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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봉은사, 그리고 <판전板殿>이야기 - 유홍준
(1)
나는 엄밀히 말해서 불자가 아니지만 나의 어머니와 집사람은 불교에 대한 신심이 독실해서 불교 집안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그런 중 나의 집사람은 일찍이 봉은사에서 천일기도를 올리고 구역법회의 법륜보살까지 지냈고, 몇 해 전에 돌아가신 선친의 49제를 역시 봉은사에서 올렸으니 봉은사와 나와의 인연은 만만치 않은 셈이다.
그리고 문화재청장에 부임하면서 나는 봉은사와 또 다른 인연이 생겼다. 문화재청장으로서 우리나라의 사찰 어느 하나 소중히 생각하지 않을 곳이 있으리오마는 조선왕조의 궁궐과 왕릉을 직접 관리하는 입장이고 보니 왕릉을 위해 창건된 조선왕실의, 3대 원찰(願刹)에 대해서는 각별한 마음이 없을 수 없는데, 그것은 세조대왕의 능인 광릉(光陵)을 위해 창건된 봉선사(奉先寺), 사도세자의 능인 융릉(隆陵)을 위한 용주사(龍珠寺), 그리고 또 하나가 성종대왕의 능인 선릉(宣陵)을 위한 봉은사(奉恩寺)이니 이것이 나를 봉은사에 얽어 묶는 인연의 끈이 되었다.
게다가 명진(明盡) 스님이 얼마 전 봉은사의 주지 스님으로 오셨으니 나로서는 이제 더 자주 봉은사로 회사하는 일이 많아질 수밖에 없게 되었다. 내가 명진스님을 처음 만난 것은 당신께서 개운사에 계실 때였으니 20년도 더 된다.
이후 명진당은 어지럽기 그지없었던 80년대에 어떤 때는 유유히 인사동에 나타나 장안의 반듯한 문인묵객(文人墨客)에, 설객(說客)과 정객(政客), 거기에 덧붙여 오갈 때 없는 식객(食客)들에게 많은 감화를 주곤 했는데 그 때 나는 그 많은 객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어느날 홀연히 희양산 봉암사에 들어가 꼭 무문관(無門關)에 있듯 할 때와 불교계의 개혁 흐름이 일어나자 거기에 온몸을 던지고는 표표히 사라졌을 때는 연락할 길도 끊겨 마음으로만 먼 인사를 나누었다.
그러나 그는 누가 연락했는지 꼭 있어야 할 자리에는 귀신같이 나타나 그 맑은 미소와 게송같은 유모어로 자신의 할 말을 다하곤 하여 그의 지기들은 다같이 소중히 생각하는 그런 스님으로 나와 내 주위 사람들에게 각인되어 있다.
몇 해 전 나의 선친이 돌아가셨을 때 어떻게 알고 왔는지 발인 전날 밤에 장례식장으로 문상을 와 마음으로 고맙고 반갑기 그지 없었는데, 나의 막내 여동생이 나에게 와서 “오빠, 지금 오신 스님이 누구야?”하고 묻는 것이었다. 그래서 “왜?”하고 되물으니 저 스님이 객실로 들어가시니까 오빠 친구 교수, 시인, 소설가, 국회의원, 장관 모두가 다 일어나서 인사하더라구. 나는 생전 처음 봤어, 모두 다 일어났다구,“ 그래서 나는 속으로 ‘’온갖 잡객들이 명진당 앞에선 그런단다.‘라는 뜻으로 웃어 보이며 대답에 대신했다.
그런 명진 스님이 봉은사 주지로 부임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가 봐야지 하며 전화 인사도 미루던 중 한 달이 넘어도 시간이 잘 나지 않아 일단 전화부터 하고 봐야겠기에 전화를 걸어 대짜고짜 “내가 원하는 분이 주지로 왔으니 건의부터 합시다. 우선 봉은사에 나무 좀 심으십시오, 도심 사찰일수록 산사다운 나무가 있어야지”라고 했더니 명진스님은 “어쩌면 내 생각과 그리도 같소. 당장 와 보시오. 여태껏 내가 한 일이라곤 천일기도 드리고 나무 심은것밖에 없소이다.” 그 답에 반갑기 그지없어 그 주말에 집사람과 함께 가 보고 어찌나 많은 나무들을 심었는지 반갑고 고마워 나는 즉석에서 백송나무 두 그루를 시주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그 답례로 돌아온 것이 이 글을 써달라고 원고 청탁하여 이 원고를 쓰고 있는 것이다. 당신이 내 맘에 드는 일을 했으니 이번엔 당신 마음에 드는 일을 부탁하는 것이라나 .
