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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유한 자가 되고 싶어서(2 사람을 향한 온유)
2024년 9월 22일 / 마 11:29-30
마 11:29-30 /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안식을 얻을 것이다. 30)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온유함의 절정은 예수님이 보여주셨다. 온갖 조롱과 멸시와 핍박을 다 견디어 내셨고 참으셨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 구하셨다. 끝까지 사랑으로 대하셨고 모든 사람을 긍휼히 여기셨다(마 11:28-30, 빌 2:5-11, 벧전 2:22-25).
이와같이 온유는 세상적인 가치관과 다르다.
세상은 남의 것을 빼앗고 자기를 자랑하고 선전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고 자기 목적을 가지고 사는 것을 당연히 생각한다.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며 사는 것이 세상 가치관ㅓ이다. 그러나 온유는 심령이 가난해지고 나서 자신이 자랑할 것이 없으며, 무능하고, 무지하며, 연약하며,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난 다음에 진실로 겸손하여진 다음에 올 수 있다. 그리고 죄 때문에 고통과 탄식가운데 있는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면서 애통한 다음에 온유가 올 수 있다. 거기서 나타나는 것이 바로 사랑이요 긍휼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웃을 정죄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랑과 긍휼로 대하기 때문에 온유함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괜찮고, 비방을 받아도 화내지 않는다. 권리를 주장하지 않는다. 그래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믿고 맡겨 드리고, 순종하며 살게 되는 것이다. 내 주장과 내 맘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먼저 구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온유함이요 바로 성령의 열매이다.
온유는 성령에 의해서 우리의 격정을 누그러뜨릴 수 있는 은혜이다. 철학자들은 덕(德)으로 부르지만 사도 바울은 은혜로 불러서 성령의 열매로 취급한다(갈 5:23). 본성적으로 우리 마음은 거친 바다와 같아서 화(火)와 노(怒)의 거품을 내뱉는다. 그때 온유함이 그 격정(激情)을 가라앉힌다. 그것은 영혼의 중재자로 앉아서 병적인 행동들을 조용하게 하고 견제를 한다. 달이 태양의 열을 완화하고 가라앉히듯이 그리스도인의 온유함은 격정(激情)의 열을 가라앉힌다.
마음의 온유함은 하나님과 사귐에 있어서도 적합할 뿐 아니라 사람과의 세속적인 교제에 있어서도 필요해서 모든 은혜 가운데서 첫째 자리를 차지한다. 온유 그 가운데에는 하나님의 아름다우심과 부드러우심이 들어있다. 그것은 신앙생활에 대한 신뢰를 가져다주며 모든 것을 이긴다.
1. 해(害)를 참는 온유
쉽게 성내지 아니하는 것이다. 젖은 불쏘시개처럼 온유한 마음에는 쉽게 불이 붙지 않는다.
시 38:12-14 / 내 목숨 노리는 자들이 올무를 놓고는 `저것을 어떻게든 괴롭혀야지. 어떻게든 고꾸라뜨려야지' 하고 벼르며 온종일 나를 해칠 궁리만 합니다. 13) 하오나 나는 아예 귀머거리가 되어 아무 소리도 듣지 않았습니다. 아예 벙어리가 되어 입 하나 벙긋하지도 않았습니다. 14 말해 보았자 듣지도 않으니 아예 대꾸조차 한마디 하지 않았습니다.
온유는 화를 내는 것에 재갈을 먹이는 것이다. 격정(激情)은 성미가 거칠고 고집이 센 데서 나오는데 온유는 이것을 억제한다. 온유는 입에 재갈을 물리고 혀를 좋은 습관으로 돌아갈 때까지 묶어놓는다. 온유는 참고 견디라는 표어를 준수한다.
온유는 네 가지에 반대한다.
1. 온유는 성급한 마음과 반대한다.
전 7:9 / 성급하게 성을 내지 말아라. 바보들이나 성깔을 부린다.
마음에 격정이 끓어오르고 화가 눈으로 불꽃을 튀기면 이것은 온유와는 거리가 멀다. 노(怒)는 지혜로운 사람에게도 잠시 있을 수 있으나 어리석은 사람에게는 그것이 항상 머문다. 화를 잘 내는 폭약과 같아서 건드리기가 무섭게 불을 뿜는다.
바질 : 성내는 것은 술 취한 것
제롬 : 포도주로 취하는 것보다 더 격정적
세네카 : 성내는 것을 짧은 발광(發狂)이라 불렀다.
그것은 때때로 이성의 사용을 보류케 한다. 가장 좋은 것은 충분히 냉정을 유지하는 것이다. 경건할 때는 얼음같이 차지만, 말다툼을 할 때는 불같이 뜨겁다. 성급한 분노가 성도들에게 얼마나 어울리지 않는가? 얼마나 보기가 흉한가?
호모 : 나는 격정(激情 : 격렬한 감정. 강렬하고 갑작스러워 누르기 힘든 감정)을 누그러뜨렸을 때는 신(神)을 닮았다. 그러나 격노할 때는 짐승 그대로였다.
