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연(世緣)이 얼마 남지 않음을 안 자장율사는
강릉에 수다사를 세우고 그곳에 주석하면서
마지막으로
문수보살을 한번 더 친견하길 서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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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어느 날 밤, 스님은
중국 오대산 북대에서 범어게(梵語揭)를 주던 범승을 꿈에 만났다.
『스님 이 밤에 어인 일이십니까? 밖이 어두우니 안으로 드시지요.』
『내일 밝은 날 대송정(지금의 한송정)에서 만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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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 잠에서 깬 자장스님은
날이 밝자마자 대송정으로 달려가 문수보살을 염했다.
『자장스님, 잘 찾아오셨군요.
소승은 문수보살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왔습니다.』
『어떤 말씀이지요?』
『태백산 갈반지에서 만나자고 하시더군요.』
『그게 언제쯤인가요?』
『그것은 스님이 선정에 들어 관해 보시면 알 것입니다.』
범승(梵僧)은
작별인사를 할 새도 없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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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자장스님은 대중을 모아놓고
「계율은 공부의 등불이니 필히 지켜 도업(道業)을 이룰 것」을 당부하고는
'갈반지'를 찾아 길을 나섰다.
태백산에 이르러 마을 사람들에게 물었으나
아무도 '갈반지'를 아는 사람은 없었다.
태백산을 헤매던 스님은 혼자 생각했다.
『'갈반지'라? 갈이란 칡을 뜻하고 반이란 소반을 말함일 텐데,
거참 묘한 지명이로구나.』
스님은 제자들에게 칡넝쿨이 있는 곳을 찾도록 지시했다.
그렇게 사흘간 산 속을 헤맨 일행은 드디어 칡넝쿨이 엉켜 있는 곳을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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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칡넝쿨 위에는 10여 마리의 구렁이가 똬리를 튼 채 엉켜 있었다.
제자들은 모두 놀라 뒤로 물러섰다.
『오! 이곳이 바로 '갈반지'로구나.
여기서 우리가 할 일은 저 구렁이들을 제도하는 일이다.
이제부터 모두 《화엄경》을 독송토록 해라.』
염불소리가 고요한 산 속에 울려 퍼지자
이상하게도 엉켜 있던 구렁이들이 스르르 몸을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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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자장스님의 꿈에 뱀이 나타나 울면서 말했다.
『스님, 저희는 전생에 불법을 공부하던 승려였지요.
수행을 게을리 하고 시물을 아까운 줄 모르고 낭비하다가
그만 뱀의 과보(果報)를 받았습니다.
그 동안 참회를 거듭하면서 큰스님이 나타나
제도해 주시길 학수고대하던 중 스님을 만났으니
몸을 바꾸도록
경을 독송하고 법문을 설하여 주옵소서.
저희는 지금부터 단식에 들어가겠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누워 있는 자리 밑에는 금은보화가 묻혀 있으니
그 재물은 절을 창건하시는 데 쓰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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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을 독송하기 7일째 되는 날,
구렁이들은 해탈하여 죽었다.
구렁이들을 화장하여 천도한 후 그 자리를 파보니
과연 금은 보화가 가득 묻혀 있었다.
자장스님은 그곳이 바로 문수보살을 친견할 인연지로 생각하고
석남원을 창건하니 그 절이 바로 오늘의 갈래산 정암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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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스님은 산정에 탑을 세우려 했으나
어찌 된 일인지 세우면 쓰러지고 또 세우면 쓰러졌다.
스님은 백일기도에 들었다.
기도가 끝나는 날 밤,
눈 덮인 산 위로 칡 세 줄기가 뻗어 내려와
지금의 수마노탑(보물 제 416호), 적별보궁, 법당자리에 멈추니
그 자리에 탑을 세웠다 하여 정암사를 속칭 갈래사라 불렀고
갈래란 지명도 생겼다.
수마노탑이란 서해 용왕이 물위로 운반하여 보낸
마노석으로 세운 탑이란 뜻에서 연유된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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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은
정암사 불사에 전력을 다하면서 문수보살을 기다렸다.
그러던 어느 날,
다 떨어진 방포를 걸친 늙은 거사가 칡 삼태기에
죽은 강아지를 담아 가지고 절 앞에 와서 자장율사를 만나기를 청했다.
괘씸하게 생각한 시봉은 한마디로 거절했다.
『우리 스님이 뉘신 줄 알기나 하고 감히 법명을 함부로 부르는 게요.
시장하여 정신이 왔다갔다하나 본데
밥이나 줄 테니 잠자코 먹고 돌아가시오.』
『웬 말이 그리 많으냐?
어서 가서 내가 자장을 만나러 왔다고 일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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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자는 늙은 거사가 하도 강경하게 말하므로
하는 수 없이 자장스님에게 사실을 전했다.
전갈을 들은 자장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잘 타일러서 보내도록 해라.』
시봉이 나와 거사를 내쫓듯 큰소리로 나무랐다.
『아상(我相)을 가진 자가 어찌 나를 보겠느냐.』
거사는 혼자 중얼거리며 삼태기를 거꾸로 쏟았다.
그러자 그 안에 들었던 죽은 강아지는
땅에 떨어지면서 큰 사자보좌로 변했고
거지노인은 사자를 타고
빛을 발하면서 허공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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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란 시자로부터 이 말을 들은 자장은 크게 탄식했다.
『참으로 나의 아상이 문수보살 친견을 막았구나. 나의 수행이 헛것이라니….』
자장은 법복으로 갈아입고
거사가 사라진 남쪽 산으로 올라갔으나 아무 흔적도 없었다.
자장은 제자들에게 말했다.
『육신으로는 문수보살을 만날 수가 없어
내 이곳에서 입정에 들어 만나 뵙고 참회할 것이니
3개월간 내 몸을 잘 보관토록 해라.』
말을 마친 자장은 조용히 바위에 앉아 입정에 들어갔다.
그 후 3개월이 되어도 신체와 안색은 평상시와 다름이 없는데
자장은 깨어나질 않았다.
대중들은 이제 그만
다비식(火葬)을 하자는 등 의견이 분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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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백일이 되는 날,
어느 스님 한 분이 와서 스승이 열반에 들었는데
왜 다비를 하지 않느냐고 호통을 쳐
제자들은 자장이 입정에 든 바위에서 다비식을 가졌다.
식이 끝나자
공중에서 자장율사의 소리가 들렸다.
『내 몸은 이미 티끌이 되었으니 의탁할 곳이 없구나.
너희들은 계에 의존하여 생사의 고해를 건너도록 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