(2)
그런 이야기들은 다 객담에 속하는 것이고 내가 봉은사와 진작부터 깊은 인연을 맺어 다 무너진 수도산(修道山) 자락의 산사 아닌 도심 절간을 해마다 몇 번씩 찾아가 선불장(選佛場), 대웅전(大雄殿), 판전(板殿)을 배회하듯 거닐었던 것은 저 유명한 <판전> 현판 때문이었다. 추사 김정희의 일대기인 <완당평전(阮堂評傳)>을 구상하면서 더욱 발길이 잦아 졌다.
추사의 일생에서 봉은사가 차지하는 비중은 막중한 것이었다. 또 추사의 작품 세계에서 <판전>이 찾이하는 위치 또한 확고부동한 것이다. 그 이야기를 시작하겠다.
추사 김정희의 파란만장한 70평생에는 몇 번의 드라마틱한 전기가 있었다. 당대의 명문 중 명문이자 세도가 집안인 경주 김씨 월성위(月城尉; 영조의 사위)의 증손으로 태어나 약관 24세에 동지부사(冬至副使)로 떠나는 아버지의 자제군관(子弟軍官) 자격으로 연경(燕京; 오늘날 북경)에 가서 당시 청나라 학예계의 석학이었던 완원(阮元)과 옹방강(翁方綱)과 학연을 맺으며 이후 금석학과 경학 그리고 시문과 서예에서 그 명성을 가히 국제적으로 드높이는 명사로 성장하였다.
그리고 35세에는 과거에 급제하여 규장각 대교, 성균관 대사성 등 요직을 두루 거치며 출세가도를 달리고, 학예계에는 신풍을 불러 일으켜 가히 일세를 휩쓰는 ‘완당바람’을 일으켰으니 그 영광은 누구도 누려보지 못한 것이었다.
그러나 아버지 김노경이 안동김씨와의 정치적 갈등으로 고금도를 유배되자 일시 벼슬을 버렸고, 다시 복직하여 나이 55세에는 병조참판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 해 동짓달에는 동지부사로 30년만에 다시 연경에 가게 되었다. 그러나 바로 그 때 다시 정쟁이 일어나 추사는 죽음의 문턱에 놓여 있었다. 불행중 다행히도 절친한 벗이자 우의정인 조인영의 상소로 죽음을 면한 추사는 유배지 중에서도 원악도(遠惡島)로 불리던 제주도, 그 중에서도 대정현에 귀양살이를 떠나게 되었다.
이후 9년간 유배 생활을 하면서 비참한 노년을 보내야만 했던 추사는 그 아픔의 세월을 오히려 자신의 학문과 예술을 무르익히는 계기로 삼아 ‘추사체는 제주도 귀양살이 이후에 완성되었다’는 평을 받게 되었다. 63세 되던 해 겨울에 마침내 귀양살이 9년을 청산하고 다시 서울로 올라온 추사는 서울 장안에서 쫒겨나 용산 한강변에 살면서 벗과 제자들과 어울리며 오직 학문과 예술에 힘썼다. 그랬건만 다시 정쟁이 일어나면서 추사의 가장 친한 벗인 영의정 권돈인이 귀양살이 가게 되는 사건의 배후인물로 지목되어 이번에는 함경도 북청에 유배되어 또다시 1년간 귀양살이를 하게 된다.
그
리고 나이 67세에 유배에서 풀려난 이 늙고, 병들고, 4년 후에는 세상을 떠날 노 학자는 과천의 과지초당에 머물며 여생을 마무리하게 된다. 그러나 생의 마지막 4년간 추사의 예술은 더욱 높은 경지에 올라, 굳이 잘 쓰려고 하지 않아도 명작을 낳는다는 입신(入神)의 경지 , 잘 썼는지 못 썼는지조차 따질 수 없는 불계공졸(不計工拙)의 경지에 이르게 되어 한국서예사에서 서성(書聖)으로 역사 속에 영원히 남게 되었다.