얼굴이 분노로 부풀어 오르면 핏줄의 피가 검어질 것이다.
엡 4:26-27 / 혹시 분한 일을 당하더라도 원한을 품어서 죄를 짓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해가 지기 전에는 다 잊어버리고 냉정을 되찾으십시오. 27) 여러분이 화를 내면 악마에게 발붙일 기회를 주기 쉽습니다.
우리가 어떤 경우에나 화를 낼 수 없다는 말은 아니다. 거룩한 분노가 있다. 죄에 대한 분노는 죄가 없는 분노이다. 온유함과 열심히 함께 있을 수 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그리스도인들은 엘리야의 마음을 옷 입고 ‘여호와의 분노가 내게 가득’하여야 한다(렙 6:11). 그리스도는 온유하셨으나(마 11:29) 또한 열성적이셨다(요 2:15). 하나님의 집을 위한 열심히 그를 삼켰다.
카톡에 있는 글 : 화 났을때 화 내기전에 잠시 심호흡하고 간디의 이 가르침을 되새겨 보는게 좋다. 내가 옳았다면 화낼 필요없고 내가 틀렸다면 화낼 자격없다. 화내는건 잘못 아니지만, 화를 통제하지 못하는건 잘못이다. 화낼 자격이 있는가?
2. 온유는 악의와는 반대가 된다.
악의(惡意:남에게 해를 끼치려는 나쁜 마음)는 마귀의 모습이다. 악의는 정신적인 살인이다. 악의에 찬 사람에게 어떻게 주기도문을 할 수 있느냐를 물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사람을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부분을 빼고 한다고 하였다. 어거스틴은 이 사실에 대해 하나님의 응답을 이렇게 말했다. ‘네가 내 기도를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내가 너를 듣지 않겠다.’ 사람이 먹는 것마다 독으로 바뀐다면 얼마나 슬픈 심판인가? 악의에 찬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이 모두 독으로 바뀐다. 주님의 식탁이 올무가 되고 그는 자신의 저주를 먹고 산다.
3. 온유는 보복과 반대가 된다.
보복은 악의에 가득 찬 사람이 마귀를 위하여 조리한 맛있는 고기이다. 성경은 보복을 금하고 있다.
롬 12:19 /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스스로 복수하려 하지 말고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원수 갚는 일은 내가 할 일이니 내게 맡기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신 32:35).
보복하는 자는 원수를 갚으시는 하나님의 권리를 빼앗는 일이다. 마귀와 싸우는 일과 자신과 싸우는 일은 합법적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과의 결투는 불법이다.
잠 19:11 / 슬기로운 사람은 분통터지는 일이 일어나도 속으로 삭이고, 이웃이 잘못한 일 있다 해도 그 허물 덮어 주어 동네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는다.
자기 방어는 그리스도인의 온유와 모순되지 않는다. 자연의 법과 종교의 법이 정당하다고 본다. 판사가 유죄 판결을 내려 벌 주는 것은 보복이 아니라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다. 땅에서의 하나님의 보조자이다. 비록 개개인이 악을 악으로 갚도록 두어서는 안 되지만(롬 12:17) 치안판사는 범죄의 악을 형벌의 악으로 다스릴 수 있다.
4. 온유는 악한 말과 반대가 된다.
우리의 말은 부드럽게 흐르는 실로암의 물과 같이 온화해야 한다. 많은 사람의 혀가 불붙는데 그것은 마귀가 성냥불을 켜는 것이다. 사람들은 옛뱀에서 은혜롭지 못한 욕설로 서로 독을 내뿜는 것을 배웠다.
마 5:22 / 그러나 나는 이 조문에 덧붙여 말한다. 까닭없이 형제에게 화내는 자는 심판받을 것이며, 어리석다고 욕하는 자는 법정에 끌려갈 것이며, 형제를 저주하는 자는 지옥불 속에 던져질 것이다.
유 1:9 / 천사들 가운데서 최고의 권위를 가졌던 미가엘도 모세의 시신을 두고 마귀와 논쟁할 때 그 마귀를 비난하거나 조롱하지 않고 '주께서 너를 꾸짖으실 것이다'라고만 말하였습니다.
벧전 3:9 / 손해를 입었다고 해서 보복을 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축복해 주십시오. 친절하지 못한 말을 들었다고 해서 퉁명스럽게 쏘아붙이지 마십시오. 그렇게 하기보다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도와주기를 기도하십시오. 누구에게나 친절하게 대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복을 내려 주실 것입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다른 사람을 헐뜯어서는 안 되지만 바울이 베스도에게 함같이 변명할 수 있다(행 26:25 / 그러자 바울이 대답하였다. `저는 미친 것이 아닙니다. 베스도 총독 각하, 저는 다만 진리를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2. 해 받음을 용서하는 온유
막 11:25 / 그러나 너희가 기도할 때에 어떤 사람과 서로 등진 일이 생각나거든 그를 먼저 용서하라. 그래야만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도 너희 죄를 용서하여 주실 것이다.
