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가도 王可道
#高麗史94卷-列傳7-王可道-001
○王可道初名子琳淸州人本姓李
왕가도의 처음 이름은 자림(子琳)이요 본 성은 이씨이다.
成宗朝擢魁科補西京掌書記
성종(成宗) 때에 장원으로 과거에 합격하여 서경(西京)에 배치되어 서기(書記)를 맡아 보았다.
顯宗五年上將軍金訓崔質等作亂由是武臣用事悍夫兇豎並帶文官羊頭狗尾布列臺閣政出多門朝綱紊亂.
현종(顯宗) 5년에 상장군 김훈(金訓), 최질(崔質) 등이 반란을 일으킨 후에 무관들이 정권을 잡은 데로부터 사납고 흉악한 무리가 문관의 자리까지 다 차지하고 어중이 떠중이가 대신 줄에 들어 앉아 정사가 집중적으로 움직이지 못하고 조정의 기강이 한없이 문란하였다.
可道以和州防禦使秩滿還京在私第心懷憤激密謂日直金猛曰:
왕가도는 화주(和州) 방어사로 있다가 임기가 차서 서울로 돌아와 자택에 있었는데 나라일이 그릇되는 것을 보고 격분한 마음을 품고 일직(日直) 김맹(金猛)에게 비밀히 말하기를
"王何不效漢高雲夢之遊乎?" 猛喩其意密奏
“국왕께서는 어째서 한(漢)나라 고조(高祖)가 운몽(雲夢)으로 놀이 가던 옛일을 모방하려 하시지 않으려는가?”고 하니 김맹이 그 뜻을 해득하고 비밀히 왕에게 아뢰었다.
王納之以
왕이 그의 의견을 채택하기로 결심하였다.
可道嘗爲書記頗得人心卽權授西京留守判官趣令先往設備.
왕가도가 일찍이 서기로 있을 때 자못 인심을 얻었던 일을 회상하고 왕은 그를 임시로 서경 유수부 판관(西京留守判官) 직에 임명하고 그가 속히 가서 미리 준비하도록 하였다.
明年王幸西京宴群臣於長樂宮乘訓等醉以兵襲之遂誅訓質及李協崔可貞石邦賢李暹金貞悅孝 林猛崔龜等十九人.
그 이듬해에 현종이 서경으로 행차하여 장락궁(長樂宮)에서 여러 신하들에게 연회를 베풀고 김훈 등이 취한 틈을 타서 군인을 출동시켜 김훈과 최질, 이협(李協), 최가정(崔可貞), 석방현(石邦賢), 이섬(李暹), 김정열(金貞悅), 효암, 임맹(林猛), 최구(崔龜) 등 19명의 목을 베었다.
龜儒士以兵部郞中扈從性麤鄙與質等交故及.
그 중 최구는 선비 출신(儒士)으로 병부 낭중(兵炳郞中) 직에 있으면서 왕을 따라 온 것인바 그는 성질이 거칠고 비루하여 최질 등과 친하게 교유한 까닭으로 이런 화를 당하였다.
尋以訓等子若同産兄弟歸之本貫常赦不原其父母妻姊妹祖孫叔伯緣坐者皆放之.
미구에 김훈 등의 아들이나 동북인 친형제들에 한하여는 고향으로 돌려 보내되 대사령이 있을 때라도 그 죄를 용서하지 않기로 하고 그들의 부모, 처, 누이, 조부, 손자, 삼촌(叔伯)이나 기타 연루자들은 모두 석방하게 하였다.
後累歷尙書右丞同知中樞事戶部尙書賜致盛功臣號十八年叅知政事.
왕가도는 후에 벼슬이 여러 번 올라 상서우승(尙書右丞), 동지 중추사(同知中樞事), 호부상서(戶部尙書)를 역임하고 치성 공신 칭호(致盛功臣號)를 받았으며 현종 18년에 참지정사(參知政事)로 임명되었다.
二十年與左僕射異膺甫御史大夫皇甫兪義尙書左丞黃周亮等築開京羅城可道令人持傘環立登高而進退之均其闊狹以定城基
현종 20년에 좌복야 이응보(異應甫)와 어사대부(御史大夫) 황보유의(皇甫兪義), 좌승(左丞) 황주량(黃周亮) 등과 함께 개경(開京)의 외성(羅城)을 축조했는데 그때 왕가도는 사람을 시켜 일산을 받고 성 주위에 둘러 서게 한 후에 높은 곳에 올라 서서 드나들면서 지휘하여 좁고 넓은 곳을 고르게 하며 성(城) 터를 설정하였다.
