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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 저술‘안중근 전기’연구
윤선자 (전남대학교 사학과 교수)
Ⅰ. 머리말
Ⅱ. 저자와 저술·간행 시기
Ⅲ. 구성
Ⅳ. 안중근 의거 평가
Ⅴ. 맺음말
현재까지발굴된, 해방 이전 중국인이 저술한 안중근 전기는 장사 정원의《안중근》과 매현 섭천예의《안중근전》두 편이다. 중국인이 저술한 두 편의 안중근 전기는 안중근 의거 직후부터 저술되었고, 많은 이들의 글을 모아 비슷한 시기인 1919년 이후와 1920년에 간행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의 중국 침략 야욕이 심화되고 있단 당시 중국인들에게 이토 히로부미는 중국침략의 상징적인 인물로 인식되고 있었다. 따라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안중근에게 중국인들은 관심을 기울였고, 관심의 결과 안중근 전기를 저술·간행하였다.
정원의 안중근 전기는 안중근을‘자객’으로, 섭천예의 안중근 전기는 안중근이‘성인(成仁)’하였다는 시각으로 전기를 저술하여 안중근의 의거를 바라보는 시각에 비판과 긍정의 다른 구조를 그려냈다. 정원의《안중근》에 수록된 글들은 대부분 외부의 적 살해보다는 내부의 매국노 살해가 시급하다고 기술하였다. 정육·채원배 등 26명의 중국인들은 안중근 의거를 단순히‘자객행위’로 파악하면서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것은 결과적으로 한국의 국망을 촉진시킨 것으로 설명하였다.
그러나 안중근 의거에 긍정적인 평가를 한 도용·비수위·적욱의 글은 안중근 의거에 대한 중국인들의 다양한 시각과 평가를 말해준다. 외부의 적 제거보다는 내부의 적 제거에 무게 중심을 두었으므로 정원의《안중근》은 안중근의 이토 암살 이유, 안중근 의거를 적극적으로 기술하지 않았다.
그런데 한국인 안중근이 중국인들에게 전기의 대상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한국의 국권을 위협할뿐 아니라 동양 평화를 깨트리는 선봉장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때문이었다. 따라서 이토 히로부미 처단 이유와 안중근 의거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그 깊은 의미를 기술하지 않는 안중근 전기라면 많은 한계가 있다.
상해에서 비슷한 시기에 간행된 정원과 섭천예의 안중근 전기는 외국인의 저술이라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안중근 의거에 대한 섭천예의 평가가 긍정적인 것은 박은식의 안중근 전기를 토대로 하고 박은식의 안중근 의거 인식과 공감대를 형성한 때문이었다. 반면 안중근 의거를 국망이 빨라진 원인으로 본 정원 등의 기술은 한국인 저자들과의 인식 공유보다는 중국인들에게 국망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목적으로 한 때문이었다.
Ⅰ. 머리말
일본의 침략에 위기감을 느끼고 있던 중국인들은 안중근 의거에 큰 충격으로 받았고, 신문 보도·소설·연극·영화 그리고 전기(傳記) 등 여러 형태로 관심을 나타냈다.1) 그중 전기란 한 개인의 생애와 활동, 업적 따위를 적은 기록이다.2)
안중근 전기의 핵심은 여순감옥에서 1909년 12월 13일 기고하여 1910년 3월 15일 탈고한 자서전《안응칠역사》(安應七歷史)이다.3) 1879년 7월 16일(음력) 출생부터 가족의 일화, 성장 과정, 동학농민군과의 전투, 천주교 입교, 지방관의 학정과 부패에 대한 저항, 교육구국운동, 의병전쟁 참여, 이토 히로부미 처단, 검찰과 재판관의 심문과 공판 과정, 그리고 1910년 2월 1일(음력) 천주교 병자성사에 이르기까지의 일생을 기록하였다. 동지들의 신변을 위하여 가능한 한 관련 인물들에 대한 언급을 자제하거나 생략한 부분이 적지 않다.4)
현전하는 안중근 전기는《안응칠역사》외에도 여러 편이다. 조광 교수에 의하면, 2010년 현재 안중근 전기는 아동용을 제외하고 해방 이전 15편, 해방 이후 37편이다.5) 이중 가장 먼저 저술된 것은 1910년 김택영(金澤榮)[通州]이 저술한《안중근전》(安重根傳)6)이고, 가장 먼저 간행된 것은 1911년 미국 하와이의 신한국보사에서 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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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韓時俊, 〈中國人이 본 安重根 -朴殷植과 鄭沅의《安重根》을 중심으로-〉, 《충북사학》11?12합집 -鶴山金鎭鳳敎授停年紀念特輯號-, 충북대학교 사학회, 2000, 494쪽 ; 한시준, 〈안중근에 대한 중국학계의연구성과와 과제〉, 《한국근현대사연구》59, 2011, 201쪽.
2)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지음, 《고려대 한국어사전》,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2009,
3) 안중근 의사 재판기록과 안중근 옥중자전의 일본어 번역 등사본은 1969년 일본 도쿄의 간다 고서점에서 도쿄 국제한국연구원 최서면 원장에 의하여 발견되었고, 1978년에는 일본 나가사키에서 고미술상을 경영하던 와타나베 쇼시로에 의하여 알려졌다(나가사키본). 이듬해인 1979년 일본 국회도서관 헌정자료실에 보관중인〈시치조문서〉에서〈안응칠 역사〉와〈동양평화론〉의 등사합본이 발견되었다(시치조본). 1970년 안중근의사숭모회에서 일본어 등사본을 저본으로 삼아〈안중근 의사 자서전〉을 , 1979년순한문본인 나가사키본을 저본으로 1979년에 간행했다. 이어 나가사키본의‘이하 생략’부분을 시치조본에서 보완하여 1990년 안중근의사기념관에서《안중근의사 자서전》으로 간행했다.
4) 윤병석, 〈安重根의사의 著述과 遺墨 - 《安重根全集》편찬을 위한 기초작업-〉, 《안중근 연구의 기초》
경인문화사, 2009, 82쪽.
5) 조광, 〈안중근 연구 백년〉, 《한국 근현대 천주교사 연구》, 경인문화사, 2010, 36~38쪽.
6) 위당(韋堂) 안숙(安潚)이 편찬한《사재》(史材) 속에 필사 수록되었고, 《창강전》(滄江傳) 권11에도 수록.
1916년 창해노방실의《안중근》(安重根)을 보고 개작, 잘못된 것을 수정하여 그의 문집《조호당문집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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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간행된 애산자(哀汕子) 홍종표(洪宗杓)의《대한위인 안중근전》(大韓偉人 安重根傳)이다.7) 이어 1913년 백산포민(白山逋民) 저(著) 《삼한의군참모중장 안중근전》(三韓義軍參謀中將 安重根傳)8), 1914년 말에서 1915년 초 간행된 창해노방실(滄海老紡
室) 고(稿) 《안중근》(安重根)9), 1914년《권업신문》에 한글로 연재된 단선(檀仙)[桂奉瑀,
연해주]의《 》10), 1917년 옥사(玉史) 편서(編書)의《만고의사 》11), 그리고 이건승(李建昇)[서간도]의《안중근전》(安重根傳)이 1910년대에 간행되었다.12) 그리고 중국인들에 의해서도 해방 이전에 안중근 전기가 간행되었는데 섭천예(葉天倪) 찬(撰) 《안중근전》(안중근전)13)과 장사(長沙) 정원(鄭沅)의《안중근》(安重根)14)이다.
