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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8:1-11을 보면서
2022년 ○월 ○○일 / 요한복음 8:1-11
본문에 나오는 사람들을 보면 이때처럼 몰려든 사람들 모두가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만이 아닌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에 집중한 적이 없었다. 말씀을 듣기 위해 몰려든 사람만이 아니라 유대인 지도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 여인 모두가 100% 집중했다는 말이다.
특이한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모두가 자기를 보게 되었으며, 예수님께서 두 번 땅에 손가락으로 글을 쓰셨을 때 유대인 지도자들은 나이 많은 사람부터 한 사람씩 슬그머니 빠져나가고 그 여자 앞에는 예수님만 남았다. 예수님의 의도대로 이렇게 움직인 예는 별로 없을 것이다.
무슨 글씨를 쓰셨을까? 아직도 풀지 못하는 문제로 짐작할 뿐이다. 보편적으로 이렇게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라고 쓰셨을 것 같다고 말한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글씨를 보면서 사람들은 죄의식이 살아나고 양심의 소리를 들었다. 돌을 버리고 다 떠났다.
어떤 신학자들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손가락으로 땅에 쓰신 것은 그 여인을 데리고 온 사람들의 명단과 그들의 죄를 하나하나 기록해 나갔다는 것이다. ‘아무개.... 무슨 무슨 죄, 무슨 무슨 죄..... 아무개는.... 무슨 무슨 죄, 무슨 무슨 죄.....’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의 이름을 적어가며 그들의 죄를 하나하나 적어 내려갔다는 것이다.
나의 생각이지만 차라리 ‘무슨 죄, 무슨 무슨 죄’라고 적으셨다는 것이 괜찮을 것 같다. 왜냐하면, 악령이 들린 사람이 보면 누구보다 유대인 지도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악한 생각에 이끌려 예수님을 정죄하려고 나온 사실을 잘 알 것이다. 하물며 예수님이 보시면 저들의 영적 상태를 모르셨을 리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점잖게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가 없는 사람은 돌로 쳐라’라고 쓰셨을 것이다. 예수님과 같은 점잖은 모습을 닮았으면 한다.
본문은 바로 이 사건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본문이 (괄호)로 묶여 있다. 7장 52절 다음이 8장 12절이다. 초막절 끝날에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라고 하신 후 다시 ‘내가 세상의 빛이다’라고 계속 이야기하는 중에 (괄호)로 묶어서 잠깐 끼워 넣은 이야기이다. (괄호)로 끼워 넣은 것은 어떤 사본에는 나오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문제는 피해갈 수 없듯이 우리 모두에게도 매우 필요한 말씀이다. 약으로 친다면 상비약도 되겠지만 반드시 있어야 할 약이요 또한 예수님이 우리에게 지어주신 처방전과 같은 약이기도 하다. 일용할 약처럼 늘 대비해 놓고서 매일 먹어야 할 약이다.
● 예수님은 낮엔 성전에서 말씀을 가르치셨고, 밤이면 감람산으로 가셔서 기도하시면서 쉬시기도 하셨다.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오셔서 말씀을 가르치실 때 밖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예수님을 비난하며 체포할 틈을 찾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한 여자를 끌고 왔다.
요 8:3-4 / 그때 유대인 지도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간음하다가 잡힌 한 여자를 데리고 와서 군중 앞에 세워 놓고 4) 예수께 물었다. `선생님, 이 여자를 간음하는 현장에서 잡아 왔습니다.
본래 간음죄는 은밀한 중에 행해지기 때문에 잡히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저들은 음행 중에 현장에서 잡아왔다고 하였다. 미쉬나(탈무드)의 규정에는 남편을 제외한 증인 둘을 세우고 현장에서 처형하게 되어 있다. 그런데 지금은 현장이 아니고, 남편도 등장하지 않고, 증인도 없다. 더군다나 간음한 남자는 도망갔는지 모르지만 등장하지 않았다. 명백히 법으로 처벌할 아무런 요건이 되지 않았다.
요 8:5 / 모세의 법에는 이런 여자를 돌로 치라고 되어 있는데 선생님의 의견은 어떻습니까?
놀라운 것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이 여자의 죄를 처벌하는 것에 관심보다는 예수 님에게 시비를 걸고, 공격할 이유를 찾기 위해서 사건화하고 있다. 사도 요한은 저들은 예수님을 고발하여 죽이려고 하는 일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고 진술하였다.
요 8:6 / 그들은 예수께 올무를 놓아 고소할 구실을 찾으려고 이런 말을 한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자리에 앉아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 쓰고 계셨다.
예수님을 고발할 조건이 그들의 초관심사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요구대로 ‘돌로 치라’고 하면 ➊ 그동안 사랑과 용서를 말한 예수님의 가르침과 모순이 되어 예수님을 믿고 따르던 사람들이 예수님께 대해 실망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안식일에도 병자들을 고쳐 주시면서 사랑과 자비를 이야기하였는데, 예수님을 무자비한 사람으로 몰아붙일 수 있다. ➋ 유대가 로마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사형의 권한은 로마 총독에게만 있었다. 예수님은 로마 정부를 거스르는 정치범 혹은 살인교사범으로 로마 정부에 고발할 수도 있다. 만일 ‘돌로 치지 말라’고 해도 큰 문제가 발생한다. 율법을 거역하는 자로 몰아가서 예수님을 죽일 것이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으시고 땅만 쳐다보고 손가락으로 뭔가를 쓰셨다. 참으로 지혜로우셨다.
