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일상의 언어
말이 통해야 마음과 의사를 소통할 수 있다.
그런데 말과 문자로 설명할 수 없다는 말이 있다.
깨달음을 설명하는데 언어의 길이 끊어져 버렸다는 뜻으로 언어도단(言語道斷)은 언어에 의해서 설명하거나 사고로 생각하여 짐작하기 어려움을 표현한다. 또한 깨달음은 문자를 통하여 전달할 수 없다는 의미로 불립문자(不立文字)라고 한다. 이것은 일상적인 말과 문자의 언어를 통해 표출하면, 이미 본래의 모습과 경지를 훼손시킬 수밖에 없으므로 문자를 매개로 해서는 온전히 전달할 수 없다는 뜻을 담고 있다.
하지만, 깨침 그 자체를 직시하여 전달하기는 어렵지만, 다양한 방법으로 지시하고 안내하며 방편을 수련하는데 언어의 도움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어차피 말과 문자를 통하여 전달하고 방편의 실습을 통하여 스스로 체험해야 하며, 수행자는 말로써 표현된 그 이상의 의미를 붙잡아야 진리를 깨우칠 수 있는 것이다. 단, 언어는 길을 안내하는 지침이 되기도 하지만 진실된 의미를 놓치면 왜곡된 망상에 얽매이게 되는 장애가 될 수 있음을 주의해야 한다.
특히, 진리를 전달하기 위해서 말과 문자는 어쩔 수 없이 필요하므로, 다양한 선지식의 말씀과 표현 방식 및 다양한 용어들을 인용하는 것은 매우 간결하고 명쾌한 수학 공식과 같다. 그러나, 깨달아야만 아는 경지가 있고, 알아야만 깨달을 수 있는 상반된 접근 경로는 여전히 동시에 만족시키기 어렵기만 하다.
이러한 일상의 언어는 우리가 보고 들어서 이해하는 문자와 말로써, 그 의미는 태어나 학습 저장된 관념과 자신만의 인식 범위 내에서 이루어지며, 역사와 문화 및 지역적 집단 배경에 종속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인간들이 고도의 발달된 영성을 전달하기 위해서는 말과 문자가 아닌 다른 차원의 언어가 필요하다. 즉, 진리의 본체는 볼 수 있는 문자나 들을 수 있는 말로 전달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 초월적이고 초감각적인 새로운 차원의 소통방법이 필요한 것이다.
2, 영혼의 언어
새로운 소통방법으로 여기서는 그것을 영혼의 언어라고 하자. 영혼의 언어는 말과 문자를 사용하지 않으며, 잡다한 생각과 분석이 끊어져 무념무상의 상태에서 잘 느껴지는 언어이다. “영”들의 의사소통이 일상적 말과 문자로 이루어질 수 없음은 당연한 일이다. 영들과 소통하는 데는 매우 주관적 경험의 직관과 육감이 사용되며, 기감과 투시 등의 이미지가 이용된다. 일상적 눈에 보이지 않고 들리지도 않는 이러한 도구들이 모두 영혼의 언어이다.
그렇다면, 말과 문자를 배워서 소통하듯이 영혼과 소통하기 위해서는 영혼의 언어를 배워야 할 것이다. 그것을 위한 기초적 학습이 기력 수련이며, 온전한 내 기력의 기반 위에서 기감을 통하여 영혼을 느끼고, 직관으로 감지하며, 투시와 이미지로 확인하면서 서로 생각과 마음을 전달하며 소통하는 방법이다.
따라서, 일반인이 기감이나 직관 및 투시 등이 불가능하다면 당연히 영혼과의 의사소통이 어려울 것이다. 또한, 영혼들끼리는 어떻게 소통할까? 물론 일상적 사람의 말이 아니라 영혼의 언어를 사용할 것이다. 만일 영통을 하려고 한다면, 누군가 내 숨을 대신 쉬어줄 수 없는 것처럼 직접 언어를 배워서 스스로 만나며 소통 확인해야 비로소 믿을 수 있을 것이다.
3. 마음의 운전
삼계유심 심통, 운기심공 기통, 심령개안 영통, 신인합일 신통, 모두가 마음운전을 떠나서 이루어질 수 없다. 탐진치 3독을 벗어나 신구의 3행을 바르게 하는 것도 내 마음의 운전이며(심통), 기를 모으고 운영하며 기력을 충전하는 것도 당기고 집중하는 마음 운전을 통하여 이루어진다(기통). 말과 문자의 일상 언어로 귀와 눈 및 5감이 없는 영혼과 소통할 수 없으며, 오로지 마음의 눈으로 보고 들을 수 있다(영통).
탐욕스러운 생각과 어리석은 집착의 마음 운전은 탈취와 강요의 행동이 나올 것이며(심통), 흔들리는 촛점이 검은 먹지에 불을 일으킬 수 없듯이 집중하여 마음 운전할 수 없다면 결코 기를 당기기가 쉽지 않다(기통). 마음이 없는 영혼이 어떠한 존재기반이 있을 수 있으며, 응집된 의념의 마음운전이 심령과 실재를 만들수도 있다는 생각이 가능하다(영통).
하지만, 한을 품거나 집착이 강한 경우는 어떠한 의지처 육체가 없어도 응축된 기운의 형태을 갖고 실재할 수 있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또한, 집착이 없는 선량하고 초월한 영혼은 올라가고 악랄하고 집착한 영혼은 내려가는가? 내려간다면 어디로 어떻게 내려가고 올라간다면 어디로 올라가며, 전체로 본다면 도대체 아래 위가 따로 있는가? 마음에 대한 위생적이고 올바른 깨달음이 없다면 귀신에 씌운 환영을 만들 수 있으며, 기력이 떨어지면 혼수상태처럼 헛된 것에 휘둘려 정상적인 생각과 마음 운전이 불가할 것이다.
참 나를 온전하게 지켜주는 것은 명쾌한 깨달음, 청정한 내 마음뿐, 오직 일체유심조이다. 하지만 이것은 일상의 언어로 소통이 이루어지는 5감의 현실 차원 세계이며, 단견이 아니라면 우리가 보고 들으며 전혀 느낄수 없는 다른 차원의 세계가 있을 수 있음을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합리적 태도일 수도 있다. 즉, 마음 운전을 기반으로 심통, 심통을 기반으로 기통, 기통을 기반으로 영통, 영통을 기반으로 신통을 이루는 안전하고 합리적인 점진적 접근 경로를 가상적으로 상정하는 것이다.
첫댓글 참새는 짹짹~
개들은 멍멍~
참새는 참새끼리,
개들은 개들끼리 말하며 소통한다.
영혼과 소통하려면,
어떻게 말을 해야 할까?
더 나아가
천지만물과 소통하는 공통어는 무엇일까요?
생각과 감정을 그대로 보여준다면 그보다 더한 언어는 없습니다.
생각과 감정을 그대로 느끼게 해준다면 그보다 더한 소통은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영적세상과 신들이 대화하는 법 입니다.
그러하니 ..,
굳이 글이 .. 언어가 .. 의미 없겠지요.
그냥 의미를 전해주고 생각을 보여주면 되는것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