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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절을 이렇게 준비하렵니다
20201225 / 성탄절 예배 / 마태복음 2:1-12
■ 어느 목사님의 이야기 / 크리스마스를 맞이하는 외부적 분위기를 보면 우리나라와 서구 사회는 조금 차이가 있는 것 같이 보인다. 한국은 크리스마스트리 장식에 그렇게 신경을 쓰지 않는 편이지만 미국과 같은 나라는 이때가 되면 크리스마스트리 장식으로 매우 찬란한 거리를 볼 수 있다. 내가 살던 마을의 한 동네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트리 마을이 있는데 도시 전체가 한 달 동안 한 집도 빼놓지 않고 지붕 꼭대기에서 주춧돌까지, 도시의 가로수 전체를 크리스마스트리로 장식했다. 그러니 얼마나 반짝이겠는가? 그래서 크리스마스 전후로 한 달 동안 미국 전역에서 그 마을을 보기 위해 사람들이 찾아온다. 끊임없는 관광객들이 그 마을을 찾아오는데 나도 두세 번 가본 적이 있다. 온갖 아이디어를 내서 누구의 집이 더 화려한가? 경쟁할 만큼 아기 예수, 동방박사, 천사, 산타클로스 등 수없이 아름답게 장식해서 조명을 밝힌다. 도시 전체가 그렇기 때문에 황홀한 조명 아래서 사람들이 밤새도록 집에 가지 않고 구경을 한다. 그런데 그렇게 하라고 시청에서 전기세를 내주는 재정 지원을 한다. 전기세가 한 달에 얼마나 많이 나가겠는가? 그런데 시 정책으로 해마다 트리 장식을 한다. 수십 년째 계속 하고 있다. 어느 집에 갔을 때 그 집 주인을 만나게 되었다. 어떻게 크리스마스트리 장식했는지 물었다. "당신 집이 이 마을 전체에서 제일 멋있게 장식을 했는데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랬더니 그 분의 말이 "우리 가족은 이때만 기다리면서 삽니다. 해마다 수십만 명의 관광객이 우리 집을 왜 오겠습니까? 우리 집 앞에 와서 너무나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려고 일 년 내내 아이디어를 냅니다." 주인에게 물었다. "예수님을 믿으세요?" "아닙니다." "그러면 이것을 왜 하셨습니까?" "좋잖아요." 그래서 서구인들은 크리스마스트리를 장식하는 문화가 예수님 믿는 것과는 아무 관계없이 행사화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그 마을 사람들 중에 교회 나가는 사람들은 1/10도 안 될 것이다. 그러나 크리스마스 행사는 세계에서 제일 화려하게 한다. 많은 사람들이 즐거워하니까 안하는 것보다는 낫다고 볼 수가 있는데 '정말 주님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 했다면 더 좋았을 것을' 하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코로나19가 창궐(猖獗)한 2020년에도 변함없이 성탄절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런데 우리는 성탄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 몇 년 전까지 아래와 같은 걱정들을 많이 했는데, 뒤돌아보면 그때가 더 좋았는지도 모르겠다.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성탄절이 오게 되면 성도들보다도 불신 세상이 먼저 호들갑을 떨고 상업적인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화려한 치장과 함께 흥을 돋우고 있다. 현대의 크리스마스는 예수님께 대한 경배와 찬양과 감사보다는 향락을 위해 존재하는 절기인양 둔갑을 하고 있다. 그래서 이제는 ‘성탄절’이 ‘한탄절’로 바뀌었고, ‘즐거운 크리스마스’(Merry Christmas)가 아니라 주님께 ‘죄송한 크리스마스’(Sorry Christmas)가 되고 말았다. 우리는 불신자처럼 성탄을 보내서는 안 된다. 구원받은 성도답게 성탄을 바로 보내야 한다. 그런데 우리가 성탄을 바로 보내려면 바로 준비해야 한다.>
이제는 하나님의 징계인 코로나19 재앙으로부터 교회들이 비대면이라든가 소수의 인원만 참석하는 상황이 되었으니 서글퍼진다. 그러나 다른 측면에서 본다면 자신들을 돌아보며 성탄을 맞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수가성 여인처럼 고난 속에서 하나님과의 맑고 깨끗한 교제가 이루어져서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나 자신과 참다운 교회가 되었으면 한다.
참고로 교회(Ecclesia)란 문자적으로는 ‘밖으로 불러 모으다’는 뜻으로, 죄악 세상에서 불러 모아진 성별(聖別)된 자들의 모임 곧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성도의 모임을 가리킨다(엡 1:22-23; 히2:12). 이는 거룩한 신앙 공동체로서의 ‘교회’를 의미한다.
잘 아는 이야기이지만 예수님의 성탄은 사람들의 생일과 다르다. 예수님의 성탄은 인간의 출생과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예수님의 탄생은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로 되어진 사건이다. 이 사건은 한 아이의 출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육신이 된 사건이다. 그래서 여인의 몸을 빌려서 이 땅에 오신 것이지 결코 인간의 방법으로 오신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 성탄은 인류 역사에 단 한번뿐인 우주적 사건이며 이 사건이 없었다면 인류에게는 소망이 없었다.
이렇게 그리스도는 온 인류의 소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을 안 사람, 영접한 사람은 소수에 불과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으나 세상은 그를 알지 못했다. 아니 자기 땅에 오셨으나 자기 백성들이 영접하지도 않았다. 그뿐 아니라 영생을 얻을 수 있는 또는 천국에 갈 수 있는 복음을 비롯하여 회개를 외치셨건만 마땅히 아멘으로 화답해야 백성들은 그분을 박대하였다.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실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인간의 죄 때문이었다. 예수님의 탄생은 인간의 죄를 속량하시기 위함이었다. 좁게는 나의 죄와 나의 죄를 속량하시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성탄절은 추리를 화려하게 장식하고, 성탄절 칸타타 합창을 하고 선물교환이나 하는 절기가 아니다. 성탄은 나를 위하여 하늘의 영광스러운 보좌를 버리시고 우리 아니 나의 죄를 속량하기 위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의 죄악을 내어놓고 자복하며 주님의 긍휼과 자비를 구하는 날이어야 한다. 그 후에 기쁨의 찬양을 하는 것인데 ㅠㅠ ... 성탄절은 인간이 죄인임을 알리는 날이요, 예수님만이 인류의 참 메시아임을 알리는 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탄을 축하하면서 죄를 사해주시려는 예수님은 없고 ㅠㅠ ...
이러한 모습은 오늘날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탄생하실 때에 기쁨으로 맞이한 사람들이 있는 반면에 무관심하거나, 거절하거나, 증오한 사람들이 있었다.
▶ 성탄절이 이교도들의 풍습을 중세 교회에서 도입한 것이기에 기독교인들은 성탄절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얼핏 들으면 그렇듯 하지만 맞는 말은 아니다. 우리가 성탄절로 지키는 때가 로마 시대에는 태양신을 기념하던 이교적 절기였는데, 교회는 태양이 신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만이 참 신이시오 구세주라고 증언하면서 지키기 시작한 것이 성탄절의 기원이다. 이전에는 태양신에게 제사를 드리던 자들이 예수님을 믿고 난 후에는 그분에게 경배하게 되었다.
Christmas = Christ(그리스도) + mas(예배)
이 설교를 듣고 보는 모든 이들이 성탄절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을 바로 알고 그분의 이름에 합당한 경배와 헌신의 삶을 살기를 결단하며 어느 때보다 의미 있는 성탄절을 맞이했으면 한다.
1. 예수님이 왜 오셨을까?
