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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 했는데…(황사영 알렉시오)
한국인으로서, 한국의 가톨릭 신자로서, 한국 정부를 대표하고 있는 주교황청 한국 대사로서, 황사영 알렉시오에 대해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고 싶었습니다. 2020년 2월, 바티칸 민속 박물관을 찾았습니다. 관리 책임자인 M 신부의 안내를 받아 고문서 연구실에 들어가 특수 제작된 상자 속에 담겨 있는 황사영 「백서」를 보았습니다. 200년이 넘은 문서인데도 방금 붓글씨로 쓴 것처럼 보관 상태가 좋아 보였습니다. 황사영의 혼이 깃들어 있는 백서를 한번 안아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습니다. M 신부가 저의 간절한 마음을 눈치챘는지, 백서의 모퉁이만 살짝 만져 보라고 특별 허락을 해주셨습니다. 황사영 알렉시오와 이백만 요셉, 실로 219년 만의 만남이었습니다. 뜨거운 전율이 감돌았습니다.
황사영 사건은 제가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된 이후 제 머리를 강하게 짓누르고 있는 쟁점적 화두 가운데 하나입니다. 주교황청 한국 대사로 3년간(2018~2020년) 근무하면서 조선의 알렉시오를 특별히 묵상할 기회가 많았습니다.
황사영은 신유박해(1801년) 때 조선 정부의 폭정을 막아달라고 청나라와 프랑스에 구조를 요청하는 밀서를 써서 베이징의 구베아 주교에게 보내려다 발각되었습니다. 황사영 백서는 절체절명의 불가항력적 상황에서 보낸 자위적 차원의 SOS(긴급구조요청)였습니다. 조선의 조정은 황사영이 외세를 끌어들이려는 반역 행위를 했다며 대역 죄인으로 몰아 극형(거열형[車裂刑])에 처했습니다. 황사영은 우리에게 누구인가? 국가전복을 꾀한 국사범인가, 목숨을 신앙과 바꾼 순교자인가? 황사영이 추구했던 가치는 무엇이었나? 정치 권력이었나, 신앙의 자유였나? 그는 왜 임금님이 보장해 준 출세의 길을 버리고 언제 죽임을 당할지 모를 형극의 길을 택했을까? 그 힘은 그 용기는 어디서 나왔을까….
영국의 역사학자 카(E.H. Carr)는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말했습니다. 역사적 인물(사진)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역사의 진보에 따라 평가의 잣대를 새롭게 설정해야 한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현재의 시각에서 황사영을 재평가해야 하지 않을까요?
로마에서 홍콩의 민주화 운동을 주시했습니다. 황사영이 왜 「백서」를 써야 했는지,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사건이기 때문이었습니다. 2019년 홍콩에서는 민주화 운동이 격렬하게 벌어졌고, 그것은 반정부 시위로 이어졌습니다. 베이징의 중국 정부가 발끈했습니다. 홍콩의 반정부 시위가 최악으로 치닫던 2019년 9월 AP통신은 특별한 사진 한 장을 보도했습니다. 제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습니다. 홍콩 시위대가 미국 총영사관 앞에서 미국 의회에 ‘홍콩 인권 민주주의 법안’의 통과를 촉구하는 모습입니다. 여기에는 “트럼프 대통령님, 홍콩을 해방시켜 주세요.”라고 쓴 깃발도 있었습니다. 시위대가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 처하자, 세계 최강 미국에 SOS를 보낸 것입니다. 중국 정부는 이를 민족 반역 행위로 규정하고, 실정법에 따라 엄중 처벌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황사영 사건과 같은 구도 아닌가요? 황사영은 혈혈단신 심산유곡(충북 제천의 배론 성지)에서 ‘1인 저항’을 하였고, 홍콩 시위대는 세계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집단 저항’을 한 것이 다를 뿐입니다. 황사영은 신앙의 자유를, 홍콩 시민들은 정치적 자유(민주주의)를 얻고자 했습니다.
