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어져가는 간식
변태현
사람들은 지나간 것을 늘 그리워한다. 그래서 “인간은 기억으로 인한 회억의 동물이다.”라고 부른다. 많은 세월이 흐른 것은 나이를 알게 모르게 먹었다는 증거이다. 저마다 꼬마시절에 뭉쳐둔 옛날 동네의 추억보따리는 풀어헤쳐 볼수록 재미나는 콩 볶기다. 비닐우산도 없어서 비료포대기 막힌 부분 구겨서 머리 위에 얹었던 기억은 요즘에 상상이라도 할 것인가? 하물며 배고팠던 시절을 살아온 우리들 세대의 간식은 생각보다 기억나는 것이 많았다. 요즘은 넘치는 고급 음식들로 간식이 대수롭지 않게 되었다. 오히려 밥맛 줄인다고 간식은 안 먹는 시절로 변하였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일이다. 전교생이 운동장에 모였다. 시골학교라 전교생이 다 모였지만 운동장을 모두 채우지 못했다. 교장선생님의 훈시를 다리 아프도록 듣고 나서 학생들을 일렬로 길게 늘어서서 운동장 청소를 하였다.
어디선가 구수한 냄새가 코끝을 자극하였다. 알루미늄 노란 컵으로 한 컵 받았다. 노란 강냉이 죽이다. 호호호~ 하면서 먹는 맛이 생전에 처음 먹어보는 맛이라 기막히게 좋았다. 하얀 우유가루도 한 봉지씩 받았다. 밥할 때 함께 쪄서 먹었다. 식으면 돌덩이가 되어 우유 맛을 느낄 수가 없었다.
그 땐 1960년도 초반이라 먹고 살기 어려운 시절이라 간식이라는 이름조차도 생소한 시절이었다. 군부대 근처에 살아서 동무들과 부대 철조망(을) 붙들고 군인들에게 군것질꺼리를 요구하기도 하고, 미군 지프차가 지나가면 “기버 미 껌!”하고 따라가면 뭐라도 던져주곤 했다.
그러다 봄이 오면 산에라도 가서 진달래를 입이 시퍼렇토록 따 먹기도 하였고, 잔대뿌리도 캐어먹었다. 송기로 먹을 수 있는 소나무껍질도 벗겨먹기도 하였다. 지나고 보니 그것이 주식은 못 되었지만 배고픈 아이들로서는 간식이 되었다. 요즘이면 상상도 못할 일들이지만 태어난 우리들 시절에는 그것이 다반사가 되었다.
초겨울에는 이산저산 산소에서 묘사를 지낸다. 그럴 때면 동네 아이들과 산소 옆에서 묘제가 끝날 때까지 쪼그리고 앉아 기다린다. 다리도 저리고, 어찌나 추운지 그 놈의 제사는 왜 그렇게 오래 지내는지… 묘제 떡 얻어먹으려는 꼬마손님들은 지칠 대로 지쳐버린다. 그렇다고 포기하면 떡 한 조각도 얻어먹지 못한다. 기다린 보람이 있어 제사가 끝나고 제수음식들을 봉지마다 싸서 우리들에게 나누어 준다. 그 때 먹은 그 맛은 잊을 수가 없다. 요즘 같으면 남의 제수 음식에 귀신 붙어온다고 먹지도 아니 할 것이다. 지난 우리들 세대에 보는 장면이겠지만 겪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는가? 나 때는 모두 그랬다.
깊어가는 겨울밤에는 구덩이를 파서 묻어둔 무를 꺼내어 깎아먹는 재미와 단지 속에 약간 얼어있는 매콤 새콤한 동치미 국물과 무맛은 지금도 그 추억을 생각하면 입안에 침이 고인다.
가끔은 아버지의 늦은 귀가에 인사도 하지 않고 자는 척 하였다. 그러면 술 냄새 풍기는 얼굴 갖다 대면서 “너 줄려고 과자 사 왔는데”하시면서 과자봉지를 부스럭거렸다. 못 이기는척하고 얼른 일어나 꿀맛 같은 과자를 정신없이 먹어 됐다.
3학년 초에 누나들이 자취하고 있는 대구로 전학을 하였다. 골목 안에서 코에 익은 강냉이 죽 끓이는 구수한 냄새가 진동을 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운동장에서 맛보았던 그 냄새였다. 아이들이 우루~루 몰려가보았지만 그 영세민 집에는 한 끼의 식사이어서 아이들은 그저 입맛만 다시다가 물러났다. 흔히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꼴이 되었다.
밤이 되면 긴 골목어귀에서 “찹쌀∼떠억! 메밀~무욱! 망개~떠억!” 어깨가 무겁도록 지게를 진 고학생의 구성진 목소리는 점점 가까이 들려온다. 그럴 때면 난 누나의 얼굴을 설금설금 살핀다. 동생의 눈치에 못 이겨 고학생을 불러서 찹쌀떡 몇 개를 사 준다. 그 때 먹어본 찹쌀떡 맛이 지금도 그 때의 맛 잊지 못하여 입에 하얀 밀가루 바르면서 추억을 더듬어 본다.
주말 시골집 가면 터 밭에 심어놓은 딸기, 복숭아, 수박, 포도 등의 과일들은 모두 내가 독차지한다. 외아들 준다고 오막조막 심어 놓은 것들이다.
요즘에 와서 만일 내가 잔치에라도 갔다가 떡을 봉지에 싸가져 왔다면 손주들이 먹어 줄 것인가?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을 것으로 세상이 변하고 말았다. 하물며 그런 것을 간식이라고 탐하지 않는 현실이 우리 사회가 되고 말았다. 우리나라 먹거리로 세상에서도 알아주던 라면은 이제 외국에서 주식이 된다고 한다. 특히 우크라이나 전장 터에서 우리나라 라면과, 추울 때 국밥과 주먹밥은 간식을 넘어 고급 먹거리 주식이 되었다.
우리 속담에 “내 배가 부르니 평안감사가 조카 같다.”고 했듯, 배부르니 부러운 것이 없다는 말이다. 요즘 시절이 그렇다할 것이다. 어렸을 때 굶주림을 꼭 기억할 필요는 없지만, 생각하는 동물이라 자꾸만 생각나는 것은 말릴 수 없는 인간 행위일 것이다. 특히 배고파보지 못한 사람들은 그런 추억, 상념들조차 사치일 뿐이기에 더욱 그렇다. 예전에는 간식이 필요의 악이었는데, 요즘은 풍족한 삶에서 간식의 필요성조차 없게 되었다.
세월이 흘러 지금은 간식거리가 너무 넘쳐난다. 요즘에 와서 입에서는 한없이 유혹하지만, 몸에서는 받아주질 않으니 그림의 떡이 되고 만다. 어릴 때 간식을 얻어먹으려고 헤매었던 그 시절이 새삼 찬바람 불면서 그리워지는 계절이 다가왔기 때문이다.(20230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