안중근 전기들은 안중근 심문 자료와 더불어 안중근 연구의 기초 자료로 활용되고있다. 그러므로 보다 정확하고 폭넓은 안중근 연구를 위해서는 이들 전기에 대한 분석이 요구된다. 안중근 전기들은 윤병석 교수에 의해 전체적으로 검토되었고,15) 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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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詔護堂文集定本) 권9, ‘전(傳)’에 재수록. 중국 통주(通州). 1면 240자, 총 11면(윤병석 역편, 《안중근전기전집》, 국가보훈처, 1999, 443쪽)
7) 표제만 한자, 본문 16면은 한글. 이 자료는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편, 《안중근의사자료집》, 국학자료원, 1999 및 윤병석 역편, 《안중근전기전집》, 국가보훈처, 1999에 수록. ‘작자불명(作者不明)’인 일역(日譯) 필사본《근세역사》(近世歷史)에는‘大韓 隆熙四年四月十五日(明治 四十三年)’라 적혀 있는데, 1910년 4월 15일 국내에서 간행된 최초의 안중근 전기이다.(윤병석 역편, 《안중근전기전집》, 413쪽)
8) 1912년 북경에 머물 때 저술, 상해로 와 혁명당 계통 잡지《민국휘보》(民國彙報)(1913년 1월 20일 창
간) 제1권 제1기에 수록.(윤병석, ‘해제’, 《1세기만에 보는 희귀한 안중근 전기》, 국학자료원, 2010, 15쪽)
9) 앞면 표지에, “‘안중근전’은《동서양위인총사》(東西洋偉人叢史)에 실린 적이 있다. 이‘안중근전’은 滄海老紡室이 쓴 것인데 本書局은 그 원본을 얻고 또 海內外 名人들의 걸작을 수집하여 한 책으로 묶어세상에 내놓게 되었다”라 기록되어 있다.
10) 《권업신문》1914년 6~8월 제117-127호 10회 연재. 미완성.(윤병석 역편, 《안중근전기전집》, 491쪽) 11) 창해노방실(滄海老紡室)의《안중근》을 간단하게 추린 국문 초역. 블라디보스톡 신한촌 한인신보사(韓人新報社)에서 석판(石版)으로 간행된‘애국혼(愛國魂)’에 수록. 한글 약전. 머리말에“긔원 4251년 무오 六월일 해삼위에서 단옥생 씀”이라고 되어 있음.(윤병석 역편, 《안중근전기전집》, 398쪽)
12) 《海耕堂收草》(해경당수초)에 수록.(윤병석 역편, 《안중근전기전집》, 457쪽)
13) 2009년 안중근의사 하얼빈의거 100주년 관련 국제학술회의에서 중국 복단대학 손과지 교수가 보고.
서울대학교 도서관 고문헌자료실에도 1질이 소장되어 있다.(윤병석, ‘해제’, 《1세기만에 보는 희귀한 안중근 전기》, 19쪽) 필자 확인함.
14) 이 책은 상해 복단대학교 도서관, 북경의 국가도서관 등에도 소장되어 있다(왕원주, 〈안중근과 중국
- 청위(程?)의 저서《안중근(安重根)》을 중심으로-〉, 《동아시아의 지식교류와 역사기억》, 동북아역사재단·동아시아사연구자포럼, 2008, 15쪽의 각주 3)
15) 윤병석, 〈안중근의사 전기의 종합적 검토〉, 《한국근현대사연구》9, 1998 ; 윤병석, 〈해제 : 안중근 전기 전집(安重根 傳記 全集)〉, 《安重根傳記全集》, 국가보훈처, 2005 ; 윤병석, 〈안중근 전기의 종합적
검토〉, 《1세기만에 보는 희귀한 안중근 전기》, 국학자료원,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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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과 정원이 저술한 안중근 전기 비교는 한시준16)에 의해, 정원이 저술한 안중근 전기는 왕원주에 의해17) 분석이 시도되었다. 그런데 선행 연구들은 안중근 전기들 자체에 대한 분석과 연구가 아니라 중국과 안중근, 중국인이 본 안중근을 규명하는데 안중근 전기들을 활용하였다. 이에 본고는 안중근 전기들 중 중국인 저술 전기들을 분석함으로써 안중근 연구의 지평을 넓히는데 기여하고자 한다. 먼저 중국인 저술 안중근 전기 두 편의 저자들과 관련자 및 저술 시기, 저술 목적을 추적할 것이다. 이어두 편의 중국인 저술 전기의 구성을 비교하고, 내용에서는 가장 핵심이 되는 안중근 의거에 대한 평가를 비교하고, 더불어 중국인 저술 전기들과 한국인 저술 전기를 비
교할 것이다.
Ⅱ. 저자와 저술·간행 시기
장사(長沙) 정원(鄭沅)의《안중근》(安重根)에는 정원 외에 정육( )[상편‘安重根傳’], 도의(陶毅)[상편‘書安重根傳後’], 왕수남(王樹枏)·오전기(吳傳綺)·이순정(易順鼎)·소능승(昭陵僧)·가은불( )·도용(陶鏞)·당규(唐桂)·채원배(蔡元培)·적욱(狄郁)·왕조(王照)·민이창(閔爾昌)·강항호(江亢虎)·요계영(姚季英)·사사단(査士端)·양계초(梁啓超)·왕상(王洋)·왕도(王燾)·진석기(陳錫麒)·나가능(羅伽陵)여사(女史)·진원춘(陳鴛春) 여사·엽주(葉舟) 여사·정선지(程善之) 여사·정미지(程美之) 여사·비수위(費樹蔚)[이상 상편‘題辭’] 등 25명의 중국인이 글을 수록하였다.
이 책자의 표지에는 長沙 鄭沅《安重根》이라 되어 있고, 상편의‘安重根傳’에는 저자가 정육이라 명기되어 있다. 즉 이 전기는 정원이 정육의‘안중근전’, 24명 중국인들의‘제사’(題辭) 등을 모으고‘약사(略史)’등을 저술하여 묶은 것이라 판단된다.18) 안중근의 출생지에 대해, ‘안중근전’(安重根傳)에는 안중근이 한국 평안도 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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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韓詩俊, 〈中國人이 본 安重根 -朴殷植과 鄭沅의《安重根》을 중심으로-〉.
17) 王元周, 〈안중근과 중국 -청위( )의 저서《安重根》을 중심으로〉.
18) 윤병석 교수도 같은 주장을 하였다.(윤병석 역편, 《안중근전기전집》, 529쪽) 그러나 그 이유가 무엇인
지는 설명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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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포 사람이라고 했는데, ‘약사’(略史)에는 안중근과 그의 부친이 모두 평안도에서 태어났다고 말하는 이도 있고 중화에서 태어났다고 하는 이도 많은데“지금은 정확히 알 수 없으며, 그 부근 일대에서 태어났다는 것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19)고 기록되어 있다. 이를 내용에 일관성을 지키지 못한 것이라 주장한 연구자가 있는데20)이는 한 책자로 엮어지기는 했지만‘안중근전’(安重根傳)과‘약사’(略史)의 저자가 정육과 정원으로 다르다는 것을 말해주는 근거라 해석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정육( )의‘안중근전’(安重根傳)에는 오류가 많다. 그 이유를 당시 이미 출판된 백산포민의《삼한의군참모중장 안중근전》이나 창해노방실의《안중근》등을 참고하지 않은 때문이라 지적한 연구자가 있는데21)‘안중근전’저술 시기가 안중근 의거 직후로 박은식의 책자들이 간행되기 이전인 때문이라 생각된다. 그런데“안씨가 나를 지기로 허락하였으므로 그의 죽지 않은 마음을 특히 적어 전기의 맺음말로 부친다”22)는‘후서’를 보면 안중근과 정육은 안중근 생전에 교류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도 생각된다.
정육과‘제사’(題辭)를 쓴 중국인들은 대부분 혁명파로 분류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정육(1870-1940)은 1900년 심중력(沈仲力)이 산서(山西)에서 양무운동을 전개할 때 영국 선교사 티모시(Richard Timothy)와 함께 이에 합세하였다고 한다.23)그러므로 정육은 혁명파로 생각되며, 그의 요구로‘제사’(題辭)를 쓴 중국인들도 대부분 혁명파로 여겨진다. 왕조(王照, 1859-1933)는 무술변법에 참여하였고, 민이창(1872-1948)은 중화민국 초기 북양정부 총통부 비서를 지냈다.
사사단(1877-1961)은 신해혁명에 호응하여 학생군을 모집하였고, 왕양(1878-1921)은 봉천에서‘동삼성일보’간행하여 반청혁명을 고취하였으며, 진원춘은 동맹회 회원이었다.24) 이러한 이들의 글을 모아《안중근》을 편찬한 정원 역시 같은 범주의 인물로 여겨진다.