그를 용서하기 전에는 기도에 별로 효과가 없다. 온유한 마음은 용서의 마음이다. 사람들은 친절은 잊어버리지만 해를 입은 것은 기억한다. 우리는 용서하되 하나님께서 용서하신 것처럼 해야 한다.
* 용서는 실제적이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용서하는 시늉만 하시고 우리의 죄를 그대로 잡고 계시지 않는다. 우리의 죄를 도말하신다(사 43:25 / 과연 나는 너희에게 아무런 의무도 없으나 내가 자진하여 네 모든 죄악을 덮어 주고 네 허물을 더 이상 기억하지 않겠다.). 대사면령을 내리신다(렘 31:34 / 그러면 아무도 다른 사람을 훈계할 필요가 없고 아무도 자기 형제에게 `주님을 알고 두려워하여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때에는 가장 친한 사람에서 가장 존귀한 사람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이 내가 누구인가를 알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모든 사람이 나를 알 때가 오면 나도 모든 인간의 불순종과 반역을 용서하고 더 이상 인간의 악행과 허물을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내가 온 세상의 주인으로서 하는 말이다.'). 그분은 용서하시고 잊어버리신다. 용서하는 모양을 보일 뿐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여야 한다.
* 용서는 완전히 하여야 한다.
우리의 죄를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사해 주셨다.
시 103:3 / 주께서 내가 지은 모든 허물 용서하셨다. 이것 몸에 생긴 병 모두 다 고쳐 주셨다.
얼마쯤의 허물은 덮어주지만 다른 것은 그대로 가슴에 품고 산다면 반(半) 용서에 불과하다. 얼마쯤의 허물은 덮어주지만 다른 것은 그대로 가슴에 품고 산다면 반 용서에 불과하다. 하나님께서도 당신에게 그렇게 해주시기를 원하는가?
* 하나님은 자주 용서하신다.
우리는 죄를 자주 짓는다. 우리는 날마다 새로운 기록의 죄를 남기지만 하나님은 자주 용서하신다. 그래서 큰 긍휼이라고 말한다(사 55:7 / 여호와께 반대하고 자기 생각대로만 산 사람은 이제 그 길에서 떠나 여호와께로 돌아오너라. 여호와께서는 얼마든지 그런 사람도 다시 받아주실 것이다. 주께서 넓은 마음으로 용서하여 주실 것이다.). 온유한 사람은 한 용서를 한 후에도 다른 용서를 계속해 보낸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궁금하여 질문하였다.
마 18:21 / [용서의 교훈] 그때 베드로가 예수께 와서 물었다. `주님, 형제가 제게 죄를 지었을 경우에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용서하면 되겠습니까?'
예수님의 대답은 일곱 번 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하라고 하셨다. 당신이 용서할 수 없다고 말한다면 당신의 죄를 생각해 보라. 당신의 이웃이 당신에게 과오를 범할 때에는 사람에 대하여 짓는 것이지만 당신이 그를 용서하기를 거절한다면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이다. 당신이 만일 오늘 밤에 죽는다면 당신은 용서받지 못한 상태에서 죽는 것이다.
마 6:15 / 그러나 만일 너희가 그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시지 않을 것이다.
3. 악을 선으로 갚는 용서
마 5:44 /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원수를 사랑하라! 너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라!
높은 수준의 사랑으로 이끄신다.
롬 12:20 / 오히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 하거든 마실 것을 주십시오. 그렇게 하면 그는 자신이 해온 일을 생각하고 부끄러워 머리 위에 숯불을 올려놓은 것처럼 얼굴이 화끈거릴 것입니다.
벧전 3:9-11 / 손해를 입었다고 해서 보복을 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축복해 주십시오. 친절하지 못한 말을 들었다고 해서 퉁명스럽게 쏘아붙이지 마십시오. 그렇게 하기보다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도와주기를 기도하십시오. 누구에게나 친절하게 대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복을 내려 주실 것입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10) `장수하며 복된 나날을 살고 싶으냐? 혀를 함부로 놀려 악을 짓지 말며, 입을 벌려 거짓을 꾸미지 말아라. 11) 악을 멀리하고 선을 쌓으며 평화를 이루는 데 힘을 다하여라.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은 짐승같은 것이고, 선을 선으로 갚는 것은 마귀적이고, 악을 선으로 갚는 것은 그리스도인이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는 은혜가 마음에 들어올 때 그것은 이상한 변화를 가져온다. 돌 감람나무가 참 감람나무에 접붙이면 좋은 열매를 맺는다. 그러므로 한 때 돌 감람나무의 성질을 가져 앙갚음이나 하던 사람도 하늘 감람나무의 수액에 한 번 참례(參禮)하게 되면 그는 너그러운 열매를 맺는다. 원수에 대한 사랑이 가득하게 된다.
4. 온유는 참 성도의 특징을 보여준다.