1.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하나님의 공의에 따르면 모든 인간은 다 죽어야 했다. 그런데 우리 스스로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구약시대에는 죄를 질 때마다 짐승들이 죄지은 사람들을 대신하여 피를 흘려야 했다.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우리 대신 죽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
요 1:14 /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독생자’라는 표현은 ‘종류로서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뜻한다. 전에도 없고 앞으로도 없을 독특하신 분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으셨다는 말은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실제로 스스로를 낮추셨다. 인간이 되어 인간과 함께 사셨다. 성육신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다 내어주신 ‘은혜’였다. 성육신은 무지로 방황하며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는 인생들에게 갈 길을 분명히 제시하신 ‘진리 그 자체’이셨다. 복음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죄 사함 받고 깨끗하게 될 수 있다는 기쁜 소식이다. 예수님의 생명의 빛이 우리의 마음을 비췰 때 죄가 드러나고 그 죄를 회개할 때 죄 씻음을 받는다.
2. 우리의 풍성한 삶을 위하여
요 10:10 / 도둑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파괴하려는 목적으로 오지만 나는 양들에게 생명을 주고 그 생명을 더 풍성하게 해주기 위해 온 것이다.
예수님이 성육신하신 목적은 양들이 생명을 얻게 할 뿐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 하는 것이다. 참 목자이신 예수님은 양에게 생명을 주실 뿐 아니라 이 땅에서도 풍성한 삶을 누리게 하신다. 부유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난하게 되심으로 우리를 부유하게 하신 것이 십자가의 사랑이다. 따라서 성도들은 세상의 일시적인 만족과 풍요를 바라지 않고 영생을 소유한 자로서 예수님을 신뢰하고 순종해야 한다. 자녀가 되면 부모의 것을 상속받을 수 있듯이 예수님을 영접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기도에 대한 응답,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특권이 주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이 놀라운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면서 예수님을 보여주어야 한다.
3. 섬김의 본을 보이시려고
막 10:45 / 인자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많은 사람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목숨을 내주려고 온 것이다.'
예수님은 지배하거나 군림하려 하지 말고 섬기는 자가 되라고 하셨다. 이것이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는 그리스도들의 자세이다. ‘섬기는 자’를 의미하는 헬라어 디아코노스에서 영어 deacon(집사)이 나왔다. 예수님은 자신을 제자들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본받아야할 궁극적인 섬김의 본보기로 제시하셨다. 예수님의 생애 즉 그분의 탄생, 사역, 죽음은 인류를 위한 섬김이었다. 대속물은 예수님이 죄와 죽음의 상태에 있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지불하신 보혈의 속전을 가리킨다. 예수님은 구원 받는 성도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모든 인류를 위해 자신을 버리셨다. 우리는 비록 예수님의 죽음이 가지는 대속적 성격까지 본받을 수는 없겠지만 그분의 삶을 본보기로 삼아야 한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계속해서 따라가야 한다.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 자녀들의 의무이기는 하지만 결코 저들은 짓밟히는 십자가만 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영원한 생명만이 아니라 참된 평화를 맛보게 될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하나님께서 하늘 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다. 그리하여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 있는 모든 것이 예수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고 입을 모아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십니다.’하고 고백하여 아버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 것이다(빌 2:9-11).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경건한 무리들은 모든 어려움을 극복해야 할 것이다(롬 8:18-23).
롬 8:18-23 / [고통에서 영광으로] 우리가 지금 당하고 있는 고난은 장차 우리가 누릴 영광과 비교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19)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자녀들을 부활시키실 날을 인내와 희망을 가지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20-21) 그날에는 하나님의 명에 따라 본의 아니게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던 가시와 엉겅퀴, 죄, 죽음, 부패 따위는 모두 다 사라져 버리고 우리는 영광스러운 해방을 맞아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즐거움을 나누게 될 것입니다. 22) 동물이나 식물과 같은 자연계의 생물까지도 이 위대한 사건을 기다리면서 병과 죽음의 고통을 참아내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23) 성령을 받고 장래의 영광을 미리 맛본 그리스도인조차도 고통과 고난에서 놓여나기 위해 신음하며 하나님의 자녀로서 완전한 권리를 받게 될 날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그날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대로 두 번 다시 병에 걸리지도 않고 죽지도 않을 새 몸을 주실 것입니다.
2. 예수님의 탄생에 역행을 한 헤롯왕
헤롯왕과 같이 미움과 증오의 태도를 지닌 사람들이 있다. 성탄절을 맞이하는 사람들 가운데도 헤롯과 같은 사람들이 있다. 헤롯은 예수님의 탄생에 대해서 겉으로는 환영하나 속으로는 저주하고 적의를 가졌다. 2절을 보면 동방박사들이 헤롯왕에게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라고 질문할 때에 3절에서 ‘헤롯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고 밝히고 있는 것처럼 헤롯왕은 물론이고 온 예루살렘이 요동하였다. 그러나 헤롯왕은 이러한 마음을 속이면서 동방 박사들에게 “가서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고 하였다.(7절) 그러나 이러한 마음은 헤롯의 본심이 아니라, 겉으로는 예수님의 탄생을 환영하는 것처럼 보이나 속으로는 그렇지 아니했다. 그러기에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 본 그 때를 표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마 2:16)”고 한 것처럼 무고한 유아들을 다 죽이는 엄청난 일을 자행했다.
▶ 그렇다면 헤롯은 어떤 사람일까? / 헤롯은 에서의 후손인 이두메 사람 안티파터(Antipater)의 아들로서 주전 73년경에 태어났다. 그는 B. C 47년에 로마의 시이저에 의해서 유대의 총독으로 임명되었고, B. C 40년에는 유대의 분봉왕으로 임명되어 B. C. 4년까지 통치하였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실 무렵 약 70세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권력을 지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매우 잔인하여 반역할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망상 때문에 아들 셋과 아내와 장모까지도 살해하였다.
이렇게 권력에 눈이 어두워 불안 속에 사는 헤롯왕에게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라는 질문은 그에게 어떠한 충격을 주었는지는 상상을 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래서 ‘소동한지라’고 그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서 ‘소동하다’(타랏소)라는 말은 ‘뒤흔들다, 흥분케하다, 당황케 하다, 요동케 하다’라는 뜻이다. 이것은 곧 극심한 불안과 공포의 현장을 생동감 있게 전해주는 단어이다.
그는 이미 70세의 나이로 쇠약해진 육체인데도 예수님의 탄생 소식에 안간힘을 쓰며 잔인무도하고 피에 굶주린 폭군답게 왕권 수호에 미친 행동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을 불러 유대인의 왕 즉 메시야가 어디서 태어날 것인가를 묻고 또한 박사들을 가만히 불러 별이 나타난 때를 자세히 묻고서(7절), 아기를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8절)고 위장을 하였다.
이렇게 악한 자는 경건을 가장하고, 신앙이란 가면을 쓰고 자기의 악함을 감추게 됨을 볼 수 있다. 헤롯은 겉으로는 미소를 지으며 환영하고, 속으로는 적의에 찬 태도로 살기가 서렸던 것이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는 헤롯 대왕의 죽음에 대해 웃지못할 이야기를 전해준다. 그는 병으로 죽었는데, 자신의 죽음을 두고 슬퍼할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이 걱정되었다. 그래서 유다 전역에서 존경받는 지도자들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는 자식들에게 유언을 내렸다. 자신이 죽는 순간에 그 사람들을 모두 살해하라고. 그렇게 하면 자신이 죽었을 때 곡하는 소리가 들릴 것이라고 계산했던 것이다. 다행히도 그 자식들이 그 유언을 따르지 않았다고 한다.
