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後漢三賢贊 幷序
余讀史。至後漢靈帝紀。天下之所謂名賢。皆指爲鉤黨而殄滅之無餘。嗚呼。禍亂至此極耶。其間㓗身遜言。不染其禍者。盖無幾人耳。掇其尤章章者。爲文以贊之。
大原林宗。郭泰其名。博學通朗。初游洛陽。一見嗟異。符融之明。因介李膺。名聲流行。送車千兩。仙舟還鄕。周游奬訓。屠沽俾臧。慰原戒允。友容師香。墮甑知性。 擲杯見情。不納宋冲。孺子是聽。不可師友。知者范滂。全身濁世。人師道光。未見其匹。嗚呼先生。
孺子徐𥠧。豫章其鄕。非力不食。家貧自耕。人服其德。帝徵不行。陳蕃見請。一榻相迎。屢辟公府。不往何傷。召之不往。負笈赴喪。四方名士。會吊黃瓊。始不我知。衆後乃驚。季偉追之。歡如平生。不答國事。稼穡其詳。林宗不言。智愚孰明。嗚呼賢哉。世仰遺芳。
至行純嘿。陳留仇香。四十無聞。鄕黨以輕。強而乃仕。爲長蒲亭。德化陳元。世始知名。厥初元母。不慈所生。告以不孝。香乃大驚。自咎不化。譬之至誠。母子如初。
慈孝方彰。考城王奐。輟奉資行。使入大學。學業以成。林宗師事。其道乃光。不起終家。嗚呼世英。
가정집 제1권 / 잡저(雜著) / 후한(後漢)의 삼현(三賢)에 대한 찬(贊) 병서(幷序)
내가 사책을 열람하다가 《후한서(後漢書)》 영제기(靈帝紀)를 읽다 보니, 천하의 명현(名賢)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모두 구당(鉤黨)으로 지목받고서 남김없이 멸절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 화란을 당한 것이 이렇게까지 참혹할 수가 있단 말인가. 그 사이에 몸을 깨끗이 하고 말을 겸손하게 하여 화를 당하지 않은 자는 대체로 몇 사람도 되지 않는데, 그중에서도 뚜렷이 드러난 자를 가려서 글을 지어 기리는 바이다.
태원 사람 임종은 / 大原林宗
곽태가 그 성명이라 / 郭泰其名
박학한 데다 사리에 통명하여 / 博學通朗
처음 낙양에 와서 노닐 적에 / 初游洛陽
한 번 보고서 찬탄하였나니 / 一見嗟異
부융의 식견이 밝기도 하였어라 / 符融之明
그의 소개로 이응을 만나 / 因介李膺
명성이 서울에 파다해져서 / 名聲流行
전송한 수레가 무려 수천 대요 / 送車千兩
신선의 배 타고서 귀향했더라오 / 仙舟還鄕
각지를 유력하며 권장하고 충고하여 / 周游獎訓
도고를 선한 방향으로 인도했는가 하면 / 屠沽俾臧
좌원(左原)을 위로하고 황윤(黃允)을 경계하였으며 / 慰原戒允
모용(茅容)을 벗으로 삼고 구향(仇香)을 스승으로 모셨다네 / 友容師香
떨어진 시루를 통해 덕성을 알았고 / 墮甑知性
죽 그릇을 던져서 성정을 보았으며 / 擲杯見情
송충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고 / 不納宋沖
유자가 해 준 말은 들었는데 / 孺子是聽
벗으로 삼을 수 없다는 것을 / 不可師友
안 사람은 바로 범방이었지 / 知者范滂
탁세에서 몸을 온전히 하여 / 全身濁世
사람의 스승으로 그 도가 빛나는 분 / 人師道光
그 짝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으리오 / 未見其匹
아 우리 선생이시여 / 嗚呼先生
유자는 서치의 자(字)이니 / 孺子徐穉
예장이 그의 고향이라 / 豫章其鄕