그는 쉽게 성을 내지 않는다. 그는 모든 것을 선의로 해석하고 악을 부드러움으로 정복한다. 하나님께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하는 사람은 이 은혜로 번쩍거려야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복을 입을 때 그리스도께 속한 자로 알려진다. 성품이 너무 온유하게 되어 편협(偏狹)한 생각을 질식시켜 버릴 수 있고 불친절을 묻어버릴 수 있는 사람이 성도이다. 눈물을 잘 흘리는 사람이 노(怒)를 잘 내는 사람보다 더 빨리 그리스도인이 된다. 모든 성도는 그리스도의 신부이다(아 4:8). 온유하게 되는 것이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는 길이다. 만일 신부에게 어떤 해가 가해지면 그녀는 자기 신랑에게 복수를 맡길 것이다. 그리스도의 신부가 주먹으로 치는 것은 보기에 흉하다.
5. 그리스도인이 온유해야 할 이유
골 3:12-14 / 여러분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고 새 생명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깊은 사랑과 배려를 입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에게 따뜻하고 친절하게 대하십시오. 겸손하게 온유와 인내로 13) 관용을 베풀어 언제나 남을 용서하고 원한을 품지 마십시오. 주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을 기억하고 여러분도 다른 사람을 용서하십시오. 14)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사랑에 넘치는 생활을 하는 일입니다. 사랑은 모두를 완전하게 하나로 묶어 주는 띠입니다.
옷처럼 그것을 입고 결코 몸에서 벗어버리지 말라. 온유는 모든 것의 필수 요소이다. 그것은 훈육에도 필요하다.
딤후 2:25 / 진리를 거역하는 사람들을 가르칠 때는 겸손한 마음으로 대하시오. 만일 그대가 온유한 태도로 따뜻하게 가르친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도움으로 자기들의 잘못을 뉘우치고 진리를 믿게 될 것입니다.
온유는 진리를 거스르는 자들을 정복한다. 온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데도 필요하다.
약 1:21 / 그러므로 더러운 것이나 악한 것은 모두 다 제거하여 버리고, 우리가 받아들인 놀라운 하나님의 말씀에 기쁜 마음으로 순종하십시오. 그 말씀은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아 우리를 구원할 능력이 있습니다.
격정, 편견을 가지고 말씀에 접근하는 사람은 좋은 것은 아무 것도 얻지 못하고 마음만 다칠 뿐이다. 그는 음료수를 독약으로 바꾸고 성령의 검으로 스스로를 찌른다. 온유는 꾸중할 때도 필요하다.
갈 6:1 /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만일 어떤 그리스도인이 죄에 빠져 있거든 성령을 따라 사는 여러분이 부드럽고 겸손한 마음으로 그를 도와 바른길로 돌아오게 하십시오. 그리고 혹시 여러분 자신도 악한 길에 빠져 들지 않을까 늘 주의하십시오.
헬라어의 뜻은 ‘뼈를 제 위치에 도로 집어넣는다’는 뜻이다. 어떤 형제가 실수로 잘못을 저질렀을 때 맹렬하게 덤벼들 것이 아니라 온유한 마음으로 그를 고치려고 노력하여야 한다.
6. 온유를 완성하자.
1. 온유의 본보기가 있다.
* 예수님의 본보기
마 21:5 / `너 시온성아, 기뻐 뛰어라! 너희 예루살렘 시민들아, 환호성을 올려라! 보아라. 네 왕께서 네게로 오실 것이다. 그분은 의로우시고 노련한 해방자이시다. 그런데도 겸비하여 나귀를 타고 오신다. 잡종도 아니고 전투용도 아닌 새끼 나귀를 타고 오신다.'
그리스도는 온유의 견본이자 모형이시다.
벧전 2:23 / 욕을 당해도 욕하시지 않고 고난을 받아도 보복하시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손에 모든 것을 맡기셨습니다.
그의 원수들의 말은 쓸개보다 썼지만 그리스도의 말은 기름보다 더 부드러웠다. 그는 원수들을 위해 기도하시고 우셨다.
마 11:29 /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안식을 얻을 것이다.
기적을 배우라는 말씀을 안 하셨지만 온유를 배우라 하셨다.
기독교인에게 허용된 '혐오(嫌惡)'는 없다.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큰 무리가 칼과 몽치를 가지고 유다를 앞세워 예수님과 일행을 잡으러 왔다. 함께 있던 베드로가 “주님, 저희가 칼로 쳐 버릴까요?”하고는 말고의 오른쪽 귀를 내리쳐 떨어뜨렸다. 예수께서는 일러 이르시되 “이것까지 참으라.” 하시고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셨다.
예수님의 행적을 따라가며 우리가 분명히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은 결코 하나님께로부터 허락된 권능을 사사로운 분노와 증오의 수단으로 사용하지 않으셨다’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무장한 병사들의 힘에 맞서 칼을 쓰고자 했던 베드로에게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하시더라?”라고 반문도 하셨다. 쓸 수 있는 힘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그 방법이 예수님의 방법이 아니었다.
