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피노자의 표현의 문제 ] 질 들뢰즈 저 이진경, 권순모 역 인간사랑(경기도 고양:
2004)
복음에는 반대하지만 신의 존재는 인정하는 우상숭배적인 철학자들에게는 성경이 되레 참 신의 계시와 진리를 가로막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성경보다 더 큰 계시, 성경보다 더 넓고 분명하고 더 확실한 신의 뜻을 자력으로 밝혀보려고 끊임없이 시도해 왔다. 그것은 단순히 교회라는 종교의 영역까지 시시하게 보겠다는 비교의식에서 아니라 어쨌든 최종 진리에 닿으려는 집념만큼은 인간들의 본성상 멈출 수가 없기 때문이다.
스피노자가 주장하는 ‘표현’이란 곧 신학에서 말하는 ‘계시’와 같은 용도이면서도 그 ‘계시’를 낳게하는 계시까지 아울러 포함시키는 개념이다. 따라서 이 신의 표현을 알면 신에 관해 ‘전부’를 다 아는 셈이 된다. 이러한 철학적 시도는 소위 오직 성경에 권위를 두고 시도하는 모든 이들의 논리성까지 더 능가하는 논리를 제공할 수 있다고 자부케 한다.
따라서 스피노자가 소개하는 신과 거기에 접근하는 논리를 소개하게 되면 평소에 성경 해석에 있어 모든 인위적인 해석적 논리를 함께 만나 볼 수 있다. 스피노자의 본 사상에 직접 대하기 전에 먼저 파악해야 될 사상들이 있다.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의 사상을 염두에 두고 언급했고, 데카르트라는 철학자도 중세 때의 사상을 받아들이면서 나름대로 신의 존재와 실체와 그것과 연관된 우주의 내막을 밝히려고 한 것이다.
사실 서양 고대의 그리스 형이상학에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이르러 완성된 신관은 이러한 고전적 뿌리 형성의 결정적 기틀로 등장했다. 이들이 공유하는 신 관념의 우선적 규정으로 ‘지고의 완전자’라는 개념에 대해 플라톤은 ‘지고의 선(善)’이라는 묘사를 덧붙임으로써 신의 전능성과 지선성의 공존을 꾀하는 신정론(神正論)의 고전적 원형을 이루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부동(不動)의 원동자(原動者)’라는 묘사를 통해 신의 완전성과 불변성의 동일화를 규정해 내었다. 이에 근거하여 소위 ‘신의 수난 불가성’이라는 공식이 기독교 전통에서 정통교리로 받들어져 왔다. 데카르트의 실체관은 ‘연장적(延長的) 실체’관이다. 이 주장은 초기중세의 자연 이해와 구분지어 볼 필요가 있다.
초기중세에서 자연은 ‘스스로 그러함, 스스로 그렇게 됨’을 의미한다. 만물이 스스로 그렇게 된다고 하는 것은 자연이 그렇게 되어야 할 바를 그 자체 내에 지니고 있다는 뜻이다. 즉 만물이 자기 자신의 본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위적이 아닌 자연적인 운동은 자연물이 자신의 본성에 따라 자기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는 운동이다.
물, 흙, 공기, 불이 각기 그 자신의 고유한 자리를 가지며, 자기 자리를 찾아 운동하는 자연물은 자기 자리에 도달하면 그때 비로소 정지할 수 있다. 자연물이 각각 자기 자리가 다른 것은 그 각각의 본성이 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며, 자연에서의 이러한 질적 차이를 가장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지상계와 천성계의 질적 구분이다.
자연물의 운동 과정을 그것이 미래에 위치하게 될 자리, 운동의 목적지에 따라 목적 지향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곧 운동의 힘이 자연물 자체에 목적인으로서 내재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연에서의 변화 및 성장은 스스로 자기 자리를 찾아가는 자연의 능동적 운동이며, 스스로 자신의 목적을 실현시켜 가는 생성적인 운동이다.