또 하나의 중국인 저술 안중근 전기의 찬술자 매현(梅縣) 섭천예(葉天倪)는 192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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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略史 - 刺客之世家’, 長沙 鄭沅, 《安重根》중편, 1쪽(윤병석 역편, 《안중근전기전집》, 국가보훈처,1999, 582쪽)
20) 왕원주, 〈안중근과 중국 - 청위( )의 저서《안중근(安重根)》을 중심으로-〉, 22쪽.
21) 왕원주, 〈안중근과 중국 - 청위( )의 저서《안중근(安重根)》을 중심으로-〉, 23쪽.
22) , ‘後序’, 長沙 鄭沅, 《安重根》상편, 4쪽.(윤병석 역편, 《안중근전기전집》, 562-563쪽)
23) 왕원주, 〈안중근과 중국 - 청위( )의 저서《안중근(安重根)》을 중심으로-〉, 15쪽의 각주 2.
24) 이상에 대해서는 왕원주, 〈안중근과 중국- 청위( )의 저서《안중근(安重根)》을 중심으로-〉15~22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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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문이 사거(死去)하였을 때‘손문총리봉안실록’(孫文總理奉安實錄)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는 만주와 일본조차 문제 전문학자였던 듯 1930년 전후에 일인(日人)이쓴《일본재만주특수지위지연구》(日本在滿洲特殊地位之硏究)의 번역 간행, 영(C.Walter Young)의《관동조차지지국제법적지위》(關東租借之地國際法的地位) 등을 중국어로 편역 간행하였다.25)
섭천예의《안중근전》에는 부록 1 ‘벽혈집’(碧血集)에 김택영(金澤榮)·임수성(林樹聲)·계강(季康)·왕양(汪洋)·궐명(闕名)의 글이 수록되어 있다. 안중근 전기 중첫 번째로 전기를 저술한 김택영은 회남에 망명해 있었는데26) 중국인들과 교류가 많았던 것 같다. 창해노방실의《안중근》에 글을 수록한 주증금(周曾錦)이 명(銘)을 청하기도 했다는 데에서27) 이러한 추측이 가능하다. 정원이 중국인들의 글만을 수록하였는데, 섭천예가 한국인과 중국인의 글을 함께 수록한 것도 이 때문이라 여겨진다.
정원의《안중근》‘제사’에 있는 사사단·양계초·왕양·왕도·진원춘·정선지의 글은 창해노방실의《안중근》‘선록’(選錄)에도 수록되어 있다. 섭천예의《안중근전》(부록1 벽혈집)에 수록된 김택영·(황)계강·왕양·궐명(청구한인)의 글은 창해노방실의《안중근》‘선록’에도 보인다. 왕양의 글28)은 정원의《안중근》, 섭천예의《안중근전》, 창해노방실의《안중근》에 모두 실려 있다.
즉 두 편의 안중근 전기를 저술한 중국인들은 국제적인 감각이 있었고, 중국을 둘러싼 국제정세에 깊은 관심이 있었으며, 19세기 말 20세기 초 격동하는 중국의 나아갈 방향 모색에 진력한 이들이었다고 판단된다.
이제 두 편의 안중근 전기가 언제 간행되었는가를 살펴보자. 정원의《안중근》은 상해 복단대학교 도서관과 북경 국가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데29) 판권난이 결본되어 간행연도 판정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연구자들은 정원의《안중근》이 192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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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윤병석, ‘해제’, 《1세기만에 보는 희귀한 안중근 전기》, 21쪽.
26) 梅縣 葉天倪 撰, 《安重根傳》(윤병석, 《1세기만에 보는 희귀한 안중근 전기》, 121쪽)
27) “중화민국 남통의 자가 진기(晉琦)인 주증금 군은 지난 청국 선통 경술년(1910) 2월 29일에 그의 처
황 안인(黃安人)의 상(喪)을 당하여 12월 모일에 선영 안에 장사를 지내고 손수 자기 처의 사적을 적어
가지고 우거해 있는 한국인 김택영에게 명(銘)을 청하였다. 때는 우리나라의 사직이 넘어간 즈음이라나 김택영은 울분과 근심에 병이 되어서 굳이 사양하였다.(왕성순 글, 한국고전번역원 옮김, 《여한십가문초》, 두산동아, 2010, 469쪽)
28) ‘안중근선생전’을 읽고 삼가 씀. 한방의 총탄으로 원한을 풀었으니 그대 이름은 천추에 빛나리. 몸을돌이켜 고국을 바라보며 웃으며 세상을 떠났네. 그 모습, 그 정신 살아서인가. 강물소리 밤마다 들려오네. 송화강 기슭에서 그대를 추억하니 비장한 마음 금할 길 없네.(윤병석, 역편, 《안중근 전기전집》351쪽)
29) 왕원주, 〈안중근과 중국 - 청위(程?)의 저서《안중근(安重根)》을 중심으로-〉, 15쪽의 각주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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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되었다고 추정한다. 한시준은《신한청년》(新韓靑年) 창간호30)의 출판시기를 근거로 1920년경으로 추정하였다. 1920년 3월 1일 상해에서 출판된《신한청년》에 안정근의‘여지래화후감상’(余之來華后感想)이 실렸는데 몇 글자를 제외하고는‘혈루어’와 일치한다는 것이다.31) 윤병석도 하편 부록에《신한청년》창간호에 실린 안정근의‘혈루어’가 전재 수록된 점으로 보아 3·1운동 후 상해에서 간행된 것으로 추단하였다.32)
김춘선은 안정근의 글에서“전년(前年) 조선인이 길림성 연길현에서 질서 정연하게 독립만세를 외쳤을 뿐 결코 소동을 일으키지 않았는데도 중국 군대가 출동하여”라는 구절에서 설명되고 있는 사건은 1919년 3월 13일 중국 군경이 용정 조선인 시위를 진압한 일로 보고, 이 책의 출판 시기를 1920년대 초로 추정하였다.33)
왕원주는 정육의‘안중근전’과‘서’는 1918년에 작성되었고, 양계초의‘추풍단등곡’을 제외한 각 명사들의 헌사는 1918-1919년에 지어졌다고 추정하였다. 또한 정육의‘후서’는 안정근의‘혈루어’를 읽은 이후에 작성되었으므로, 《안중근》이 인쇄에 들어간 것은 1920년 3월 1일 이후라고 주장하였다.34) 네 연구자 모두 안정근의‘혈루어’를 근거로 1920년에 간행되었으리라고 주장한다.
섭천예의《안중근전》은 목판본 1책으로 상해에서 간행되었는데, 판권이 없어 언제 간행되었는지 알 수 없다. 윤병석은 1914년 말에서 1915년 초 사이에 대동편역국에서 창해노방실의《안중근》이 간행될 무렵으로 추측하였다. 창해노방실의《안중근》과 사실 기술 부분에 유사점이 많아 이를 참조하여《안중근전》을 찬술한 것 같다고하였다.35)
그런데 이 책자의 간행 시기는 언제 저술되었는가를 추적한 데서 추론이 가능할 것이다.
“이등박문으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거의 10년이 되었다”는 기술은 이 책의 저술 시기가 1919년일 것이라는 추론의 근거가 된다. “이등박문으로부터”는‘안중근의 이토 처단 사건’으로부터라 여겨지는데 그 이유는 이 문장 앞에“저자가 살펴보건데 일본의 야심은 … 동봉(東峯, 한국)은 이미 이루었으니 이에 서쪽으로 향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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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1919년 12월 1일 발행한 한글과 한문으로 섞어 발행한 한글 창간호가 있고, 1920년 3월 1일 발행한
순한문 창간호, 두 가지가 있다.(유정 조동호선생기념사업회, 《신한청년 창간호》, 2002, 9쪽)
31) 韓時俊, 〈中國人이 본 安重根 -朴殷植과 鄭沅의《安重根》을 중심으로-〉.
32) 윤병석, 〈안중근전기의 종합적 검토〉, 《1세기만에 보는 희귀한 안중근 전기》, 185쪽.
33) 김춘선, 〈안중근 의거에 대한 중국인의 인식〉, 《한국근현대사연구》33, 2005, 125쪽의 각주 54.
34) 왕원주, 〈안중근과 중국 - 청위(程?)의 저서《안중근(安重根)》을 중심으로-〉, 19쪽.