요 8:7 / 그들이 계속 대답을 재촉하자 예수께서 일어서서 말씀하셨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지라.'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자 그들은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하고 다그친다. ‘빨리 대답하시오.’ 이에 예수님께서 일어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라고 떠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에게 말씀하셨다. ‘율법을 잘 지키는 자가 먼저 율법을 행하라’ 저들은 율법의 형식을 주장했지만, 예수님은 율법이 담고 있는 정신을 말씀하셨다. ‘너 율법을 잘 지키느냐? 그러면 율법을 행하라.’
성경은 율법에 따라 의로운 자가 한 명도 없다고 하였다. 율법 앞에서 스스로 무죄하며, 의롭다고 자부할 자도 없다. 저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율법의 본질을 망각하였다.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자기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였다.
요 8:8-9 / 그러고나서 예수께서는 다시 앉아서 땅에 무엇인가 더 쓰고 계셨다. 9) 그러자 유대인 지도자들은 나이 많은 사람부터 한 사람씩 슬그머니 빠져 나가 버리고 그 여자 앞에는 오직 예수만 남았다.
그리고 아무 말씀을 하지 않으시고 다시 땅에 뭔가를 쓰셨다. 저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반격할만한 답변을 찾지 못했다. 그들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느껴서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돌아갔다.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고 자기들의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했다는 뜻은 아니다.
요 8:10 / 예수께서 일어서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너를 고발하던 자들은 어디 갔느냐? 그들 중에 너를 정죄한 사람이 하나도 없더냐?'
예수님을 정죄하고 고발하려는 저들은 한 사람도 남지 않고 돌아갔다. 그럴지라도 예수님에게 남아 있는 일이 있으니 죄인으로 붙잡혀 온 여인을 죄의 멍에와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죄인인 여인을 향해 ‘여자여’(woman)라고 부르셨다. 요한복음 2:4에서 어머니 마리아에게 한 말과 같은 단어이다. 어찌 된 일인가? 이미 그 여인은 죽고 사는 것을 떠나 하나님께 용서와 긍휼을 구하였을 것이다. 그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어 하나님께서는 용서와 긍휼을 베푸사 신분 회복까지 해주셨다. 앞으로는 누구를 막론하고 그 여인을 정죄하여 죄인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하나님께서 용서하신 것을 감히 피조물인 인간이 정죄할 수는 없는 것이다.
사 1:18 /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 `오라, 우리가 이 문제를 상의해 보자! 너희가 아무리 죄악에 찌들어 있다 하더라도 내가 너희의 죄악을 씻어 주리라. 금방 떨어진 눈송이보다도 더 희게 하리라. 너희가 진홍같이 붉게 물들어 있다고 하더라도, 너희를 양털처럼 희게 씻어 주리라.
예수님은 중요한 말 한마디를 더 하셨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회개한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것을 넘어서서 U-Turn 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길 결단하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이 바로 이것이다. 죄인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시고, 새로운 삶을 살 기회를 제공해 주는 것이 십자가이다.
‘나도 너를 정죄치 아니하노니..’라는 말은 대법원에서 확정판결까지 난 것을 특별 사면하는 것과 같다. 이것이 은총이다. 세상 사람들처럼 정죄는 아무나 할 수 있다. 정죄는 자기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들에게 또는 남을 비판하다 보면 누구나 하고 싶어하는 쉬운 말이다.
예수님처럼 하지는 못할지라도 같은 입장이 되어 이해하고, 공감하고, 용서하고, 사랑하고, 교정하는 것은 능히 할 수 있는 일이다. 예수님은 성도들에게 이런 일을 하라고 하신다. 세상과 마귀의 비난을 무릅쓰고 예수님은 기꺼이 죄인된 우리의 편이 되어주신 것처럼 우리도 유대인 지도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처럼 남을 정죄하지 말고 이웃을 이해하고 사랑해 줄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복을 것임이요’(마 5:8)라는 말씀이 새롭게 마음에 와닿는다.
■ 어느 목사님이 다음과 같은 고백의 글을 남겼다. “설교만 잘하면 되는 줄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삶이 없는 설교는 성도들의 귀만 키우는 줄을 예전엔 미처 몰랐습니다. 기도만 잘하면 되는 줄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회개 없는 기도는 교만한 바리새인을 만들어 내는 줄을 예전엔 미처 몰랐습니다. 심방만 잘하면 되는 줄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마음이 없는 심방은 성도들의 가려운 곳만 긁어주는 줄을 예전엔 미처 몰랐습니다. 장소만 좋으면 부흥하는 줄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한 영혼을 찾아가는 사랑이 없는 부흥은 ‘나는 너를 도무지 모른다’ 하시는 주님의 엄중한 심판이 됨을 예전엔 미처 몰랐습니다.”