* 성도들의 본보기
모세는 비길 데 없이 온유한 사람이다.
민 12:3 / 모세는 이 말을 듣고도 아무 대꾸를 하지 않았다. 이는 그가 무척 온유(겸손)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겸손(온유)한 사람은 세상에 없었다.
이스라엘 백성이 불평을 털어놓을 때 그는 분노를 터트리는 대신 그들을 위해 기도하였다. 그들은 폭풍 속에 있었으나 모세는 고요 속에 있었다. 엘리야의 마음이 엘리사에게 있었던 것처럼, 땅 위의 천사라 할 모세의 마음이 우리에게 머물렀으면!
다윗의 온유함 역시 흠모해야 한다. 시므이가 다윗을 저주했을 때 아비새가 그의 목을 자르려 했다. 다윗은 오히려 그의 죽음을 막고 저로 저주하게 버려두라 했다(삼하 16:11). 사울왕의 진지에 밤에 돌입하여 원수 사울 왕을 죽일 수 있는 때에도 하나님께서 심판자가 되어 주시기를 맡기고 물병만 가지고 돌아왔다(삼상 26:12). 의 손에 피를 대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심판이 악인들에게 내려졌다.
■ 바보 같은 삶 그러나 빛이 된 삶 / 누군가 당신께 ‘바보’라고 하면 어떤 기분이 들까? 기분 나쁘고, 자존심 상하고, 불쾌할 것이다. 그런데, 평생 바보라는 소리를 듣고 살았지만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았으며, <바보 같은 삶>이 오히려 <성공한 삶>이라는 말을 듣는 사람이 있다. 의사였지만 집 한 채 없이 평생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며 겸손한 삶을 사셨던 한 분의 이야기이다. 바보 의사, 장기려(張起呂) 박사 이야기이다. “제가 밤에 뒷문을 열어 놓을 테니 어서 집으로 가세요.” 장기려 박사는 어느 생활이 어려운 사람이 병원에 입원해있다가 퇴원해야 하는데 돈이 없어 막막해하고 있을 때 이를 눈치채고는 병원 뒷문으로 몰래 빠져나가게 해 주었다. “이 환자에게는 닭 두 마리 값을 내주시오. – 원장” 병이 나으려면 무엇보다 잘 먹어야 하는 환자에게 장기려 박사가 써준 처방전이다. 서울대, 부산대 의대 교수, 부산 복음병원 원장을 지냈지만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에게는 방 한 칸 없었다. 자신의 소유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모두 나누어 주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종종 그를 이렇게 불렀다. 바보... 그는 “바보라는 말을 들으면 그 인생은 성공한 것이다. 그리고 인생의 승리는 사랑하는 자에게 있다.”라고 말했다. 그는 철저히 청지기의 삶을 살았고, 주님만을 섬기며 겸손하게 살았다. 그는 평생 가난했지만 다른 사람들을 부유하게 했고, 집 한 채 없었지만 사람들에게 따뜻한 사랑을 베풀었고, 뇌경색으로 반신이 마비될 때까지 무의촌 진료를 다녔다. 그는 자신 드러내기를 싫어했고, 자신이 칭송받는 것을 싫어했고, 오직 주님을 높이고 섬기기를 좋아했다. 그는 이웃과 나누며 가난하게 살았다. 아내에 대한 그의 극진한 사랑은 육체나, 환경을 초월한 영혼과 영원의 사랑이었다.
1950년 12월 평양 의대 병원 2층 수술실에서 그가 밤새워 가며 부상한 국군장병들을 수술하고 있을 때 갑자기 폭탄이 병원 3층에 떨어졌다. 국군들은 모두 재빨리 철수해야 했다. 그 바람에 그는 사랑하는 아내와 생이별하게 되었고, 일평생 빛바랜 가족사진 한 장을 가슴에 품고 아내를 그리워하며 살아야 했다. 주변 사람들이 그에게 재혼을 권했으나 그는 언제나 똑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한번 사랑은 영원한 사랑입니다. 나는 한 여인만을 사랑하기로 이미 약속했습니다. 나는 사랑하는 나의 아내와 영원히 살기 위해서 잠시 그저 혼자 살겠습니다!" 그가 부인을 그리며 1990년에 쓴 망향 편지는 우리의 가슴을 에는 듯한다.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당신인 듯하여 잠을 깨었소. 그럴 리가 없지만, 혹시 하는 마음에 달려가 문을 열어 봤으나 그저 캄캄한 어둠 뿐… 허탈한 마음을 주체하지 못해 불을 밝히고 이 편지를 씁니다.>
미국에서 북한을 많이 도운 그의 제자가 북한당국과 합의하여 중국에서 장기려 부부를 만날 수 있도록 주선했다. 그러나, 그는 기어코 그 기회를 사양하였다. 그런 특권을 누리면 다른 이산가족의 슬픔이 더 커진다는 이유였다. 그는 결국 빛바랜 사진을 보며 아내를 그리워하다가 만나지 못하고 1995년 12월 25일 성탄절 새벽 1시 45분 85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셨다. 그때 한국의 언론은 ‘한국의 슈바이처’ 또는 ‘살아있는 작은 예수’가 우리 곁을 떠났다고 아쉬워했다. 그는 어두운 밤과 같은 그 시대에 밝은 빛을 비추며 주님과 병든 사람들을 섬기면서 겸손하고 가난하고 따뜻하게 사신 분이었다. 그가 죽기 전에 남긴 유언은... “내가 죽고 나거든 나의 비문에는 ‘주를 섬기면서 살다 간 사람’이라고 적어달라”는 것이었다. 장기려 박사님처럼, 바보처럼 사는 삶, 많은 사람이 장기려 박사님을 존경하고, 칭찬하나 과연 그런 삶을 살 수 있을까?
