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因緣
<제3편 세상꽃>
① 첫사랑 준희-17
이러한 동병상련의 아픔을 가슴에 고스란히 간직하였을 그녀는 어김없이 이곳으로 달려와서 가슴속 깊이에 묻어둔 눈물겨운 사연들을 어김없이 털어놓을지도 몰랐다. 실은 그녀에게 사랑을 간절히 느끼는 까닭도 그렇게 닮은 아픔을 서로 기탄없이 털어놓을 수 있는 절실함이 엿물처럼 끈끈하게 달라붙는 때문이 아닌가 싶었다.
아버지가 없는 서러움이란 아버지가 없이 살아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을 거였다.
그는 아버지가 없이 살아온 지 어느덧 삼년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러한 동안 불연 듯이 나타나는 꿈속의 아버지를 곧잘 보았고, 그러할 적마다 감격어린 뜨거운 눈물을 흘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리고 그 흐느낌으로 깨어나면 또 다른 상실감에 사로잡히어 더욱 슬퍼지고는 하였다.
이곳 두메산골 열두 매기는 이번 전쟁에서 상처를 입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하기에 가족과 헤어지어서 슬픈 이별을 맛본 사람도 없었다. 참으로 평화스럽고 복된 사람들만이 꾸밈없이 지순하고 순박하게 살아가는 피난고지임에 틀림이 없었다.
그는 골짜기 먼 곳에 시선을 꽂아놓은 채로 천진한 눈망울에 눈물이 서리었고 채워지는 물기가 또 뺨을 흘러내리었다. 얼음덩이보다 더 차갑고 시리어오는 고독과 번민에서 오는 쓰린 아픔과 견딜 수 없는 슬픔 때문일 거였다.
이러한 아픔과 슬픔을 준희와의 뜨거운 사랑으로 메워야 한다는 생각에 미치었던 거였다. 그렇지 않고서는 잠시도 견디어낼 수 없는 고통의 연속이었고, 그로부터 몸속의 어딘가를 마구 저미고 있었던 거였다.
한 올의 바람결이 스치어갔다. 그가 끝내는 슬픔에 잠기었는데, 드디어 서낭당 고갯마루께서 바람을 타고 인기척이 들리어오고 있었다. 토닥거리는 발소리와 주고받는 대화는 정녕 여자들의 것이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리었다. 소리가 차츰 가까워질수록 그는 더욱 몸을 움츠린 채로 칡넝쿨 사이에서 소리가 나는 쪽을 살피어보았다.
‘아, 준희다!’
그는 얼핏 준희의 모습이 눈으로 들어오자 탄성을 올리었다. 그런데 준희는 혼자가 아니라 누구와 함께 오고 있는 게 아닌가. 그렇다면 그녀를 대뜸 만날 수가 없을 건만 같았다. 오늘도 그녀와 호젓하게 만나기는 글렀다는 낭패감이 그를 꽁꽁 묶었다. 누구와 있는 데에서 그녀와 사랑을 이야기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는 문득 가슴 한 켠이 무너지어 내리는 느낌이었다.
그러자 그는 주눅이 들어서 바싹 넝쿨 속으로 몸을 감추어야 만하였다. 발소리와 함께 주고받는 소리가 가까이로 들리어오더니, 그네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그가 몸을 숨긴 곳을 돌아보지도 않고 그냥 지나치고 말았다.
그러자 그는 숨어서 그네들의 뒷모습만 허탈한 눈길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준희는 다름 아니라 단짝인 기분이와 함께 걸어가고 있었던 거였다. 그녀와 둘이는 자나 깨나 늘 실과 바늘처럼 단짝이었다.
그는 얼른 칡넝쿨을 뛰쳐나와 준희 앞에 달려가고 싶은 충동이 불끈 솟았다. 그리고 격한 눈으로 그녀를 마주보고 싶었던 거였다. 그러나 마음뿐으로 그렇게 하지를 못하였다. 그러할 용기도 없으려니와, 그렇게 하여서는 아니 될 거라고 마음속에서 말리었다.
준희는 그가 보낸 편지를 읽어보았을 건만 같았다. 하기에 기분이를 데리고 이곳까지 일부러 온 거라는 생각이 번개처럼 스치었다. 그녀의 속맘은 이곳을 지나치면서도 칡넝쿨 속을 스쳐보고 싶었을 터이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였으리라. 하지만 그녀는 충분히 그를 의식하였을 게 분명하였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녀가 이곳을 지나칠 까닭이 하나도 없었다.
그는 이렇게 자위하면서도, 무엇인가를 놓친 실심으로 마냥 씁쓸하고 안타까움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어찌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하염없이 멀어지어가는 그네의 뒷모습만 망연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거였다.
그는 바람에 날리는 준희의 뒷머리 채를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그곳에서 천천히 빠져나왔다. 그리고 빈 가슴을 끌안고 터벅터벅 집으로 돌아왔다. 기대가 어그러지는 순간, 몸과 마음 또한 풀잎처럼 힘을 잃고 땅바닥에 누웠다.
하지만, 한 가닥의 희망은 걸리어있었다. 그녀의 생각이 미치고 있다는 확연한 사실이 그의 마음을 쓰다듬어주었던 거였다.
아무튼 그는 영육이 모두 나른하여지어서 힘아 리가 풀리고 피로에 젖어들었다. 집 앞의 고래실논배미에서 개구리소리가 유난히도 요란스럽게 들리어왔으나, 가마득하게만 느끼어지었다.
첫댓글 불쌍한 용훈
하지만 이또한 지나가겠지요 ㅎ
오르지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는 속담이
요즘은 사다리를 타고 오른다고 바뀌었다지만
과연 사다리를 구해다가 오를 정도로 가치가 있는 것인지는
용훈이가 판단하겠지요 ^^*
정녕 가엾지요. 그러나 세상사란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게 정상이지요.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욕구불만에 차있습니다. 물론 용훈도 불우한 상태에서 이것을 극복하려는 어린 마음이 가상하기는 하나 어린 시절 실패를 거듭하게 되면 깨닫는 바도 있고 그로부터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게도 되지요. 그러나 세상은 인간이 바라는 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 다만 노력에 의해서 조금씩 성공하고 조금씩 성과가 나는 것일 뿐입니다. 이 성공과 성과라는 것도 욕심을 버리면 느껴지고 욕심을 갖게 되면 무용지물이 아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