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산강 유역의 대표적 정자인 식영정으로 갑니다
공식설명을 인용합니다.
그의 호인 한호처럼 한가로움을 좋아한다는 취지로 그림자가 잠깐 쉬었다 가는 곳이라 하여 식영정으로 불렀다고 전해진다. 임연의 증손으로 동사회강을 지은 문인학자인 노촌 임상덕(林象德1683~1710)이 제현과 교류하는 등 무안 몽탄 이산리의 나주임씨 강학교류 공간이었다. 무안 이거와 경관, 정자 건립 등에 관해서는 1643년에 임연이 지은 복거록에 잘 나타나 있고 교류한 문인도 많다. 식영정은 창건주 임연의 증손인 노촌 임상덕 등 대를 이어가면서 교류공간으로 활용되었다. "
"현재의 건물은 1900년대 초반에 중건한 건물이며,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층 건물로 팔작지붕이다. 시멘트로 마감되어 있어 그 원형을 알 수 없는 낮은 기단 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그 위에 원통형의 원주(圓柱)를 세웠다. 종도리와 주심도리는 굴도리로, 중도리는 납도리로 되어 있고 마루대공은 판대공(板臺工)으로 되어 있다. 중앙의 마루방 3면에는 사분합문이 설치되어 들쇠에 매어달게 되어 있으며 후면 벽에는 다락이 있다."
식영정앞 돌계단을 내려가면 몽탄강을 잘 볼 수 있는 곳이 나옵니다.
이곳은 영산강 팔경중 2경 몽탄노적에 해당되는 곳으로 영산강의 아름다움을 잘 표현하는 대표적인 장소로 꼽습니다.
몽탄강의 전설을 한번 들어보시지요.
"몽탄강은 무안군 몽탄면과 나주군 동강면을 연결하는 영산강 하류를 말하며 이곳을 몽탄강이라 이름한 것은 후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려태조 왕건이 아직 후삼국을 통일하기 이전에 후백제 견훤과 한판의 승부를 겨루게 되어 견훤이 마지막 나주성에 웅거하여 고려군과 싸우게 될 때 왕건이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동강면 옥정리 몽송부락에 당도하여 진을 쳤었다.
그 때에 견훤군이 사방을 애워싸고 공격하니 포위된 고려군은 당황하여 포위망에서 혈로를 뚫으려하였으나 마침 강물이 범람하여 빠져 나갈 수 없기 때문에 고려군은 사력을 다하여 방어하였으며 밤이 깊어서야 견훤군이 공격을 멈추어 서로가 방어태세를 갖추게 되었고 싸움은 소강상태에 들어가게 되어 고려군은 지친 나머지 잠에 빠지게 되었다. 물론 고려의 장수 왕건도 군막에서 잠이 들었는데 백발노인이 왕건 앞에 나타나 "앞으로 대업을 이루려는 장군이 일기도 모르고 잠만 자면 되는가 지금 강물이 빠졌으니 군사를 이끌고 빨리 강을 건너 무안 청용리 두대산을 향하여 파군천 하류에 진을 치고 있다가 견훤군이 뒤를 쫓으면 그곳에서 견훤군을 치면 장군은 크게 승리하고 삼국을 통일하는데 성공할 것이다."라고 말하며 사라졌다. 왕건은 깜짝 놀라 일어나니 꿈이었다. 왕건은 이상한 꿈인지라 밖을 나가보니 과연 강에는 물이 완전히 빠져있어 급히 군사를 깨어 강물이 빠진 여울을 건너 청용리 두대산을 향하여 행군하니 두 대산은 마람으로 이어져 군량미를 쌓아놓은 노적봉 같았고 파군천에 이르니 마치 강물이 하얀 쌀뜨물처럼 흐르고 있어 이상히 여기고 군사를 좌우에 매복시켜놓고 지형을 살피고 있을 때 견훤군이 뒤를 쫓아오다가 이상한 노적봉이 있고 또 하얀 쌀뜨물이 흐르니 큰 군사가 진을 치고 있는 줄 알고 전진을 주저하고 있을 때 좌우에 매복되었던 왕건의 군사가 함성을 지르며 협공하니 혼비백산한 견훤의 군대는 지리멸열하여 크게 부서지고 견훤은 겨우 생명을 부지하여 도망하였다.
그 후 이 강을 꿈에 여울을 건넜다 하여 몽탄강이라 부르게 되었고 이 몽탄강 하류의 전승지를 파군천이라 하였으며 이 천을 이은 다리를 파군교라 하였다."
다시 식영정으로 올라갑니다.
파군천옆을 지나 백련지로 갑니다.
파군교를 넘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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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하늘타리정원 원문보기 글쓴이: 하늘타리
첫댓글 인심좋은 마을이 있는 남도의 젖줄 영산강가의 식영정을 둘러보셨네요......몽탄강의 전설도 잘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