우리는 이런 자연관을 자연의 운동이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라는 점에서 목적론적 자연관이라고 부를 수 있다. 다시 그 목적이 외적으로 부과되는 것이 아니라 자연 안에 본성적으로 내재된 것이라는 점에서 목적 내재적 자연관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나아가 자연은 목적으로 나아가는 운동의 힘뿐만 아니라 목적지에 도달한 후 그 운동의 끝, 즉 죽음도 그 본성 안에 함께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유기체적 자연관이라고 할 수 있다.
근세에 들어오면 자연은 더 이상 그 각각의 본성에 있어 질적으로 서로 구분되는 것으로 이해되지는 않는다. 천상계와 지상계의 구분을 포함해서 모든 종래의 질적인 구분, 존재의 계층적 다양성의 의미는 사라지고 모든 존재하는 것의 차이는 다만 양적인 차이로 환원된다. 따라서 사물 자체가 본래 속해야만 하는 본래적 자기 자리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자연의 운동은 더 이상 자신의 목적지를 찾아가는 자발적인 운동으로 설명될 수가 없다. 운동은 더 이상 최고선의 궁극 목적에 도달하기 위해 자연이 자신의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연이 지닌 획일적인 관성의 법칙에 따라 진행되는 기계의 움직일 뿐이다.
즉 할 바가 없는데도 사물이 움직이게 되는 것은 스스로 움직이고자 해서가 아니라 다른 것에 의해 피동적으로 움직여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일 뿐이다. 도달하여 멈춰 서고자 하는 자기 자리가 없으므로 한번 움직여진 것은 스스로 멈출 줄을 모르고 계속 관성에 의해 나아가게 된다.
따라서 머무르고자 하는 바가 없는데도 사물이 멈추는 것은 스스로 멈추고자 해서가 아니라 다른 것의 저항에 의해 저지받기 때문에 멈추는 것일 뿐이다. 자연은 더 이상 스스로 생동력을 갖고 움직이고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남이 밀 때 밀려가고 남이 막으면 멈춰 서는 생명력 없는 수동적 기계로 이해될 뿐이다. 이처럼 자연을 자발적 활동성이 없이 수동적으로 돌아가는 기계처럼 이해하는 자연관을 기계론적 자연관이라고 할 수 있다.
스스로 성장하는 자연에서 수동적이고 기계적인 자연으로 그 이해가 바뀌게 된 까닭은 무엇이며 그 정당성는 무엇인가? 움직이는 힘과 움직여지는 것, 활동하게 하는 힘과 활동하게 되는 것, 이들은 분명히 하나의 운동, 하나의 활동 안에 함께 들어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우리는 움직이게 하는 활동적인 것은 의식 작용이고 사물은 단지 움직여지는 수동적인 물질일 뿐이라는 정신과 물질을 이분화해서 이해한다. 즉 주-객 나누어지지 않는 포괄의 봄의 활동을 놓고서 보는 자(주)와 보여진 것(객)을 구분하는 것이 인간의 차별성의 논리이다.
‘사고하는 한 나는 존재한다’로서 데카르트가 직관한 것은 다름 아닌 나 자신에게 직접적으로 의식되고 확인될 수 있는 것은 사고의 활동성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내가 어떤 말을 듣고 있음을 의식할 때 내게 직접적으로 의식되고 확인될 수 있는 것은 사고의 활동성이라는 점이다.
그 활동성 안에서는 어떠한 분리도 아직 일어나고 있지 않다. 들음의 활동이 확실한 것이지, 말을 듣고 있는 주체가 존재한다거나 말을 듣는 나의 귀(신체)가 존재한다거나 아니면 들려진 말이 따로 객체로서 존재한다거나 말하는 타인의 입이 존재한다거나 하는 것은 확실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무분별의 확실성 안에 머물러 있지를 못하다. 사고 활동, 그것만으로서는 우리의 언어 논리에서는 불완전하다. 우리의 일상적 언어 논리는 그 활동이 누구의 활동인가 하는 활동의 주체를 묻는다. 그저 활동이란 것은 불완전하며 활동하는 것(활동 주체)이 활동의 기반인 실체로서 전제되어 그것이 속성으로 설명되어야만 납득이 간다.
