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女性敎役
1990년 11월 16일 강사 : 김성수 교수
1.序論
저로서는 왜 이런 토론이 있어야 하는지 그 이유조차 알지 못하겠다. 나의 생각에는 너무나 분명한 문제인데, 그것이 어떻게 어려운 성경해석을 거쳐야 해결이 되는 문제가 아니고 너무나 분명하기 때문에 왜 이런 논쟁이 다른 이견이 생겨야 하는지 나는 잘 이해를 못하겠다. 여성교역을 찬동하는 사람의 그 이유들을 먼저듣기를 원했다. 왜냐하면 나는 너무나 빤한 것이라서 별로 할말이 없기 때문이다. 왜 찬동을 하는지에 대해서 먼저 들었으면 내가 거기에 대해서 대답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다. 그래서 찬동하시는 분의 입장과 그들의 주장의 근거를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자연히 내가 하는 강의가 상대없이 그냥 휘두르는 것처럼 되었다. 그래서 좀 장황한 그런 말씀이 될 것 같다. 양해해 주시기 바란다. 그리고 이제 신약에 나타난 여러 가지 성경구절들은 너무나 분명한 것이니까 그것을 일일이 해석할 수는 없다. 시간이 너무 많이 소요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 신약 교수님도 계시니까 여기에 박형용 교수님도 계시는데 이분은 저보다 더 강하게 반대하시는 분이시다.
이제 신약에 문제가 남으면 잘 말씀해 주시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지난번 개교기념 행사때 이 여성교역 문제에 관한 첫 강사의 말씀을 들었는데 대개문제가 되는 것이 남녀관계에 있어서 동등성과 종속성, 이 두 성격에 대한 이해가 충분치 못하기 때문에 자꾸 선례가 되고 적어도 이 두 동등성과 종속성에 대한 바른 이해가 이 문제를 푸는데 어떤 열쇄가 된다고 생각해서 오늘 저는 이 문제를 좀 포괄적으로 다루려고 한다.
요즘 사회적 분위기는 여성의 권익과 지위 향상에 매우 우호적일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남녀평등 심지어 여성 우위론 까지 적극적인 여성들과 남성우위사회에서 이런 저런 모양으로 불이익을 당해 온 여성의 처지를 이해하고 동정하는 남성들을 페미니스라고 그러는데 이들에 의해서 거론되고 있으되 별다른 거부반응 없이 수용되고 있고 이 정치인들도 요즘도 여성에 대해서 매우 적극적이고 호의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와 어느 정도 관련이 있는지는 확실치는 않지만 교회에서도 교회 내에의 여성의 지위, 여성사역, 우리의 오늘의 문제가 되겠지만 설교권, 강도권 목사안수 가능성이 오래 전부터 거론되어 왔고 흔히 자유주의 진영으로 분류되는 교단들에서는 국내외를 막론하고 목사안수가 허용되고 있으며 최근에는 상당히 보수적 성향을 띠고 있다고 믿어져 온 통합측에서도 여성목사 안수안이 한 두 표 차이로 부결될 만큼 여성의 지위와 사역 문제는 작금 열띤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저의 경우 적어도 보수진영 내에서는 이 문제에 관한 한 이론이나 거론의 여지가 없다고, 안전지대라고 아전지대라고 믿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학내에서 여성교역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여성 강도권내지 설교권 주장이 학우들의 상당한 호응을 얻어서 공개강좌 형식으로 지난개교기념 행사의 한 순서로 채택됨으로서 공식화되기에 이르렀다. 이런 움직임이 사전에 알려져서 교수회에서 거론이 되었고 격론이 있었다. 이처럼 이 문제가 학교 내에서 아니 학교뿐만 아니라 학내외적으로 공식화된 지금에 와서는 이 문제를 덮어두는 것보다 공개적으로 토론해서 공식적 결론을 맺는 것이 시간이 더 걸리더라도 바람직하다고 생각해 왔으며 우여곡절 끝에 이런 자리가 마련된 것으로 안다.
우선 이 문제와 관련해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여성의 문제는 비단 오늘 현대사회에서만 생길 수 있는 그런 문제가 아니라 이미 초대교회시대 즉 고린도교회에서 예언과 기도사역과 관련해서 제기된 문제요 특히 고전11:16절 변론, 이의가 있어서 논쟁하려는 태도를 가진 자가 있을지라도 이런 표현이나, 고전14:36절 이하의 말씀 등은 이 여성교역의 문제가 논쟁의 소지가 많은 말하자면 열띤 논쟁으로 비화할 소지가 많은 문제임을 이미 암시하고 있다. 물론 교회에서 논쟁이 있는 것보다는 논쟁이 없는 것이 모두가 동일하게 진리를 깨닫고 한마음으로 주를 섬기는 것이 정상적이요 바람직하지만은 경우에 따라서는 옳지 않은 견해룰 묵인하고 수용하기보다는 다른 의견들을 분명히 밝히고 개진하여서 옳은 것, 참된 것이 드러나야 하는 경우가 있음을 고리도전서 11장 19절에서 말씀하고 있다. 모두 남녀문제와도 관련 있는 말씀이다. 교회사를 보더라도 중요한 교리들이 교회 논쟁을 통해서 밝혀지고 분명해지는 경우들을 볼 수 있고 이처럼 교회 내에서의 논쟁은 긍정적 역할을 할 수 있으므로 논쟁을 반드시 부정적 시각으로만 볼 필요는 없다고 할 수 있다. 다만 논쟁의 부작용 교회사상 이견으로 말미암은 교회분열의 고통스러운 경험에 유념해서 파당이나 편견이나 미움이 생겨나는 것은 극도로 경계해야 할 것이요 여성교역문제와 관련해서도 논쟁을 통해서 오직 옳고 참된 것이 밝히 드러나는 긍정적 결과가 나타나도록 우리가 기대하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어떤 문제대해서 시비를 판단하거나 옳고 그름의 판단을 하고 원칙을 제시하려고 할 때 적어도 교회 내에서는 그 근거와 근원, 또 판단과 기준과 규범이 오직 성경이 되어야 한다. 굳이 웨스트민스터 조문을 들추지 않더라도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 백성됨의 의미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자들의 모임 또는 영역이라는 뜻이요. 하나님의 통치는 구체적으로 그의 말씀을 통해서 말씀에 대한 믿음의 순종을 통해서 이루어짐을 우리가 아는 만큼 교회에서의 모든 일은 성경의 규범 기준 교훈에 따라서 판단되고 결정되고 행해져야 함이 마땅하다. 혹자는 성경은 구원과 관계된 부문에 관해서만 규범성을 갖는다고 말해서 성경적용의 범위의 제한성과 아울러서 성경규범 외에 다른 무엇이 우리의 판단 결정 행동의 어떤 규범성을 가질 수 있는 것처럼 말하지만 그러나 과연 신자의 전 삶의 전 영역에 있어서 어떤 부분이 어느 부분이 구원과 관계가 없다고 말할 수 있는가? 어떤 사람은 여성교역문제에 관한 성경교훈의 불명료성을 언급하면서 아디어포라의 문제로 취급하려고 한다. 성경은 여성교역의 문제에 대해서 서로 상충되는 다양한 견해들을 제시하고 있으니 그저 경우에 따라 이렇게도 할 수 있고 저렇게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냐고 말한다. 물론 성경은 부분에 따라 그 명료성이 다른 경우가 있고 어떤 문제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이 불명료할 때 우리는 확실한 판단과 결론에 여지를 두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여성교역문제와 관련한 성경의 교훈이 불명료한지는 우리가 차후에 따져 볼 문제이다. 