35) 윤병석, 해제, 《1세기만에 보는 희귀한 안중근 전기》, 20~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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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를 도모하려 하였다”36)는 기술이 있기 때문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끝나고 윌슨의 민족자결론이 발표되자 중국인들은 일제에게 빼앗겼던 주권을 회복할 수 있다는 희망에 부풀었다. 그러나 일본은 파리강화회의에서 산동반도의 권리를 넘겨받았고, 1918년 5월 북경정부와‘중일 육군 공동 방어 협정’과‘중일 해군 공동 방어 협정’을 맺음으로써 중국 침략의 발판을 다졌다.37)“동봉은 이미 이루었”다는 것은 대한제국 강점을 의미한다고 생각된다. 그
러므로 이 문장은 대한제국 강점 이후 중국을 향한 일본의 침략 야욕을 말하고, 파리강화회의 이후 중국을 행한 일본의 침략 야욕의 실행을 의미한다고 해석된다. 따라서 섭천예의《안중근전》은 1919년경 저술되었고, 1919년 이후 간행되었다고 추정된다.
한편 정원의《안중근》은 저술 시기가 상편, 중편, 하편이 각각 다르다. 윤병석은 정원의《안중근》은 상편은 안중근 의거 직후 저술되었다고 하였다.38)‘제사’는 상당히 오랜 시간에 걸쳐 저술되었다. 최형욱은‘추풍단등곡’(秋風斷藤曲)의 편찬 시기를 1909년 10월 말부터 12월 말 사이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하였다. 이국준(李國俊)이 편찬한《양계초저술계년》(梁啓超著述系年)에 이 작품이 1909년 12월 11일 지은 문장 다음에 나열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39) 비수위가‘제사’를 쓴 것은“안중근의 의열은 … 지금까지 10년이 된다”40)고 하였으니 1919년이다. <중편>의‘약사’(略史)는 1910년에 저술되었다. 그 이유는“작년 봄에 블라디보스톡으로 도항하여”(昨年春渡航浦鹽)41), “그가 원산에서 블라디보스톡으로 출발한 때가 2년 전의 일이고”(然察其自元山向浦鹽出發之時 則爲前二年之事)42), “지금 듣건데 평석 법원장과 구구 검찰관은 아직까지 하얼빈에 남아서 엄밀한 조사를 진행하고 있다”(現聞平石法院長 及 溝口檢察官 尙在哈爾賓 嚴密調察)43)라는 문장이‘약사’에 기술되어 있기때문이다.
두 편의 중국인 저술 안중근 전기는 안중근 의거 직후부터 저술되었고, 많은 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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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梅縣 葉天倪 撰, 《安重根傳》, ‘저격 제6’(윤병석, 《1세기만에 보는 희귀한 안중근 전기》, 86쪽)
37) 왕원주, 〈안중근과 중국 - 청위( )의 저서《안중근(安重根)》을 중심으로-〉, 27~28쪽.
38) 윤병석 역편, 《안중근전기전집》, 529쪽.
39) 최형욱, 〈梁啓超의‘秋風斷藤曲’탐구〉, 《동아시아문화연구》49, 2011, 298쪽.
40) 費樹蔚, 長沙 鄭沅, 《安重根》상편(윤병석 역편, 《안중근전기전집》, 576쪽)
41) 刺客之家世, 長沙 鄭沅, 《安重根》중편, 1쪽(윤병석 역편, 《안중근전기전집》, 582쪽)
42) 刺客之行程, 長沙 鄭沅, 《安重根》중편, 2쪽(윤병석 역편, 《안중근전기전집》, 584쪽)
43) 公判, 長沙 鄭沅, 《安重根》중편, 15쪽(윤병석 역편, 《안중근전기전집》, 59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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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글을 모아 비슷한 시기인 1919년 이후와 1920년에 간행되었다. 당시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의 중국침략 야욕이 심화되고 있었으며, 이토 히로부미는 중국침략의 상징적인 인물이었다. 따라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안중근에게 중국인들은 관심을 기울였고, 관심의 결과 안중근 전기를 저술·간행하였다.
Ⅲ. 구성
정원의《안중근》과 섭천예의《안중근전》은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다.
○ 정원, 《안중근》
<상편> : 序, 安重根傳, 書安重根傳後, 後序, 題辭, 圖畵
<중편> : 略史, 기관, 행자, 송옥, 공판, 就義
<하편> : 부록1 韓人殺賣國奴之歷史 등, 부록2 안정근의 피눈물 맺힌 말
○ 섭천예, 《안중근전》
머리말, 가세 1, 평적 2, 상무 3, 유세 4, 창의 5, 저격 6, 입옥 7, 공판
8, 성인 9, 결론
부록1 碧血集, 부록2 韓國諸義士傳
정원의《안중근》은 상·중·하편으로 구성되어 있고 각각 14·20·12쪽 분량이다. 상편은 정육( )의 서(序)·안중근전(安重根傳)·후서(後序), 도의의 서안중근 전후(書安重根傳後), 제사(題辭), 도화(圖畵)로 구성되어 있다. 중편은 약사(略史), 기관(機關), 행자(行刺), 송옥(送獄), 공판(公判), 취의(就義)로 구성되어 있는데 정원이 저술·편술하였다. 안중근의 가계와 교우관계, 연해주에서의 의병활동, 하얼빈의거, 재판에서 순국까지 관련 자료를 중심으로 기술하였고, 안중근의 동양평화사상의 내인(內因)을 설명하는‘삼국화회지대원’(三國和會之大願)을 수록하였다.
하편은 부록1에 한인들이 매국노를 죽인 역사(韓人殺賣國奴之歷史) 등이, 부록 2에는 안정근의피눈물 맺힌 말(安定根之血淚語)이 수록되어 있다. 한편 섭천예의《안중근전》은 본문과 부록으로 구성되어 있고, 각각 33쪽과 8쪽 분량이다. 본문은 가세(家世) 제1, 평적(平賊) 제2, 상무(尙武) 제3, 유세(遊說) 제4, 창의(倡義) 제5, 저격(狙擊) 제6, 입옥(入獄) 제7, 공판(公判) 제8, 성인(成仁) 제9, 결론으로, 부록 1은 벽혈집(碧血集), 부록 2는 한국제의사전(韓國諸義士傳)으로 이루어져있다.
그런데 이러한 구성은 해방 이전 간행된 안중근 전기들 중 박은식의 안중근 전기들과 상당히 비슷한 모습을 보인다. 박은식의 안중근 전기는 1913년 백산포민(白山逋民)의 필명으로 발표한《삼한의군참모중장 안중근전》과 1914년 말 1915년 초 간행된 창해노방실(滄海老紡室) 필명의《안중근》이 있는데, 섭천예의《안중근전》은 백산포민의《삼한의군참모중장 안중근전》과 정원의《안중근》은 창해노방실의《안중근》과 제목도 같고 구성도 비슷하다. 《삼한의군참모중장 안중근전》은 서언(緖言), 제1장
가정지유전(家庭之遺傳), 제2장 일인병한지시기(日人倂韓之時期), 제3장 헌신국가지사상(獻身國家之思想), 제4장 거국출양(去國出洋), 제5장 단지동맹(斷指同盟), 제6장 이등지부합이빈(伊藤之赴哈爾賓), 제7장 천강벽력(天降霹靂), 제8장 여순공판(旅順公判), 제9장 우덕순지소사(禹德淳之小史), 제10장 안이김삼의사지소사(安李金三義士之小史), 결론(結論)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창해노방실의《안중근》은 안국비(安君碑)[章炳麟], 제사(題詞), 도화(圖畵), 안중근서(安重根序), 안중근전(安重根傳), 선록(選錄), 부록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원·섭천예의 안중근 전기의 구성을 백산포민·창해노방실의 안중근 전기들과 좀 더 자세히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정원의《안중근》상편‘제사’(題辭)는 구성면에서 창해노방실《안중근》의‘안중근서’(安重根序)와 비슷한데 수록된 글을 보면‘선록’(選錄)과 비슷하다. ‘제사’에는 24명 중국인들의 글이 수록되었는데, ‘선록’에는 13명의 중국인을 포함하여 17명글이 수록되어 있다. 이중 양계초의‘추풍단등곡’(秋風斷藤曲)이 같은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고, ‘제사’에 제목이 없는 사사단의 글은‘안중근전 감부’(安重根傳 感賦)44), 왕양의 글은‘경제안중근선생전’(敬題安重根先生傳)45), 왕도의 글은‘독안중근선생전’(讀安重根先生傳)46), 진원춘 여사47)의 글은‘조안중근선생’(弔安重根先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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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滄海老紡室, 《安重根》選錄, 22쪽(윤병석 역편, 《안중근 전기전집》, 353쪽)
45) 滄海老紡室, 《安重根》選錄, 11쪽(윤병석 역편, 《안중근 전기전집》, 351쪽)
46) 滄海老紡室, 《安重根》選錄, 22쪽(윤병석 역편, 《안중근 전기전집》, 353쪽)
47) ‘선록’에는‘女史’라는 글자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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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는 제목으로48) 선록에 수록되어 있다. 또한 정선지의‘금루곡’(金縷曲)은 선록의 ‘금루곡제안중근’(金縷曲題安重根)을 약 1/2 수록하였는데 수록된 시를 비교하면 글자에 약간의 차이가 보인다.49) 상편 마지막에는 안중근과 이토 히로부미의 사진이 같은 면에 수록되어 있는데, 사진이 타원형으로 재단되어 있을 뿐 창해노방실《안중근》에 수록된 사진과 같다.50) 중편의‘약사’를 보면‘자객지가세’(刺客之家世)와‘자객지열력’(刺客之閱歷)은 창해노방실《안중근》의 제2장 중근지유년파적(重根之幼年破賊)과 제8장 중근지거국(重根之去國)과 제목도 비슷하고 내용도 비슷하다.