인간의 역사란, 중국이나 유럽을 들여다보면 서로 죽이고 죽은 것의 기록의 전부이다. 인간의 역사를 생각하다 보면 인간이란 결국 이런 정도밖에 안 되는 존재인가 하는 회의에 빠지기도 하지만 문제는 우리 안에도 있다는 것이다. 지금도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못하는 사람의 마음은 헤롯과 같이 변화하지 못하여 끊임없이 남을 미워하고, 욕심을 부려 남을 해롭게 하며 끝내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데 동조를 하게 될 것이다.
3. 무관심한 사람들
1. 제사장과 서기관들과 같은 사람들이다.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는 헤롯왕의 질문 앞에 저들은 명쾌한 답을 즉시 제공하였다.
마 2:5-6 / 그들이 대답하였다. 유대 베들레헴입니다. 예언자 미가가 이렇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6) 그러나, 너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비록 유다 족속의 작은 마을이지만 이스라엘의 통치자가 될 나의 사람이 네게서 나올 것이다.
제사장들은 아론의 후손들이 그 직분을 이어갔으나 헤롯은 자기의 권세로 아무나 제사장으로 임명하기로 하고 해임시키기도 하였다. 여기 유대 종교의 서기관은 구약 율법에 능통하며, 구약의 구전에 해박한 지식을 가진 율법해석자요, 교사였다.
이들은 미가서 5장 2절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그리스도의 탄생 지역을 명확히 꼬집어 내었다. 그러나 이들은 메시아의 탄생 곧 예수님의 탄생에 대해서 이상하게 느껴질 만큼 철저하게 무관심했다. 메시아의 탄생지는 베들레헴이라고 가르쳐 주기는 하였으나 자신들은 베들레헴에 가지도 않았고, 대망의 메시아가 오셨다고 하는데도 기뻐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자신의 특권만 챙기고 헤롯 왕 눈치만 살필 뿐 메시아에 대한 지식이 있으면서도 무관심하였다. 그렇다면 이들이 메시아의 탄생에 대해서 전혀 무관심한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당시에 이들 모두는 너무 깊이 세속화되었기 때문이다. 물질이나 명예나 어느 면에서나 부족함이나 불편이 없었기 때문에 구태여 메시아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바리새인과 서기관이 왜 성경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구세주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했을까?
➊ 인간의 교권주의 때문이다 /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그들의 교권주의(종교상의 권위와 권력) 때문에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했다. 그들은 당시 이스라엘 민족을 지도하는 지도 계급이었다. 그런데 나사렛 예수라는 사람이 갑자기 나타나서 죽은 자를 살려내고, 중풍병자를 일으키며, 오병이어로 수많은 군중들을 먹이고도 남기는 등 인기가 높아지자 저들은 시기 질투를 했다. 자신들이 존경과 높임을 받아야 되는데 예수라는 사람이 나타나서 많은 일들을 행하니 시기 질투가 나서 예수님을 핍박하고 가는 곳마다 괴롭혀 나중에는 처참하게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
교권주의자들은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한다. 교권주의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처럼 교회의 직분을 하나의 권리로 착각해서 남에게 명령하고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것을 말한다. 우리 또한 모두 죄성을 갖고 있기에 자칫하면 그렇게 되기 쉽다. 교회의 직분은 예수님처럼 섬기는 직책이다.
➋ 형식주의와 외식주의 때문이다 /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한 사람들은 형식주의 자들과 외식주의 자들이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누구보다 성경을 잘 아는 사람들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예수님으로부터 회칠한 무덤이라고 책망받았다. 외식주의자였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훌륭하게 보였지만 속에는 정성도 없었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도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할 뿐 아니라 계속해서 예수님을 쫓아다니며 괴롭히다가 나중에는 십자가에 못 박았다. 우리의 모습 속에서도 이런 모습을 볼 수 있다. 성탄을 맞이하면서 우리 자신 반성하여 타성에 젖어 형식적이고 의식적인 것들을 회개하고 말구유에 탄생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해야 하겠다.
본문이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일까? / 우리는 이들을 볼 때 성경을 안다는 것 자체가 다 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종교적인 직분을 가진 자들이 메시아의 오심에 대해서 너무나 무관심을 나타내었다. 저들은 하나님이 인간이 되어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에 대해서 기쁨이 없었다. 습관적으로 봉사하고, 지식적으로만 성경을 연구하였지 정작 구약 성경이 가르치는 오실 메시아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던 자들이었다.
오늘날 교회 안에도 이런 사람들이 없다고 말할 수가 없다. 예수를 오래 전에 믿었는데 은혜 체험도 없고, 눈물로써 자기의 죄를 회개해 보지도 못하고, 진정 생명의 예수님께 자기의 삶을 드려 헌신해 보지도 못하면서 교회에 나온 연륜만 자랑하고, 습관적으로 예배당만 출입하는 사람들이 오늘의 한국교회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현상이다.
우리는 안다는 것과 믿는다는 것을 혼돈하지 말아야 한다. 지식과 신앙은 별개의 것임을 알아야 한다. 습관으로 주일이면 교회 마당을 밟으면서도 구원의 감격도 없고,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삶의 희열도 느끼지 못하고, 하나님의 요구에 무엇이든 순종하지 못한다면 바로 나의 모습이 제사장과 서기관의 모습이 아닌지 자신 스스로 진단해 보아야 할 것이다.
예수님께서 신앙고백을 했던 베드로를 비롯하여 모든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상기해 보자.
마 16:24-26 / [예수를 따르는 길] 그리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버리고(부인)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 25)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보존하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 26) 너희가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생명을 잃어버리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생명의 가치를 무엇과 비교할 수 있겠느냐?’
2. 여관집 주인과 같은 사람들이다.
누가복음 2:7에도 보면 여관 주인의 무관심을 찾아볼 수가 있다. 예수님은 숙박할 곳도 없어 말구유에서 태어났다. 만약에 여관집 주인이 예수님이 메시아요, 만왕의 왕인 줄 알았더라면 자신의 안방이라도 내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메시아인 줄 몰랐다. 이 주인은 영적인 일에는 무관심하고 세상적인 것에는 지극히 예민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여관집 주인은 오직 돈을 버는 일에만 관심이 있었다. 예수님께서 여관집 주인의 구유에서 태어나셨을 때 여관집 주인은 가만히 앉아서 메시아를 자기 집에 모실 수 있는 영광을 얻었는데도 그 기회를 놓쳐 버리고 말았다. 여관집 주인은 물질을 모으는 일에만 급급하여 예수님을 모실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놓치고 말았던 것이다.
설령 여관집 주인이 메시아를 몰라보았다 할지라도 인간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당연히 자기 집 안방이라도 내어 주어야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기를 낳아야 하는 산모에게 방 하나 내어주지 못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마태복음 25장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마 25:34-40 / 그리고 왕인 나는 내 오른편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사람들아, 와서 천지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한 이 나라에 들어가라. 35) 너희는 내가 배고플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 되었을 때에 너희 집으로 따뜻하게 맞아들였다. 36) 또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병들었을 때와 감옥에 갇혔을 때에 찾아와 주었다.' 37) 그때 그 의로운 사람들은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이 배고프신 것을 보고 잡수실 것을 드렸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렸습니까? 38) 또 언제 주님이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도와 드렸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렸습니까? 39) 언제 주님이 병드셨거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찾아가 뵈었습니까?' 40) 그러면 왕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가 진정으로 말한다. 너희가 여기 있는 내 형제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곧 내게 해준 것이다!’
그렇다. 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라면 당연히 선을 베푸는 것을 의무로 알아야 한다.