자기 힘이 아니면 먹지 않으면서 / 非力不食
가난한 집에서 직접 농사지었어라 / 家貧自耕
사람들이 그의 덕에 감복한 가운데 / 人服其德
천자가 불러도 가지 않았는데 / 帝徵不行
진번의 초청을 받고서는 / 陳蕃見請
걸상 하나로 서로 맞았어라 / 一榻相迎
관아에서 벼슬로 부르는 것들이야 / 屢辟公府
가지 않아도 무슨 상관이랴 / 不往何傷
아무리 불러도 응하지 않던 그가 / 召之不往
빈소에는 배낭 메고 꼭 찾아갔더라오 / 負笈赴喪
사방의 명사들이 / 四方名士
황경의 상에 조문하러 모였는데 / 會弔黃瓊
처음엔 아는 척도 않는다고 여기다가 / 始不我知
나중엔 모두 알고 깜짝 놀라면서 / 衆後乃驚
계위에게 뒤쫓아 가게 하자 / 季偉追之
평생의 친구처럼 다정하게 대하면서 / 歡如平生
나랏일엔 대답을 하지 않고 / 不答國事
농사일은 자세히 답변하였는데 / 稼穡其詳
임종이 그 이유를 설명하지 않았던들 / 林宗不言
지우를 어떻게 밝힐 수 있었으랴 / 智愚孰明
아 훌륭하도다 / 嗚呼賢哉
후세에 길이 앙모할 꽃다운 이름이여 / 世仰遺芳
지극한 행실에 순후하고 과묵했던 / 至行純嘿
진류 출신의 구향이시여 / 陳留仇香
사십 년 동안 이름도 없이 / 四十無聞
향리에서 경시되었어라 / 鄕黨以輕
나이 마흔에 비로소 벼슬을 하여 / 强而乃仕
포정의 정장(亭長)이 되었는데 / 爲長蒲亭
진원을 덕으로 교화하면서 / 德化陳元
세상이 처음 이름을 알았어라 / 世始知名
당초에 진원의 모친이 / 厥初元母
자식을 사랑하지 못하고서 / 不慈所生
불효 죄를 범했다고 고발하자 / 告以不孝
구향이 크게 놀라며 / 香乃大驚
교화하지 못한 것을 자책하고는 / 自咎不化
지성으로 깨우친 결과 / 譬之至誠
모친과 아들이 처음과 같이 / 母子如初
자애롭고 효성스럽게 되었다오 / 慈孝方彰
고성의 현령 왕환이 / 考城王奐
노잣돈으로 봉록을 내주면서 / 輟奉資行
태학에 입학하게 하여 / 使入大學
학업을 성취하게 하였는데 / 學業以成
임종이 사사할 정도였으니 / 林宗師事
그 도가 얼마나 빛났다고 하겠는가 / 其道乃光
벼슬하지 않고 집에서 생을 마친 / 不起終家
아 한 세상의 영걸이시여 / 嗚呼世英
[주-D001] 후한서(後漢書) …… 되었다 : 구당(鉤黨)은 서로 끌어 모은 한 패거리라는 말이다. 《후한서》 권8 효영제기(孝靈帝紀)에 “중상시(中常侍) 후람(侯覽)이 유사를 꼬드겨 어전에서 사공(司空) 우방(虞放)과 태복(太僕) 두밀(杜密) …… 등을 모두 구당으로 지목하여 하옥시키니, 죽은 자가 100여 인에 이르렀다.”라는 말이 나온다.[주-D002] 한 번 …… 하였어라 : 부융(符融)이 태학에서 이응(李膺)을 사사(師事)하다가 곽태(郭泰)를 한 번 만나 보고는 감탄한 나머지 이응에게 소개하면서 “바다 속의 구슬이 아직 빛을 발하지 않고, 새 중의 봉황이 나래를 아직 펴지 않은 격이다.〔海之明珠 未燿其光 鳥之鳳凰 羽儀未翔〕”라고 말하였다는 내용이 《후한서》 권68 부융열전(符融列傳)과 그 주석에 나온다.[주-D003] 그의 …… 귀향했더라오 : 이응은 자(字)가 원례(元禮)로, 사람들이 그의 영접을 받기만 해도 “용문에 올랐다.〔登龍門〕”고 자랑할 정도로 명망이 높았는데, 그런 그가 부융의 소개로 곽태를 만나 보고는 사우(師友)의 예로 대접하자 곽태의 명성이 경사(京師)를 진동했다고 한다. 