황사영에 대한 평가에서 한국 일반사와 한국 교회사는 심각한 불일치 상태에 있습니다. 민족주의 사학자들을 중심으로 적지 않은 역사학자들이 황사영에 대해 수구적 평가를 견지하고 있습니다. 덩달아 일반인들도 황사영을 반역 죄인으로 보려는 경향이 여전합니다. 역사의식의 빈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국 천주교는 민족주의 사학자들과 완전히 다른 시각을 갖고 있습니다. 황사영을 순교자로 인정하고 시복시성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황사영 재평가 문제의 해법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수많은 민주 투사들이 군사 독재에 항거하다 실정법(국가보안법 등)을 위반했습니다. 대학생 · 시민운동가 · 성직자 · 정치인 등이 투옥당하고 심지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기도 했습니다. 군사 독재가 사라지고 민주 체제가 들어서면서 그들은 복권되고 명예 회복이 이루어졌습니다. 내란 음모 등의 죄목으로 사형을 선고받았던 정치인이 대통령이 되기도 했습니다.
황사영에 대한 재평가는? 황사영이 조선 시대의 실정법을 위반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200여 년 전 조선 시대의 잣대로 황사영을 재평가해야 할까요, 아니면 21세기 대한민국의 잣대로 재평가해야 할까요. 황사영은 권력을 탐하지도 않았고, 정권을 찬탈하려 들지도 않았습니다. 오로지 신앙의 자유를 지키려 했을 뿐이었습니다. 당시 조선 시대에는 신앙의 자유가 없었습니다. 현재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입니다. 신앙의 자유를 온전히 보장하고 있습니다.
황사영의 재평가 문제는 단순히 가톨릭이라는 특정 종교 차원에서만 논의될 사안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신앙의 자유는 인류 보편적 가치에 뿌리를 둔 핵심적인 기본권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하루빨리 역사의 법정이 열려 황사영에 대한 복권과 명예 회복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합니다.
[교회와 역사, 2022년 7월호, 이백만 요셉(전 주교황청 대사)]
2. 황사영과 가마골의 의미
주문모 신부와 지도층 신자들의 노력으로 성장해 가던 천주교회는 1801년의 신유박해로 인해 큰 타격을 받게 되었다. 정약종을 비롯하여 지도층으로 지목된 신자들 대부분이 체포되거나 순교하였으며, 주문모 신부도 의금부에 자수한 뒤 4월 19일(양력 5월 21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이에 앞서 황사영은 충북 제천의 배론(봉양면 구학리) 교우촌으로 피신하였고, 9월 22일에는 그곳에서 북경의 구베아 주교에게 전달할 장문의 보고 서한을 명주에 작성하였으니, 이것이 이른바 <백서>(帛書 : 명주에 담은 신앙)였다. 그러나 이 서한을 북경에 전하기로 된 밀사 옥천희(요한)가 체포됨으로써 모든 사실이 밝혀지게 되었으며, 9월 29일에는 황사영이 체포되면서 <백서>도 관리들에게 압수되고 말았다.
* 교회 밀사와 신자들의 서한 : 밀사들의 활동과 서한 전달의 애환 설명
정난주(丁蘭珠, 마리아 : 1773~1838) 즉 정명련(丁命連)은 바로 황사영의 부인이었다. 마리아는 일찍이 복음을 받아들인 양근(楊根, 지금의 양평) 땅 마재(馬峴, 현 남양주군 조안면 능내리)의 유명한 정씨 집안에서 정약현(丁若鉉)과 이씨 부인의 장녀로 태어났다. 부친 정약현은 집안의 맏아들로 정약종(아우구스티노)과 정약용(요한)의 이복형이었고, 모친 이씨 부인은 이벽(요한)의 손윗누이였다. 그러므로 마리아는 순교자 정약종의 조카요 정하상 성인의 4촌 누님이 된다. 바로 이러한 집안의 신앙 분위기 때문에 마리아는 일찍부터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었던 것 같다.