어떤 사람은 남녀문제 내지 여성교역문제는 현사회 분위기를 감안할 때 현대사회의 분위기를 감안할 때 별로 큰 중요성을 갖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지엽적인 문제에 있어서까지 성경의 엄격한 원칙을 따를 필요가 있는가 하고 반문한다. 저로서는 남녀질서의 문제가 대수롭지 않은 사안이라는 생각하는 자체에 대해서 동의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설혹 이 문제가 중요하지 않은 사안이라 할지다도 몰라도 성경이 분명히 가르치는 것은 분명히 지켜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더욱이 세상 타락한 분위기에 감염이 되어서 중요한 가볍게 생각하는 경우라면 더욱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이다.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언급해야 할 것은 이 문제에 대한 접근순서이다. 여성교역에 대해서 호의적인 태도를 가진 사람들이 내세우는 근거중 중요한 것은 교회 내에서의 여성의 현실적 비중이다. 수적으로 우월할 뿐만 아니라, 대부분이 여성들이다. 다양한 형태의 은사들 열심과 봉사 능력 경간에 있어서까지 그들은 남성보다 우월하다는 현실적 이유를 들어서 또한 여성특유의 긍정적 자질을 들어서 여성교역의 교역자의 필요성을 주장한다. 그러나 어떤 원칙을 정립함에 있어서 그 출발점이 현실이 될 경우, 현실에 대한 집착과 관심등에 의해서 원칙 자체가 왜곡되거나 상대화 내지 모호해져 버릴 위험이 있다. 예를 들면 성경은 분명히 남녀관계에 있어서 동등성과 종속성 두 가지를 모두 말하고 있는데 남녀 평등주의자는 평등성만을 발견하려고 하고 종속성은 무시 내지 간과해 버리려고 한다. 오히려 교회에서의 모든 원칙정립은 성경을 객관적 근거와 근원으로 삼아서 이루어져야 하며 일단 원칙이 정립된 다음 원칙의 허용한도 내에서 현실적용의 구체적 안들이 마련되어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원칙에 의해서 현실을 판단하고 원칙에 위배되는 것은 원칙에 위배되는 현실과 관행은 점진적으로 수정개선해 나아가야 할 것이다. 이 순서를 무시하고 현실인식 내지 현실수긍이 원칙에 선행할 경우 예외적인 상황, 구체적으로 예를 들지 못하지만 불가피하게 남자가 전혀 어떻게 할 수 없는 경우에 남자가 해야 할 일을 여자가 감당해야 할 예외적인 상황이 생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인식이 원칙에 선행할 경우, 예외적인 상황이 정상적인 상황으로 인정되고 원칙화 내지 교회전통으로 굳어 버리면 나중에 시정하려 할 경우 매우 큰 진통과 부작용이 초래될 것이요 더한 경우는 영영 시정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오류를 우리는 로마카톨릭에서 볼 수 있다. 반면 원칙이 분명히 정립,제시되어 있으면 예외적인 상황은 어디까지나 예외적이고 비정상적인 경우로 인식되어서 가능한 한 속히 정상적인 상황으로 인식되어서 가능한 한 속히 정상적인 개선 회복하는 노력이 있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현실과 관련해서 만일 여성에게 훌륭한 은사와 능력이 주어진 경우라고 한다면은 어디까지나 성경의 원칙,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질서와 원칙에 따라서 사용이 되어져야 할 것이다.
2.聖經의 男女 秩序의 意味와 重要性
우선 여성 교역의 문제를 취급하면서 먼저 남녀질서의 의미와 중요성을 거론하는 이유는 여성교역내지 설교의 문제는 결국 남녀질서의 문제로 환원되기 때문이다. 교회 내에서도 남녀질서가 유효한가라는 질문으로 환원되기 때문이다. 더 중요한 이유는 남녀질서의 전체적 의미에 대한 포괄적 이해는 여성교역 문제와 관련된 성경구절들을 개별적으로 취급할 때 초래되기 쉬운 단점, 즉 서로상충하는 듯이 보이는 다양한 내용들을 - 말하자면 어떤 것은 동등성을 어떤 것은 종속성을 이야기하는 것 - 서로 긴밀히 연결된 하나의 원칙체계로 볼 수 있게 하는 통일적 시각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남녀질서에 관한 기본 본문을 창세기1:27 2:18-25에서 발견할 수 있다. 우선 창세기 2장의 내용을 간략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창조하신 후에 그를 에덴동산에 두시고 하나님과 교제하게 하시며 또한 땅을 피조계를 다스리게 하셨다. 특히 피조계에 대한 인간의 다스림은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능력을 사용하는 창조적 일을 통해서 피조계를 이용하고 건사하는 즉 하나님을 대신해서 하나님의 복된 다스림을 대행하는 것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피조계를 향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인 축복을 전달하는 자, 실현하는 대리자였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동산 중앙에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생명나무를 두셔서 사람은 하나님께 순종해야 하는 자라고하는 사실과 생명의 삶은 바로 이 순종의 삶과 직결되어 있음을 생각케하셨다. 이처럼 창세기 2:1-17은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 그리고 사람과 땅의 관계를 다룬 반면에 창세기 2:18절 이하에서는 주로 사람과 사람의 관계, 즉 인간관계를 다루고 있다. 물론 부수적으로 동물과 인간관계를 취급하고 있지만 주된 목적은 바로 인간관계의 취급이다. 그리고 이 인간관계는 부부관계이다. 남녀관계가 그 기초요 출발점임을 밝히고 있다. 창세기2:18절에 보면 우선 하나님께서 인간이 홀로 있는 것이 좋지 않다고 말씀하셨다. 우리 성경에는 독처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아담이 뭔가 부족한 점 잘못된 점이 있다거나 홀로 있어서 외롭기 때문에 하신 말씀이 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바라시는 깊은 뜻, 본래의도하셨던 원대한 계획과 관련된 말씀이었다. 즉 하나님께서는 단 하나의 하나님의 형상, 단 하나의 인간만을 원하신 것이 아니라, 수많은 인간 거대한 하나의 인간공동체를 원하셨음을 암시하는 말씀이었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명백히 보여주는 말씀이 창세기1:28의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그들 즉 남자와 여자를 축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온 당에 충만할 만큼 번성한 인간공동체를 원하셨다. 이 원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시기 위한 첫걸음으로서 하나님께서는 남자와 여자를 지으시고 함께 가정을 이루게 하셨다. 따라서 가정은 인간공동체 사회의 가장 기본적 단위요,인간사회의 전형 내지 원형이며 더 나아가서 가정제도에 관한 창세기 2:18이하의 말씀은 가정의 원리 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 공동체 사회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원리 그리고 그 공동체 구성원간의 관계, 즉 이웃관계 또는 인간관계의 전형을 제시한다고 볼 수있다.