배가 볼록한 마리아를 보면서 / 만삭인 마리아는 누가 보아도 금방 알 수 있는 신체적 조건을 가지고 있는데다가 또 먼 길을 걸어왔기 때문에 몸이 지쳐 있었다. 그런데 베들레헴의 모든 주민들은 어느 누구도 이 마리아의 딱한 사정을 돌아보지 않았다. 요셉이 얼마나 당황스럽게 주민들을 찾아다니며 호소를 했을까?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라’ 그랬다. 만약 이때 요셉이 돈이 주머니에 많았다면 문제는 달라졌을 거라고 본다. 우리들이 다 인정하는 일이 있다. 또 세계가 다 인정하는 일이 있다. 돈에 대한 애착을 가장 많이 갖는 민족은 유대인들이라고 한다. 돈에 대해서는 피도 눈물도 없고 돈이 생기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한다는 것은 세계가 다 인정한다. 유대인의 그 지독성이라고 그럴까... 만약 요셉이 돈 뭉치를 꺼내들고 ‘방을 하나 주십시오!’ 했다면 베들레헴 주민들은 자기들 안방이라도 주었을 것이다. 그런데 남루한, 행색이 남루하고 돈이 없는 이 요셉은 갈 때가 없어서 결국 마구간으로 왔다. 만약 이때 베들레헴의 어느 주민 하나가 자기 집 초라한 한 칸의 방이라도 빌려주었다면 그 집은 영원한 성지가 되었을 것이다. 결국 예수님은 마구간으로 밀려났다.
그러면 우리의 생활을 한번 돌아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영적인 눈을 가지고 보면 지금도 그러한 일은 얼마든지 많을 것이다. 잘 보고 잘 돌보면 영원한 축복이 될 수 있는 것을 천대하고 헛간에 집어던져 버리는 경우가 우리 주변에도 많이 있다.
아브라함은 부지중에 천사를 영접하였다고 하였다.
히 13:2-3 / 잊지 말고 나그네에게 친절히 대하십시오. 늘 나그네를 잘 대접하던 어떤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천사를 대접한 일도 있었습니다. 3) 감옥에 갇힌 자들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이 그 처지에 놓여 있다고 생각하고 고난을 함께 나누십시오. 학대받는 사람들의 슬픔에 동참하십시오. 여러분은 그들이 당하는 슬픔이 어떤 것인가를 이미 알고 있지 않습니까?
아브라함은 자기 집 앞을 지나가는 나그네 세 사람을 보고 극진히 영접하였다. 기름진 송아지를 잡아서 고기를 대접하였다. 아브라함의 접대는 그야말로 극진한 접대였다. 어떻게 기름진 송아리를 지나가는 나그네를 위해 잡을 수 있었다는 말인가? 그런데 그들은 천사였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소원인 아들 출산을 말해주었고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경고를 말해 주고 떠났다.
4. 아기 예수님께 경배한 동방박사들
동방박사들과 같이 성탄을 준비해야 한다. 동방박사들에 대해서는 이름도 출신도 알 수가 없다. 이방인이 또한 어떻게 오실 메시아로 알게 되었으며, 초자연적인 별에 의하여 예수의 메시아임을 어떻게 확신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어 짐작만 할 뿐이다. 그렇다면 동방 박사들은 어떻게 예수님의 탄생을 준비했을까? 나름대로 짐작을 해 본다.
1. 동방박사들은 성경도 없었다.
성경만 있으면 아기 예수님을 찾기가 쉬울 것이다. 성경에는 ‘태어날 곳 베들레헴, 피난 가실 곳 애굽, 자라실 곳 나사렛, 활동하실 곳 갈릴리, 죽으실 곳 예루살렘 영문 밖...’이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은 예루살렘에 와서야 서기관들을 통해 왕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다는 것을 들었다. 즉 그들은 성경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구전으로 조상적부터 내려온 민수기 24:17 한 구절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홀이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리라’는 것을 희미하게나마 알고 있었을 것이다.
왜 그랬을까? 학자들 중에는 동방박사들이 바벨론에 끌려갔던 유대인들의 후손이라고 말한다. 그렇다고 본다면 바벨론에서 석방될 때 믿음 좋은 사람들은 다 고국에 돌아오고 대부분 믿음 없는 사람들은 그곳에 정착했는데 수백 년이 지난 그들에게 종교교육은 열악했을 것이다. 물론 회당이라는 것을 세워 나름대로 교육에 힘썼다고 하지만 그리 쉽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 형편이 그러했듯이 구술(口述)로 전해지는 하나님의 이름이나 성경 몇 마디 아는 것이 전부였고, 동방박사는 서기관들처럼 전문가도 아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그들은 성경 몇 구절 붙잡고 믿음 지키며, 이 땅에 오실 메시아 왕을 기다리며 그것도 아기 예수님 계신 곳까지 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참으로 대단한 믿음들이다. 그런데 우리는 성경 66권 모두 갖추고 있고, 눈을 들어 사방을 보면 쉽게 십자가와 교회를 찾을 수 있다. 지금은 다양한 형태로 말씀도 듣고, 찬양도 들어가며 살아가고 있지만 과연 동방박사와 같은 경배를 드리고 있는지 부끄럽기도 하다.
2. 사실 이 땅에 오신 메시아를 뵈려 유대 베들레헴까지 온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마 2:1 / 예수께서는 헤롯왕 때에 유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을 때는 헤롯의 통치시절이었다. 그때에 동방에서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찾아와서 물었다.
예수님은 역사 속에 나타나셨다. 가상인물이 아니고,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다. 생명의 빛 되신 예수님께서 어두운 때에 이 세상에 탄생하셨다. 그러나 성경을 잘 알고 있는 유대인들은 이 사실을 알지 못했지만 이방의 나라에서 온 박사들이 유대인의 왕이신 예수님을 찾아 나선 것이다. 이들은 비록 이방인이었으나 기쁨과 감격에 찬 경배를 아기 예수님께 드릴 수 있었다.
서기관과 제사장의 성경 해석의 도움으로 메시아의 탄생 장소인 베들레헴을 알게 되었고, 전에 나타났던 별의 인도로 아기 예수님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베들레헴은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약 8Km 정도 떨어진 곳으로 다윗이 태어난 고향이요, 다윗의 도성이었다(삼상 16:1, 17:12).
베들레헴의 뜻은 ‘떡집’으로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의 오심을 나타내 주는 장소라고도 볼 수 있다. 유대인들의 구약 성경에 대한 능통함에 비해 동방박사들은 별에 의해 메시아가 태어난 것을 알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작은 은혜와 성경 지식으로 메시아를 직접 만나는 영광을 얻게 되었다. 동방박사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먼 길도 마다하고 아기 예수를 찾아왔다. 예배란 자기를 포기하고 생명을 드려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 과연 우리는 동방박사들 같이 예수님께 경배 드리기 위해 나를 포기하고 생명을 드리며 예배에 임해 본 적이 있는지? 동방박사들의 경배는 예물을 드림으로 절정에 이르렀다.
여기 동방이란 곳이 어떤 나라인지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지만 메대ㆍ파사로 보는 학자도 있고, 페르시아, 아라비아, 바벨론, 인도, 애굽으로 보는 학자들이 있다. 동방에서 온 박사들(Magoi)은 별을 연구하는 사람들이었다. 박사라는 말은 갈대아나 파사에서 천문학자들에게 붙여진 이름이기에 이들이 갈대아나 파사에서 온 것으로 생각할 수는 있다. 저들은 별을 연구하다가 예수님의 별을 보게 되었다(2절). 저들은 초자연적인 특별한 별을 발견하고는 곧바로 유대 땅까지 발길을 돌렸다.