이것이 곧 ‘주어-술어’ 관계의 우리 언어 구조에 상응하는 ‘실체-속성’의 관계이다. 속성이 변화하고 달라질 때 그 속성의 담지자인 실체는 불변하는 자기 동일적인 것으로서 그 변화의 기전에 놓여 있어야 한다. 이러한 실체화의 논리는 어떠한 분리를 가져 오는가?
‘봄’의 활동 자체에서는 보는 자와 보아진 것이 분리되어 있지 않으며 오히려 그 둘을 포괄하는 미분(나누어지지 않는)의 전체이다. 그런데 실체화의 논리는 활동에 앞선 존재를 욕구함으로써, 즉 활동성을 하나의 활동적인 것의 활동으로 해석함으로써 본래의 활동이 지니고 있던 포괄적 전체를 깨고 그 한쪽 끝인 ‘보는 자(주관)’ 쪽으로 가져가며 따라서 보아진 것은 그 활동 밖에 관찰의 대상으로 멈춰 서 있게 된다.
그리하여 활동은 더 이상 더 이상 주객 포괄의 활동이 아니라 보는 자의 일방적인 실체의 속성이며 그에 대해 보아진 것은 봄과 독립적인 그 자체의 실체를 따로 가지는 것이 된다. 결국 주객 포괄의 동일적 전체성의 출발점을 깨어지고 오히려 보는 주관과 보아진 객관이 각각 분리된 고정된 실체로서 출발점을 이룬다. 즉 사고적 실체와 연장적 실체의 실체 이원론이 성립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 의식에 떠오르는 사고에 대해 그것의 기반에 정신으로서의 사고적 실체를 상정하고, 시공 안에 나타나는 사물의 연장성에 대해서는 물질로서의 연장적 실체를 상정하는 것이 데카르트의 실체 이원론이다.
이에 대해 스피노자는 사고의 배후에 ‘나’라는 실체를 상정하거나 시공 안에 나타나는 연장적 속성들의 배후에 물질적 객관 실체를 상정하는 것을 비판다. 변화하는 속성들 배후에 불변하는 X로서 자기 동일성을 유지하며 개체로서 존속하는 그런 개체적 실체는 없다는 것이다.
사고성이나 연장성은 무수한 개별 실체의 근거 위에 존재하여 각각의 개체에 소속되는 개체 고유의 속성이 아니다. 왜냐하면 한 개체의 사고가 다른 개체의 사고와 관계하고, 한 개체의 연장이 다른 개체의 연장과 관계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실체화의 논리에 따라 관계의 근거로서 실체를 상정할 경우에도 그러한 개체간의 관계를 고려한다면 궁극적으로 각 개체의 실체일 수가 없으며 오히려 관계 맺고 있는 모든 개체를 포괄하는 전체의 기반의 오직 하나의 실체만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 스피노자의 생각이다.
이렇게 볼 때 사고(思考)와 연장(延長)은 각 개별적 실체에 근거한 속성이 아니라 오히려 개체적 차별을 넘어선 전체인 유일자의 실체에 속하는 속성이 되며, 우리가 흔히 개별 실체로 여기는 정신 또는 사물은 사실 실체성을 갖는 개체가 아니라 오히려 유일자의 속성이 전개되어 나타난 결과의 모습과 양태일 뿐이다. 즉 개체는 사고, 연장의 속성에 대해 그 기반이 되는 실체가 아니라 반대로 그 속성이 드러난 결과인 양태일 뿐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나에게 떠오르는 사고는 사고자, 즉 정신으로서의 실체인 내가 존재함으로써 주체가 되어 일으킨 사고가 아니다. 오히려 사고는 나를 넘어서는 유일자의 속성이며 그런 사고를 받아들이는 정신으로서의 나는 유일자의 실체에 근거해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이처럼 개체가 자기 실체성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은 그것이 변화하는 속성들 너머에 자기 동일성을 유지하는 고정적인 것으로서 다른 것과 분리되고 경계지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개체는 다른 개체들과 독립된 자기 충족적인 실체가 아니다. 그러므로 스피노자가 데카르트와 달리 개체가 실체임을 부정하고 오직 전체를 포괄하는 유일자 곧 신만이 실체라고 주장함으로써 강조하는 바는 개체의 유한성이다. 우리는 이 유한성을 우선 개체들의 상호 의존성으로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개체들 전체의 유일자에의 의존성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무한자인 신은 유한자를 자신과 분리된 것으로서 자기 밖에 가지는 것이 아니라 유한자를 그 자신 안에 포괄함으로써 진정한 의미의 무한자가 되고자 한다. 그러므로 무한 실체는 실체가 아닌 개체들과 구분되면서도 전적으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그들 개체 존재의 ‘내재적 원인’이며 또한 개체로서의 자연은 무한 실체의 한계 안에 있으면서 그것으로부터 존재를 부여받는 것이다.