3.男女關係에 있어서 多樣性과 區別性·相異性
온당에 충만한 인간사회를 형성하시기 위한 첫걸음으로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는 것이다. 여기서 유의할 사실은 하나님께서는 인간 공동체를 형성하시기 위해서 꼭같은 복제인간 아담과 꼭같은 존재를 여럿을 만들지 않으시고 서로 분명히 구별된 다른 존재를, 남자와 여자를 지으셨다는 것이다. 이 사실은 모든 인간을 아덴티칼한 존재, 동일한 존재로 보려고 하는 모든 면에서 동등하고 동일한 존재로 보려고 하는 형태의 사고에 대해서, 그것이 극단적인 민주주의이든, 극단적인 남녀평등주의 계급평등주의이든간에 이런 모든 인간을 동일 동등한 존재로 보려고하는 사고에 대해서 명백한 경고가 되는 말씀이라고 할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사회를 다양한 구성원 여러가지 면에서 구별되는 상이한 존재들로 형성한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구별에 즉 인간이 구별되는 다양한 구성원으로 인간공동체가 형성된다고하는 이 구별성의 가장 명확한 예가 바로 남녀의 구별이다. 생리적으로 인체의 기관이나 모습까지도 남녀느 서로 다르다. 물론 그기능이은 말할 것도 없다. 더 나아가서 남녀의 구별과 질서는 인류 구성원의 다양성과 구별에 있어서 가장 근본적이고 분명한 구별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인간의 다양성은 남녀로만 표현되지 않고 어떤 때에는 남녀노소, 신분의 차등 여러가지로 표현될 수 있는데 그 중에서도 노소의 차이, 나이가 많고 적음의 차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공통적으로 겪는 과정의 일부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말하자면 사람이 태어나면 아이가 되었다고 크고 자라서 청년이되고 늙어 노인되면 죽는다. 이런 과정을 공통적으로 거치게되어있다. 따라서 노소의 차이라고 하는 것은 가변적 이다. 오늘은 내가 어린아이지만 다음에는 내가 노인이된다. 그러기 때문에 상대적이다. 내가 내 아이에 대해서는 내가 어른이지만 나보다 윗사람에 대해서는 내가 아이이며 아들이란말이다. 그러나 남녀의 구별만큼은 현 창조질서 안에서 사는 한 내가 이세상안에서 사는한 한 번태어날 때 정해지면 죽을때까지 불변의 구별이다. 유사한 예로 이 남녀질서에 근거한 부부의 역활 어머니 아버지의 역활은 평생불변이다. 어머니인 사람은 아버지가 될 수 없다. 남편인 사람은 죽을때가지 아내가 될 수가 없다. 아버지는 성전환 수술하기 전까지는 아내가 될수 없다.
이와는 달리 노소의 질서에 근거한 부모자식의 관계는 어린아이가 자라서 부모가 되고 또 자식을 낳고 이런 과정이 반복되므로 가변적이요 상대적이라고 할수있다. 그 외에 빈부의 차이나 신분계층의 차이등도 가변적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따라서 남녀의 구별이야 말로 현 창조질서 가운데 가장 명확하고 불변의 질서요, 가장 근본적인 구별의 질서라고 할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성경에 보면 부모자식의 관계보다 부부관계가 선행하는 것으로 보는 것은 이해가 되는 줄을 안다.
이 구별된 남녀의 관계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자 한다. 이 처럼 서로 구별된 남자와 여자사이의 관계를 가리켜 창세기2:18절은 세 단어로 규정하고 있다. “내가 아담을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고 하는 사실이다. 사실 이 번역는 썩 명확하다고 볼 수는 없다. 여하튼 세 단어는 아담을 위해서 돕는자, 우리 말에는 배필이라고 되어있지만, 이 말은 필적할만한 이라고하는 형용사로 번역해야 더 옳은 줄 안다. 이 각세단어는 동등성과 종속성 협력보완성의 의미를 갖는다고 말할수 있다. 펜네그도라는 말은 아담의 탁월함과 동일한 아담앞에 필적할만한 그런 존재라는 뜻이요, “로” 그(아담)를 위해서라는 말은 여자가 아담을 위하는 존재라는 뜻이요, 고린도전서 11장에서는 아담때문에라고 되어있다. 에젤이라는 것은 협력자 보완자라는 뜻될 것이다.