그런데 저들은 민수기 24:17에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홀이 이스라엘에게 일어나서 모압을 이편에서 저 편까지 쳐서 파하고 그 소동하는 자식들을 다 멸하리라’고 하신 말씀을 믿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예루살렘까지 온 것이다.
그렇다. 동방박사들은 유대인의 왕이신 메시아를 찾아 머나먼 길을 순례해야만 하는 헌신자들이었다. 당시의 교통수단은 너무나 열악했다. 저들이 걸었던 길은 지금처럼 아스팔트로 포장된 길이 아니었다. 참으로 험난한 길이었다. 먼지를 뒤집어쓰고 와야 하는 길이었다. 하루 이틀의 거리도 아니다.
페르시아 수도권에서 유적지까지 거리를 계산해 보면 비행기 여행 거리이다. 차를 타고 가기도 힘든 사막이다. 사막의 유일한 교통수단인 낙타를 탔는데, 낙타의 걸음걸이는 빠르지 않다. 그래서 여기까지 오느라고 이들은 생명을 걸고 찾아온 것이다.
바로 이것이 신앙생활이다. 영광의 길이 아닌 십자가의 길이 우리에게 있다. 평안의 길이 아닌 고난의 길이 우리 앞에 놓여 있다. 그래도 가야만 하는 길이다. 구원받았다고 자랑하지만 고난의 길을 거추장스럽게 생각하는 교인들이 늘어만 가고 있다. 참으로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동방박사들은 상류계층의 사람들로서 생활이 넉넉한 사람들이다. 그런데도 저들은 평안을 추구함보다는 예수님을 찾아 순례의 길을 떠났다.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여행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무릅쓰고 먼 길을 떠났다.
참된 예배란 이렇게 생명 바쳐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다. 저들은 성경을 잘 알지 못해 베들레헴이 아닌 예루살렘으로 찾아 나섰다. 다행스럽게 서기관들의 조언을 듣고 베들레헴으로 가려할 때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저들을 예수님이 계신 곳까지 인도했다.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께 경배하려고 하는 자들에게는 남이 알지 못하는 신비스러운 은혜체험을 할 수 있음도 교훈해 주고 있다.
동방박사들에게 출생 장소를 정확히 알려준 사람들은 서기관들이었다. 그런데도 누구 한 사람 가보지 않다. 예루살렘에서 베들레헴까지는 남쪽으로 8km지점으로 훤히 보이는 가까운 곳으로 산 고개 하나만 넘으면 된다. 내리막길이니 걸어서 한두 시간 남짓이면 갈 수 있다. 그런데도 그들은 아기 예수께 경배하러 가지 않았다. 메시아가 탄생하였는지 확인조차도 해보지 않았다. 궁금해서라도 가보면 될 텐데 아무도 가보지 아니하고 오직 아기 예수를 축하하려고 찾은 사람은 베들레헴 목자들과 동방박사들 밖에 없었다. 이들은 아기 예수 경배라고 하는 이 한 가지 목적을 위해서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페르시아에서 베들레헴까지 와서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한 것이다.
3. 동방박사들은 철저히 헌신함으로 온전한 경배를 드렸다.
본문 2절에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라고 했다. 11절에서도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 모친 마리아의 함께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고 하였다.
동방박사들의 성탄 방문의 목적은 왕께 경배하고, 예물을 드림에 있다. 왕께 경배! 이것이 성탄의 본질이요, 목적이다. 저들이 생명을 바치고, 자기들의 생활을 포기하고 베들레헴까지 찾아온 것은 요셉을 만나기 위함이 아니었다. 마리아에게 축하해주기 위해 온 것이 아니었다. 바로 메시아 되신 아기 예수께 경배하기 위함이었다.
우리는 하나님을 기만하려고 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이러한 헌신도 없이 참된 경배를 드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위험한 생각은 없다. 동방박사들은 만왕의 왕 예수님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 여기 ‘황금’은 왕께 드리는 최고의 선물로 예수님을 왕으로 인정하는 행위였다. 그리고 ‘유향’은 제사장이 성전에서 향기를 내기 위해 피우는 향으로서 예수님을 대제사장으로 인정하는 예물이었다. 그리고 ‘몰약’은 죽은 사람의 시체에 바르는 약으로서 이것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나타냄으로 예수님의 구원자 되심을 증거하고 있다.
그렇다. 진정한 경배에는 이렇게 헌신이 담겨진, 정성이 담겨진 예물이 있어야 한다. 어쩌면 우리에게 성탄의 감격과 기쁨이 없는 것은 주님께 드릴 진정한 예물이 없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많이 드리느냐, 적게 드리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그 예물에 내 마음이 담겨져 있고, 그 예물에 내 헌신이 담겨져 있느냐가 중요한 문제이다. 형식적인 예물, 마지못해 드리는 예물은 주님께 대한 경배를 퇴색시키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헌심+헌신=경천애인이다.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는 드려야 할 귀한 예물 3가지를 함께 묵상하였으면 한다.
❶ 아브라함의 진정한 헌심+헌신=경천애인
약 2:21-24 / 우리 조상 아브라함까지도 아들 ㄱ) 이삭을 잡아 제물로 바치라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셨을 때, 기쁨으로 그 명령에 복종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하나님 앞에 의롭다고 인정받은 것이 아닙니까? 22) 아브라함은 조그마한 의심도 없이 하나님을 신뢰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어떠한 명령에도 기쁨으로 복종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은 그가 실제로 취한 행동과 선행으로 완전해진 것입니다. 23) 이로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으므로 주께서는 그가 하나님 보시기에 의로운 자라고 인정하셨다’고 되어 있는 성경의 말씀이 이루어졌으며, 또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친구’라고까지 불렸던 것입니다. 24) 그러므로 여러분은 신앙만이 아니라, 신앙과 함께 반드시 행동이 따라야 한다는 것을 마음에 잘 새겨 두어야 합니다.
❷ 헌금 시간에 가장 많이 불리어진 찬송가는 213장 ‘나의 생명 드리니’이다.
♬ 213장 ➀ 나의 생명 드리니 주여 받아주셔서 세상 살아갈 동안 찬송하게 하소서
➁ 손과 발을 드리니 주여 받아주셔서 주의 일을 위하여 민첩하게 하소서
➂ 나의 음성 드리니 주여 받아주셔서 주의 진리 말씀만 전파하게 하소서
➃ 나의 보화 드리니 주여 받아주셔서 하늘나라 위하여 주 뜻대로 쓰소서
➄ 나의 시간 드리니 주여 받아주셔서 평생토록 주 위해 봉사하게하소서 아멘
❸ 로마서 12:1-2 / [그리스도 안의 새 생활]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여러분에게 부탁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거룩하게 하여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실 산제물로 드리십시오. 이것이 진정한 예배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베푸실 일을 생각할 때 이것이 무리한 요구이겠습니까? 2) 여러분은 이 세상 사람들의 행동이나 관습을 본받지 마십시오. 그보다는 생각이나 행동으로 새로워져서 딴 사람이 되십시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방법이 실제로 얼마나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인가를 여러분의 경험을 통해서 알게 될 것입니다.
4. 동방박사들은 성령의 지시에 순종하는 목숨을 건 사람들이었다.