마리아는 18세가 되던 1790년 무렵에 16세의 황사영(알렉시오)과 혼인을 하였다. 바로 그 해에 황사영은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특히 시(詩)에서 일등을 하여 정조로부터 ‘백지 3권, 붓 세 자루, 먹 세 자루’를 상으로 받기까지 하였다. 한편 황씨 집안과 정씨 집안은 모두 유명한 남인(南人) 가문으로 선대부터 같은 당색 안에서 혼인 관계를 맺어 왔다. 황사영이 정씨 집안의 맏딸인 마리아를 아내로 맞이해 들이게 된 데는 이러한 배경이 작용하였음에 틀림없다.
황사영은 1775년에 서울의 아현(阿峴, 즉 애고개)에서 유복자로 태어나 그곳에서 성장하였다. 따라서 마리아도 그와 혼인한 뒤 이곳 아현에서 생활했음이 분명하다. 또 황사영은 1790년 진사시에 급제한 후 인척 이승훈(베드로)으로부터 천주교 서적을 얻어 보게 되었으며, 이승훈․정약종 등에게 교리를 배운 뒤 영세 입교하였다. 그리고는 과거 공부까지 폐기한 채 오로지 전교 활동에만 힘쓰면서 교회 일에 참여하여 주문모 신부를 도왔고, 자신의 집을 명도회(明道會)의 하부 조직인 육회(六會)의 하나로 사용하였다. 그 결과 아현의 집에는 자연히 신자들이 자주 모이면서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었고, 마리아가 이 공동체를 뒷바라지하게 되었다.
마리아는 1800년에 아들 경한(景漢)을 낳았다. 그러나 이듬해 신유박해가 일어나면서 모든 가족이 수난을 겪어야만 하였다. 이때 황사영은 교회 재건을 위해 몸을 숨기기로 작정하고 1801년 2월 15일 서울을 떠났으며, 2월 그믐부터 9월 29일 배론에서 체포될 때까지 은거 생활을 하면서 <백서>를 작성하였다. 마리아와 아현에 함께 거처하던 가족들은 이에 앞서 2월 10일경에 이미 체포되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이 날 황사영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졌고, 따라서 포졸들이 그의 종적을 찾기 위해 먼저 그의 집을 급습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어 강화도에 살던 황사영의 숙부 황석필도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당시 조정에서는 누구보다도 먼저 주문모 신부와 정약종, 황사영과 같은 지도자들을 체포하고자 하였다. 그러므로 마리아와 가족들은 남편의 종적을 알아내려는 포졸들로부터 갖은 문초를 받아야만 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마리아에게는 어린 경한이를 데리고 오랜 옥중 생활을 견뎌내야만 하는 고통도 따랐을 것이다. 실제로 법률에 금지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정에서는 그때 양반 출신 부녀자들에 대한 문초와 형벌을 묵인해 주고 있었다. 그러나 포졸들은 주 신부가 박해의 종식을 위해 자수한 뒤에도 황사영의 종적만은 찾아낼 수가 없었다.
7개월 후, 황사영이 배론에서 체포되고 <백서>가 압수되면서 조정에서는 이를 대역부도죄(大逆不道罪)로 다루었고, 11월 5일(양력 12월 10일)에는 그에게 능지처사(陵遲處死)의 판결을 내렸다. 이어 11월 7일에는 부인 정 마리아와 남은 가족들에게도 연좌죄가 적용되어 모두 유배형을 받게 되었다. 당시의 판결 내용을 보면, 모친 이윤혜는 경상도 거제부로, 부인 마리아는 전라도 제주목 대정현의 노비로 유배되었고, 아들 경한은 두 살이어서 역적의 아들에게 적용되는 형률을 받을 나이가 안되었기 때문에 교수형을 면하고 전라도 영암군 추자도의 노비로 가게 되었다. 이들이 서울을 떠나 유배지로 향한 것은 11월 8일이었다. 이로써 황사영의 집안은 완전히 몰락하고 말았다.
당시 제주도는 유배지 중에서도 가장 먼 곳이었다. 신유박해 때 이곳으로 유배된 사람들은 정난주(마리아) 외에도 이승훈의 아우 이치훈(李致薰)이 있었으나, 그는 천주교 신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형 때문에 유배형을 받았던 것 같다. 유배 이후 마리아와 아들 경한은 오랫동안 잊혀지게 되었다. 그러다가 1909년에 제주 본당의 2대 주임 라크루(Lacrouts, 具瑪瑟) 신부가 전교를 위해 추자도(楸子島)를 왕래하던 중에 황경한의 손자를 만나 마리아와 경한에 관한 사실들을 알게 되었다.