4.同質性과 同等性
남녀관계에있어서 동등성과 동질성이 우선 취급되어야 할것은 창세기 1:27절에서 발견된다. 왜냐하면 그 성구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그의 형상대로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고 하셨다. 먼저 인간을 창조하셨고 그다음에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고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남자와 여자의 구별이전에 다 이들은 다같이 인간 즉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는 사실이 언급되기 때문이다. 즉 남자와 여자는 인간됨의 본질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데에는 어떤 차등 차이가 없이 완전이 동질이요 동등이라고 하는 것이다. 남녀의 동등성을 2장에서는 다음과 설명하고 있다. 아담의 필적할 만한 조력자를 찾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똑같이 흙으로 빚으신 동물들을 아담 앞에 데려오셔서 어떻게 이름을 짓는가를 보셨다. 어떤 대상의 이름을 붙인다고 하는 것은 그 대상의 본질을 규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만큼 이름을 짓는다는 행위는 곧 그 대상에 대해 모종의 권위, 권세를 가졌음을 함축한다고 할 수있다. 물론 아담이 제멋대로 이름을 붙였다기 보다는 하나님께서 각 동물을 창조하신 목적과 의도를 잘 파악해서 그에 잘 부합되는 명칭을 붙였다고 할 수 있다고 할 수 있지만은 그렇다고 해서 이름 짓는 행위가 함축하는 이 권위적 요소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아담은 하나님께서 모든 동물 가운데 자신에게 필적할 만한 조력자를 찾지 못했다고 말씀한다. 이것은 여자를 낮추어서 동물과 비교하라는 말이 아니라 이것은 여자를 피조계의 상층부에 속하는 동물보다 더욱 뛰어난 존재이며, 남자자신의 일부 남자와 동일한 재질로 만들어진 존재요 그 탁월함에 있어서 남자에 조금도 못지 않는 동등한 존재임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이처럼 남자와 여자는 인간 됨의 본질, 하나님의 형상면에 있어서는 완전히 동등과 동질이요 하등의 차이가 없고 땅과 그 안에 있는 피조물을 다스리고 정복하는 권세도 같이 소유하고 있음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이와 같은 남녀의 동등성을 본질적인 동질성과 동등성, 쉽게말하면 거시적인 동질성 동등성이라고 말할 수있다.
5.男女 關係의 從屬性
남녀가 다함께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거시적 동질성이 남자와 여자가 서로 다르다고 하는 미시적인 구별, 내지 상이성을 배제하지 않드시 인간들의 본질 즉 하나님의 형상에 있어서는 남녀가 완전히 동등하다고 하는 이 거시적 동등성이 즉 본질적 동등성이 남녀상호 관계와 지위, 역할에 있어서의 미시적 차등성, 종속성을 배제하지 않고 오히려 함축하고 있다. 남녀의 동등성에 집착하고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남자를 위해 여자를 만드셨다고 하는 그 사실을 무시하거나 간과하려고 한다. ‘로’(אל)에 대해서는 별로 설명을 하려 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러나 아담을 위하여라고 하는 ‘로’(אל)라고 하는 것은 무의미한 허사가 아니고 남자의 권위와 여자의 종속성을 함의하는 표현임을 고린도전서 11:9절에서 밝히되 여자를 위해서 여자 때문에(δια라는 전치사를 주목하라) 남자가 지음 받지 아니하고 여자가 남자 때문에 남자를 위해서 지음을 받았다고 말함으로서, 그리고 이 사실을 남자의 머리됨 남자의 권위의 근거로 제시함으로서 분명히 하고 있다. 또한편 남자의 갈비뼈 남자의 신체의 일부로 여자를 지으셨다고 하는 사실은 남자와 동일한 본질을 소유하며 남자와 동등함을 상징하는 사실이기도 하지만은 동시에 여자가 남자로부터 취하여졌다고 하는 의미에서 여자의 종속성을 분명히 뜻한다. 고린도전서11:9-12절에서 이 사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근본적으로는 하나님께서는 남녀를 같이 창조하셨으므로 인간존재의 궁극적 절대적 근원은 하나님이시요, 이런 의미에서 남녀는 동등하지만은 동시에 남자로부터 취하여진 고로 제한적인 이차적인 의미에서 여자의 존재의 근원(εκ라는 전치사를 주목하라)은 남자라고 말함으로서 여자의 종속성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디모데전서2:13절에는 이것을 우회적으로 표현해서 남자가 먼저 창조되고 그 다음에 여자가 창조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뿐 아니라 아담이 하와를 보고 이름을 짓는 행위 즉 “여자라 하리라”라는 행위도 남자의 권위와 여자의 종속성을 함의한다고 볼 수 있다.
이상에서 본바와 같이 남자와 여자의 관계는 동등성과 아울러 종속성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얼핏보면 상반개념으로 동시에 수용될 수 없는 듯한 동등성과 종속성이 실은 인간의 본질에 있어서의 동등성과 지위역할의 종속성이란 의미에서 남녀관계라고 하는 하나의 관계 속에 통일 결합될 수 있다고 하는 것을 보았다. 간명하게 표현하면 남녀질서는 거시적 동등성과 미시적 종속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고린도전서11:3절에 보면 - 어떤 사람이 이 문제에 대해 말했기 때문에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여자에 대한 남자의 머리됨, 권위를 서자에 대한 성부의 권위에 비교되고 있는데 혹자는 이에서 추론하기를 성부와 성자는 동등하시니 따라서 남자의 headship도 반드시 여자의 종속성을 함의하지 않는다고 강변한다. 그러나 실재 있어서 성삼위에 있어서 신적 본질, 하나님 되심에 있어서는, 그 능력과 신성과 영광,권세 등에 있어서는 완전히 동등하시지만 존재의 방식에 있어서는 사역을 포함한 존재의 방식에 있어서는 성자께서는 성부에게서 영원적으로 발생하시고 성자께서는 성부께 복종, 종속하신다고 되어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남녀관계에 있어서 거시적 동질성과 동등성, 미시적 다양성내지 종속성의 신비한 하나의 원형을 본다고 말할 수 있다.