2. 온유는 그리스도인의 의의 옷에 장식품이다.
벧전 3:3-4 / 보석이나 화려한 옷이나 머리 단장 등으로 외모를 아름답게 보이려고 열중하지 마십시오. 4) 오히려 온유하고 조용한 마음의 소유자가 되어 언제까지나 퇴색하지 않는 매력으로 내면을 아름답게 장식하십시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가장 값진 것입니다.
성도가 이 보석으로 꾸밀 때 하나님의 눈에 얼마나 붙임성 있는 모습일까? 아무 의복도 온유보다 그리스도인들에게 더 어울리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이 의복을 입으라고 명령을 받는 것이다.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으라(골 3:12). 온유는 신앙생활에 명예를 가져오고 악을 잠재운다.
3. 온유는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를 성나게 하시는 자들에게도 온유하시다. 하나님의 이름을 찢어놓고 그의 성령을 괴롭게 하고 그의 아들을 다시 못 박고 있다. 그럼에도 아무도 멸망당하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벧후 3:9). 하나님이 죄인들을 박살내시고 지옥으로 던지시는 것이 얼마나 쉬운 일인가? 그분은 위엄으로 가득 차 있으시지만 온유로도 가득 차시다. 온유가 결핍되면 사람답지 않지만 우리가 온유하면 하나님을 닮는다.
4. 온유는 고상하고 훌륭한 마음을 입증한다.
온유한 사람은 용맹스러운 사람이다. 그는 자신과 싸워 이긴다. 격정(激情)은 우둔하고 약한 사람들에게서 일어난다. 격노를 정복할 수 있는 사람은 강하고 승리를 자랑할 수 있는 사람이다.
잠 16:32 / 쉽사리 화내지 않는 이는 용사보다 더 낫고, 자기 마음을 잘 다스리는 이는 성을 빼앗는 장군보다 더 낫다.
격정을 따라가는 일은 부패한 본성의 물결을 따라 헤엄치는 것이다. 그러나 본성에 대항해서 돌아서는 것, 격정의 마음을 억누르는 것, 이것이 선으로 악을 정복하는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다운 것이다. 영적인 기사도이다.
5. 온유는 원수의 마음을 녹이고 정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다윗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위치에 사울이 누웠는데도, 다윗이 다만 그의 옷자락만 베었을 때 사울이 다윗에 대해 얼마나 감동되었을까?
삼상 24:17 / 다윗이 말을 끝마치자 사울은 `내 아들 다윗아! 이것이 정말 네 목소리냐?' 하고 묻더니 큰소리로 울기 시작하였다.
한 방도 쏘지 않고 이기는 것은 가장 큰 승리가 된다. 온유한 그리스도인은 심지어 그들의 대적으로부터도 감사장을 받는다. 이스라엘 왕이 포로로 잡아 온 포로들에게 잔치를 베풀었을 때 그들은 그들의 칼보다 그의 온유에 정복되었다. 이로부터 아람군사의 부대가 다시는 이스라엘 땅에 들어오지 못하였다(왕하 6:23).
6. 온유하지 못한 자의 재난을 생각하라.
분노와 성냄은 마귀가 마음속으로 들어올 여지를 주고 그것을 차지해 버리도록 방치하는 것이다. 화를 잘 내는 사람은 마귀와 한 집에 있거나 한 침대를 쓰는 자이다. 격정은 영혼을 어지럽게 만든다. 이성을 흐리게 할 뿐 아니라 양심을 흩트려 놓는다. 격정이 사로잡고 있는 사람은 자신을 사로잡지 못한다. 분노는 성령님을 슬프게 하고 성령님은 결국 떠나신다. 우리는 연기가 가득한 집에 머물기를 원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성령님도 병적이고 격정의 수증기와 연기가 가득한 마음에 계시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7. 선으로 갚으시는 하나님의 손을 보라.
시므이가 왕을 저주할 때 다윗이 다 받아들인 이유가 있다.