섭천예의《안중근전》은 창해노방실의《안중근》에 수록된‘안중근전’과 매우 비슷하다. 섭천예의《안중근전》평적 제2는‘안중근전’제2장 중근지유년파적(重根之幼年破賊), 상무 제3 ‘상무주의’는 제3장 중근지상무주의(重根之尙武主義), 유세 제4는‘러일전쟁과 통감정치’는 제6장 중근지분주국사(重根之奔走國事)와‘안중근의 출유’는 제8장 중근지거국(重根之去國)과 비슷하다. 창의 제5는‘헤이그 밀사문제와 칠조약의 체결’은 제7장 한황폐립시지광경(韓皇廢立時之光景), 저격 제6 ‘이등박문의 만주 시찰’은 제12장 이등시찰만주(伊藤視察滿洲), ‘저격의 실행’은 제14장 중근 지저격이등(重根之狙擊伊藤), 입옥 제7 ‘일본관헌의 협박과 안중근의 강직함’은 제16장 일인지대부여중근지태도(日人之對付與重根之態度) 및 제17장 일인지교유(日人之巧誘), ‘두 동생의 면회’는 제18장 이제지면회(二弟之面會), ‘한국황제의 모함을 받음’은 20장 일인욕계한황(日人欲累韓皇), 공판 제8 ‘안병찬이 피를 토함’은 제19장 한국율사지구혈(韓國律師之嘔血), ‘공판 때의 상황’은 제22장 공판시지상황(公判時之狀況)과 비슷한 제목이고 비슷한 내용을 수록하고 있다. 섭천예의《안중근전》은 정원의《안중근》중편‘약사’와도 비슷한 점을 많이 찾을 수 있다. 가세 제1은‘자객지가세’(刺客之家世), 유세 제4 ‘안중근의 출유’는‘자객지열력’(刺客之閱歷), 창의제5 ‘의군의 조직’은‘자객지행정’(刺客之行程)과 유사점이 많다. 또한 저격 제6 ‘저격의 실행’은 중편‘행자’(行刺), 공판 제8은 중편‘공판’과 같은 내용을 기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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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滄海老紡室, 《安重根》選錄, 21쪽(윤병석 역편, 《안중근 전기전집》, 352쪽) 선록에 수록된 글과 앞 7자만 다르고 나머지는 같다. 선록에는 捐軀慷慨逐豺狼, 제사에는‘茫茫前路已斜陽’라 수록되어 있다.
49) 選錄 :劍氣橫燕市數男兒屠龍身手而 今唯是一角山河餘涕淚認取將軍意氣只消得一丸足矣 霹霹 .古宮回首斜陽裏記當年河伯兒孫日精王子萬里夫餘來覇迹不外都隨逝水淪溝○唯當後死 得此番終快義敎倭奴省識三韓士有志者且重起.題辭 :劍氣橫燕市數男兒屠龍身手而 今唯是一角河山餘涕淚認取將軍意氣只消得一丸足矣 霹霹 . 古宮回首斜陽裏記當年河伯兒孫日精王子萬里夫餘來覇迹轉眼都隨逝水淪溝○唯當後死 得此番終快義敎倭人省識三韓士有志者且重起)
50) 滄海老紡室의《안중근》에는 이외에도 독립문, 유동하 등 많은 사진이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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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1 벽혈집에 수록된 김택영(金澤榮) 등 5명 8편의 글은 창해노방실《안중근》‘선록’에 수록된 글과 같다. 김택영의‘제안공중근문’(祭安公重根文)은‘의제문’(擬祭文)과 몇 글자만 다를 뿐이고, 계강(季康)51)의‘감안중근사’(感安重根事)은‘감안중근사’(感安重根事), ‘조이등박문문’(弔伊藤博文文)은‘조이등문문문’(弔伊藤博文文), 왕양(汪洋)의‘도안중근’(悼安重根)은‘경제안중근선생전’(敬題安重根先生傳),김택영의‘문합이빈소식 삼수록이’(聞哈爾濱消息 三首錄二)은‘문합이빈소식’(聞哈爾濱消息)과 같다. 또한 궐명(厥明) 저술로 기록되어 있는‘문합이빈사감부’(聞哈爾濱事感賦)는‘문합이빈포격’(聞哈爾濱砲擊), ‘우문여순수형속부’(又聞旅順受刑續賦)는‘도여순수형’(悼旅順受刑)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고, 저자는‘청구한인’으로 기록되어 있다. 즉 벽혈집에 수록된 글들은 임수성(林樹聲)의‘동한열사가’(東韓烈士歌)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창해노방실《안중근》‘선록’에 수록되어 있다.
부록 2 한국제의사전(韓國諸義士傳)에는 우덕순(禹德淳), 안명근(安明根), 이재명(李在明), 김정익(金貞益), 이준(李儁) 등 5명에 대한 기록인데 이준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창해노방실《안중근》‘안중근전’에 수록된 인물들이다. 즉 우덕순은 창해노방실《안중근》‘안중근전’제26장 우덕순지역사대계, 안명근은 제27장 중근지종제명근, 이재명과 김정익은 제28장 이재명김정익과 같은 구성이고 비슷한 내용을 수록하고 있다.
이완용을 저격한 이재명은 정원《안중근》하편 부록1에 매우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고, 안정근에 대해서는《신한청년》에 수록된 글이 게재되어 있다. 정원이 이완용 피격 사건과 이재명을 자세하게 기록한 것은 내부의 간신을 제거하는 것이 가장 먼저이고 중요하다는 그의 생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정원과 섭천예의 안중근 전기는 46쪽과 41쪽으로 분량에서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그러나 구성에 있어서는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정원의《안중근》은 창해노방실의 《안중근》과, 섭천예의《안중근전》은 창해노방실《안중근》‘안중근전’과 비슷하다.
창해노방실《안중근》‘안중근전’이 백산포민 필명의《삼한의군참모중장 안중근전》을 토대로 저술되었음은 두 전기를 비교해보면 알 수 있다. 《삼한의군참모중장 안중근전》의 제2장은 창해노방실《안중근》‘안중근전’의 제5장, 제3장은 제6장, 제4장은 제8장, 제5장은 제9장, 제6장은 제12장, 제7장 제14장, 제9장은 제26장, 제10장은 제27·28장과 같은 내용을 수록하고 있으며, 제8장은 제16-24장으로 대폭 증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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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선록(選錄)에는 모두‘황계강’이라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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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섭천예《안중근》의 구성은《삼한의군참모중장 안중근전》과 비슷하고, 세부적인 구성과 내용은 창해노방실《안중근》‘안중근전’을 참조하였다고 생각된다.