以功進檢校太尉行吏部尙書兼太子少師 知政事上柱國開城縣開國伯食邑七千戶加輸忠創闕功臣號賜姓王給開城縣莊田封其妻金氏開城郡夫人.
이런 공으로 검교 태위(檢校太尉) 행리부 상서로 승진되고 태자 소사, 참지정사를 겸임하였으며 상주국(上柱國) 훈위와 개성현 개국백(開城縣開國伯)의 봉작과 식읍 7천 호를 받았으며 수충 창궐 공신 칭호(輸忠創闕功臣號)를 받고 왕씨(王氏)로 사성(賜姓)하고 개성현(開城縣)에 전장을 주었다. 그의 처 김씨는 개성군 부인을 봉하였다
#高麗史94卷-列傳7-王可道-002
德宗卽位可道請納妃於是納其女爲妃
덕종(德宗)이 즉위하자 왕가도가 왕비를 맞을 것을 제의하였다. 그래서 왕이 그의 딸을 데려다 왕비로 삼았다.
改門下侍郞同內史門下平章事以有疾免朝.
그리고 그를 문하시랑 동 내사 문하 평장사(門下侍郞同內史門下平章事)로 임명했는데 그는 신병이 있어서 조회 이외의 출석을 면제하였다.
時遣工部郞中柳喬郞中金行恭如契丹會葬且賀卽位可道奏:
그때에 조정에서 공부 낭중(工部郞中) 유교(柳喬)와 낭중(郞中) 김행공(金行恭)을 거란에 파견하여 거란 임금 장례에 회장할 겸 새 임금의 즉위를 축하하기로 하였는데 왕가도가 건의하기를
"契丹與我通好交贄然每有幷呑之志今其主殂駙馬匹梯叛據東京宜乘此時請毁鴨綠城橋歸所留我行人若不聽可與之絶." 乃附表請之契丹不從
“거란이 우리와 통호하고 예물도 교환하나 매양 우리 나라를 집어 삼키려는 의도를 품어 왔다. 이제 그 나라 임금이 죽고 그의 사위 필제(匹梯)가 동경을 근거지로 삼고 반란을 일으키니 이때를 타서 압록강의 성과 다리를 허물고 그들에게 억류되어 있는 우리 사신(行人)들을 돌려 보낼 것을 청해서 만일 그들이 우리의 제의를 듣지 않으면 우리는 그들과의 국교를 끊읍시다”라고 주장하니 그의 말대로 공문으로 거란 측에 요청하였으나 거란이 듣지 않았다.
王命群臣議徐訥等二十九人曰: "彼旣不從我言宜勿通好." 皇甫兪義等三十九人駁云: "今若絶交必貽禍害不如繼好息民." 王從可道及訥等議停賀正使仍用聖宗*大平{太平}年號.
왕이 이 일을 여러 신하들의 토의에 붙이니 서눌(徐訥) 등 29명은 “저희들이 우리 나라의 제의를 거절하였으니 응당 국교를 단절할 일이라”고 주장하고 황보유의 등 39명은 “이제 만약 절교한다면 반드시 후환이 있을 터이니 계속 국교를 유지하고 백성을 안식시키는 편만 같지 못하다”고 논박했는데 왕은 왕가도와 서눌 등의 의견을 채택하고 하정사(賀正使) 파견을 정지하고 요(遼)나라 성종(聖宗)의 태평이란 연호(太平年號)를 사용하였다.
平章事柳韶請攻破丹城王下宰執議訥及兪義黃周亮崔齊顔崔沖金忠贊等皆曰不可可道與李端奏時不可失固請出軍王命有司卜於*大廟不果出兵.
평장사 유소(柳韶)가 거란의 성을 탈취하자고 건의하였으므로 왕이 이를 재상들의 토의에 붙였더니 서눌과 황보유의, 황주량(黃周亮), 최제안(崔濟顔), 최중(崔沖), 김충찬(金忠贊) 등은 모두 반대하였고 왕가도와 이단(李端) 등은 “기회를 놓쳐서는 아니 된다”고 출병을 고집하니 왕이 해당 관리에게 지시하여 태묘(太廟)에서 점을 쳐서 가부를 결정하기로 했는데 결과는 출병하지 않기로 되었다.
可道尋乞骸歸鄕養疾三年卒官 喪事謚英肅後贈太師中書令配享顯宗廟庭.
미구에 왕가도는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병을 조섭하다가 덕종 3년(1034)에 죽었다. 국비로 장사를 치르고 영숙(英肅)이라는 시호를 주었으며 그 후에 태사 중서령(太師中書令) 벼슬을 추증하고 현종 묘정에 배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