그 뒤에 곽태가 고향에 돌아가려 하자 강가에 나와 전송한 제유(諸儒)의 수레가 수천 대나 되었으며, 이응과 곽태 두 사람이 타고서 건너가는 배를 바라보며 모든 빈객들이 신선과 같다고 찬탄하면서 부러워했다는 이곽선주(李郭仙舟)의 고사가 전한다. 《後漢書 卷68 郭泰列傳》[주-D004] 각지를 …… 충고하여 : 곽태가 “군현과 봉국을 두루 유력하였다.〔周游郡國〕”라는 말과, “사류를 권장하며 인도하기를 좋아하였다.〔好獎訓士類〕”라는 말이 《후한서》 권68 곽태열전에 나온다.[주-D005] 도고(屠沽)를 …… 하면 : 도고는 백정과 술장수 등 미천한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을 말한다. 《후한서》 권68 곽태열전에 “소공자와 허위강 등은 모두 도고 출신이었다. …… 이들 60인 모두에 대해서 곽태가 이름을 이루게 해 주었다.〔召公子許偉康 並出屠酤 …… 六十人 並以成名〕”라고 하였다.[주-D006] 좌원(左原)을 위로하고 : 좌원이 군(郡)의 학생으로 있다가 범법 행위를 하여 쫓겨났을 때, 곽태가 과거에 개과천선하여 명현이 되었던 사례를 열거하며 위로하자 사람들에게 악인으로 지목받던 좌원이 뉘우치고 행동을 바꿨다는 이야기가 《후한서》 권68 곽태열전에 나온다.[주-D007] 황윤(黃允)을 경계하였으며 : 곽태가 황윤을 한 번 보고는 “그대는 남보다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으니 큰 그릇을 이룰 수 있지만, 자신을 단속하는 것이 독실하지 못하니 그 재능을 발휘할 기회를 잃을 듯하다.”라고 경계하였다. 뒤에 권세가의 집안에서 황윤의 재능을 욕심내어 사위로 삼으려 하자, 황윤이 그 소문을 듣고는 자기의 처를 내쫓았다가 그 처가 앙심을 품고 보복하는 바람에 톡톡히 망신을 당하였다는 이야기가 《후한서》 권68 곽태열전에 실려 있다.[주-D008] 모용(茅容)을 벗으로 삼고 : 곽태가 모용의 집에 유숙한 다음 날 아침에 모용이 닭을 잡자 곽태는 자기를 대접하기 위한 것인 줄 알았다. 이윽고 모용이 그것을 모친에게 올린 뒤에 자신은 객과 함께 허술하게 식사를 하자, 곽태가 일어나서 절하며 “경은 훌륭하다.〔卿賢乎哉〕”라고 칭찬하고는 그에게 학문을 권하여 마침내 덕을 이루게 했다. 《後漢書 卷68 郭泰列傳》 그런데 《후한기(後漢紀)》 권23 효령황제기(孝靈皇帝紀)에는 “ ‘경이 이와 같으니 바로 나의 벗이다.〔卿如此 乃我友也〕’라고 하고는 일어나서 마주 대하고 읍(揖)한 뒤에 학문을 권하였다.”라고 되어 있다. 《후한기》는 진(晉)나라 원굉(袁宏)이 각종 자료들을 종합하여 정리한 사서(史書)로 모두 30권인데, 가정이 이 책을 많이 참고하며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주-D009] 구향(仇香)을 스승으로 모셨다네 : 구향은 구람(仇覽)의 이명(異名)이다. 《후한서》 권76 순리열전(循吏列傳) 구람에 의하면, 태학의 학생 시절에 곽태가 부융(符融)과 함께 구향의 방을 찾아가서 인사를 나누고는 마침내 유숙하게 해 줄 것을 청했다고 하고, 또 곽태가 찬탄하면서 침상에서 내려와 그에게 절했다고 하였다. 