목사인 나의 입장에서 이렇게 더 추가하고 싶다. 삶이 없는 설교를 유창하게 했다. 회개 없는 기도를 날마다 중언부언했다. 아버지 마음이 없는 심방을 열심히 했다. 한 영혼이 귀한 줄 모르는 부흥을 얼마나 원했는지 모른다. 설교보다 더 귀한 건 내가 부서지는 삶이었다. 기도보다 더 귀한 건 내가 깨어지는 삶이었다. 심방보다 더 귀한 건 내가 아버지의 마음을 품는 것이었다. 부흥보다 더 귀한 건 내가 한 영혼을 찾아가는 예수님의 발걸음이었다.
설교를 준비하면서 간음한 여인을 끌고 오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모습 속에서 나의 모습을 발견하였다.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은 조금도 없이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끌을 바라보며 분노하고 정죄하는 서기관이 바로 나의 모습이었다. 또한 여인의 모습 속에서도 나의 모습을 보았다. 현장에서 잡히지 않았을 뿐 비난을 받아 마땅한 죄와 더러움, 게으름, 가식들이 내 안에 많이 있다. 수치심과 열등감, 분노와 증오를 회개하지 않고 살아간다. 이러한 나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을 테니 아버지 앞에서 회개하고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내가 먼저 회개하는 삶을 살고 싶다.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끌을 빼려고 분노하는 어리석은 삶을 내려놓고 내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련다. 삶이 있는 설교를 하고 싶고, 회개가 있는 기도를 드리고 싶다. 대속해 주시는 찬양을 마음껏 불러보고 싶다.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담아서 교제하고 싶고, 한 영혼을 사랑하여 귀히 여기는 마음으로 부흥을 사모하고 싶다.
이제부터는 돌 대신 예수님처럼 아름다운 용서를 …
용서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 어떤 사람에 대해서 혐의를 가지고 증오심과 독한 마음, 원한을 풀지 아니하고 내 마음에 품고 있으면 그 독한 마음이 내 육신과 정신생활에 많은 해독을 가져온다. 스탠리 존스 혹은 놀만 필의 책을 읽으면 이런 원한과 독한 마음이 내 정신과 내 육체에 얼마나 많은 해독을 가져오는지 많은 실례를 들어서 말해 주었다.
■ 어떤 여자 분은 평소에 음식도 소화가 잘되고 건강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음식을 먹으면 곧 토해버리고 만다. 음식을 먹기만 하면 10분도 못 되어 토한다. 의사에게 가서 의학적으로 진단해 보아도 원인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아무리 많은 검사를 해도 원인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정신적으로 어떤 원인이 있으리라 생각하고 심리적 조사를 했다. 그 여자는 젊은 부인인데 결혼해서 그 남편과 잘 살았다. 그런데 싫어하는 것 한 가지가 있었다. 그것은 시어머니였다. 이 시어머니가 그동안은 따로 살았는데, 나이가 많고 혼자 생활할 능력을 상실하자 며칠 전에 전보를 보내기를 ‘내가 혼자 살기 힘이 드니까 같이 살자. 내가 곧 너에게 간다.’라는 것이다. 이 전보가 온 후부터 토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 어떤 부인은 갑자기 오른팔을 들지 못했다. 아무리 의학적으로 조사해 보아야 원인을 알 수 없는데 심리적으로 잘 조사해 보니까 친정어머니와 같이 오래 살았다. 그런데 어머니와 늘 불화하였다. 그래서 마음에는 손을 들어서 자기 어머니를 때리고 싶은 충동이 자꾸 들었다. 그럴 수 없지 않겠는가? 그런 심리 가운데서 그만 팔을 못 쓰게 되었다. 그러나 마음을 고쳐 회개한 후에야 오른팔을 제대로 쓸 수 있었다고 한다.
우유를 많이 먹는데 소가 성날 때 짠 우유는 사람에게 해롭다고 한다. 우유뿐 아니고 엄마가 성났을 때 먹인 모유는 아기에게 대단히 위험하다고 한다. 모유로 수유를 하는 어머니들은 조심해야 한다. 싸움하면서 젖 먹이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다. 성나고 독한 마음이 생기면 독소가 분비된다. 성난 다음에 소화가 안 되는 것은 위액이 잘 분비되지 않고 위액 가운데 독소가 분비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육신을 만드셨을 때는 선의를 가지고, 좋은 마음을 가지고, 사랑을 가지고 살게 만드셨다. 악의를 가지고 독한 마음을 가지면 우리 육체에 고장이 생긴다.