당시 라크루 신부는 한국 선교사로 있다가 파리 외방전교회 교수 신부로 임명되어 귀국해 있던 샤르즈뵈프(Chargeboeuf, 宋德望) 신부에게 1909년 10월 5일에 서한을 보내 순교자 황사영과 황경한의 후손들의 비참한 사실을 알렸고, 샤르즈뵈프 신부는 이를 리옹에서 발간되던 전교 잡지 <미션 가톨릭>(Les missions Catholiques)에 소개하였다. 그 결과 프랑스의 후원자들이 라크루 신부에게 480프랑을 보내 주었으며, 그는 이 후원금으로 황경한의 손자에게 집을 사주고 밭도 사주었다. 아울러 이때 그는 정난주(마리아)가 유배 생활 중에 아들 황경한에게 보낸 서한을 얻어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다음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이때 라크루 신부는 마리아의 유배 생활에 대해서까지 조사하지는 않았다.
<라크루 신부의 1909년 10월 5일자 서한>
내게 미래에 대한 좋은 희망을 주는 것은, 내가 지난해 6월에 추자도에서 황 알렉산델(알렉시오의 잘못)의 손자들과 증손자들을 방문하는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을 누렸다는 사실이다. 황 알렉산델은 1802년(1801년의 잘못)에 순교한 신자로, 샤를르 달레의 교회사에 그의 전기가 다소 길게 언급되어 있다.……북경의 주교(즉 구베아 주교)가 주(문모)라고 하는 중국인 사제 한 명을 조선에 파견하였는데, 황 알렉산델은 여러 해 동안 그의 중요한 협력자가 되었다.
이 거룩한 사제와 모든 유명한 신자들이 (신유박해 때) 순교하였다. 박해자들의 손아귀를 기적적으로 벗어난 알렉산델은 회장이 되었다. 조선 교회는 이후 30년 후에야 사제를 얻게 되었다.
황 알렉산델은 고발되어 체포되고 재판을 받는 동안 모든 이들에게 비난을 받았으며, 그에게 남겨진 모든 재산을 압수당하였다. 그의 모든 친척들이 유배되었는데, 모친은 거제도로, 그의 젊은 아내는 제주도로, 그의 세 살(두 살의 잘못)된 어린 아들은 추자도로 유배되었다. 모두가 불행하게 생활하였으나, 비판을 받는 치욕을 당하지는 않았다. 바로 나는 순교자의 후손들, 즉 세 살 때 추자도로 유배된 아이의 아들과 손자를 다시 찾는 무한한 기쁨을 누린 것이다. 신앙 때문에 그토록 고통을 참아받은 한 집안을 불행하게 그대로 놔둘 수 있을 것인가?
이로부터 60여 년이 지난 1970년대에 와서 교회에서는 다시 한 번 마리아와 경한에 대한 기록을 찾으려는 움직임이 있게 되었다. 대구의 교회사가 김구정(金九鼎, 이냐시오)이 1970년에 우연히 황사영의 후손 황찬수(당시 대구시 신암동 거주, 황경한의 4대손)를 만나 그로부터 창원 황씨 족보와 가첩, 서한 등을 받아 검토하게 되었고, 황찬수가 소장해 오던 제주 사람 김상집(金相集, 혹은 尙集)의 1838년 서한 2장을 확인하게 된 것이다. 이어 김구정은 1973년 초 모슬포 본당에 재임하던 고 김병준(金丙準, 요한) 신부에게 자신이 황찬수에게 들은 여러 사실들을 확인해 주도록 요청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마침내 정난주(마리아)의 무덤까지 밝혀지게 되었다.
* 제주의 대정 성지와 추자도 성역화 사업
2) 외로운 가마골의 무덤 :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부곡리. 속칭 가마골.