그런데 《후한기》 권23 효령황제기에는 곽태가 진류(陳留) 포정(蒲亭)의 정장(亭長)이었던 구향과 이야기를 나누고는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 인사를 드리면서 “그대는 저의 스승이요, 저의 친구가 아닙니다.〔君泰之師 非泰之友〕”라고 말한 것으로 되어 있다.[주-D010] 떨어진 …… 알았고 : 맹민(孟敏)이 시루를 시장에 팔려고 등에 지고 가다가 땅에 떨어져 깨졌는데도 거들떠보지 않고 미련 없이 떠나가는 모습을 보고 곽태가 그 이유를 묻자, “이미 깨진 시루를 다시 본들 무슨 소용이겠는가.”라고 대답했다는 내용이 《후한서》 권68 곽태열전에 보인다. 그런데 《곽임종별전(郭林宗別傳)》에는 곽태가 그런 그의 면모를 접하고는 “그의 덕성을 알았다.〔因以知其德性〕”라고 말한 것으로 되어 있다.[주-D011] 죽 그릇을 …… 보았으며 : 진(陳)나라의 동자 위소(魏昭)가 간청하여 곽태의 옆에서 시중 들 적에 곽태가 그에게 밤중에 죽을 끓여 오라고 명하였다. 위소가 죽을 준비해 올리자 “어른을 위해 죽을 끓이면서 경의를 보이지 않는다.”고 꾸짖으면서 그릇을 땅에 던지고는 다시 끓여 오게 하여 그러기를 세 차례나 반복했는데도 위소가 공경하는 자세를 전혀 바꾸지 않자, 곽태가 “이제야 내가 그대의 마음을 알았다.〔今而後知卿心耳〕”고 하고는 마침내 벗으로 친하게 지냈다는 말이 《후한기》 권23 효령황제기에 나온다.[주-D012] 송충(宋沖)의 …… 않고 : 출사를 권하는 말을 따르지 않았다는 말이다. “환제(桓帝) 때 곽태가 유도지사(有道之士)로 천거를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는데, 평소에 그의 덕을 흠모하던 같은 군(郡)의 송충이 한나라 초 이래로 그와 견줄 만한 사람이 없다고 하면서 항상 벼슬하기를 권했다.”라는 말이 《경재고금주(敬齋古今黈)》 권3에 나온다.[주-D013] 유자(孺子)가 …… 들었는데 : 유자는 서치(徐穉)의 자이다. 그가 한나라 왕실이 갈수록 혼란스러워져 장차 환란이 일어나리라고 예측하고는, 곽태에게 “거목이 쓰러지려 할 때에는 밧줄 하나로 묶어서 붙들 수가 없는 법이다. 그대는 어찌하여 바쁘게 돌아다니기만 하고 편히 쉴 겨를도 없는가.〔大木將顚 非一繩所維 何爲棲棲 不遑寧處〕”라고 충고하자, 곽태가 감오(感悟)하여 “삼가 이 말을 배수(拜受)하겠다.”라고 하면서 사표로 삼았다는 말이 《후한기》 권22 효환황제기(孝桓皇帝紀)에 나온다.[주-D014] 벗으로 …… 범방(范滂)이었지 : 혹자가 “곽임종(郭林宗)은 어떤 사람인가?”라고 묻자, 범방이 “그는 세상을 피해 숨어도 개지추(介之推)처럼 어버이의 뜻을 어기지 않고, 절조가 곧아도 유하혜(柳下惠)처럼 속세와 단절하지 않으며, 천자도 신하로 삼을 수 없고, 제후도 벗으로 삼을 수 없다. 나는 그 밖의 것은 알지 못한다.〔隱不違親 貞不絶俗 天子不得臣 諸侯不得友 吾不知其他〕”라고 대답한 말이 《후한서》 권68 곽태열전에 나온다.