■ 미국 미시간주에 있는 호프 대학에서 71명에게 과거의 상처나 원한을 기억하도록 했더니, 혈압이 오르고 맥박이 빨라지고 근육이 긴장하는 현상이 일어났다. 화를 낼 때도 같은 현상이 일어났다. 미시간 대학에서도 비슷한 실험을 했다. 1,324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누군가를 용서한 사람이 한을 품고 있는 사람보다 훨씬 건강한 것으로 나타났다. 친구와 담을 쌓고 사는 사람보다 친구를 사귀고 친구와 교제하면 치명적 병을 이길 가능성이 크고, 더 강하고 탄력적인 면역체계를 갖게 되고, 정신건강이 향상되고, 사회적 유대가 약한 사람보다 오래 산다고 한다.
■ 미국 피츠버그에 있는 카네기 멜른 대학교에서 276명을 대상으로 연구한 바에 의하면 친구와 사귀고 사이좋게 지나는 사람은 감기에 걸릴 확률도 1/4이라고 한다. 276명 콧구멍 속에 감기 바이러스를 떨어트린 후 5일 동안 격리한 후 조사한 바에 의하면 평소 친구나 친지들과 사이좋게 지낸 사람들은 감기에도 잘 걸리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했다고 한다.
언젠가 미국에서 100명의 재벌에게 ‘재벌이 될 수 있는 성공 요인을 무엇이냐?’라고 물었다. 대부분이 ‘인간관계에서 장점만을 보고 말한다!’라는 것이다. 단점을 보는 사람, 남의 잘못을 비판이나 해서 남을 힘들고 슬프게 만드는 사람은 성공하기가 어렵다. 반대로 장점을 보고 칭찬을 많이 해서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사람은 사업에서도 성공한다고 한다. 그래서 예수님이 ‘온유한 사람들은 행복하다. 그들이 땅을 차지할 것이다.’(마 5:5)라고 말씀하셨나 보다.
항상 남의 허물보다 남의 장점을 보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이것은 용서에서만 가능하다. 그런데 용서하는 일은 저절로 되지 않는다. 작정해야 한다. 항상 ‘용서해야지...’ 하지 않으면 미움이 나오게 되어 있는 것이 사람의 본능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성령을 구하여야 하겠다.
■ 미국 에모리대학 정신의학과 부교수 찰스 레종 박사에 따르면, 남을 탓하고 원망하는 수준을 넘어 누군가에게 적개심을 지속적으로 품으면 자신의 육체의 건강도 병들게 한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그에 따르면 미음과 증오의 감정 응어리를 풀지 않으면 호르몬, 면역 체계에 교란을 일으키게 되며, 마음에 분개와 복수심을 품으면 신체가 본능적으로 그 대상과 싸울 준비를 하는데 이러한 끊임없이 싸울 대비는 혈압과 심장박동수 증가와 같은 변화로 이어진다고 했다. 마침내 잠을 이루지 못하고 공황 발작을 겪으며, 체내에 C반응성단백질과 같은 화학물질이 쌓이면서 심장과 신체 다른 부위에 큰 타격을 준다고 하였다. 이는 혈압과 심장박동수 증가와 더불어 심장 근육이 두꺼워지는 현상을 발생시켜 부정맥, 심장질환 등으로 돌연사하게 한다고 하였다.
결국 화병(火病 - 억눌린 분노에 따른 정신적·감정적 장애)에 걸려 죽는다는 말이 과학적으로도 입증된 셈이다. 또한, 미음과 증오의 감정 응어리를 풀지 않은 채 장시간 지내면 호르몬, 면역체계에 교란을 장시간 방치한 결과를 빚어서 결국 호르몬 조화가 깨져서 각종 몸의 이상 현상에 시달려 삶의 질을 현저히 떨어뜨린다. 또 인체 면역계의 장시간 교란은 균형과 조화가 깨져서 그 면역계가 손상되거나 약화되면 신체가 더욱 쉽게 감염되게 된다. 이렇게 사람에게서 장시간 면역결핍은 암세포를 파괴하지 못하는 지경이 오게 되어 당연히 각종 암에 걸린다. 그리고 그 면역계의 장시간 교란은 자가 면역질환으로 인해 만성염증성 질환으로 일평생 고생할 수도 있다고 하였다.
■ 어느 교수의 이야기 / 그는 가까운 친구와 대화를 하던 중에 깊은 상처를 받았다. 친구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모욕에 가까운 말을 했기 때문이다. 깊은 상처를 받고 난 뒤 그는 친구를 미워해서는 안 된다고 입으로 말하면서도 속에서는 그를 미워하는 마음이 떠나지 않았다. 그를 용서했다고 생각하면서도 자꾸 입은 그 친구를 비난하는 말을 쏟아냈다. 그렇게 며칠을 보내고 나서 그 교수가 잠을 자려고 했는데 잠이 오지 않았다. 그래서 그 교수는 눈을 감고 묵상을 했다. 그때 갑자기 ‘네가 잡은 멱살을 놓아라!’라는 소리가 들렸다. 처음에는 누가 이런 말을 하는가 싶어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그럴 만한 사람이 없었다. 순간 그는 하나님이 자기를 깨우치는 음성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자기가 누구의 멱살을 잡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중얼거리듯 낮은 소리로 ‘제가 누구의 멱살을 잡았단 말입니까?’라고 물었다. 그랬더니 마음속에 며칠 동안 비난했던 바로 그 친구의 멱살을 잡았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멱살을 놓아라.’ 이 말은 계속 그 교수의 뇌리에 박혀 떠나지를 않았다. 그 소리를 들으면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 친구를 용서하지 못하고 분개한 마음으로 비난도 하고, 욕도 하며, 그의 멱살을 잡고 놓아주지 않고 있었다. 이것이 하나님의 경고임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서 흐느끼면서 한 시간 동안을 울며 회개했다.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저를 먼저 용서해 주세요.’ 그렇게 한 시간 동안 울면서 회개하고 났더니 가슴이 시원해질 뿐 아니라 그 친구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고, 그를 위해 기도하고 축복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났다. 다음 날 바로 친구를 찾아가 무조건 잘못했다고 사과하고, 하나님께서 형제를 사랑한다고 진심으로 축복했다고 한다.