한편 정원과 섭천예의 전기의 구성상 또 다른 차이점은 정원의 전기에는 중국인들만의 글이 수록되어 있고, 섭천예의 전기에는 한국인의 글도 수록되어 있는데 창해노방실의 전기에 수록된 글을 게재한 때문일 것이다. 또한 정원의 전기는 안중근을 ‘자객’으로, 섭천예의 전기는 안중근이‘성인’(成仁)하였다는 시각으로 전기를 저술하여 안중근의 의거를 바라보는 시각에 각각 비판과 긍정의 구조를 그려냈다. ‘취의’에‘삼국평화지대원’(三國平和之大願)을 수록하여 안중근이 동양평화를 구체적으로 구상하였다는 내용을 수록하였지만 안중근에 대한 정원의 시각은‘자객’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반면 섭천예는 창해노방실《안중근》‘안중근전’을 상당 부분 참조한 데서 확인할 수 있듯이 박은식 등 한국인 저자들과 마찬가지로 안중근 및 안중근의거에 긍정적이었다.
따라서 안중근을 자객으로 규정한 정원의《안중근》에는 안중근 의거를 자객의 행동으로 규정하고 동의하는 많은 글들이 수록되었고 부록에도 암살? 자객에 대한 내용들이 수록되었다. 그러나 섭천예의《안중근전》은 안중근 의거를‘성인’(成仁)으로 판단하였고, 정원이 암살자로 규정한 이재명을‘의사’(義士)로규정하였다.
정원과 섭천예의 안중근 전기로만 볼 때 정원에 비해 섭천예는 한국인들과의 교류가 많았거나 깊이가 있었던 때문에 안증근 의거를 긍정의 시각에서 바라본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Ⅳ. 안중근 의거 평가
1911년 이지포(李芝圃)는《조선망국사》편찬 이유를 일본이 대한제국을 병탄하고 열강이 묵인한다는 사실을 게시하여 중국정부와 국민이“국제사회에 강권만이 존재하고, 소위 공법과 평화가 없음을 깨닫게 하고, 조문(條文)을 믿지 말고 위험을 참고 견디는 구습을 고치고, 다함께 쇠퇴와 나약한 것으로부터 구하여, 진작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을 도모”52)하기 위해서하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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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李芝圃, 《朝鮮亡國史》, 1911, 제4편, 90쪽 : 왕원주, 〈근대 중국인의 한국 인식 : 경로와 특징〉, 《동방
학지》132, 2005, 1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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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도《안중근》편찬 목적을‘주의’(注意)란 제목 아래“이 책은 조선의 안중근이 아직 망국에 이르지 않았던 시기에 이완용과 이용구 등의 매국노를 처단하였더라면 조선이 멸망에는 이르지 않았을 것이며(나라 안을 어지럽게 만드는 자들의 죄는 매국노와 같다), 망국 이후에야 이토 히로부미를 격살한 것은 이미 때늦은 일로서 오히려 조선의 멸망을 앞당기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사실을 설명하고 있다.… 스스로 멸망의 길을 취했는데 이토 히로부미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53)라며, 안중근을 통하여 중국인들을 각성시킴과 동시에 중국 내의 매국역적을 경계하기 위해서라고 하였다.
정원의《안중근》에 수록된 글들은 대부분 외부의 적 살해보다는 내부의 매국노 살해가 시급하다고 기술하였다. 정육·채원배 등 26명의 중국인들은 안중근 의거를 단순히‘자객행위’로 파악하면서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것은 결과적으로 한국의 국망을 촉진시킨 것으로 설명하였다. 정육은,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처단이 일본의 병력을 빠른 시일에 강하게 만들어 대한제국의 멸망을 촉진시켰다고 하였다.
또한 한 명의 이토 히로부미가 죽었다지만 5천만 일본인이 모두 이토 히로부미가 될 수 있고, 나라는 반드시 스스로 자기를 해친 뒤에야 다른 사람이 진공할 수 있으니 한국은 이토의 손에 망한 것이 아니라 이완용·이용구와 같은 사람에 의하여망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일찍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 나라를 망하게 한다면 그 화가 우선 자기 집과 자신에게로 돌아온다는 것을 알게 했다면 모두 스스로 나라를 망하게 하는 마음을 감히 갖지 못하게 했을 것이라고 기술하였다.54)
도의 역시 정육과 같은 시각을 가져“하나의 이등을 죽이는 것은 분노를 털어놓는데 족하다지만 멸망을 구하지는 못하고 도리어 한국의 멸망을 가속화시키는 것이”며 수많은 외적을 다 죽일 수는 없으니 내부의 간신을 죽임으로써 이 간신을 따라 나라를 팔아먹고 적에게 아첨하는 것을 업으로 삼는 자들에게 경종을 울릴 수 있다고 하였다.55)
오전기도, 안중근에게 큰 뜻이 있었다면 자강으로 외침을 방지할 것을 일찍 상소해야 했고 암살은 자국 내에서만 하여 간당들을 없애야 한다고 하였다. 또한 이등을 죽였지만 적들은 손해가 없을 뿐 아니라 헛된 죽음으로 경중을 잃은 것 같다고 하였다.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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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注意’, 長沙 鄭沅, 《安重根》: 왕원주, 〈근대 중국인의 한국 인식 : 경로와 특징〉, 《동방학지》132,2005, 122쪽.
54) , ‘序’, 長沙 鄭沅, 《安重根》상편, 8쪽(윤병석 역편, 《안중근전기전집》, 557~558쪽)
55) 陶毅, ‘書安重根傳后’, 長沙 鄭沅, 《安重根》상편(윤병석 역편, 《안중근전기전집》, 560~5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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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은창도 이등을 죽일 것만을 알았으니 집안의 도적들은 털끝 하나 상하지 않았다며57) 안중근 의거를 폄하하였다. 채원배는“홀로 분연히 나섰으나 결국 사직을 연장하지 못했으니”58)라며, 도계영은“이미 양을 잃고 나서 우리를 고치는 것은 필시 늦은 것”59), 당계는“일찍이 내부의 간신들을 없앴다면 훌륭한 나라가 어찌 스스로 구멍이 나겠는가”60)라며 안중근 의거가 한국의 멸망을 구하지 못했다고 한탄하였다.
또한 암살은 한 사람을 징벌함으로써 백 사람에게 경고하는 계책이지만 요행을 바랄 뿐 결과는 알 수 없는 것이라 비판하였다.61) 이처럼 정원《안중근》에 수록된 중국인들의 글은 대부분 안중근 의거에 부정적이었다. 중국인들의 글은 안중근 의거에 대한 평가나 의미보다는 안중근이라는 인물을통해 중국인들을 각성시킴과 동시에 중국 내의 매국역적을 경계하려는 의도가 강하다.62)
정육 등이 지적한 중국 국내의 매국노란 북양군벌과 지방군벌, 특히 그들 가운데 친일파를 가리킨다. 5·4운동 시기 중국의 언론은 한국의 망국사를 예로 들면서 국민들에게 망국노가 되지 않으려면 다 같이 일어나 매국역적을 타도할 것을 호소하였다.63)
그러나 도용은 원칙적으로는 매국노를 처단해야 한다는 정육의 주장에 동의하면서도 암살의 불가피함을 기술하였다. “간신배들이 나라를 망치려 무슨 짓인들 하지못하랴. … 간사한 무리들은 스스로 뭉쳐 강한 성곽을 이루고 있으며 강력한 왜구의 지원을 받고 있다. 나라의 형법도 여기에 이르러서는 기피하고 감히 어쩌지 못한다.