삼하 16:10-12 / 그러나 다윗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스루야의 아들들아, 왜 나의 일에 그토록 간섭을 하느냐? 가서 나를 저주하라고 그에게 명령을 내리신 분이 바로 여호와이시라면 누가 감히 그를 책망하고 벌을 내릴 수가 있겠느냐?’ 11) 그리고 다윗이 끝으로 아비새와 모든 신하들에게 이런 말을 하였다. ‘내 몸에서 태어난 아들도 지금 나를 죽이려고 하는데 하물며 베냐민 사람이야 더 말하여 무엇하겠소?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를 저주하라고 책임 맡겨 주신 것이니 계속 욕하고 저주하게 내버려 두시오! 12) 내가 지금 이 수모를 그대로 다 받으면 여호와께서 혹시 나의 비참한 모습을 보시고 시므이의 모든 저주를 축복으로 바꾸어 주실는지 누가 압니까?’
사람들은 흔히 돌을 던진 손은 보지 않고 돌멩이에 으르렁거리는 어리석은 잡종개와 같다.
욥은 그의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을 눈 여겨 바라보았고 그것이 그의 마음을 온유하게 하였다.
욥 1:21 / 이렇게 말하였다. ‘어머니 뱃속에서 빈몸으로 나온 이 몸 다시 빈몸으로 돌아갈지라. 여호와께서 주셨으니 가져가지는 분도 여호와시라. 오직 여호와만이 찬양받으실지라.’
예수님도 십자가를 지심이 빌라도나 유다 때문이라 보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았다.
요 18:11 / 그러자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네 칼을 칼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이 잔을 어찌 마시지 않을 수 있겠느냐?’
보통 주님께서 우리에게 현저한 은혜를 베푸시고자 할 때에는 어떤 두드러진 시험을 하신다. 모세의 손이 구원의 사역을 하기 전에 나병이 들었던 것처럼 말이다(출 4:6).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고요히 기다려야 한다.
8. 온유함이 모자라는 것은 은혜가 모자람을 입증한다.
참된 은혜는 사랑을 불타오르게 하고 분노를 가라앉힌다. 은혜는 거친 쇠를 부드럽게 갈아주는 줄과 같다. 그것은 사람의 아므의 거칠게 튀어나온 것을 줄로 갈아 없앤다. 은혜는 그리스도께서 성난 파도를 향하여 ‘잠잠하라 고요하라’(막 4:39) 말씀하신 것처럼 마음에다 말한다. 그러므로 마음에 은혜가 있으면 그것은 격정의 분노를 가라앉힌다. 계속해서 미쳐서 날 뛰면서 분노와 사악의 고삐를 풀어놓는 사람은 결코 달콤한 은혜의 효과를 느끼지 못한 사람이다. ‘무자비’는 이방인의 죄 중에 하나였다(롬 1:31). 마귀의 마음이다. 옛 뱀은 악독과 복수의 독을 뿜어낸다.
9. 노여움을 극복할 수 없다면 고침받기를 싫어하는 사람이다.
잠 22:24 / 화를 잘내는 사람과는 사귀지도 말며 성질 급한 사람과도 같이 다니지 말아라.
분노에 가득한 마귀를 잠재우지 못한다면, 그런 사람과도 친분을 가져서도 안 된다. 뱀을 가슴속으로 끌어들이는 것과 같다. 일단 거리를 두어야 할 사람을 분별하자. 이런 변명도 내밀고 싶어한다. ‘그것은 내 본성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성깔 사나운 본성이다’ 아니다. 당신은 하나님께 잘못 덤벼들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그런 본성을 주시지 아니했다.
전 7:29 / 내 모든 연구를 종합하건대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단순하고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인간은 온갖 수단과 음모를 꾸며내고 있다.
하나님은 당신을 곧게 만드셨으나 당신 스스로가 당신을 굽게 한 것이다. 원래 좋은 본성을 주셨음에 감사하라. 본성의 샘은 죄가 독약을 풀어놓기 전에는 순수하였다. 본성이 나빴으니 내 행동도 나빠도 된다는 변명이 성립될 수 있을까? 당신은 그리스도 안에서 얼마든지 천사의 모습으로 바뀌질 수 있다.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고전 15:50).
10. 거룩한 분노도 있다.
모세는 430년 동안 애굽의 종살이를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시키는 위대한 지도자가 되었다. 백성들이 자기를 향해 불평을 하고 불만을 품어도 노를 발하지 않았다. 언제나 부드럽고 유순하게 대했다. 그들의 형편을 이해하고 그들의 편에 서서 하나님께 기도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나님께서 모세를 시내산으로 부르시고, 두 돌판에 십계명을 적어주셨다.