■ 위대한 신앙인 - 천부적인 달란트로 찬송시를 지은 여류작가, 화니 크로스비(Fanny Crosby) /
화니 크로스비를 잘 모른다 해도 모든 기독교인은 그녀가 지은 많은 찬송을 부르며 큰 은혜를 받으며 그 찬송들이 비록 육신의 눈은 보이지 않았으나 영혼의 눈으로 본 영의 세계가 그의 펜을 통하여 아름다운 찬송시로 나타났다. / 뉴욕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지 6주 만에 심각한 눈 염증을 앓아 의사의 부주의한 처방으로 결국 시력을 잃었다. 그러나 그 부모는 "왜 우리에게 이런 비극이! 안 돼! 받아들일 수 없어!"라고 원망하는 대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그 고난의 골짜기를 걸어가기로 작정했다. 그 의사는 자신을 용서하지 못했지만, 그녀는 9살 때 이렇게 기도하였다. “만약에 하나님이 나에게 시력을 허락해 주신다고 해도 나는 안 받으렵니다. 하늘나라에 가면 밝은 눈을 주실 터인데, 세상에서 더럽혀지지 않은 깨끗한 눈으로 우리 주님의 얼굴을 보렵니다.” 그리고 그녀는 “제가 만약 다시 그분을 만날 수 있게 된다면 저는 그분이 저를 시각장애인으로 만들어 주신 것에 대해 몇 번이고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평생 시각장애인으로 사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스러운 섭리였던 것 같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그와 같은 섭리에 대해 감사를 드립니다.”라고 자서전 ‘화니 크로스비의 생애’에서 말하고 있다.
화니 크로스비 가문은 영국에서 건너온 청교도 집안으로 신앙심이 깊었다. 화니는 자랄수록 청각과 미각, 후각과 촉각이 예민하게 발달했고 손재주가 좋았으며 영리하고 똑똑했다. 성경의 사람이었으며 기도를 확신하는 사람이었던 외할머니는 어린 화니에게 성경 이야기를 은혜롭게 들려주며 아름다운 꽃과 나무를 손으로 만져 보고, 코로 향긋한 향기를 맡게 했다. 특히 자연이 움직이는 모습을 성경 말씀과 연관 지어 설명해 주었다. “필요가 있을 때마다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해라. 그리고 일어난 모든 좋은 일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도록 해야 한다.” “일이 너무 어렵다고 하나님께서 하지 못하실 일이 하나도 없다. 자기의 필요가 무엇이든지 간에 하나님은 능히 채워주실 수 있는 분이란다.” “너의 기도 제목이 아무리 엉뚱하거나 가망이 없는 것일지라도 너에게 유익하다면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실 것이다. 설령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해 주지 않으신다 해도 낙심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얼토당토않은 너의 소망과 기대보다 더 좋은 것을 이미 예비해 놓으셨기 때문이지. 그러므로 늘 기뻐해야 한다. 고통과 좌절도 기쁘게 인내하면서 참을 수 있어야 한다. 그 이유는 그것이 더 좋은 것으로 바뀌고 있기 때문이지.” 그녀의 인생에 큰 전환점이 된 사건이 발생하는데, 1848년에 맹인학교에 콜레라가 발생하여 많은 사람이 죽게 되어 주검의 시신 앞에서 사람들의 마음이 변하는 것을 장례식에서 경험하고, 화니도 이러한 일을 경험하면서 죽음과 그 후의 삶에 대해서 깨닫게 되어 자기 신앙을 돌아보았다. “만일 콜레라가 내 생명을 빼앗아 갔다면 나는 하나님을 만날 준비를 했을까? 내가 이렇게 살아있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또 다른 무언가를 하라는 말씀이 아닐까?” 때마침 부흥 집회에 참석하여 회개의 시간을 통하여 과거 어두움을 다 씻어내고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일하는 사명의 눈을 뜨게 되어 그날 구원을 받게 되었다.
51년 동안 하나님께 이끌려 찬송 8,000여 곡을 작사했는데, 마음 상태가 최적에 도달할 때까지 늘 회개하고 기도하며 “나는 시 쓰기에 앞서 기도해요. 좋으신 주님께 내가 쓰려는 시에 영감을 달라고 요청하는 기도를 드리지 않고는 찬송가를 써 본 적이 없어요.”라고 했다.