12절에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 지시하심을 받아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가니라’고 하였다. 동방박사들은 메시아 되신 예수님께 경배하고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다른 길로 고국으로 돌아갔다. 헤롯이 동방박사들에게 예수님이 계신 곳을 찾거든 나에게 알려 나도 가서 경배하게 하라고 요청했다(8절). 물론 이 헤롯의 말은 예수님께 경배하기 위함이 아니라 예수님을 죽이려는 음모였다. 하나님은 악한 헤롯의 모략을 아시고 박사들로 하여금 선한 길로 가도록 인도하셨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헤롯을 거역하는 일이 쉽게 생각되는지 모르지만 그때 상황은 생명적 위험을 감수해야 된다. 헤롯 대왕이 누군데 감히 그의 명령을 거역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목숨이 달린 문제이다. 낙타를 타고 천천히 이동을 해야 되는데 그것도 낯선 외국인들이라 금방 노출된다. 헤롯의 군대가 그것을 못 찾을 리가 없다. 지금처럼 자동차로 한 시간에 50-60km 밖을 도망갈 수 있는 그런 시대가 아니다. 어떻게 그렇게 헤롯 대왕을 거역할 수 있었을까? 이들은 생명을 걸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목표하는 유대인의 왕으로 탄생하신 메시야를 뵈옵고 경배를 하였으니 죽어도 괜찮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된다.’ 그리고 헤롯의 명령을 거역하고 다른 길로 자기들의 갈 길을 갔다.
우리 기독교 진리 수행에 있어서 반드시 따라오는 과정이 하나 있다. 그게 무엇일까? 어느 때인가는 십자가를 져야 한다. 우리가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괴로우나 즐거우나 주 만 따라가오리다. 어느 누가 막으리까 죽음인들 막으리까?’라고 늘 찬송을 하였고, 예수님도 말씀하셨듯이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그러니까 예수님을 만나는 사람들은 예수님처럼 생명의 위협을 각오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 있다. 동방박사들은 꿈으로 주어진 하나님의 지시를 철저하게 순종하였다. 사람들은 나름대로 하나님의 지시함을 받는다고 하면서 자기 멋대로 하는 반면에 이방인이었던 이들은 꿈에 들려진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한 순종의 모습을 보여줌으로 불순종으로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교훈을 던져주고 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명령에는 그 무엇보다 순종이 우선되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우리가 어디를 가든지 천사를 보내 보호하게 하시니 그들이 두 손으로 우리를 꽉 붙잡을 것이다. 혹시나 돌부리에라도 채이지 않을까 노심초사하실 것이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하나님의 요구에 순종하는 것이다. 내 뜻과 내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교회에 봉사하는 것이 아니다. 어린아이들의 믿음대로 내 경험, 내 방법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걸어가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을 만난 자들에게는 끝없는 변화와 영적인 성숙 그리고 새로운 도전이 있어야 한다. 동방박사들은 예수님을 만난 뒤 지금껏 걸어왔던 길로 가지 아니하고 새로운 길, 진리의 길, 생명의 길, 순종의 길로 나아갔다.
우리는 성탄을 이렇게 준비하자
1. 죄와의 단절
엡 4:17-32 /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 생활] 이제 나는 주님의 이름으로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더 이상 구원받지 못할 자들이 사는 방식대로 살지 마십시오. 그들은 분별력을 잃어버리고 혼란에 빠져 있습니다. 17) 그들은 마음을 닫고 깜깜한 어둠에 갇혀 지냅니다. 하나님을 향해 마음을 닫아 버렸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에서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길을 깨닫지 못합니다. 19) 그들은 선과 악도 구별하지 못하고 자신을 불결한 생활 속에 내맡기고 있습니다. 그들은 악한 생각과 무분별한 욕망에 이끌려 그런 생활을 멈추려고 하지 않습니다. 20)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여러분에게 그렇게 살라고 가르쳐 주시지 않았습니다. 21) 만일 여러분이 참으로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고 그리스도에 대한 진리를 배우고자 한다면 22) 여러분의 그 낡고 악한 옛 사람을 뽑아 던지십시오. 여러분의 그 낡고 악한 옛 사람이야 말로 육욕과 속임수로 가득 차서 속속들이 다 썩어 버린 지난날 여러분의 자화상입니다. 23) 이제 여러분은 태도와 생각을 새롭게 바꾸어야 합니다. 24) 여러분은 전혀 다른 새 사람, 거룩하고 선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새사람이 되십시오. 25) [새 생활의 법칙] 거짓말을 하지 말고 진실만을 말하십시오. 한 몸의 지체인 우리가 서로 거짓말을 하면 우리 자신에게 상처를 입히는 셈입니다. 26) 혹시 분한 일을 당하더라도 원한을 품어서 죄를 짓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해가 지기 전에는 다 잊어버리고 냉정을 되찾으십시오. 27) 여러분이 화를 내면 악마에게 발붙일 기회를 주기 쉽습니다. 28) 만일 도둑질로 살아온 사람이 있거든 당장에 그 일에서 손을 떼고 그 손으로 정직한 일을 해서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십시오. 29) 악담을 하지 말고 상대방에게 유익하고 도움이 되고 복이 되는 말만을 하십시오. 30)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마십시오. 성령께서는 구원이 완성되는 날 여러분에게 구원의 보증을 인쳐 주실 분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31) 심술궂고 불쾌한 태도와 성내는 버릇과 싸움과 가시 돋친 말과 남을 멸시하는 태도를 버리고 32) 친절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가지십시오.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사람들이라는 이유만으로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한 것같이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골 3:1-17 /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을 때 여러분도 함께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러니 하늘에 있는 풍부한 보화와 기쁨에 눈을 돌리십시오. 그곳에는 그리스도께서 영예와 능력을 가지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2) 하늘나라의 것으로 여러분의 생각을 채우십시오. 이 세상일을 염려하느라고 시간을 보내지 마십시오. 3) 마치 죽은 사람이 이 세상에 미련을 두지 않는 것처럼 여러분도 이 세상에 조금도 미련을 두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참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4) 우리들의 참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여러분도 그분과 함께 빛나며 그분의 모든 영광을 함께 나누게 될 것입니다. 5) [그리스도인의 생활 원칙] 그러므로 죄에 가득 찬 세속적 욕망을 버리십시오. 여러분 속에 파고드는 악한 욕망을 죽이십시오. 성적인 죄, 부정, 정욕, 수치스러운 욕망을 끊어 버리십시오. 이 세상의 금전과 쾌락을 흠모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우상숭배이기 때문입니다. 6)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가 그런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내릴 것입니다. 7) 여러분이 이 세상에 속해 있을 때는 여러분도 그런 생활을 해왔습니다. 8) 그러나 지금은 분노와 증오와 저주와 더러운 말과 같은 때 묻은 옷을 벗어 버릴 때입니다. 9) 거짓말로 서로 속이지 마십시오. 거짓말은 모든 악행만을 일삼던 여러분의 대명사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 옛사람은 죽었습니다. 10) 여러분은 완전히 새사람으로 살고 있습니다. 새사람은 계속해서 옳은 일을 더욱더 배우려 하고 여러분 속에서 새 생명을 창조하여 주신 그리스도를 닮은 자가 되려고 부단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11) 이 새 생명으로 사는 사람에게는 국적이나 인종이나 교육이나 사회적 신분의 차이 같은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소유하고 있느냐, 있지 않느냐 하는 것만이 중요합니다.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기회는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주어져 있습니다. 12) 여러분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고 새 생명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깊은 사랑과를 배려를 입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에게 따뜻하고 친절하게 대하십시오. 겸손하게 온유와 인내로 13) 관용을 베풀어 언제나 남을 용서하고 원한을 품지 마십시오. 주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을 기억하고 여러분도 다른 사람을 용서하십시오. 14)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사랑에 넘치는 생활을 하는 일입니다. 사랑은 모두를 완전하게 하나로 묶어 주는 띠입니다. 15) 그리스도께 받은 평화가 항상 여러분의 마음과 생활에 깃들이도록 하십시오. 이것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된 여러분의 책임이며 특권입니다. 그리고 항상 감사하는 생활을 하십시오. 16) 그리스도의 교훈을 마음에 간직해 그분의 말씀이 여러분의 삶을 풍부하게 하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그 말씀으로 지혜롭게 되어 서로 가르치고 충고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에 넘치는 마음으로 주님을 찬양하십시오. 17) 무슨 일을 하든지 무슨 말을 하든지 간에 주 예수의 대리인으로 행동하고 주 예수와 함께 아버지 하나님 앞에 나아가 감사를 드리십시오.