홍복산 자락 아래에는 순교자 무덤이 외롭게 안장되어 있다. 신유박해로 순교한 <백서>의 주인공 황사영(알렉시오)의 무덤이다. 당시 황사영은 양박 청래(洋舶請來)의 원흉으로 지목되어 능지처참형을 받았으므로 시신이 온전할 리 없었다. 또 가까운 집안 사람들이 모두 유배를 당한 터였으므로 그 시신을 거둘 사람조차 없었다. 그의 시신을 수습하여 황씨 문중의 선산에 안장한 이들은 먼 친척이나 면식이 있는 신자들 몇 사람이었을 것이다.
이후 황사영의 무덤은 집안에서조차 오랫동안 잊혀져 왔다. 양반 집안의 자손으로 태어나 국사범으로 처형되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러다가 180년이 지난 1980년에 황 씨 집안의 후손이 사료 검토 작업과 사계의 고증을 거쳐 홍복산 선영에서 황사영의 것으로 추정되는 무덤을 발견하였다. 또 이를 발굴한 결과 석제 십자가 및 비단 띠가 들어 있는 항아리가 나오면서 무덤의 주인공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겨우 찾은 황사영의 묘비에는 ‘순교자 황사영 공의 묘’라고 새겨져 있다. 비록 당시의 위정자들에게는 그의 죽음이 매국의 결과로 치부되었을지라도 묘비를 건립한 사람들은 이를 순교로 이해했던 것이다. 아니면 “황사영은 출생 가문과 개인적인 공로로, 또 드물게 보이는 재능과 덕행으로 일반 신자들로부터 존경을 얻었다.”(샤를르 달레, 한국 천주교회사 상, 557쪽)라고 한 것처럼 그의 덕행을 기리고자 한 것임이 분명하다.
황사영의 무덤은 지금 어떤 모습일까. 사적지로 조성되기도 전에 주변이 개발되면서 순교자의 무덤은 초라한 모습으로 건물 뒤에 가려지게 되었다. 이제 황사영의 무덤을 다른 곳으로 이장해야 하지 않겠는가?
차기진(루가) / 양업교회사연구소 소장, 순교자현양회 교육 · 홍보 분과장
[천주교 서울대교구 순교자 현양회 홈페이지 자료실에서]
3. 배론과 황사영의 "백서"
충북 제천군 봉양면 구학리의 백운산(白雲山)과 구학산(九鶴山) 줄기에 둘러 싸인 벽촌. 이제 신자들에게 익숙해진 '배론(舟論) 성지'가 자리잡고 있는 곳이다. 배론이란 명칭은 이곳 골짜기의 형상이 배 바닥처럼 깊고 길게 뻗어 있다는 데서 붙여졌다.
옛날 이 부근에는 아랫배론, 중땀배론, 윗배론, 점촌배론, 박달나무골, 미륵재 등 6개 동리가 자리잡고 있었으며, 그 중에서 교우촌이 있던 곳은 바로 점촌배론이었다. 이 점촌배론의 본래 이름은 '팔송정의 도점촌(陶店村)'으로, 1791년 신해박해 이후 충청도 남부에서 피신해 온 신자들이 옹기점을 운영하여 생계를 유지하면서 부르게 된 이름이었다. 그후 박해가 끝나고 다시 이곳에 돌아온 신자들은 1890년대에 와서 '사학(邪學)쟁이들의 옹기점'이라는 기억 때문에 전교 활동에 지장을 받을까 염려하여 마을 이름을 바꾸어 주도록 관계 당국에 요청하였고, 이 요청이 받아들여져 '구학리 배론'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곳으로 가는 길은 두 갈래가 있다. 원주에서 가자면 동쪽으로 치악산 줄기의 끝자락에 연결되어 있는 가라피 고개를 넘어가야 하는데, 그 왼편에는 중앙선의 유명한 또아리굴이 있다. 또 남쪽으로 가자면 온갖 설화로 얽혀 있는 박달재를 넘어야 한다. 바로 이 두 고개처럼 배론 성지는 한국 천주교회사와 관련하여 길고 긴 고난의 여정을 넘나든 곳이었다.