그러므로 추사 예술의 최고봉은 그의 생애 마지막 4년에 있었다고 할 수 있는데 나는 이 시기의 추사를 <완당 평전>에서 ‘제10장 과천시절; 과지초당과 봉은사를 오가며’라는 부제를 달고 서술하였다. 실제로 추사의 말년 삶에 대한 기록과 족적은 과지초당과 봉은사에 집약되어 있다.
(3)
추사 선생 살아 생전의 모습을 유일하게 기록한 상유현이라는 분의 <추사선생 방현기(訪見記)>는 다름 아닌 봉은사로 선생을 찾아와 그가 본 바를 생생하게 전한 것이었다. 그런 중 추사는 과천의 좁고 어둡고 답답한 과지초당에서 남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자신의 그림자조차 추함을 호소하며 눈에는 안화(眼花)가 끼어 앞을 가린다느니, 기침이 멎지 않아 고통스럽다니 하는 호소로 가련한 추사의 노년을 엿보게 하는데, 봉은사에 머무는 시절의 편지에는 여전히 옛날 못지 않은 열정으로 학문과 예술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유장하게 펼쳐간다.한 예로 경기도 광주의 퇴촌에 은거하고 있던 벗 권돈인에게 보낸 한 장문의 편지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달포 전에 절집(봉은사)로 갈 때는 대감님을 방문하지 못하고 곧장 절을 향해 용감하게 가니 소나무 사이로 비치는 석양이 부처님을 밝히고 있었음니다. 이 때 향과 등을 켜고 승려 서넛이 먹을 갈고 종이 펴는 일을 도와주니 장시간 쓴 병풍 글씨와 대련 작품이 쌓인 것을 보니 크고 작은 것이 수 백 폭이었고, 또 편액(扁額)이 그만큼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3, 4일 동안 멋대로 마구 붓을 휘둘러 답답함을 한껏 시원하게 풀었습니다. 먹은 다하였는데 팔의 힘이 아직 남아 있어 은근히 한번 웃어 보았습니다.”
이렇듯 추사는 봉은사에서 당신 말년의 명작들을 무수히 제작하였다. 뭇 사람의 감동을 자아내어 지금도 상찬해 마지 않는 추사의 과천시절 작품들이란 실상 봉은사에서 쓴 것이 많았다. 실제로 추사는 아예 봉은사에 별실을 마련하고 상주하며 유유히 작품을 제작하며 말년을 마무리하고 있었다. 추사 선생이 타계하는 ‘병진년(1856년) 봄과 여름 사이’라고 했으니까 세상을 떠나기 5개월쯤 전 봉은사로 추사를 방문하였던 상유헌은 당시 추사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상유헌은 추사의 손자 제자뻘 되는 분이다.
“큰 방의 남쪽 벽 아래 나무로 가옥(假屋) 한 칸을 짓고, 사방에는 장자(障子)가 없고, 앞은 반쯤 걷어올린 휘장을 드리웠다. 가옥 안을 보니 화문석을 폈고, 자리 위에 꽃담요를 폈고, 담요 앞에 큰 책상을 놓고, 책상 위에는 벼루 한 개가 뚜껑이 덮인 채 놓여 있고, 곁에 푸른 유리 필세(筆洗)가 있고, 또 발이 높은 작은 향로가 있어 향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또 필통이 두 개 있는데, 하나는 크고 붉으며, 하나는 작고 희었다. 큰 필통에는 큰 붓이 서너 개 꽂혀 있고, 작은 필통에는 작은 붓이 여덟아홉 개 꽂혀 있었다. 그 사이에 백옥으로 만든 인주합(印朱盒) 한 개와 청옥 서진(書鎭) 한 개가 놓여 있다. 책상에는 또 큰 벼루 한 개가 있어 먹을 갈아 오목한 못을 채웠고, 왼편에 목반(木盤)하나가 있어 도장 수십 방[顆]이 크기가 고르지 않게 놓여 있고, 바른편에 붉은 대나무로 만든 작은 탁자[紫竹小卓]가 한 개 있는데 단 위에는 깁[비단]과 생초(絹綃)와 지물이 가득 꽂혀 있었다.”