■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 / 마티티야 벤 헤레쉬 랍비는 토라 공부에 열중하는 랍비였다. 경건하기로 소문이 나있었다. 그는 늘 해처럼 빛났고, 얼굴은 천사처럼 찬란하였다. 그러나 평생 여자에게 눈길을 준 적이 없었다. 사단이 시기가 났다. 그래서 하나님께 말했다. “하나님! 마티티야 벤 헤레쉬 랍비를 어떻게 보십니까?” “진짜 성인이다.” “그러면 내가 이성으로 유혹하여 보아도 되겠습니까?” “너는 실패할 것이다.” “허락해 주십시오.” “허락한다.” 하나님의 허락을 받고 사단은 창조 이래 가장 어여쁜 여자의 모습으로 분장하여 마티티야 벤 헤레쉬 랍비에게 나타났다. 마티티야 벤 헤레쉬 랍비는 마음이 흔들렸다. 제자에게 말했다. “불과 화젓가락을 가지고 오라.” 갖다 주자 시뻘겋게 달려서 눈을 찔러 지져 버렸다. 사단은 실패하였다. 하나님이 이를 보시고 라파엘 천사를 보내면서 말씀하셨다. “가서 마티티야 벤 헤레쉬 랍비 눈을 고쳐 주거라.” 마티티야 벤 헤레쉬 랍비는 라파엘 천사를 보자 말했다. “나는 이대로 살겠다.” 라파엘이 하나님께 보고 드렸다. 하나님이 보장하여 주셨다. “절대로 너를 유혹하지 못하게 할 터이니 눈을 고치고 살거라.” 이 말을 듣고서 마티티야 벤 헤레쉬 랍비는 눈 고치기를 허락하였다. 그리고 평생 죄를 짓지 않았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따릅니다.
2. 네 번째 박사 알타반을 통한 교훈
동방에 박사 네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들의 이름은 카스파(Caspar), 멜키오(Melchior) 발사살(Balthazar) 알타반(Artaban)이었다. 그들은 모두 재산이 많은 부자들이었고 학문이 많은 박사들이었고 그리고 메시아를 기다리던 믿음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구약 성경을 연구하면서 메시아가 태어날 때를 살피고 있었다. 그들은 메시아가 태어날 때 새로운 하나의 별이 나타날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알타반은 페르사에서 다른 박사들은 바벨론에서 새로운 별이 나타나기를 살피기로 했다. 별이 나타나면 네 사람이 10일 후 한 곳에 모여서 각기 준비한 보물을 가지고 유대 예루살렘으로 가서 새로 태어난 메시야께 경배하기로 약속했다. 알타반은 재산을 다 팔아 사파이어와 루비와 진주를 사 가지고 밤마다 지붕에 올라가 밤하늘을 바라보며 별이 나타나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캄캄한 밤하늘에 푸르고 붉은 색으로 찬란하게 빛나는 별 하나가 나타났다. 흥분한 알타반은 머리 숙여 감사하며 이렇게 외쳤다. "별이다. 왕이 오셨다. 나는 왕께 경배하러 가야 한다." 알타반은 가장 빠른 말에다 안장을 얹고 말 위에 올라 이렇게 기도했다. "하나님이시여! 우리를 지켜 주시옵소서. 우리들을 죽음에서 건지시고 왕께 경배하기 하시옵소서." 그리고 약속 장소를 향해 달리기 시작하였다. 충성스러운 말은 열흘 동안 달려서 바벨론 교외 어느 약속 장소에 거의 이르게 되었다. 그런데 달리던 말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몸을 떨기 시작했다. 알타반이 말에서 내려 앞을 바라보았을 때 별빛에 희미하게 비치는 길가에 누어있는 한 사람을 발견했다. 온 몸에 질병의 흔적이 가득한 한 사람이 죽어가고 있었다. 알타반이 그에게 다가 갔을 때 그 죽어가는 사람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날 좀 살려 주십시오." 그러나 알타반은 그곳에 머무를 시간이 없었다. 병자 한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다가 그의 전 생애를 바쳐 준비한 일을 그르칠 수는 없었다. 그는 죽어가는 병자에게 미안한 생각을 하면서 말에 오르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죽어가는 사람을 그대로 버려둘 수도 없었다. 알타반은 이렇게 기도했다. "진리와 자비의 하나님이시여, 나를 옳은 길로 인도하시옵소서. 진리의 길입니까? 자비의 길입니까?" 결국 알타반은 죽어가는 사람에게로 가까이 갔다. 그는 겉옷을 벗고 가지고 온 약들을 병자의 몸에 바르며 병자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몇 시간 후 병자는 의식을 회복했다. 알타반은 가지고 가던 빵과 포도주와 약초와 여비를 모두다 그에게 주었다.
그리고 말을 타고 가던 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말은 최고의 속도로 빨리 달렸지만 약속한 장소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약속 시간이 훨씬 지난 뒤였다. 동방 박사 세 사람은 그곳에 보이지 않았다. 그곳에는 글귀만 부쳐 있었다. "우리는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어 먼저 떠납니다. 우리의 뒤를 따라 사막을 건너오시오." 알타반은 너무 기가 막혀 땅에 주저앉고 말았다. "음식도 포도주도 약초도 여비도 없이 지친 말을 타고 어떻게 사막을 건넌단 말인가?" 한숨을 쉬면서 알타반은 바벨론 도시로 돌아갔다. 그리고 왕께 드리려고 준비했던 사파이어 보석을 팔아 낙타와 음식과 여비를 장만했다. 그리고 유대를 향해 먼 사막 길을 떠났다.
알타반이 베들레헴에 도착했을 때 동방 박사들은 이미 그곳을 떠난 뒤였다. 베들레헴 거리는 한산했다. 아니 음산하고 삭막했다. 헤롯의 군인들이 새로 태어난 아기들을 잡으려 집집을 뒤지고 있었다. 알타반은 대문이 열려 있는 어느 집에 들어갔다. 그 집에는 어머니가 아기를 안고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 어머니는 알타반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삼일 전에 동방에서 박사 세 사람이 베들레헴에 와서 마리아와 요셉과 아기에게 황금과 유향과 몰약의 예물을 드리며 경배하고 다시 동방으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바로 그 날 밤 요셉은 마리아와 아기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난을 떠났다는 것이다. 헤롯왕이 새로 태어난 아기들을 모다 잡아서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바로 그 때 밖에서 군인들의 떠드는 소리와 여인들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헤롯의 군인들이 아기를 죽인다." 아기를 안은 그 여인은 온 몸을 떨고 있었다. 알타반이 밖으로 나왔을 때 군인들이 집으로 달려 들어왔다. 군인 장교가 소리를 지르며 알타반을 밀치려고 했다. "이 집에 아기를 잡아내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알타반은 물러서지 않았다. 알타반의 손에는 커다란 루비 보석이 빛나고 있었다. "나는 당신에게 이 보석을 주려고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소. 장교는 이 보석을 받고 다른 곳으로 가시오." 군인 장교는 보석의 찬란함에 놀라며 보석을 받아 들고 이렇게 말했다. "자, 가자! 이 집에는 아기가 없다." 알타반은 이렇게 기도했다. "오, 하나님이시여, 나의 죄를 용서하소서. 왕께 드릴 보석을 사람을 위해서 또 썼습니다. 내가 왕의 얼굴을 볼 자격이 있습니까?" 바로 그때 기뻐서 우는 여인의 소리가 들려왔다. "당신은 나의 애기를 구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축복하시고 평안을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어린 아기의 얼굴에는 평안과 기쁨의 미소가 가득했다.