6.男女關係의 協力補完의 關係
그 다음으로 살펴볼 것은 협력보완의 관계이다. 하나님께서 남자에게 여자를 조력자로 주셨다고 하는 것은 남녀의 관계가 협력보완의 관계임을 암시한다. 그러나 이 관계는 상호 대등한 입장에 있어서의 협력 보완관계가 아니라 여자는 남자의 남자의 권위 아래 있는 종속적 협력의 관계임을 분명히 한다. 혹자는 말하기를 남녀관계가 타락 전에는 대등한 협력보완 관계였으나 타락후 저주와 심판으로 창세기3장에 나온 데로 종속적 관계가 되었다고 말함으로서 타락전 종속성을 부정한다. 그러나 딤전2:13절에서는 여자의 종속성과 남자의 권위의 근거가 이중근거, 즉 남자가 여자보다 먼저 창조된 것, 말하자면 여자가 남자에게서 취해진 사실과 여자가 먼저 범죄한 사실 두 가지를 함께 제시함으로서 여자의 종속성이 타락 전에도 분명히 있었음을 밝히고 있다. 굳이 그 차이를 말하라고 한다면 타락 전에는 종속적 협력관계였던 것이 타락 후에는 종속적 지배관계로 변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에제르(רזע, 돕다)와 ‘마샬’(לשׁמ, 다스리다)의 차이를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7.머리된 權威의 意味
이처럼 남녀관계는 동등성과 협력보완성을 갖는 동시에 종속성 또한 분명히 가진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여자의 종속성은 결국은 남자에게 있어서는 머리됨 곧 권위를 의미한다. 그러나 남자의 이런 권위를 여자에 대한 부당한 태도로 보고 분개하는 여성 못지않게 남편 쪽에서도 이 권위를 오해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대개의 사람 특히 타락한 인간은 이 권위라고 하는 것을 이기적 관점에서 이해하려고 한다. 즉 나의 권위라고 하는 것은 나를 위한 권위로 생각한다. 특히 다스린다고 하는 말은 일반사회 내지 정치사회에서는 강자가 약자를 우등한자를 열등한자를 지배하여 자기 이익을 도모하는 의미로 통용된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권위, 내지 다스림은 이와 전혀 다르다. 하나님의 피조계 통치는 피조계를 축복하는 다스림이요, 인간의 자연계의 통치는 자연계를 번창케하고 창달케하는 다스림이다. 이기적 목적을 위해서 착취하는 다스림이 아니라 축복을 베푸는 다름이다. 에베소서5:2이하에서 남자의 머리됨, 권위의 의미를 설명하기를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하라고 말하고 있다. 말하자면 남편의 머리됨의 권위는 아내를 자신의 생명까지 희생적 사랑의 다스림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베드로전서 3:7절에서는 아내를 더 연약한 자로 여겨서 위하여 돌보라 말하자면 여자의 연약함을 베려 하면서 동거하라, 함께 살라고 말씀하고 있다. 남자의 권위는 자기를 위하여 상대방을 희생시키는 권위가 아니요, 상대방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는 섬기기위한 권위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정하신 남녀질서에 따라 남자는 남자답게 여자는 여자답게 행하기를 원하신다. 남자는 권위와 leadership을 발휘하되, 남자답게 즉 남자답다고 하는 대명사는 힘이다. 그래서 히브리어를 보면 남자를 뜻하는 “게베르”(רבג)라고 하는 단어는 무엇과 연결되어 있는가 하면 “그브라”라고 하는 남자다움, 힘을 뜻한다. 그런데 이 남자다움을 행사하는데 있어서 사나움으로 해서는 안된다. 나의 이익을 위해서 남을 희생시키고 억누르는 그런 힘, 사나움으로 해서는 안된다. 그런 힘은 폭력배의 남성다움이다. 오히려 남자의 힘은 어떤 식으로 발휘되어야 하는가? 관용과 너그러움, 약자를 돕고, 돌보는 것, 그리고 용기와 담대함, 자기 희생적 사랑으로 행하실 것을 하나님은 원하시며 오히려 남자가 남자답지 못할 때 마땅히 용기를 내어서 자기 희생을 각오하지 않고 주저하거나 나약할 때 이를 수치스럽다고 하신다. 드보라가 바락더러 가라고 했을 때 주저주저하니까 책망한 것을 우리가 알 수 있다. 남자답지 못하니까, 나약한 바락에 대한 책망의 사실을 성경에서 확인할 수 있다. 남자에 대해 종속적 위치에 있는 여자는 모든 행위에 있어서 여자다워야 하는데 여자라 그러면 우리에게 있어서 들어오는 것은 아름다움이다. 남자는 힘이라고 한다면 여자는 아름다움이다. 그런데 여자의 아름다움을 성경은 말씀하기를 요즘 도깨비같이 화장하는 것을 아름답다고 하지 않고, 순복하는 자세 순종하는 자세를 아름답다고 한다. 여자가 남자에 대해서 순복하는 자세를 취하는 것을 두고 성경은 노예적인 비굴함이라고 낮추어 보지 않고 오히려 여자다움의 상징인 단정한 긴 머리가 여자에게 있어서는 영광이요, 남편에게 순종하는 자세는 내면적인 단장 내면적인 아름다움이라고 베드로전서3:5절에서 말하고 있다. 이 자세에 부합하는 겸손과 조용한 태도가 여자에게 있어서는 비굴함이 아니요 하나님 앞에 귀한 것이라고 했다. 즉 여인의 진정한 내적 영적 아름다움이라고 했다. 이와 관련해서 자기를 가리우는 여자다움의 상징인 이 베일이 여인의 깊음과 위엄을 상징했다고 하는 램스웨이의 말을 우리가 한번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오히려 이러한 여자다운 태도를 버리고 남자처럼 행동하는 것 마땅히 공중 앞에서 자기를 가리울 줄, 숨길 줄 모르고 나서는 일을 가리켜 수치스러운 일이요, 괴악한 일이라고 말씀한다. 하나님의 교회에서는 그런 예가 없다, 그런 과행이 없다고 말씀한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질서를 따라 남자는 남자답게 여자는 여자답게 행동하는 것이 가장 선하고 아름다운 이유는 만사를 그 때에 따라 아름답게 행하시는 하나님이시니 그의 뜻 그가 세우신 질서를 따라 행하는 것이 가장 선하고 아름다울 것은 자명한 일이다. 따라서 여자의 종속적 위치, 물론 본질적 동등성을 토대로 하는 것이지만 여자의 순종하는 위치에서 벗어나서 남자와 대등하게 행동하도록 부축이는 사람들은 첫째로 하나님을 거스르는 자요, 둘째로는 여성의 지위를 향상하고 영예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은 여성으로 하여금 수치스럽고 욕되게 하는 것이다. 이때까지 남녀질서의 동일성 다양성 동등성 종속성 협력보완성에 대해서 언급했다.
8.하나 됨
창세기 2:24절에 보면 남자는 부모를 떠나서 그 아내와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룰 지니라고 되어 있다. 얼핏보면 남녀의 구별성은 상호간의 단절을 초래해서 공동체로 함께 존재할 수 없게 하는 것 같지만은 여자가 남자의 신체일부 남자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졌다고 하는 하나 됨에 의해서 함께 살수 있게 되고 종속적 불평등 관계는 알력과 갈등을 일으킬 것 같지만은 이 하나 됨에 의해서 해소된다. 내 손이 내 머리의 지시대로 따르지만은 결코 굴욕감은 느끼지 않는 것은 손과 머리는 한 몸에 속하기 때문이다. 머리는 몸의 각 지체가 다칠세라 염려하고 보호하지만은 자기가 희생한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은 모두가 하나이기 때문이다. 내 머리요, 내 손이요, 내 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하나 됨은 동질성 동등성 협력성 만이 아니고 다양성과 종속성을 내포하는 유기적 하나됨이다.