그녀의 삶은 당시 하나님께 크게 쓰임 받던 복음 전도자 무디와 미국 전역을 순회하며 자신이 경험한 간증과 찬양으로 수많은 이를 주님께 인도했다. 시인이며, 교육자, 음악가인 그녀는 하프와 오르간 연주가로도 유명하고, 간증 설교자 겸 강연자로도 유명하다. 그녀는 인류 역사에서 최고의 찬송 시인이며 위대한 탐험가요 위대한 승리자였다.
그녀는 절망과 슬픔이 아닌 기쁨과 감격의 인생길 95년을 찬양 속에 살아갔다. 현재 찬송가에는 22곡이 실려 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더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깊은 느낌이 들게 된다.
279장 인애하신 구세주여, 417장 주 예수 넓은 품에 / 31장 찬양하라 복되신 구세주 예수, 439장 십자가로 가까이, 498장 저 죽어가는 자 다 구원하고 / 255장 너희 죄 흉악하나 / 288장 예수를 나의 구주 삼고, 532장 주께로 한 걸음씩 / 380장 나의 생명 되신 주 ; 384장 나의 갈 길 다 가도록, 540장 주의 음성을 내가 들으니, 615장 그 크신 일을 행하신 / 361장 기도하는 이 시간 주께 / 531장 자비한 주께서 부르시네 / 40장 찬송으로 보답할 수 없는 / 608장 후일에 생명 그칠 때 <176장 주 어느 때 다시 오실는지 / 249장 주가 맡긴 모든 역사 / 391장 오 놀라운 구세주 / 435장 나의 영원하신 기업>
▶ 잠 19:11 / 슬기로운 사람은 분통 터지는 일이 일어나도 속으로 삭이고, 이웃이 잘못한 일 있다 해도 그 허물 덮어주어 동네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는다.
나에게도 아직 용서하지 못하고 있는 누군가가 있는지? 전화번호를 차단하고, 카톡을 차단하고, 그 사람이 나오는 모임에는 나가지 않고, 부딪히지 않으려고 애쓰는 그런 사람이 몇 명이나 남아 있나? 실제로 마음 깊이 진심으로 용서하기란 쉽지 않다. 내게 손해를 끼치고 고통을 주고, 일생에 지울 수 없는 상처와 억울한 누명을 씌운 사람을 용서한다는 것이 어찌 쉬울 수가 있겠는가? 그래서 헨리 나웬은 용서의 어려움을 이렇게 말했다.
말로는 종종 ‘용서합니다’하면서 그 말을 하는 순간에도 마음에는 분노와 원한이 남아 있다. 여전히 내가 옳았다는 말을 듣고 싶고, 아직도 사과와 해명을 듣고 싶고, 끝까지 너그러이 용서한 데 대한 칭찬을 돌려받는 쾌감을 누리고 싶은 것이다.
우리는 몇 번이나 용서할 수 있을까? 한두 번… 기껏해야 3번 정도는 억지로라도 할 수 있다. 그런데 성경은 몇 번을 용서하라고 하였나?
마 18:21-22 / 그때 베드로가 예수께 와서 물었다. `주님, 형제가 제게 죄를 지었을 경우에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용서하면 되겠습니까?' 22)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아니다.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해 주어라.'
이어서 예수님은 ‘그러므로 만일 너희가 진심으로 네 형제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실 것이다.’(마 18:35)라고 경고까지 하셨다.
예수님은 7번을 70번 즉 490번까지 용서하라고 하셨다. 이 말의 의미는 용서의 횟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용서하라는 의미이다. 예수님은 왜 이렇게 어려운 용서를 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일까? 왜냐하면,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 곧 자신이 사는 길이기 때문이다. 내가 누군가를 용서하지 않고 산다면 가장 큰 피해를 보는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다.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 용서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미운 사람에 대한 분노, 나에게 상처 준 사람에 대한 미움은 결국 나 자신을 병들게 한다. 미움과 분노는 또 다른 미움과 분노를 낳고 결국은 나 자신을 영육간에 사망에 이르게 한다. 용서하지 않으면 평안도 천국도 없기 때문이다.
요한 크리스토프 아놀드는 그의 ‘잃어버린 기술, 용서’에서 이렇게 말했다.
“용서를 해야 하는 데에는 매우 현실적인 이유들이 있다. 누군가 나에게 잘못을 저질렀을 경우에, 우리가 복수를 선택했다면 우리의 삶은 분노로 타오를 것이다. 그리고 앙갚음을 했다 하더라도 남는 것은 공허함 뿐이다. 그러나 용서는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또한 용서는 하나님의 선물이며 은총이다. 이런 용서를 통해 나는 정말 삶의 만족을 누리고 있다.”