모세가 기쁜 마음으로 그 돌판을 들고 백성들이 있는 곳으로 내려갔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황금 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그 앞에 절하고, 먹고 마시고 춤추며 광란의 축제를 벌이고 있었다. 모세가, 나 외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말고,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말씀이 적힌 십계명을 들고 내려오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황금 송아지를 만들어 절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모세는 분노했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장 온유하다고 칭찬하신 모세가 분노했다. ‘크게 노하여 손에서 그 판들을 산 아래로 던져 깨뜨리니라. 모세가 그들이 만든 송아지를 가져다가 불살라 부수어 가루를 만들어 물에 뿌려 이스라엘 자손에게 마시게 하니라’(출 32:19-20). 이 말씀만 놓고 본다면, 모세는 유순하거나 조용한 성품이 아니다. 그는 거칠고 분노하고 공격적인 성품을 지녔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모세가 세상에서 가장 온유한 사람이라고 하셨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셨다. 예수님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마 11:29)라고 말씀하실 만큼 한결같이 온유하셨다. 특히 가난하고 헐벗은 사람들, 소외된 세리와 병든 자들, 죄인 취급을 받던 창기와 사마리아인들에 대해서 한없이 부드러우셨고 풍성한 사랑을 베푸셨다. 더러운 제자들의 발을 닦아주실 정도로 친절하셨고, 사회적으로 약자에 대해서는 놀라울 만큼 부드러우셨다. 그러나 예수님이 언제나 부드럽고 유순하셨던 것은 아니다.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요 2:13-15). 유월절은 유대인 최고의 절기로, 각처에 흩어져 있던 수십만 명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찾아와 유월절을 지킨다. 그러니 당시에 예루살렘 성전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있었겠는가? 그런데 예수님이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양과 소를 내쫓으시고, 돈을 쏟아버리시고, 상을 엎으셨으니, 성전이 일대 아수라장이 되었을 것이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보았을 때, 행패도 그런 행패가 없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스스로 나는 마음이 온유하니 내게 배우라고 하셨다.
모세와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는 온유한 사람이 단순히 성품이 조용하고 부드러운 사람이 아님을 알 수가 있다. 때로는 분노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 때나 화를 내거나 분노하는 사람이 아니다. 자기 자존심이 상했다고 해서, 경쟁에서 뒤졌다고 해서, 기분이 나쁘다고 해서 분노하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일 수 없다. 참으로 온유한 사람은 하나님이 무시당할 때, 하나님의 뜻이 손상될 때, 하나님의 집이 더럽혀질 때 분노하는 사람이다. 이것을 거룩한 분노라고 한다.
온유한 사람은 거룩한 분노를 발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교회가 상처를 입었을 때, 하나님의 뜻이 위기에 처했을 때, 분연히 일어설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일제 시대에 신사참배의 강요를 당했을 때, 조용히 고분고분하게 군소리 없이 신사를 향해 절했던 사람들이 온유한 사람이 아니라, 신사참배를 극렬히 거부하고 항거했던 주기철 목사, 손양원 목사 같은 분들이 참으로 온유한 사람들이다.
3. 온유한 자는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
악인은 그가 잡은 행운 때문에 오히려 병들었다. 오염된 공기 속에 사람처럼 기름진 땅을 가짐이 죄를 확대시켜 나간다. 땅의 축복을 누릴만한 심령을 가지지 못할 때 땅의 평안은 이미 손실된 것이다. 그러나 오직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시 37:11).
온유한 자는 땅을 잠시 동안 머무는 집으로 소유할 뿐만 아니라 천국은 그들의 영원한 머물 집으로 소유하게 된다. 온유는 신앙생활을 아름답게 장식해 주고 하나님은 구원으로, 그들을 아름답게 꾸며 줄 것이다. 온유한 자는 구원을 수놓은 왕의 옷을 입을 것이다. 온유한 자는 그에 해당하는 축복된 삶을 살기 때문에 땅의 소유주가 되고 구원의 상속자가 된다. 구약의 성도들이 약속에 따라 가나안 땅에 들어간 것 같이 새 하늘과 새 땅의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됨을 약속하신다. 세상에서는 강한 자들이 질서를 떠나 땅을 많이 소유하지만 더 좋은 하늘나라의 소유권은 다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자들의 것이다. 하늘의 상속권자들이다.
모세의 온유함(민 12:3)의 인도로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을 차지하였고, 예수님의 온유함과 겸손으로(마 11:29) 우리도 하나님의 나라를 차지하는 영광을 누리게 될 수 있다. 바울은 날마다 자기를 죽이는 온유의 투쟁으로 예루살렘으로부터 일루리곤까지의 땅(롬 15:19)을 복음으로 점령하여 그 땅을 하나님의 왕국으로 만들었다. 세상에서는 땅 한 평 없는 바울이지만 복음의 땅을 넓히므로 하나님의 왕국을 건설한 상급을 받게 된 것이다. 땅 중에 가장 광활한 땅은 마음일 것이다. 땅의 가치는 많이 가지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고 얼마나 많은 것을 경작하여 생산을 내는가에 부의 가치가 있을 것이다. 마음에서 모든 창조적인 생각도 생산하고 사악한 사람이 될 수도 있고 또 구원받는 작업도 한다. 사도 바울은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시키는(고후 10:5) 일에 성공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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