 가통을 이었고, 고려 말에 충신(忠臣) 정몽주(鄭夢周)와 뜻을 같이 했던 을서(乙瑞 : 균의 아우)는 조선의 개국(開國)한 후 수차에 걸친 태조(太祖)와 태종(太宗)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고 둔거하여 고려 말 절의충신(節義忠臣)으로 유명했으며, 야은(冶隱) 길재(吉再)에게 글을 배웠던 인경(仁敬 : 성경의 증손, 문우의 아들)은 태종 때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를 지내고 세종 때 고주 수령(固州守令)으로 나가 선정(善政)을 베풀어 뒤에 고부군(古阜君)에 봉해졌다.
배언 裵彦
고려후기 밀직부사, 화령부윤, 판밀직 등을 역임한 관리.
인물/전통 인물
집필 및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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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고려후기 밀직부사, 화령부윤, 판밀직 등을 역임한 관리.
개설
본관은 달성(達城). 자는 호익(虎翼). 초명은 배을균(裵乙均), 배균(裵均). 조부는 배성경(裵成慶)이고, 부친은 배광유(裵光裕)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377년(우왕 3) 밀직부사(密直副使)에서 화령부윤(和寧府尹)이 되었다. 1379년 문하평리(門下評理) 이무방(李茂方)과 함께 판밀직으로서 명나라에 금 31근 4냥, 은 1,000냥, 백세포(白細布) 500필, 흑세포 500필, 잡색마(雜色馬) 200필을 세공(歲貢)으로 가지고 갔다.
그러나 명나라가 조공의 내용이 약속과 다르다고 입국을 거부하여 등주(登州)에서 기다리다가 다음 해 6월 돌아오고 말았다. 같은 해 8월 왜적이 침입하여 사근내역(沙斤乃驛: 지금의 경상남도 함양)에 주둔하자 원수로서 배극렴(裵克廉)·박수경(朴修敬)과 더불어 공격하였으나, 패배하여 박수경과 같이 전사하였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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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경 朴修敬
고려후기 안동도원수 겸 안동부윤, 경상도도순문사 등을 역임한 무신.
인물/전통 인물
집필 및 수정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으로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고려후기 안동도원수 겸 안동부윤, 경상도도순문사 등을 역임한 무신.
생애 및 활동사항
1363년(공민왕 12)에 대호군으로서 전년에 홍건적을 격퇴한 공으로 이등공신이 되었다.
1374년에 안주목사(安州牧使)로 있을 때 안주에 침입한 왜구를 물리쳤으며, 1377년(우왕 3)에 원수로서 최영(崔瑩) 등과 함께 해주(海州)·평주(平州: 지금의 황해도 평산)에 침입한 왜구를 격퇴하였다.
이듬해 밀직부사(密直副使)로서 남양(南陽)·수원부(水原府)에 침입한 왜구를 격퇴하였고, 또 아주(牙州: 지금의 충청남도 아산)에 침입한 왜구를 물리쳤다.
1379년에 안동도원수 겸 안동부윤이 되어 왜구를 무찔렀고, 1380년에 경상도도순문사(慶尙道都巡問使)가 되었는데, 그해 사근내역(沙斤乃驛)에서 원수 배극렴(裵克廉)·정지(鄭地) 등과 함께 왜구를 무찌르다가 전사하였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