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3호선 안국역 1번 출구에서 경복궁 방향으로 조금 가다보면 2021년 7월에 옛 풍문여고 건물 5개동을 리모델링해 개관한 서울공예박물관이 있습니다. 학교의 정문이 있던 곳에 ‘안동별궁’이라는 표지석이 눈에 들어옵니다.
‘안동별궁’은 고종 때 세자인 순종의 가례를 위한 별궁을 지을 때 얻은 이름입니다. 북촌의 초입에 위치해 누가 보아도 요지임을 알 수 있는 이곳의 이력에 대해서 오늘 소개해 보고자 합니다.
이곳은 세종의 막내아들 영응대군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세종은 늦게 낳은 영응대군을 친히 기르며 매우 사랑하였습니다. 때가 되어 궁을 떠나야 하는 막내아들에게 한양의 최고 길지를 골라 집을 지어 주었습니다.
세종은 영응대군 집을 지을 때 집 동편에 궁(宮)을 세워 거처할 곳을 함께 마련하였는데, 말년에 풍수설의 압박 때문에 경복궁을 기피하여 이곳에서 요양하다가 승하한 곳이기도 합니다. 세종의 장례는 영응대군 집에서 치렀기에 문종은 영응대군 집에서 즉위하였으니 이곳이 역사에 남을 장소임에는 틀림이 없겠습니다.
이후 영응대군 궁가(宮家)에서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 중종의 딸 혜순옹주, 선조의 딸 정명공주로 이어져 내려옵니다. 파란만장한 삶을 산 정명공주는 이곳에서 7남1녀를 두었으며 그 후손이 번성하여 84년 동안 이 집에 거주하며 한양의 최고 갑제(甲第, 제일 좋은 저택)임을 증명하였습니다.
계속하여 숙종의 막내아들 연령군, 정조의 이복동생 은신군, 은신군에게 양자로 입적한 남연군, 철종의 생부 전계대원군의 사당으로 이어져 오다가 고종이 즉위한 후 순종의 가례를 위해 새롭게 별궁을 지은 것이 안동별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안동별궁은 1907년 칙령에 의해 여타 궁들과 함께 폐궁이 되어 나라와 운명을 같이 하였는데, 갈 곳 없던 경복궁과 창덕궁의 나인들이 옮겨와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1936년에 이르러서는 지번이 나누어지며, 민영휘 집안의 경성휘문소학교와 최창학의 대창산업 그리고 궁의 나인들 숙소로 분할되는 등 큰 변화를 겪게 되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오늘날, 경성휘문소학교는 풍문여고를 거쳐 서울공예박물관으로, 대창산업은 안국빌딩과 주변 건물들로, 북쪽의 나인들 숙소는 개인 주택과 식당으로 바뀌었습니다. 지난 600년의 세월이 이곳에 녹아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때마침 최근에 ‘열린송현 녹지광장’이 맞은편에 새로 조성되었고, 멀지 않아 ‘이건희 미술관’이 송현공원에 들어서게 되면 또 하나의 문화 탐방 명소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뜻있는 많은 분들에게 큰 즐거움을 제공하여 줄 것으로 기대됩니다.
주) 고종 때 새로 지은 ‘안동별궁’의 전각들은 1965년까지 교사로 사용되다가 1966년 운동장을 확장하면서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경연당과 현광루는 부여의 한국전통문화학교 내로 옮겨져 복원되었고, 정화당은 우이동에 위치한 메리츠화재해상보험 중앙연수원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지하철 3호선 안국역 1번 출구에서 경복궁 방향으로 조금 가다보면 2021년 7월에 옛 풍문여고 건물 5개동을 리모델링해 개관한 서울공예박물관이 있습니다. 학교의 정문이 있던 곳에 ‘안동별궁’이라는 표지석이 눈에 들어옵니다.
‘안동별궁’은 고종 때 세자인 순종의 가례를 위한 별궁을 지을 때 얻은 이름입니다. 북촌의 초입에 위치해 누가 보아도 요지임을 알 수 있는 이곳의 이력에 대해서 오늘 소개해 보고자 합니다.
이곳은 세종의 막내아들 영응대군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세종은 늦게 낳은 영응대군을 친히 기르며 매우 사랑하였습니다. 때가 되어 궁을 떠나야 하는 막내아들에게 한양의 최고 길지를 골라 집을 지어 주었습니다.
세종은 영응대군 집을 지을 때 집 동편에 궁(宮)을 세워 거처할 곳을 함께 마련하였는데, 말년에 풍수설의 압박 때문에 경복궁을 기피하여 이곳에서 요양하다가 승하한 곳이기도 합니다. 세종의 장례는 영응대군 집에서 치렀기에 문종은 영응대군 집에서 즉위하였으니 이곳이 역사에 남을 장소임에는 틀림이 없겠습니다.
이후 영응대군 궁가(宮家)에서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 중종의 딸 혜순옹주, 선조의 딸 정명공주로 이어져 내려옵니다. 파란만장한 삶을 산 정명공주는 이곳에서 7남1녀를 두었으며 그 후손이 번성하여 84년 동안 이 집에 거주하며 한양의 최고 갑제(甲第, 제일 좋은 저택)임을 증명하였습니다.
계속하여 숙종의 막내아들 연령군, 정조의 이복동생 은신군, 은신군에게 양자로 입적한 남연군, 철종의 생부 전계대원군의 사당으로 이어져 오다가 고종이 즉위한 후 순종의 가례를 위해 새롭게 별궁을 지은 것이 안동별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안동별궁은 1907년 칙령에 의해 여타 궁들과 함께 폐궁이 되어 나라와 운명을 같이 하였는데, 갈 곳 없던 경복궁과 창덕궁의 나인들이 옮겨와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1936년에 이르러서는 지번이 나누어지며, 민영휘 집안의 경성휘문소학교와 최창학의 대창산업 그리고 궁의 나인들 숙소로 분할되는 등 큰 변화를 겪게 되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오늘날, 경성휘문소학교는 풍문여고를 거쳐 서울공예박물관으로, 대창산업은 안국빌딩과 주변 건물들로, 북쪽의 나인들 숙소는 개인 주택과 식당으로 바뀌었습니다. 지난 600년의 세월이 이곳에 녹아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때마침 최근에 ‘열린송현 녹지광장’이 맞은편에 새로 조성되었고, 멀지 않아 ‘이건희 미술관’이 송현공원에 들어서게 되면 또 하나의 문화 탐방 명소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뜻있는 많은 분들에게 큰 즐거움을 제공하여 줄 것으로 기대됩니다.
주) 고종 때 새로 지은 ‘안동별궁’의 전각들은 1965년까지 교사로 사용되다가 1966년 운동장을 확장하면서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경연당과 현광루는 부여의 한국전통문화학교 내로 옮겨져 복원되었고, 정화당은 우이동에 위치한 메리츠화재해상보험 중앙연수원의 일부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