[주-D015] 사람의 …… 분 : 위소(魏昭)가 곽태에게 시중 들겠다고 간청하면서 “경서를 배울 수 있는 스승을 만나기는 쉬워도 타인의 모범이 되는 스승을 만나기는 어렵다.〔經師易遇 人師難遭〕”라고 했다는 말이 《후한기》 권23 효령황제기에 나온다.[주-D016] 사람들이 …… 않았는데 : 《후한기》 권22 효환황제기에 “서치가 사는 곳의 주민들이 그의 덕에 감화된 나머지 길에 떨어진 물건도 줍지 않았다.〔所居服其德化 道不拾遺〕”라고 하였고, 《후한서》 권53 서치열전(徐穉列傳)에 “도가 있다고 조정에 추천되어 집에서 태원 태수의 임명을 받기도 하였으나 모두 응하지 않았다.〔擧有道 家拜太原太守 皆不就〕”라고 하였다.[주-D017] 진번(陳蕃)의 …… 맞았어라 : 진번이 예장 태수(豫章太守)로 있을 적에 다른 빈객은 맞지 않고 오직 서치만을 위해서 특별히 전용 걸상 하나를 준비해 두고는, 서치가 와서 환담을 하고 떠나면 다시 위에 올려놓았다는 현탑(懸榻)의 고사가 《후한서》 권53 서치열전에 전한다.[주-D018] 관아에서 …… 상관이랴 : 《후한서》 권53 서치열전의 “누차 관아에서 벼슬로 불렀어도 응하지 않았다.〔屢辟公府 不起〕”의 주(註)에 “효렴(孝廉)으로 4회, 재부(宰府)에 5회, 무재(茂才)로 3회 추천을 받고 관직에 임명되었다.”라고 하였다.[주-D019] 아무리 …… 찾아갔더라오 : 배낭을 메고 각지를 유력하다가 누가 죽거나 상을 당하면 도보로 먼 길을 찾아가서 두주(斗酒)ㆍ척계(隻雞)를 흰 띠풀 위에 진설하여 제사를 올리고는 곧장 떠나갔으므로 그가 누구인지 상주도 몰랐다는 내용이 《후한기》 권22 효환황제기에 실려 있다. 두주는 술에 적신 솜을 햇볕에 말렸다가 다시 물에 적셔서 주기(酒氣)가 우러나오게 한 것이고, 척계는 미리 구워서 가지고 간 닭이다.[주-D020] 사방의 …… 있었으랴 : 서치가 태위(太尉) 황경(黃瓊)에게 일찍이 배운 바도 있고 또 관직에 천거받은 적도 있었기 때문에 그의 부음을 듣고 달려가서 애곡한 뒤에 상주도 만나지 않고 그냥 떠나갔다. 당시에 천하 명사들이 원근에서 모두 모였는데, 서치가 왔다는 소리만 듣고 만나지 못하자 상주에게 물었다. 상주가 남루한 차림의 서생 하나가 슬피 곡하다가 이름도 적지 않고 떠났다고 하자, 그가 바로 서치임을 알고는 말을 잘하는 계위(季偉)에게 뒤쫓아 가게 하였다. 계위는 모용(茅容)의 자이다. 모용이 서치에게 술을 대접하면서 국가의 일에 대해 물었을 때에는 서치가 대답하지 않더니, 농사일에 대해서 묻자 상세히 대답해 주었다. 모용이 돌아와서 그 일을 그대로 보고하니, 혹자가 “함께 이야기할 만한 상대에게 말하지 않으면 사람을 잃은 것이다.〔可與言而不與之言 失人〕”라는 공자의 말을 인용하면서 “서치는 실인(失人)한 것이 아닌가.”라고 물었다. 이에 곽임종이 서치의 입장을 대변하여 자세히 설명해 주면서 역시 “그 지혜로움은 다른 사람도 따라갈 수 있겠지만, 그 우직함은 다른 사람이 따라갈 수 없다.〔其知可及 其愚不可及也〕”라는 공자의 말로 대답하였다. 《후한기》 권22 효환황제기에 이상의 내용이 소개되어 있다.[주-D021] 지극한 …… 구향(仇香)이시여 : 《후한서》 권76 순리열전 구람(仇覽)에 구향은 구람의 이명으로 진류(陳留) 고성(考城) 사람이라고 하였으며, 소싯적에 서생의 신분으로 순묵(淳默)하여 향리에서 그를 아는 자가 없었다고 하였다.