9.男女秩序의 擴張性
온 땅에 충만한 인류 공동체를 이루시기 위한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남녀는 가정을 이루어서 자식을 낳음으로서 그 공동체를 확장시키며 이 과정을 따라서 공동체내의 인간관계는 부모자식의 관계, 형제의 관계, 가정 사회, 전 인류의 관계로 폭이 넓어진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인간 공동체와 그 속에서 인간관계의 폭이 아무리 넓어지더라도 그 기본 성격과 원리는 남녀부부, 즉 가정의 경우와 같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다양한 인간관계 속에서 그 성격과 정도가 그리고 그 표현양식이 달라지지만은 남녀질서의 기본원칙들은 모든 종류의 인간공동체에게 적용된다고 할 수 있다. 남녀질서의 기본 원칙을 다양한 공동체의 적용가능한 원칙으로 일반화시켜 본다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본질적 동질성과 동등성을 소유 하시지마는 똑같은 복제인간을 통해서가 아니라, 서로 구별된 전혀 다른 존재들 다양한 모습과 재능을 가진 다양한 기능을 가진 사람들로서 공동체를 형성하신다. 두 번째로 각 사람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위치에서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를 따라 그 직무를 행하게 되어 있다. 이것은 각 구성원이 그 독자적인 존재의 의미를 갖는다는 것과 동시에 각 사람은 다른 위치의 사람과 그 직무를 인정하고 존중해야 함을 의미한다. 참으로 아내가 남편의 지위와 직무를 존중하고 남편의 마음으로부터 아내의 지위와 하는 일을 귀하게 여긴다고 하면 부부간에 별 불편이 없을 것이다. 다 부엌일을 천하게 여기니까 여자가 억울한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아이 기르는 일을 참으로 귀하게 여긴다고 한다면 그것이 겉으로 나타난다고 한다면 결코 여자들은 불평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는 다스림과 순종의 상하질서 일수도 있고 상호 협력보완의 질서일수도 있으나 그 어느 구성원도 부당한 위치에 처하거나 불평등대우를 받는다고 할 수 없는 것은 전체가 하나의 몸을 이루어 하나이기 때문이다. 즉 온 구성원이 합력해서 하나의 몸을 세우는 것인데 이런 공동체를 가리켜 흔히 유기적 공동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러한 유기적 공동체의 존재의 원리는 사랑의 원리이다. 사랑으로 다스리고 사랑으로 협력하고 사랑으로 순종하는 원리요 서로를 위해 희생하고 서로를 통해 도움 받고 힘을 합해서 한 몸을 세우는 원리이다. 한 조상 아담의 살과 혈육에 참예함으로서 육적으로 한 몸된 인류공동체에도 적용되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인류 타락으로 말미암아 이러한 이상적인 공동체의 실현은 불가능해져 버렸고 다만 바람직한 이상적 원리로서만 존재하게 되었다. 이 상실한 인류 공동체의 참모습을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이루어진 공동체 그리스도의 혈육에 참여함으로서 한 혈육, 한 몸이 된 공동체 즉 교회를 통해 회복하시고 완성하시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각각 한 성령으로 세례 받아, 한 영적 공동체를 이루었고, 이 영적 공동체는 유기적 공동체요, 이 공동체의 존재의 원리는 사랑의 원리라고 하는 고린도전서 12,13장의 말씀에서 남녀질서의 기본원칙이 영적 공동체인 교회에도 적용됨을 우리가 알 수 있고 더욱이 부부관계를 그리스도와 교회관계에 비유하는 에베소서5:32절이 이를 뒷받침한다고 할 수 있다. 조금더 고린도전서 12:-13장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본다고 한다면은 영적 공동체인 교회에 대해 다음의 사실들을 확인할 수 있다. 우선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새로운 영적 존재가 되었다는 의미에서는 본질적 근본적, 동질성과 동등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이런 거시적 동질성과 동등성에 있어서는 모든 육적 구별이나 종속의 질서, 영적 구별과 종속의 질서가 해소가 되어 버린다. 여기에서는 사도와 선지자와 치리자와 평신도와 남녀노소와 신분의 모든 구분과 차이가 거시적 동등성과 동질성 속에서 해소가 되어버려서 하나의 몸, 하나의 영적 공동체를 형성한다고 말씀한다. 고린도전서 12:13절 “우기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였느니라”고 하는 말씀의 뜻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이 거시적 동질성과 동등성이 미시적 구별과 종속성을 배제하지 않는다고 하는 사실을 이 영적 공동체가 유기적 공동체요, 그 하나됨이 유기적 하나 됨임을 밝히는 바로 그 다음 말씀들에 의해서 확인이 된다. 이 하나됨은 영적 구별과 종속의 질서뿐만 아니라-사도,선지자,교사,행정등 다양한 은사와 직분들-육적 구별과 종속의-질서 남녀노소 신분의 차이-즉 영적, 육적 다양성과 종속이 질서를 내포하는 포함하는 유기적 하나 됨임을 밝히고 있다. 특히 육적 구별과 차의 질서가 영적 공동체인 교회 내에서도 한시적으로나마 지켜질 수밖에 없는 것은 우리가 현창조질서를 사는 동안에는 우리의 영적 새생명도 현창조질서의 형식을 통해 표출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영적 새생명은 부모와 자식관계, 부부관계, 이런 여러 현 창죄질서를 따라서 표현되게 되어 있다. 따라서 남녀질서에 함의된 공동체의 원리가 새 영적 공동체인 교회에도 유효함을 알 수 있다. 즉 한 성령으로 세례 받는 것 이것은 근본적 본질적 은혜에 있어서는 모두가 동질이요, 동등하지만은, 미시적 은혜, 즉 직분과 다양한 은사와 직분의 역할에 있어서는 다양성과 종속성이 존재한다. 교회의 하나 됨은 이런 거시적 동질,동등성과 미시적 다양성과 종속성을 내포하는 그 자체 안에 통일시키는 유기적 하나 됨인 것이다.
