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단 같은 꽃이 만발한 마을 화천(花川),동천(洞天),금천(錦川),양화금(楊花錦)2
동천마을이 지금은 우리남해 관광 일번지라고 할 수 있는 ‘독일마을’이나 ‘원예예술촌’인근에 위치하고 있어서 그곳으로 관광오신 분들에게 맛있는 먹거리 제공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다.
전복전문집이나 멸치쌈밥집, 그리고 향촌식당 그런 다양한 먹거리와 업소들이 여행오신 관광객에게 만족을 주고 있으니 참으로 자랑하고픈 동네다. 이곳에서도 사족을 하나 단다면 예전에 어떤 준수한 젊은이가 내게 이런 제안을 했다.
“선생님, 동·서 화합의 의미로 여수사람들과 이벤트를 한 번 하면 했으면 하는데요... 여수와 우리남해는 공통분모인 충무공 이순신이 있으니 우리남해사람들이 자비로 여수의 충무공 이순신과 관련되어 있는 사람들을 초대하여 이순신유적지를 관광 시키고 또 그들의 초청으로 우리남해에서 충무공 이순신과 관련되어 있는 사람들이 여수로 가서 이순신유적지를 둘러보는 그런 이벤트를 하면 어떻겠습니까? 그럼 방송국에서 다 촬영을 한다고 하니 이슈가 되어서 ‘이순신순국공원’ 개관을 앞두고 남해에 많은 사람들이 이순신유적지를 찾아오는 계기다 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여수와 남해로 배를 타고 하는 여행이란 스토리가 새롭고...”
내가 충무공 이순신을 열렬히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이런 제안을 하는데 마다할 서재심이 아니었다.
“좋지요. 그럼 남해에서 쓸 경비는 어떻게 합니까?“
“그래, 그것이 문제인데...선생님이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그래서 나는 그날로 남해군의원 중에 한 분을 만나서 타진을 해 보기도 했지만 그분은 미리 해야지 이렇게 갑자기는 예산을 확보 할 수가 없다고 했다. 그래서 참 어리석고 어리석은 나는 그 사람이 나라는 사람을 믿고 제안을 한 것이 감사해서 이곳저곳 사람들에게 부탁을 하면서 뛰어 다녔다. 그리고 100여명의 여수사람들이 배를 타고 남해에 와서 관광 할 배 삯과 버스비와 식대를 그냥 개인 돈으로 해결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오빠에게 부탁을 했고 오빠가 경비를 지원하기로 하고 일을 진행했다. 그런데 나의 이런 이야기를 들은 동천에 있는 ‘향촌식당’의 이봉원사장님께서 거금 50만원을 찬조하겠다고 선뜻 말씀하셨다.
그리고 남해대학 김성현교수님께서 100인분의 간식으로 빵과 우유를 준비해 주셨고 그리고 주변의 고마운 사람들이 십시일반 돕기도 해서 일은 순조롭게 진행이 되었다. 참 두 개의 신문에 두 번 낸 홍보비까지...
그런데 그때 여수에서는 이순신전문가와 방송국에서 촬영을 하여 남해를 방방 띄워 줄 것이라고 했던 말들은 사실과 거리가 멀었다.
난중일기에 나오는 여수의 섬 어르신들을 모시고 왔었는데
충렬사나 이락사를 둘러보기 전에 그래도 남해의 관광일번지인 독일마을을 둘러보게 했는데 일행 중에 한 분이,
“왜 원예예술촌은 안 갑니까? 우리가 입장료를 다 내었는데...”
순간 머리가 띵했고... 그때부터 ‘이 무슨 말인가?’ 머리가 복잡했다.
일을 끝내고 전후사정을 알아보니 여수사람들에게는 남해관광에 필요한 배 삯과 식대, 버스비, 입장료 일체의 경비를 다 받아 놓고 그 돈은 남해사람들이 여수 갈 때 쓰고자 그냥 두고 내가 마련한 경비로 남해 관광을 하게 한 것이다. 그리고 그 프로그램은 민간인들이 자발적으로 교류를 한 이슈로 세상에 알려졌고 일을 진행한 준수한 젊은이는 본인의 하는 일의 공이 되었다. ‘사람이 이렇게도 이용이 되는 구나.‘ 어이가 없었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엎어진 물 주워 담을 수도 없고...‘ 그냥 나만 바보가 되었다. 지금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헛웃음이 나오고 기가 막혔지만 ‘향촌식당의 순수하신 사장님의 사람됨을 알기 위해 그런 일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마음으로 위안을 삼았다.
그래서 향촌식당을 지날 때면 늘 마음속으로
‘그때 참 감사했습니다. 그 은혜 늘 기억하겠습니다..’ 하면서 지나간다.
그리고 누군가 남해의 맛 집을 문의하면 향촌식당을 추천한다. 물론 나를 이용 했던 그 준수한 젊은이는 그 결과물로 자기가 하는 일에 조금은 도움이 되었는지 모르지만 한 사람에게 영원히 신뢰를 잃었으니...
꼭 이익을 취했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세상을 살면서 남을 이롭게 하면서 살고 가지는 못 해도 남을 해롭게 하지는 말아야지...‘ 그런 생각을 다시 하는 계기가 되었다.
다만 그때 그 일로 ’이순신순국공원‘이 방방 뜨게 하지 못 한 것이 아쉬운 일이라면 아쉬운 일이었다. 그리고 나는 내 위안을 하느라고 ‘어쩌면 정성이 아직 부족해서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그리 생각하고 말았다.
그리고 화천마을은 삼동면지에 있는 마을유래가 너무 마음에 들어서 그대로 옮겨본다.
‘꽃내’ 마을은 비가 많이 와 홍수가 나면 그 유역 일대가 범람하고 물이 빠지면 상류에서 떠내려 온 토사가 벌판을 이루었던 곳이다.
마을 뒤 설매산은 그 지형이 마치 눈 속에서 피어나는 매화와 같다하여 붙어졌으며 풍수지리로 좌청룡, 우백호의 지형을 갖춘 명지인 화천(꽃내)은 인물이 많이 배출되기로 전 군에서 따를 곳이 없다.
선출직의원, 법조인, 교육계, 행정관리, 경제계, 의사 등을 많이 탄생시켰다. 마을 앞을 감싸 흐르는 꽃 내는 육·해수가 만나는 하구로 물이 맑아 전국에서 유명한 은어의 산란 회유천이다.‘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이곳에는 자연에 피는 꽃도 만발하지만 비단 같은 인물들이 많이 배출되고 다녀간 곳으로 본다면 딱 맞을 것 같다. 또 한 발 나아간다면 비단 같은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곳이요, 권력과 명예와는 다소 거리가 있지만 사람 꽃 한 송이는 확실하게 피어있다고 자랑하고 싶다.(사람 꽃 한 송이를 꼭 지목 해 달라 하신다면 ‘향촌사장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