미움은 옛사람의 죄악된 습성이며, 사탄의 일이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아니다. 용서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성령이 함께 해야 가능하다. 예수님은 죄인의 괴수 같은 나의 죄를 사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대신 죗값을 치르셨고, 나는 사망에서 해방되어 예수님의 생명으로 사는 자유로운 존재가 되었고, 예수님이 내 안에 사는 귀한 존재가 되었는데... 여전히... 아직도... 미움이 자리 잡고 있다면 예수님이 얼마나 슬퍼하실까? 먼저 하나님께 내 모든 상황을 아뢰고, 심판은 하나님께 맡기자. 내 지혜와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구할 때, 나는 미움으로부터 자유롭게 될 것이다. 사망의 권세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생각하며 사랑하는 마음이 충만하여 아름다운 용서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기도하며 함께 찬양했으면 한다.
♬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으니 그런즉 이제 내가 산 것 아니요 오직 내 안에 예수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자기 몸 버리신 예수 위해 산 것이라
▶ 마태복음 18:21-22에 이어서 감동 있게 읽고 있는 23-35절을 보충 설명을 하셨다.
데나리온과 달란트는 신약시대의 화폐 단위이다. 1데나리온은 무게가 약 4g인 로마의 은화로 군인이나 품꾼의 하루 품삯에 해당하는 액수이며(마 20:1) 1달란트는 지역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지만 보통 20kg에서 40kg 정도 나가는 금의 무게를 가리킨다. 100데나리온과 10,000달란트의 화폐 가치를 비교하게 되면 일만 달란트라고 표현하는 하나님께 입은 은혜가 얼마나 큰지, 그에 비하면 크게 표현한 일백 데나리온에 해당하는 형제자매의 실수나 허물은 얼마나 작은지?
1달란트 = 6,000데나리온 / 1만 달란트 = 6,000만 데나리온 / 1데나리온 = 하루 품삯(최저 10만원) / 1만 달란트 = 60,000,000일×10만원 = 164,384년 동안 한 푼도 안 쓰고 저축한 액수. 일만 달란트를 탕감받았다면 일백 데나리온 빚진 자의 빚은 탕감해 주는 것은 기본적인 의무이다. 그것도 형제에게 말이다. 이것조차 못한다면 그는 사람도 아니요 미물만도 못한 극악(極惡)한 인간이다. 누가 뭐라 할지라도 일만 달란트를 빚질 정도의 사람이라면 1백 데나리온은 적은 돈으로 충분히 탕감해 줄 수 있었다. 아니 더 한 것이라도 탕감해 주었어야 한다. ‘내가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남에게 자비를 베풀라’는 말씀은 결코 무리하거나 부담이 되는 것이 아닌 주머닛돈처럼 동냥도 할 수 있는 액수일 것이다.
이 비유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스스로의 힘이나 능력으로는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일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받은 것처럼 개개인이 받은 하나님의 은혜는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무궁무진(無窮無盡)한 것이다. 그러기에 값없는 은혜라고 하는 것이 아닌지?
▶ 우리 모두가 받고 싶은 은혜로운 말씀이다. ‘만일 너희가 남에게 주면 너희는 그것을 다시 얻을 것이다. 말에다 누르고 흔들어서 차고 넘치도록 후하게 담아 너희에게 안겨 주실 것이다. 너희가 남에게 되어주는 분량대로 되돌려 받을 것이다.’(눅 6:38). 그러나 자세히 보자.
눅 6:27-37 / 모두 내 말을 들으라.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 너희를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라. 28) 너희를 저주하는 사람들에게 복을 빌어 주고 너희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라. 29) 만일 누가 네 한쪽 뺨을 치거든 다른 쪽 뺨도 돌려대고 겉옷을 달라 하거든 속옷까지도 주라. 30) 네게 구하는 사람들에게는 주고, 누가 네 것을 가져가거든 도로 찾으려고 애쓰지 말라. 31) 남이 너희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대로 너희가 먼저 남에게 해주라. 32)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들만을 사랑해서 너희가 상을 받을 줄 아느냐?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한다. 33) 너희에게 잘해 주는 사람에게만 잘해 준다면 그것이 그렇게 장한 일이겠느냐? 죄인들도 그만한 일은 하고 있다. 34) 만일 너희가 되돌려 받을 수 있는 사람에게만 돈을 꾸어 준다면 그게 무슨 선한 일이겠느냐? 악한 사람들도 되돌려 받을 수 있는 사람에게는 친절하게 꾸어 준다. 35)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그들에게 선한 일을 하며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러면 하늘에서 너희가 받을 보상이 클 것이며 너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것이다. 하나님은 은혜를 모르는 사람에게나 악한 사람들에게도 인자하시기 때문이다. 36)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 37) `남을 심판하지 말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정죄하지 말라. 그러면 너희도 정죄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용서하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38절은 앞에 나온 27-37절 말씀을 했을 때 이렇게 해주겠다고 하시는 말씀이다. ‘만일 너희가 남에게 주면 너희는 그것을 다시 얻을 것이다. 말에다 누르고 흔들어서 차고 넘치도록 후하게 담아 너희에게 안겨 주실 것이다. 너희가 남에게 되어주는 분량대로 되돌려 받을 것이다.’