10.敎會 內에서의 男女秩序
앞에서는 남녀질서의 기본원칙이, 즉 남녀질서 속에 함축된 기본 원리들이 영적 공동체에도 적용된다고 말을 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우리의 문제와 관련 있는 좀 더 직접적으로 관련 있는 그저 남녀질서 그 자체가 말하자면 일반적 원리의 상징으로서가 아니고 남녀질서의 그 자체가 교회 내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또 어떻게 적용되어야 하는지를 살펴보자.우선 여성 교역을 찬동하는 사람들 즉 남녀 평등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가장 중요하게 제시하는 성경구절이(제가 느끼기로는) 바로 사도행전2:16-21이 아닌가 생각한다. 요엘서 3장의 예언을 인용하고 있는 곳이다. 여기에서 오순절날 성령께서 다락방에 모인 각 사람에게 임하신 후에 이들이 각국 방언으로 하나님께서 행하신 위대한 일, 구원의 복음에 대해 증거한 일에 대해서 베드로 사도는 이일을 요엘서 3장 1절-5절의 예언의 성취로 보고 이 사건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이 구절에서 여성교역의 근거를 발견하는 사람들은 이 은혜가 아들과 딸들 남종과 여종등, 남녀구별 없이 평등하게 임하리라고 예언한 사실에 주의해서 여기에 추론하기를 극단적인 경우는 교회 내에서는 남녀의 구별이나 질서가 무의미하거나 철폐되었다고 주장하고 좀 나은 경우는 적어도 이 은혜 받음에 있어서, 성령을 받아 예언하는 일에 있어서 만큼은 남녀의 구별이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여기에서 우리가 우선 생각해야 할 것은 오순절에 임한 은혜의 포괄성이다. 오순절사건을 요엘서3:1-5의 성취로 볼 때 성령께서 임하여 예언하게 하실 것이라고 하는 표현은 고린도전서 11,14장에서 말하는 성령님의 계시로 예언하는 것, 특별히 공예배에서 예언하는 것과 같은 구체적이며 특수한 형태의 예언이 아니고 일차적으로는 오순절 사건 그대로 방언으로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을 증거하는 것을 가리키고 더 나아가서 사도행전 1:5,8절에서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대로 오순절의 성령의 오심은 성령세례, 즉 성령으로 새 존재가 됨을 의미하고 예언한다고 하는 것은 성령님의 능력이 임하여 그리스도의 증인될 것을 뜻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여기 그리스도인의 증인사역은 사도적 증언 선포, 가르침등 다양한 형태, 다양한 상황에서 다양한 사람들의 그 증언을 뜻하는, 포괄적인 형식의 그런 증언을 뜻하는 것이지 고린도전서11,13장의 공예배에서의 예언과 같은 특수한 예언을 취급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성령세례도 그리스도안에서 새 존재가 됨을 뜻하는 매우 포괄적인 은혜이다. 사실 오순절사건의 의미는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사 만유의 통치권세를 받으신 후 성령님을 보내사 그의 왕적 통치를, 즉 성령님으로 새 존재가 되게 하사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게 하시는 사역을 시작하심을 뜻하는 것이다. 또한 유의해야 할 것은 이 오순절의 은혜 특히 성령세례의 포괄성은 그 은혜의 보편성과 밀접하게 관련되서 나타난다는 것이다. 사실 아들과 딸 남종과 여종 등의 표현은 남녀질서의 철폐에 관련해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남녀노소 종, 자유자 신분등 모든 계층의 사람, 문자 그대로 모든 육체에 은혜가 임한다는 개방되어 있다는 이 은혜의 보편성과 관련되어 나타난다. 흥미롭게도 남녀노소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라는 이 표현은 항상 성령세례등 그리스도인의 가장 기본적이고 본질적이고 보편적인 은혜와 관련해서 나타난다. 사도행전10:44,11:16에 보면 오순절과 동일한 적어도 동질의 성령세례의 은혜가 방언 말함과 하나님높임의 현상까지 이런 동일한 은혜가 이방인 고넬료가정에 임함으로서 이 은혜 받음에 있어서 유대인이나 이방인의 차이가 없다는 것이 밝혀졌다. 동일한 한 성령으로 세례받아 한 영적공동체 교회 안에 이방인도 속하게 되었다고 하는 것을 웅변으로 보여주는 사건이 바로 그 사건이었다. 조금 전에 읽은 고린도전서2: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이 사람들이 흔히 인용하는 갈라디아서 3:27-28절이 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함께 세례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 너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 자나 남자나 여자없이 다 그리스도안에서 하나이니라” 여기도 보면 어떤 그리스도인의 근본적인 은혜, 본질적인 은혜와 관련해서 그것의 보편성을 이와 같은 표현으로 말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성구들은 한결같이 그리스도안에서 세례받아 새 존재가 된 것과 한 몸 안으로 속하게 되었다고 하는 가장 기본적이고 포괄적인 은혜의 보편성을 말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추론이 가능할 것이다. 그리스도안에서 성령으로 새로운 존재가 되어서 한 몸에 속하게 되는 것 그리고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사는 것과 같은 기본적인 은혜에 있어서는 즉 그리스도인 됨에 본질에 있어서는 남녀노소 신분에 따른 차이가 있을 수 없으며 동일하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는 육적 구별과 차이뿐만 아니라 영적 차이와 구별도 해소되어 버린다. 선지자나 사도나 그 어떤 교회의 여러가지 상하질서도 하나 됨에 있어서는 다 동등하다. 다 한 성령으로 한 몸에 속하게 된 것이다. 여기서는 어떤 차이도 있을 수 없다. 말하자면 공동체의 원리중 거시적 본질적 동등성과 동질성이 영적 공동체인 교회에도 적용된다고 말할 수 있다. 특히 남녀와 관련해서 말한자면 그리스도인됨의 본질에 있어서는 남녀가 동등이요 동질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3:7절에 보면 생명의 은혜의 공동상속자로서(싱클레로 노모스) 저를 존중히 여기라고 되어 있다. 이것은 다 본질에 있어서 남녀가 동등하다는 말씀이다.