오직 용감한 협객들에게 10만개의 검을 갈아 나누어주고 5보 내에서 놈들의 가슴을 찌르게 하는 수밖에 없다.”64) 또한 비수위는 이완용 등 매국노 처단보다는 이토 히로부미 처단이 옳았다고 주장하였다. 외부의 적을 처단하지 않는다면, 그들의 흉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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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吳傳綺, ‘ ’, 長沙 鄭沅, 《安重根》상 편, 6쪽(윤병석 역편, 《안중근전기전집》,564-565쪽)
57) , “帝..”, 長沙 鄭沅, 《安重根》상편, 7쪽(윤병석 역편, 《안중근전기전집》, 567쪽)
58) 蔡元培, “ ”, 長沙 鄭沅, 《安重根》상편, 10쪽(윤병석 역편, 《안중근전기전집》, 571쪽)
59) 姚季英, “ ”, 長沙 鄭沅, 《安重根》상편, 12쪽(윤병석 역편, 《안중근전기전집》, 573쪽)
60) 唐桂, “矯矯程候”, 長沙 鄭沅, 《安重根》상편, 9쪽(윤병석 역편, 《안중근전기전집》, 569-570쪽)
61) , ‘安重根傳’, 長沙 鄭沅, 《安重根》상편(윤병석 역편, 안중근전기전집, 559쪽)
62) 김춘선, 〈안중근 의거에 대한 중국인의 인식〉, 126쪽 ; 왕원주, 〈안중근과 중국 - 청위( )의 저서《안중근(安重根)》을 중심으로-〉, 23쪽.
63) 김춘선, 〈안중근 의거에 대한 중국인의 인식〉, 123쪽.
64) 陶鏞, 長沙 鄭沅, 《安重根》상편(윤병석 역편, 《안중근전기전집》, 5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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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 움직이는 매국노가 끊임없이 나타나기 마련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즉“누가 이익과 지위로 유혹하는데도 단념하도록 만들 수 있단 말인가? 도둑을 잡을 때는 마땅히 도둑의 왕을 잡아야 하니, 문제는 여기가 아닌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65) 적욱은 도용이나 비수위보다 한층 적극적으로 안중근 의거를 평가하였다. “안군은 원수를 죽이고 크게 웃으면서 죽음을 당하였다. 조선의 멸망을 혹자는 그의 탓을 하나, 그 말은 궤변일 뿐 나는 아니라고 적는다 한국이 망함을 혹은 안군의 과실로 돌리지만 나는 이런 괴상한 엉터리 소리를 전혀 기록하지 않는다.”66)
도용·비수위·적욱은 다른 23명의 중국인들과는 달리 안중근 의거를 긍정의 시각으로 바라보고 평가하였다. 정육으로부터 제사를 부탁받았지만 이들은 정육과 다른 견해를 피력하였고, 정육은 자신과 의견을 달리 하였지만 이들의 제사도 수록하였다. 따라서 안중근 의거에 대한 중국인들의 다양한 시각과 평가를 읽어낼 수 있다.
외부의 적 제거보다는 내부의 적 제거에 무게 중심을 두었으므로 정원의《안중근》은 안중근의 이토 암살 이유, 안중근 의거를 적극적으로 기술하지 않았다. 그 이유가 안중근 의거에 대한 평가나 의미보다는 안중근이라는 인물을 통해 중국인들을 각성시킴과 동시에 중국 내의 매국역적을 경계하려는 의도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한국의 3·1운동과 중국의 5·4운동을 통하여 주권회복과 나라의 독립은 한 개인의 자객행위가 아닌 거족적인 민중운동에 의거해야 성공할 수 있다는 도리를 깨달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67) 그러나 안중근 의거를 적극적으로 기술하고 평가하고 의미부여를 한다고 하여 중국인들을 경각시키려는 저술 목적이 훼손되지 않으므로 서술 방법과 내용에 많은 아쉬움이 남는다.
한국인 안중근이 중국인들에게 전기의 대상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한국 국권을 위협할 뿐 아니라 동양 평화를 깨트리는 선봉장 이토 히로부미 처단 의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이토 히로부미 처단 이유와 안중근 의거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그 깊은 의미를 기술하지 않는 안중근 전기라면 많은 한계가 있다.
중국인이지만 창해노방실의《안중근》‘안중근서’에 글을 수록한 이들은 정원의《안중근》에 글을 수록한 중국인들과는 안중근 의거를 달리 평가하였다. 주호(周浩)는 안중근의 이등박문 처단을‘세계평화의 공적(公敵)을 제거한 것’이라고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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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費樹蔚, “韓亡子”, 長沙 鄭沅, 《安重根》상편, 13쪽(윤병석 역편, 《안중근전기전집》, 577쪽)
66) 狄 郁, “荊軻刺”, 長沙 鄭沅, 《安重根》상편, 10쪽(윤병석 역편, 《안중근전기전집》, 571쪽)
67) 김춘선, 〈안중근 의거에 대한 중국인의 인식〉, 129쪽 ; 왕원주, 〈안중근과 중국 - 청위( )의 저서《안중근(安重根)》을 중심으로-〉, 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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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은‘한국의 공신(功臣)만이 아니라 동아(東亞)의 공신(功臣)이요 세계의 공신이라 하였다.68) 반상누는 안중근 의거가 없었다면 동아의 화평이 파괴되고 중국의 운명도 알 수 없었을 것인즉 안중근 의거는 단순히 한국인이 나라 원수를 보복하기 위한 것만이 아니고 세계를 위하여 공적을 없앤 것이라 평가하였다.69) 나남산(羅南山)은 안중근이 일본의 중국침략을 막아주었다고 보았다.
이토에 의해 중국이 침략받아 멸망하게 될 상황에서 안중근이 그를 처단한 것으로 이해하였다.70) 증용(曾鏞)도 안중근을 일본의 중국침략을 막아준 공신으로 여기고 있다.71)‘선록’에 글을 수록한 나흡림(羅洽霖)도“그가 위력을 떨치자 남의 나라를 강점하고 잠식했던 열강들마저 저들의 행패를 다소 삼가게 되었으니 그가 인도주의에 미친 영향이 어찌 적다고 할 수있으랴”72)며 안중근 의거를 세계정세, 세계평화와 연관하여 기술하였다.
정원의《안중근》이 안중근을 자객으로 규정하고 안중근 의거에 상당히 부정적인 평가를 내린데 비해 섭천예의《안중근전》은 긍정적인 기술을 하였다. 섭천예는 안중근을‘세계 위인’이라 평가하였다. 열사·의민·용부·협객·혈성남자·애국지사는 자기 몸을 던져 백성을 구하였지만 그 공은 한 나라에 한정되는데 안중근이 이룬것은 한 나라를 넘고 인류를 넘어 세계에 통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안중근이 정치전쟁시기가 끝나고 시작되는 인도(仁道)전쟁시기의 기미를 열었다고 평가하였다.
또한 세계정세는 서쪽에서 동쪽으로 오고, 동아시아에 세계 세력이 집중되므로 세계평화를 보전하려면 먼저 동아시아의 평화를 보전해야 하는데 일본이 동아시아의 평화를 깨기에 안중근의 일격(一擊)은 아시아 평화를 위한 계책이고 또한 세계평화를 위한 계책이라고 의미부여를 하였다. 그리고 안중근 의거로 인하여 국망을 극복하지 못한 것은“처한 지위가 같지 않은 까닭이다. 이것은 시세(時勢)가 그런 것이지 인력으로 만회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설명하였다.73) 안중근 의거 이후 대한제국이 멸망하였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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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周浩, ‘安重根序’, 滄海老紡室 稿, 《安重根》. 大同編輯局, 1914(윤병석 역편, 《안중근전기전집》, 269쪽)
69) 潘湘累, ‘安重根序’, 滄海老紡室 稿, 《安重根》. 大同編輯局, 1914(윤병석 역편, 《안중근전기전집》275쪽)
70) 羅南山, ‘安重根序’, 滄海老紡室 稿, 《安重根》. 大同編輯局, 1914(윤병석 역편, 《안중근전기전집》267쪽)
71) 曾 鏞, ‘安重根序’, 滄海老紡室 稿, 《安重根》. 大同編輯局, 1914(윤병석역편, 《안중근전기전집》, 276쪽)
72) 羅洽霖, ‘謹題安重根先生傳’, 滄海老紡室 稿, 《安重根》選錄, 21쪽(윤병석 역편, 《안중근전기전집》,
351쪽) : 김진욱, 〈안중근의거를 통한 중국 지식인의 조선인식 연구-문학 작품을 중심으로-〉, 《중국인문과학》30, 중국인문학회, 2005, 266쪽.
73) 梅縣 葉天倪 撰, 《安重根傳》, ‘序言’(윤병석, 《1세기만에 보는 희귀한 안중근 전기》, 55-6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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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의《안중근》이 안중근 의거가 국망을 앞당긴 것처럼 평가한 것과 달리 섭천예의《안중근전》은 안중근 의거 때문이 아니라 당시의 상황과 시세 때문이었다고 기술하였다.
