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마음속에 떠오르는 것은
살구나무와 커다란 팽나무, 그리고 오래된 돌담이다.
기역(ㄱ)자로 이어진 초가집은
낮은 돌담에 기대어 고즈넉하게 앉아 있었다.
아침이면 해보다 먼저 집이 깨어났고,
저녁이면 달빛보다 먼저 하루의 고단함이 집 안에 내려앉았다.
정제 옆에는 마루가 있었고
마루 곁으로 난 큰 창으로
아침 햇살과 저녁 바람이 드나들었다.
정제의 가마솥에서는
어머니가 가족의 밥을 지으셨다.
할아버지 때부터 내려왔다는 큰 가마솥은
수많은 밥을 지어내며
세월의 불기운을 온몸으로 받아
검고 번들번들하게 윤이 나 있었다.
그 오른쪽에는 조금 작은 가마솥이 하나 더 있었고,
두 솥 사이에는 조항물이 담긴
하얀 사기그릇이 놓여 있었다.
정제 뒤편의 살강에는
왕대를 쪼개 엮어 만든 오래된 발 위로
우리 식구들이 쓰던 사기 밥그릇과 국그릇이
엎어진 채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런 정제 오른쪽에는
또 하나의 작은 공간이 있었다.
땔감을 쌓아두는 헛간이었다.
장작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고,
그 사이에는 왕겨와 소나무 갈비 같은
불쏘시개가 수북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겨울이면 장작 타는 냄새가
집 안까지 스며들었다.
가마솥 아궁이 옆에는
불길을 살려내기 위해 바람을 불어 넣던
분무기 두 개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어머니는 불이 약해지면
그것을 손에 들고 힘껏 바람을 불어넣으셨다.
그러면 꺼져가던 불씨가
붉게 살아나며 아궁이 속에서 춤을 추었다.
어린 나에게는
그 불씨 하나에도 생명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우리 집 오른쪽에는 텃밭이 있었다.
고추도 심고, 파도 심고,
계절에 따라 이것저것 채소를 길렀다.
텃밭을 돌아 길을 따라가면
오래된 감나무 한 그루가 나타났다.
오십 년도 넘었다는 넓적 감나무.
그 나무는 마치 제 몸을 길게 뻗어
친구 X 균이 네 마당을 감싸려는 듯
굵은 가지를 길게 늘어뜨리고 있었다.
여름이면 푸른 잎이 무성했고,
가을이면 감이 주렁주렁 달렸다.
나는 그 나무를 보며
계절이 오는 것을 알았다.
봄에는 새잎으로 봄을 알려주었고,
가을에는 익어가는 감으로
가을이 깊어졌음을 알려주었다.
그 감나무 넘어
우리 담장 바로 옆에는
내 초등학교 친구 x 균이 네 집이 있었다.
우리 집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기와를 얹은 잘 지어진 본채가 있었고,
집안의 규모도 우리 집보다 훨씬 컸다.
종균이 어머니 집안인 황xx 씨 집안의 행랑집도
거창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그 집을
**'동산집'**이라고 불렀다.
동산이 있는 큰 집이라는 뜻이었다.
x 균이 아버지는 남원 시내에서도 이름이 알려진 분이었다.
x 첩 대에 근무하시던 x 무상사.
당시에는 군인으로서도 상당한 위치였고
집안 형편도 넉넉하여
마을에서는 부잣집으로 소문이 나 있었다.
나는 어린 시절
우리 집과 x 균이 네 집을 오가며 놀았다.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 다른 세상이 붙어 있었다.
우리 집에는 초가집과 돌담,
살구나무와 오래된 팽나무가 있었고,
x 균이 네 집에는
기와집과 넓은 마당,
동산처럼 펼쳐진 집안의 풍경이 있었다.
그러나 어린 우리에게
그런 차이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우리는 그저 친구였고,
함께 뛰어놀았으며,
나무 아래에서 웃고 떠들었다.
집 아래채로 내려가면
재래식 변소가 하나 있었고,
그 옆에는 돼지 마구간이 붙어 있었다.
어머니는 매일 식사를 마치고 나면
밥상에 남은 음식물 찌꺼기를 모아
돼지에게 먹이로 주셨다.
돼지는 꿀꿀거리며 먹이를 받아먹었고,
어머니는 다시 다음 일을 찾아 움직이셨다.
그때는 그것이
그저 평범한 하루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지금 돌아보면
그 모두가 가난한 농촌의 삶이면서도
참으로 정겨운 풍경이었다.
아궁이의 장작불,
왕겨와 소나무 갈비의 냄새,
가마솥에서 피어오르는 김,
살강에 엎어놓은 하얀 사기그릇,
텃밭의 푸른 채소,
오래된 감나무의 그늘,
돌담 너머 친구 x 균이 네 기와집,
그리고 돼지 마구간의 꿀꿀거리는 소리.
그것들이 모여
내 어린 시절의 고향을 만들었다.
밤이 되면
500년이 넘었다는 팽나무가
우리 초가집 위로 긴 가지를 드리우고,
살구나무는 어둠 속에서
말없이 집을 지켰다.
나는 그 아래에서 자랐다.
그때는 몰랐다.
그 풍경 하나하나가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내 인생의 가장 따뜻한 한 페이지가 될 줄은.
세월이 흘러 초가집도, 돌담도,
아궁이도, 살강도
어느새 기억 속의 풍경이 되었지만,
내 마음속에는 아직도
그 집이 그대로 서 있다.
아궁이에서 장작 타는 소리가 들리고,
어머니가 가마솥 앞에 앉아 계시고,
감나무 가지가 친구 집 마당으로 늘어져 있으며,
담장 너머에 친구가 나를 부른다.
그리고 그 모든 풍경 위로
커다란 팽나무의 가지가 조용히 흔들리고 있다.
그곳이 내가 태어나
세상을 처음 배운 집이었다.
내 인생의 가장 오래된 기억이 시작된 곳,
그리고 내가 지금도 마음속으로 찾아가는
나의 살구나무 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