11.男女秩序의 限時性 暫定性
이것을 더 포괄적으로 말하자면 현 창조질서의 한시성 잠정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 후에 천사와 방불해서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심으로서 부활후에는 남녀질서가 무의미 폐지, 철폐될 것을 말씀하셨다. 즉 남녀질서는 우리가 현 창조질서 내에 살 때만이 적용되는 한시적이요 궁극적인 질서가 아니라는 점을 밝히셨다. 그래서 고린도전서7:29절 같은 데에서는 “이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라고 말씀함으로서 남녀질서의 한시성과 잠정성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궁극적이요 영구적인 질서가 아니라고 해서 교회에서 이런 육적질서를 무시해도 좋은가? 그것은 아니다. 부모자식간 관계에 있어서의 상하질서도 육적인 질서에 속하는 것이며, 연령에 따른 상하질서도 육적인 질서인데 교회에서 교회 나온다고 해서 윗사람이나 부모에게 아무렇게나 해된다면 말이 되겠는가? 부모에게 그렇게 해되면 그것을 옳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근본적인 질서가 남녀의 질서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됨의 본질, 근본적인 은혜에 있어서 남녀의 동등성과 남녀질서의 한시성에도 불구하고 교회 내에서 남녀질서는 존중되어야 한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남녀질서의 엄중성에 대해서 이를 범하는 것은 어느 교회에서든지 이런 일이 없다고 하면서 이에 대해서 이론을 제기하는 자에게 그가 선지자이든지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자이든지 신령한 자든 간에 이것은 주의 계명이니 다른 소리하지 말라고 못을 박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근본적인 동등성이 한시적이고 미시적인 종속성을 배제하지 않음을 조금 전에 공동상속자라해서 남녀의 동등성을 이야기한 베드로전서 3:7절에 동시에 이야기한다. 생명의 은혜를 상속함에 있어서는 남녀가 공동상속자이며, 동등하지만은 동시에 여자를 더 연약한 그릇으로 알라고 권하고 있다. 교회에서도 여자는 남녀질서를 따라서 여자답게 행할 것을 겸손과 종용함과 복종하는 자세로 행할 것을 명하고 이것이 수치와 비굴함이 아니요, 이것이 오히려 거룩한 부녀들 그리스도를 믿는 여인들의 진정한 내면적 영적 아름다움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렇게 행하지 않는 것이 수치라고 말하고 있다. 성령으로 새롭게 된 자라 할지라도 현 창조 내에 사는 동안 남녀질서를 따르는 것이 당연하고 아름다울 수밖에 없는 것은 영욕의 통일체로 존재하는 한 영적 새생명도 현 창조질서를 따라 표현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12.具體的인 命令-女性敎役의 限界와 關聯해서
현 창조 내에서 사는 한 남녀질서를 존중하라고 하는 일반적인 교훈이 구체적인 상황에서도 구체적 명령으로 제시되는 말씀들이 있다. 즉 교회 내에서 남녀 질서가 무시되거나 문란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구체적으로 명령하시는 말씀들이 있다. 특히 공예배에서는 여자의 말하는 것, 이것은 단순히 예언이나 방언을 하지 말라는 정도가 아니고 더 포괄적인 이야기이다. 말하는 것까지... 저도 한국전통에서 자라서 성경을 보면 더욱 엄격해진다. 나 자신도 주체할 수 없을 정도다. 공식석상에서 질문하는 것까지도 안된다고 말한다. 고린도전서 11장에서는 공예배에서는 남자는 남자답게 권위와 헤드슆을 가지고 행할 것이요, 여자는 순종하며 배우는 자세를 취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공예의 범위를 벗어나서 좀더 일반적인 상황에서 여자가 여자를 대상으로 여자에게 친숙한 일들 특히 가정사등을 가르칠 수 있으나(이것은 디도서에 나온다) 가르치는 일, 가르친다고 하는 행위 자체가 그 안에 권위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가르치는 일 특별히 남자의 권위를 무시하는 형식의 가르침은 허용되지 않는다고 디모데전서 2장에서 말씀하고 있다. 여타 다양한 은사와 직분수행에 있어서도 남성의 권위를 존중하며 여성다움의 겸손과 순종의 자세에 합당한 형식으로 이런 다양한 은사와 직분들을 수행해야 할 것이다. 예언의 은사의 경우도 여자에게 전혀 주어지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힘들 것이다. 빌립의 딸들도 있었고, 또 고린도전서에서 여자에게 이런 예언이나 이런 말하는 것을 금한 것 자체가 아마 여자들 가운데 예언의 은사 방언의 은사등 여러가지 가르침의 은사들을 받은 것을 전제하는 것이 쉬울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은사를 행함에 있어서 항상 하나님께서 정하신 원칙과 남녀의 질서를 허물어뜨리지 않는 방식으로 행해야 한다는 성경의 뜻일 것이다. 이런 말씀들에서 일반적 원칙을 도출해 본다고 한다면 최대한으로 일반적으로 포괄적으로 말한다면 교회에서나 가정에서나 어디에서나 여자에게 합당한 태도에서 벗어나는 특히 남자의 권위를 손상시키는 어떤 형태의 행위도 허용되지 않는다고 말할 수있다. 오직 여자는 겸손과 순종과 조용함으로 행할 것을 명하시며 이것이 하나님앞에 귀한 일이라고 말하고 있다. 가장 구체적으로 또한 최소한으로 축소해서 말한다고 할지라도 성인남녀가 합석한 공석상에서 특히 예배시에 말하는 것은 예언이나 기도, 설교, 가르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특별한 사적인 인간관계, 즉 가족 관계 내에서 어머니는 아들을 교육, 훈계할 수 있다. 잠언 같은 곳에서는 오히려 하라고 했다. 또는 누이는 남동생을 훈계할 수 있다. 또 가정의 태두리를 벗어나서 사회에서도 사적인 경우 어머니와 같이 나이가 많고 친숙한 분이 연장자적 입장에서 어린 남자의 잘못을 훈계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적 관계가 해소되는 공석에서 특히 불특정 다수의 공중 앞에서는 여자는 자신을 가리우는 것이 나서서 말하지 않는 것이 여자다운 태도라고 말할 수 있다. 가르치는 것을 금한다고 하니까 주일학교는 어떻게 하느냐고 질문하는 경우도 있다. 저는 원칙으로는 그것도 금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그러나 한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조금 전에도 보았드시 남녀의 질서 권위문제가 다른 인간관계 다른 질서에서 넘어설 수도 있다. 어머니는 남자인 아들을 가르칠 수 있다. 이것은 남자의 권위가 부모라는 권위 앞에 의해서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고 볼 수있다. 이것을 유추한다고 그러면 성인 여자가 어린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은 가능하지 않을까라고 생각이 된다.
13.하나 됨의 意味
그러나 이러한 권위, 종속성의 불평등한 관계가 자연스럽고 어느 구성원에게도 부당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모두가 하나이기 때문이다. 즉 다스림이나 순종이나 모두가 궁극적으로는 서로를 섬겨서 하나의 몸 하나의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우는 하나의 사랑의 형태들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서 정하신 질서이기 때문이요, 이 질서에 따라서 행하는 것이 아름답고 선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 질서를 무시하는 행동을 가리켜 괴악하고 수치스런 일이라고 극언하는 것은 남녀의 질서가 인간 질서에 있어서 가장 근본적인 구별의 질서요, 가정과 사회 교회등 모든 제도에 모든 인간관계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울은 이를 무시하는 자들에 대해서 주의 명령을 계명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시간이 다되었다. 왜 여성교역의 근거로서 제시되는 개별적 사례들 특별히 구약의 드보라나 신약의 브리스길라가 등이 있는데 취급해도 좋지만 시간이 없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개별적 사례들은 일반적 원칙에 따라서 평가되고 판단되고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그 원칙에 어긋나는 것은 예외적 상황으로 취급하는 것이 좋고 성경자체도 그런 쪽으로 암시하고 있다고 생각이 된다. 발표하는 것은 이것으로 마치겠다.
첫댓글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