알타반은 다시 왕을 만나기 위해 애굽으로 먼 길을 떠났다. 애굽의 곳곳을 찾아갔다. 피라미드 근처들을 뒤졌고 알렉산드리아 도시의 거리들도 뒤졌고 히브리 랍비들을 만나서 그들의 조언을 듣기도 했다. 히브리 랍비들은 메시야는 부자들 가운데 있지 않고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 있을 것이라고 말해 주었다. 그래서 알타반은 가난한 사람들을 찾았다. 그는 병자들이 사는 곳을 찾았고 재난 당한 사람들이 사는 곳을 찾았고 노예 시장들도 찾았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그들에게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폈다. 알타반은 경배의 대상은 찾지 못했지만 섬김의 대상들은 너무 많았다. 수십 년이 지나는 동안 알타반은 배고픈 자들을 먹였고, 벌거벗은 자들을 입혔고, 병든 자들을 치료했고, 갇힌 자들을 위로했다.
알타반이 왕을 찾기 위해서 집을 나선지가 어느덧 33년이 지났다. 그의 머리는 어느덧 백발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어디엔가 살아 있을 그의 왕 메시아를 찾아 온 세상을 헤매었다. 결국 알타반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왔다. 그가 예루살렘에 도착했을 때는 유월절 절기 때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어디론 가를 향해 떼를 지어 걸어가고 있었다. 알타반은 걸어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다. 한 사람이 대답했다. "우리는 지금 처형 장면을 구경하려고 성문 밖 골고다 언덕으로 갑니다. 강도 두 사람이 처형을 당하고 그 가운데서 나사렛의 예수가 처형을 당하지요. 나사렛의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자처했지만 우리의 종교 지도자들은 그를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지요."이 사람의 말이 알타반의 가슴에 천둥처럼 들려왔다. "왕이 처형을 당하다니!"알타반의 가슴은 큰 소리로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나는 이제라도 왕을 뵈어야 한다. 나는 이제 왕을 구해야 한다. 하나 남은 보석과 내 목숨을 바쳐서라도 나의 왕을 구해야 한다."
알타반은 군중들과 함께 골고다 언덕을 향해 사력을 다해 달려갔다. 그런데 바로 그때 군인들이 한 젊은 여자를 끌고 가는 것을 보았다. 알타반이 잠시 서서 그 여자를 바라보았을 때 그 여자는 군인들의 손을 뿌리치고 알타반 박사의 발 앞에 엎드렸다. "할아버지 저 좀 살려 주세요. 저의 아버지도 박사였는데 죽었어요. 아버지가 진 빚 때문에 저는 지금 노예로 팔려가요. 할아버지 박사님, 저 좀 살려 주세요." 알타반은 또 한 번 영혼의 고뇌를 경험하며 떨었다. 그가 바벨론에서 경험했던 고뇌, 그가 베들레헴에서 경험했던 고뇌를 다시 한 번 경험하며 떨었다. 왕께 드리려고 준비했던 두 개의 보석인 사파이어와 루비를 왕 대신 사람들을 위해서 사용했는데, 이번에도 또 그런 잘못을 범해야만 하는가? 그의 영혼은 깊은 고뇌로 떨었다. 그러나 그는 노예로 팔려가는 소녀를 내 버려 둘 수는 없었다. 알타반은 결국 가슴속에 깊이 간직해 두었던 진주 보석을 꺼내었다. 그리고 소녀의 손에 쥐어 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딸아, 이것이 네 몸값이다. 이것이 내 마지막 보석이다."
알타반이 이렇게 말하고 있을 때 하늘이 어두워지고 땅이 흔들렸다. 집들이 흔들렸다. 군인들은 무서워서 도망을 쳤다. 알타반은 무너진 성벽에 기대어 기진맥진해서 쓰러졌다. 알타반의 인생 여정은 마지막 종점에 도달하고 있었다. 왕을 만나려던 그의 한 평생의 추구는 이제 실패로 돌아가는 듯 했다. 또 한 번의 지진이 땅을 흔들어 댔다. 무너져 내린 돌들이 알타반 박사의 몸을 뒤 덮었다. 알타반은 신음하듯 이렇게 중얼거렸다. "하나님, 용서하시옵소서. 저의 죄를 용서하시옵소서." 바로 그때 저녁노을의 하늘로부터 고요한 소리가 들려왔다. "알타반! 알타반!" 알타반은 너무 놀랐다. 알타반의 옆에 기대어 있던 구출된 소녀는 알타반이 중얼 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아닙니다, 주님. 제가 언제 주님이 배고프셨을 때 음식을 대접한 일이 있습니까? 언제 주님이 헐벗었을 때 옷을 입혀 드린 일이 있습니까? 언제 주님이 병들었을 때 제가 치료해드린 일이 있습니까? 주님! 제가 아닙니다. 언제 주님이 옥에 갇혔을 때 제가 가서 도와 드린 일이 있습니까? 언제 주님이 팔려갈 때 제가 구해 드린 일이 있습니까? 33년 동안 저는 나의 왕 되시는 주님을 찾았지만 저는 당신의 얼굴을 뵈온 적도 없고 당신을 섬긴 일도 없습니다." 하늘로부터 다시 소리가 들려 왔다. 그 소리는 알타반만 들을 수 있었다. "알타반! 알타반! 진실로 내가 네게 이르노니 내 형제 중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니라. 너는 나를 만났고, 나를 도와주었고, 나를 섬겼노라." 알타반의 얼굴에는 놀라움과 기쁨의 빛이 가득했다. 그는 마지막 긴 평안의 숨을 쉬고 고요히 눈을 감았다.
그의 인생 여정은 끝났다. 왕을 위해서 준비된 그의 보물들은 왕 그 분에 의해서 기쁘게 열납되었다. 결국 네 번째 동방의 박사는 왕을 만났다. 가장 아름다운 방식으로 왕을 만났다. 이 세상에서도 그리고 영원에서도 그의 왕을 가장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방식으로 만났다.
▶ 이제라도 나의 남은 생애를 축복의 통로로...
♬ 김석균 - 나의 남은 생애는
나의 남은 생에는 복음의 편지되어 살리라 나의 남은 생에는 섬김의 향류되어 살리라
나의 남은 생에는 주님의 기쁨되어 살리라 나의 남은 생에는 사랑의 샘물되어 살리라
일년을 살지 한달을 살지 모를 나의 남은 생에 주님이 주신 사랑 주님이 주신 은혜 빛을 갚으며 살리라
나의 남은 생에는 은혜의 통로되어 살리라 나의 남은 생에는 축복의 통로되어 살리라
일년을 살지 한달을 살지 모를 나의 남은 생에 범사에 감사하며 쉼없이 기도하며 주님 뜻대로 살리라
나의 남은 생에는 하늘에 속한자로 살리라 나의 남은 생에는 행복한 전도자로 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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