이렇듯 그의 서재는 사실상 봉은사에 있었던 것이다.그리고 그때 상유헌은 추사의 방에는 “방금 제작을 마치고 볕에 쬐어 먹마르기를 기다리고 있는 작품 3점(옥색 색종이 바탕에 쓴 서예 대련)이 동편 가장자리 불탁(佛卓)아래 놓여 있었다”며 그 작품의 내용까지 기술하였다.
“<봄바람 같은 큰 아량은 능히 만물을 받아들이고, 가을 물살 같은 문장은 티끌에 물들지 않으리라.(春風大雅能容物 秋水文章不染塵)>
<석간석 푸른 이끼는 어린 사슴을 길들일 만하고, 돌밭 봄비에 인삼을 심노라.(磵戶蒼苔馴子鹿 石田春雨種人蔘)>
<노국(潞國, 송나라 文彦博)의 만년은 오히려 건강했고, 여단(呂端, 송나라 사람)은 큰일을 흐지부지 않았다.(潞國晩年猶矍鑠 呂端大事不糊塗)>”
그렇다고 추사가 작품 제작만을 위하여 봉은사에 온 것만은 아니었다. 해동의 유마거사라는 평을 받고 있는 추사는 학(學)으로서 불교학, 선학의 대가였을 뿐만 아니라 진정한 재가불자였고 속된 말로 ‘반(半)중’에 가까왔다. 상유현은 이어 완당이 이때 스님들과 똑같이 발우(鉢盂)공양을 하고 계셨던 것을 상세하게 기록하였고, 이어서 자화참회(刺火懺悔)하는 모습까지 증언하였다.
“늙은 스님 한 분이 댓가지를 하나 가지고 들어왔다. 그리고 댓가지 끝에 작은 종이통 하나를 매달았다. 통 가운데에는 바늘과 같은 까스랑이[針芒]가 있었다(베 올을 초칠해 짧게 자른 것이다). 한 개를 골라 공의 바른팔 근육 위에 곧추세웠다. 작은 스님이 석유황에 불을 붙여 가지고 와서 까스랑이 끝에 붙였다. 타는 것이 촛불 같았으나 바로 꺼졌다.
나로서는 평생 처음 보는 일이었다. 스님이 나간 후 공들에게 물었다. “그 하시는 것은 무슨 뜻이고, 무슨 법이며, 뭐라고 부릅니까?”
어당 선생이 말씀하기를, “이는 불경에 있으니 ‘자화참회(刺火懺悔)’가 곧 이것이라. 또, 수계(受戒)라고도 부른다. 무릇 중이 되면 비로소 삭발(削髮)한다. 스승의 계를 받을 때도 이와 같다. 이는 모두 더러운 것을 사르어버리고 귀의청정(歸依淸淨)하는 맹세이니 불법은 그러하니라.”
나는 처음으로 이일을 보았고, 또 이 말을 들으니 비록 말하지는 않았으나 심히 의아스럽고 괴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하자면 추사처럼 높고 귀한 분이 어찌 이렇게 불심(佛心)에 미망되었는지 늘 의심하였다.“
그런 추사였기 때문에 그는 봉은사에 있는 동안 “어디서 풍문을 듣고 와서 농짓거리 하는 약간의 산승(山僧)들이 있어 오는대로 수응수답하다 보니” 날이 다 갔다고도 했고, 불교의 선양을 위하여 스님들을 여기 저기 소개하기도 하고 이런 저런 절집안의 사정을 풀어주기도 했다. 어느날 추사는 봉은사의 영기(永奇)스님을 권돈인에게 소개하는 편지에 이렇게 적어 보냈다.
“승려 영기는 자호(自號)하여 남호(南湖)라고 하는데 연전에 <아미타경>과 <무량경>을 판각하여 이미 대감께 전달했던 자이니 생면은 아닐 듯 싶습니다.
또 승려 한민(漢旻)은 스스로 운구(雲句)라 하고 있는데 작년부터 소인에게 내왕하였습니다마는 금강경과 능엄경에 대해 공부를 퍽 많이 하였습니다.