[주-D022] 나이 …… 하여 : 《예기(禮記)》 곡례 상(曲禮上)에 “나이 마흔에는 신념이 흔들리지 않아 강하다고 할 수 있으니, 이때부터는 벼슬길에 나가도 좋다.〔四十曰强而仕〕”라는 말이 나온다.[주-D023] 포정(蒲亭)의 …… 되었다오 : 구향이 포정의 정장으로 부임한 초기에 진원의 모친이 불효의 죄를 범했다고 진원을 고발했다. 이에 구향이 놀라면서 말하기를 “내가 최근에 집을 방문해 보니, 거처가 정돈되어 있고 때에 맞춰서 농사일을 잘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그는 악인이 아니라 교화가 충분하지 못해서 그런 것일 뿐이다. …… 그런데 모친은 어찌하여 하루아침에 화풀이를 하려고 자식을 불의의 죄에 빠뜨리려고 하는가.”라고 하자, 모친이 감복하여 후회의 눈물을 흘리며 갔다. 이에 구향이 다시 그 집에 가서 모자와 함께 술을 마시며 인륜과 효행에 대해 설명하고 화복(禍福)의 도리로 깨우친 결과, 진원이 마침내 지극한 효자가 되었으므로 그 마을에 속담으로 전해지기까지 했다고 한다. 《後漢書 卷76 循吏列傳 仇覽》[주-D024] 고성(考城)의 …… 하였는데 : 구향이 진원을 덕으로 교화시켰다는 말을 왕환(王奐)이 듣고 구향을 주부(主簿)로 발탁한 뒤에, “가시나무 덤불은 봉황이 깃들일 곳이 못 되고, 이 작은 고을은 대현이 나아갈 길이 아니다.〔枳棘非鸞鳳所棲 百里豈大賢之路〕”라고 하고는, 1개월 봉급을 털어 노잣돈으로 주면서 태학 입학을 권유한 일이 《후한서》 권76 순리열전 구람에 나온다.[주-D025] 임종(林宗)이 사사(師事)할 정도였으니 : 임종은 곽태(郭泰)이며 구향은 구람(仇覽)의 이명(異名)이다. 《후한서》 권76 순리열전(循吏列傳) 구람에 의하면, 태학의 학생 시절에 곽태가 부융(符融)과 함께 구향의 방을 찾아가서 인사를 나누고는 마침내 유숙하게 해 줄 것을 청했다고 하고, 또 곽태가 찬탄하면서 침상에서 내려와 그에게 절했다고 하였다. 그런데 《후한기》 권23 효령황제기에는 곽태가 진류(陳留) 포정(蒲亭)의 정장(亭長)이었던 구향과 이야기를 나누고는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 인사를 드리면서 “그대는 저의 스승이요, 저의 친구가 아닙니다.〔君泰之師 非泰之友〕”라고 말한 것으로 되어 있다.[주-D026] 벼슬하지 …… 마친 : 구향이 학업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온 뒤에 주군(州郡)에서 벼슬로 불러도 모두 병을 핑계로 사양하였으며, 집에서 항상 예법에 맞게 몸을 단속하고 평생토록 희로의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는 말이 역시 《후한서》 권76 순리열전 구람에 나온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상현 (역) |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