배론 사적지가 갖고 있는 특징은, 첫째 그 복음사가 한국 천주교회와 함께 오랫동안 지속되어 오고 있는 점이고, 둘째 다른 사적지와는 달리 여러 사적과 복음사의 애환들을 함께 간직해 온 곳이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 가장 일찍 교우촌이 형성된 곳이요, 유명한 황사영(알렉시오)의 "백서"(帛書)가 탄생한 곳이며, 한국 최초의 신학교인 '성 요셉 신학교'가 자리잡았던 곳이다. 또 최양업 신부의 시신이 안장되어 있는 곳이고, 1866년의 병인박해 때 여러 순교자들과 성인들의 순교사가 시작된 요람지이기도 하다.
배론 교우촌에 대한 기록은 1801년의 신유박해 때부터 나타난다. 이 박해로 많은 교우들이 체포되고 유일한 목자 주문모(야고보) 신부가 순교하는 것을 본 황사영은, 그 해 2월 말에 서울을 떠나 경상도와 강원도를 거쳐 이곳으로 숨어 들게 되었다. 그때 이곳에서 옹기점을 운영하고 있던 교우 김귀동이 그를 받아들여 옹기점 뒤에 토굴을 파고 그의 은신처를 마련해 주었다. 현재 배론에 조성되어 있는 토굴은 이러한 사실을 근거로 최근에 다시 조성한 것이다.
황사영은 이후 토굴에 은거하여 자신이 겪은 사실들과 김한빈(베드로), 황심(토마스) 등이 알아 오는 박해 내용들을 세명주에 적어 나갔다. 이것이 '명주에 담은 신심', 곧 "백서"로, 122행, 13,384자에 달하는 장문의 서한 형태의 글이다. 그 내용은, 박해의 원인과 "백서"의 작성 이유를 기록한 첫 부분, 신유박해의 전말과 순교자들의 행적을 기록한 둘째 부분, 교회의 재건과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한 방법을 제시한 셋째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황사영은 이 서한을 북경의 구베아(Gouvea, 湯士選) 주교에게 전달한 계획이었다.
그러나 하느님의 섭리는 달리 결정되고 말았다. 북경 주교는 조선 교회의 소식을 듣기 위해 간절하게 밀사들을 기다렸지만 하루하루가 헛수고였다. "백서"를 북경 주교에게 전달할 책임을 맡은 밀사 옥천희(요한)과 황심이 9월에 체포되었고, 얼마 뒤에는 황사영도 배론에서 체포되고 만 것이다. 오히려 "백서"는 박해자들의 손으로 넘어갔고, 그렇게도 신앙의 자유를 고대하던 황사영은 1801년 11월 5일(음력) 서소문 밖에서 능지처참형을 받고 순교자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만일 할 수만 있다면, 병선 수백 척에 정병(精兵) 5-6만, 대포 등 날카롭고 강한 병기를 많이 싣고, 겸하여 글을 잘하고 사리에 밝은 중국 선비 3-4명을 데리고 오십시오. 그리고 이 나라의 해안에 정박하여 국왕에게 글을 보내 선교를 용인하고 우호 조약을 체결하도록 요구하십시오. 그리고 국왕에게 '한 사람의 선교사를 받아들여 온 나라가 화를 입지 않도록 하라.'고 요청하십시오(황사영의 "백서", 110-111행 중에서).
이처럼 황사영은 무력을 통한 선교의 자유를 갈망하면서도 우호 조약 체결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것은 '신앙이냐? 모반이나?'의 갈림길에서 방황해야만 했던 조선의 신앙인이요 지식인으로서의 고뇌였다. 그러나 이러한 고뇌도 민족사의 입장에서 본다면 결코 용납될 수 없는 것이었으며, 비록 전근대적인 민족의식에서 본다고 할지라도 결코 수긍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 훗날 다블뤼(Daveluy, 安敦伊) 주교가 '하느님의 종'을 선택하면서 황사영을 제외시킨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그의 신심과 순교 자체까지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사목, 1999년 7월호, pp.123-124, 차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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