이러한 섭천예의 평가는 백산포민의《삼한의군참모중장 안중근전》의 평가와 같다. 이토를 죽인 것은 세계평화를 희망하고 이토를 평화의 공적(公賊)으로 인정하여 그 괴수를 제거하지 않으면 화를 막을 수 없다고 여겼기 때문74)이라고 백산포민은 암살 이유와 안중근 의거를 적극적으로 평가하고 의미부여를 하였다.
앞에서 확인한것처럼 섭천예는 창해노방실의《안중근》‘안중근전’과 비슷한 내용이 많고, ‘안중근전’은 백산포민의《안중근》에 토대하므로, 섭천예의 평가는 박은식의 안중근 인식과 공감대를 형성하였다고 여겨진다.
또한 이토 암살 이유는“이등박문을 한국에 파견한 것은 단번에 한국민의 죽을 운명을 만들려고
해서였다. 이등으로 하여금 한국정권을 장악하게 하여 훗날 병탄을위해 미리 준비하게 한 것이고 … 따라서 한국인이 일본정부에 품은 한은 옮겨가서 이등에게 한을 품게 되었다. 이것이 훗날 안중근이 일격(一擊)하게 된 이유”75)라며 정원의《안중근》이 나라의 원수를 갚았다고 단순히 기술한 데 비해 이토의 역할, 이토를 암살이 의미하는 것을 기술하였다.
처음부터 암살을 통하여 국망을 막고자 한것이 아니라 힘을 다하여 국운을 만회하려 했지만“하늘이 치우치고 막혀서”부득이 암살의 길을 가게 되었다고 하였다.76)
안중근 의거를 약육강식의 제국주의시대를 끝맺고 정의(正義), 인도(人道), 공리(公理)가 지배하는 세계평화의 시대를 여는 중요 전기로 논평하였다. 따라서 이토의 죽음으로 인하여 만주의 분할이 저지되고 중국의 위난(침략)이 줄어들고 한국독립도이룩하는 길을 연 것이라고 하였다.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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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백산포민, 《삼한의군참모중장 안중근전》(윤병석, 《1세기만에 보는 희귀한 안중근 전기》, 32쪽)
75) 梅縣 葉天倪 撰, 《安重根傳》, ‘유세 제4’(윤병석, 《1세기만에 보는 희귀한 안중근 전기》, 69-70쪽)
76) 梅縣 葉天倪 撰, 《安重根傳》, ‘창의 제5’, ‘저격 제6’,(윤병석, 《1세기만에 보는 희귀한 안중근 전기》,82, 88-89쪽).
77) “안중근의 일격(一聲)이 있고부터 일본의 중국에 대한 야심이 한꺼번에 꺾였고 만주를 분할하라는 논의도 행해지지 못했고 재정을 감독하려는 계략도 즉시 실행되지 못했으니 우리 중국에 크게 이로움이있다. 또한 세계에도 그대로 크게 이로움이 있는 것이다”(윤병석, 해제, 《1세기만에 보는 희귀한 안중근 전기》, 23~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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Ⅴ. 맺음말
안중근 의거가 일어난 후 많은 전기들이 저술되고 편찬되었다. 그중에는 외국인인 중국인들이 저술한 안중근 전기도 있는데 현재 발굴된 것은 장사 정원의《안중근》과 매현 섭천예의《안중근전》두 편이다. 정원과 섭천예를 포함하여 두 편의 안중근 전기에 글을 수록한 중국인들은 국제적인 감각이 있었고, 중국을 둘러싼 국제정세에 깊은 관심이 있었으며, 19세기 말 20세기 초 격동하는 중국의 나아갈 방향 모색에 진력한 이들이었다. 두 편의 중국인 저술 안중근 전기는 안중근 의거 직후부터 저술되었고, 많은 이들의 글을 모아 비슷한 시기인 1919년 이후와 1920년에 간행되었다.
당시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의 중국침략 야욕이 심화되고 있었으며, 이토 히로부미는 중국침략의 상징적인 인물이었다. 따라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안중근에게 중국인들은 관심을 기울였고, 관심의 결과 안중근 전기를 저술·간행하였다.
정원과 섭천예의 안중근 전기는 46쪼과 41쪽으로 분량에서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그러나 구성에 있어서는 정원의《안중근》은 창해노방실의《안중근》과, 섭천예의《안중근전》은 창해노방실《안중근》‘안중근전’과 비슷하다. 또한 정원의 전기에는 중국인들만의 글이 수록되어 있고, 섭천예의 전기에는 한국인의 글도 수록되어 있는데 창해노방실의 전기에 수록된 글을 게재한 때문이다.
그리고 정원의 전기는 안중근을‘자객’으로, 섭천예의 전기는 안중근이 성인(成仁)하였다는 시각으로 전기를 저술하여 안중근의 의거를 바라보는 시각에 각각 비판과 긍정의 구조를 그려냈다.
따라서 안중근을 자객으로 규정한 정원의《안중근》에는 안중근 의거를 자객의 행동으로 규정하고 동의하는 많은 글들이 수록되었고 부록에도 암살·자객에 대한 내용들이 수록되었다. 그러나 섭천예의《안중근전》은 안중근 의거를 성인(成仁)으로 판단하였고, 정원이 암살자로 규정한 이재명을‘의사’(義士)로 규정하였다.
정원과 섭천예의 안중근 전기로만 볼 때 정원에 비해 섭천예는 한국인들과의 교류가 많았거나 깊이가 있었던 때문에 안증근 의거를 긍정의 시각에서 바라보았던 것이라 여겨진다.
정원의《안중근》에 수록된 글들은 대부분 외부의 적 살해보다는 내부의 매국노 살해가 시급하다고 기술하였다. 정육·채원배 등 26명의 중국인들은 안중근 의거를 단순히‘자객행위’로 파악하면서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것은 결과적으로 한국의 국망을 촉진시킨 것으로 설명하였다.
안중근 의거에 긍정적인 평가를 한 도용·비수위·적욱의 글은 안중근 의거에 대한 중국인들의 다양한 시각과 평가를 말해준다.
외부의 적 제거보다는 내부의 적 제거에 무게 중심을 두었으므로 정원의《안중근》은 안중근의 이토 암살 이유, 안중근 의거를 적극적으로 기술하지 않았다. 그런데 한국인 안중근이 중국인들에게 전기의 대상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한국 국권을 위협할뿐 아니라 동양 평화를 깨트리는 선봉장 이토 히로부미 처단 의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이토 히로부미 처단 이유와 안중근 의거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그 깊은 의미를 기술하지 않는 안중근 전기라면 많은 한계가 있다.
섭천예는 안중근을‘세계 위인’이라 평가하였고, 안중근 의거는 아시아 평화를 위한 계책이고 세계평화를 위한 계책이라고 의미 부여를 하였다. 그리고 안중근 의거가 국망을 극복하지 못한 것은 시세와 상황 때문이라고 설명하였다. 안중근 의거를 약육강식의 제국주의시대를 끝맺고 세계평화시대를 여는 중요 전기로 논평하였다.
이러한 섭천예의 평가는 백산포민의《삼한의군참모중장 안중근전》의 평가와 같다.
섭천예는 창해노방실의《안중근》‘안중근전’과 비슷한 내용이 많고, ‘안중근전’은 백산포민의《안중근》에 토대하므로, 섭천예의 평가는 박은식의 안중근 인식과 공감대를 형성하였다고 여겨진다.
같은 지역인 상해에서 비슷한 시기에 간행된 정원과 섭천예의 안중근 전기는 외국인의 저술이라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안중근 의거에 대한 섭천예의 평가가 긍정적인 것은 박은식의 안중근 전기를 토대로 하고 박은식의 안중근 의거 인식과 공감대를 형성한 때문이었다. 반면 안중근 의거를 국망이 빨라진 원인으로 본 정원등의 기술은 한국인 저자들과의 인식 공유보다는 중국인들에게 국망하지 않으려면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목적으로 한 때문이었다.
투고일 : 2012.12.13
심사일 : 2012.12.14
게재확정일 : 2012.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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