이 두 승려가 대원(大願)하여 <화엄경>을 간행하려고 하니 그 뜻이 가상합니다.“
바로 그 화엄경, 정확하게 말하여 <화엄경 수소 연의본(華嚴經 隨疏 演義本)> 전 80권을 직접 베껴 쓰고 이를 목판으로 찍어 인출하는 작업을 완성하였다. 그때가 1856년 9월말이었다. 추사가 그 해 10월 10일에 타계했으니 보름 남짓 전의 일이었다. 영기와 운구 스님들은 당연히 추사에게 <화엄경판>을 보관할 경판전의 현판 글씨를 부탁하였다. 또 추사는 병들고 열흘 후면 세상을 떠날 기력이었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최선을 다해 글씨를 썼다. 더욱이 각별한 애정이 있었는지 다른 현판 글씨 두배는 되는 대자(大字)로 글자 하나 크기가 어린애 몸통만한 대작이었다. 그 현판 이름은 평범한 <경판전>이 아니라 <판전>이라고 줄여 그 의미의 함축성을 응집시켰다. 그것이 봉은사의 유명한 <판전>이다.
추사는 <판전>을 쓰면서 현판 왼쪽에 낙관하기를 <칠십일과 병중작(칠십일과 병중작)이라 하였다. 칠십일과는 추사가 71세 되면서 사용했던 별호로 “71세 된 과천 사람”이라는 뜻인데 거기에 병중에 썼다는 강조한 것이다. 전하는 말로 추사 선생은 이 글씨를 쓰고 3일 후에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지금은 지워졌지만 오래전에는 그런 글을 누군가가 써넣은 것이 있었다고 한다. 아무튼 <판전>은 우리나라의 서성(書聖) 추사 김정희의 절필(絶筆)이다.
이 판전의 글씨가 추사체의 최고가는 명작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의견이 다를 수 있지만, 그 다양하고 수많은 추사 작품 중에서 추사체의 본질을 가장 잘 반영하고 있는 작품 하나를 고르라고 하면 반드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갈 명작임에는 이론이 없을 것이다.
판전의 글씨를 보면 마치 어린애 글씨 같은 분위기가 있다. 마치 어린애 그림처럼 그린 노대가의 그림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어린애의 글씨는 아무 꾸밈없는 그저 천진한 것이 자랑인데 추사가 추구한 이 천진무구함이란 “단련된 천진성”이라는데 중요한 미덕이 있는 것이다. 세련되게 쓰기란 차라리 쉬워도 그 세련됨을 속으로 감추고 저 노자가 말한 대교약졸(大巧若拙), 즉 큰 제주는 어리숙해 보인다는 경지에 들어간다는 것이 보통의 단련으로 될 일이겠는가. 추사는 말하기를 “나는 70평새에 벼루 10개를 밑창 냈고 붓 일천 자루를 몽당붓으로 만들었다”라고 말하며 제자들에게 장인적 수련과 연찬을 강조했다. 또 “서예가라면 모름지기 309개의 옛 비문 고전을 완전히 익혀 팔뚝아래 간직하고 있어야 한다”며 고전의 습득을 강요하였다. 그 과정을 다 거치고 나온 것이 추사체의 내공이고 <판전> 글씨의 미학인 것이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주에는 그 깊은 경지는 못 알아보고 괴이하다느니 멋대로라느니 하며 추사의 글씨를 헐뜯기 일수였다. 이런 비낭에 지친 추사는 이렇게 하소연 한 적이 있다.
“근자에 들으니 내 글씨가 세상사람들 눈에 크게 괴(怪)하게 보인다고 하는데 이 글씨를 혹시 괴하다고 헐뜯지나 않을지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이 비웃건 꾸지람하건 그것은 그들에게 달린 일이외다. 해명해서 조롱을 면할 수도 없거니와 괴(怪)하지 않으면 글씨가 되지 않는 것을 날더러 어떡하란 말입니까”
추사는 다만 산신령 부처님께서만 꾸지람하지 않으시길 바랄 뿐이라고 했다. 후학으로 나는 추사 선생을 위하여 다른 분 아닌 추사의 제자이고 사유헌의 스승인 어당 이상수가 금강산을 보고 되다만 산이라고 비방한 것을 듣고 대답한 한 마디 말로 나의 생각을 대신하고 싶다.
“대저 명산(名山)은 명사(名士)와 같아서 그 이름을 얻은 것은 객관적 정평이 있어서 이루어진 것이니 몇몇이 헐뜯는다고 그 명성에 상처가 나는 것이 아니다.”
“ 나무 시방삼세 동서고금 예술보살 마하살, 나무 추사 처사 마하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