■ 코리 텐 붐 여사의 용서와 사랑 / ‘주는 나의 피난처’라는 책을 쓴 네덜란드의 코리 텐 붐(Corrie Ten Boom 1882-1983)여사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집에 유대인을 숨겨준 죄로 가족들이 모두 독일군에 체포되어 강제수용소에 갇혔다. 부모님과 언니는 그 가혹한 고문을 이기지 못해서 수용소에서 죽었지만 코리는 구사일생으로 살아서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 후 신학교에 가서 공부하고 하나님의 종이 되었다. 코리가 복음을 증거할 때 성령의 음성이 들려왔다. “독일은 전쟁을 일으킨 민족이기 때문에 지금 큰 상처를 입고 있다. 그들에게 가서 복음을 증거하라” 코리는 하나님께 “하나님께서 가라면 어디든지 가겠습니다. 그렇지만 독일에만은 못 갑니다. 하나님. 그곳만은 빼 주십시오. 독일 사람이 우리 부모님도 죽이고 언니도 죽였습니다. 내가 강제 수용소에서 당한 고통은 말로 형용할 수 없습니다. 그 독일 사람에게 가서 내가 복음을 증거할 수는 없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사랑하는 딸아 내가 나를 저주하고 욕하고 등진 사람들을 위해서 십자가를 진 것을 기억하라. 네가 내 딸이면 독일 사람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라” 그 말씀을 듣고 코리는 독일에 가서 복음을 전했다. 그녀는 가는 곳마다 많은 사람이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고 주님께 나오는 것을 보고 보람을 느꼈다. 그런데 하루는 설교를 마치고 강단에서 내려서자 많은 사람이 악수하기 위해 줄을 섰는데, 허름한 외투를 입은 한 남자가 앞으로 다가오는 것을 보고 코리 여사는 심장이 멎고 온몸의 피가 거꾸로 흐르는 것 같았다. 왜냐하면 그는 강제 수용소에서 자기에게 무시무시한 고통을 가한 악명 높은 강제 수용소 간수였기 때문이다. 그 남자는 한겨울 이른 새벽에 여자 포로들을 나체로 밖에 서 있게 하고 먹을 것도 주지 않고 갖은 횡포를 다해 괴롭힌 장본인이다.
그 사람 손에 사촌 언니 벳시가 강간당하고 견디지 못하여 끝내 수용소에서 죽었다. 강제 수용소에서 있던 악몽 같은 괴로운 기억들이 주마등같이 스치는데 앞에 있는 바로 그 남자가 손을 내미는 것이었다. 그 남자는 전쟁 당시 수많은 여자 포로들을 죽였기 때문에 여사를 알아보지 못했으나 코리는 꿈에도 그 얼굴을 잊을 수가 없었다. 강단에서는 용서를 외쳤지만 자기와 같이 벌거벗기운 채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죽은 언니의 얼굴이 크게 클로즈업 되면서 자기의 청춘을 짓밟은 장본인을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어서 손을 내밀지를 않았다. 도저히 손을 내밀어 그와 악수할 수가 없어서 얼른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예수 님 저는 하늘에서 진노의 벼락이 내려 이 사람을 때리기 전에는 용서할 수 없습니다. 저를 도와주십시오. 저는 도저히 이 사람만은 용서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 저를 좀 이해해 주십시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십자가에서 나를 못 박고 죽이고 침 뱉으며 채찍으로 때리고 조롱하며 가시관을 씌워서 나를 괴롭히는 사람들을 내가 용서했지 않느냐? 너도 용서해 주어라”, “하나님이 도와주지 않으시면 못합니다.”라고 기도하자 성령의 능력이 임하여 여사의 손이 나가서 그 사람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그 사람은 무거운 입을 열어 이렇게 말했다. “네덜란드 사람인 당신이 전쟁 때 우리 독일 사람이 저지른 죄를 용서하고 복음을 전해 주어서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저는 죄를 많이 지은 사람입니다. 죄를 용서받고 새 사람이 되기 위해서 오늘 주님 앞에 나왔으니 저를 위해서 기도해 주십시오.” ❶ 그 순간 갑자기 하늘문이 열리고 주님의 사랑이 여사에게 넘치게 임했다. ❷ 순식간에 미움과 원한이 눈 녹듯이 다 녹아버리고 말았다. ❸ 그를 용서하고 나자 여사의 영혼이 얼마나 홀가분하고 즐거운지 말로 표현할 수 없었으며 ❹ 거기에서 10년이나 젊어지는 듯한 재생의 치료를 받았다고 한다. ❺ 코르덴 붐 여사는 그리스도의 큰 사랑으로 그 사람을 용서해 주었고, ❻ 그 사람의 영혼이 구원받기 위해서 기도해 주었다. ❼ 그때 자신의 마음속에 남아있던 쓰라린 원한의 상처가 치료를 받고 그 이후로 온 세계에 다니면서 용서와 사랑을 힘 있게 전할 수가 있었다고 고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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