이와 같은 상관 관계 안의 다양하고 유한한 개체들의 궁극 원인으로서 그들 개체 전체를 근거짓는 실체, 무한자로서 유일한 이 실체를 스피노자는 전통에 따라 ‘신’이라고 부른다.
스피노자는 ‘하나님이 이름’으로부터 시작해서 신을 규명해나간다. 오랜 전통에 따르면 신명(神名)은 신의 현시에 관계된다. 역으로 신적인 현시는 그것을 통해 신이 이러저러한 이름으로 자신을 인식시키는 말씀이다. 따라서 신을 지칭하는 이름(명사)들이 긍정인지 부정인지, 신을 현시하는 질들과 신에게 적합한 속성들이 적극적인지를 묻는 것은 결국 같은 것이다.
말씀이자 현시이고, 빛이자 소리인 표현이라는 개념은 두 가지 가설을 조장하는 고유한 논리를 갖고 있는 것 같다. 사람들은 어떤 때는 적극성을, 다시 말해 표현 안에 표현된 것의 내재성을 주장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소극성을 다시 말해 모든 표현들에 대한 스스로를 표현하는 신의 초월성을 주장하기도 한다.
감추는 곳은 또한 무언가를 표현하지만 표현하는 것 역시 무언가를 감춘다. 그래서 이름 혹의 신의 속성들의 문제에서 모든 것은 뉘앙스의 문제이다. 이른바 부정 신학은 가장 가까운 것에서 가장 먼 것으로 나아가는 내재성의 규칙 아래서 긍정들이 원인으로서 신을 지칭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러나 원인으로서의 신과 달리 실체 혹은 본질로서의 신은 가장 먼 이름들로부터 가장 가까운 이름들까지 차례로 부정되는 초월성의 규칙에 따라 부정적으로만 ‘ ̴이 아니다’ 라는 식으로만 정의될 수 있다. 그리고 마침내 초실체적 혹은 초본질적 신성은 부정들로부터도 긍정들로부터도 멀리 떨어져 빛을 발하게 된다.
따라서 부정 신학은 부정의 방법을 긍정의 방법과 결합(조합)하며, 양자 모두를 지양(止揚)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모든 사변의 중심인 신에게 다가가는 두 가지 길 또는 방법의 논리들이었다. 그 두 가지 길은 긍정의 길과 부정의 길로, 이 둘의 구별은 프로클로스에 의존해, 위(僞)-디오니시우스에 의해 발전되어 중세 기독교 철학과 신학에 전해지고, 예컨대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 수용된다.
먼저 긍정의 길 또는 방법은 피조물들 가운데서 발견되는 완전성들, 즉 신의 영적(정신적)인 본성과 양립가능한 완전성들을 신에게 돌리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그 완전성은 피조물들 속에 있을 때와 같은 방식으로 신 안에 있지 않다. 왜냐하면 신 안에서 그것들은 불완전성 없이(신에게 돌려지는 이름들의 경우에는 실재적 구별없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위-디오니시우스는 이 긍정적 방법을 따라서 선․ 생명․ 지혜․ 능력과 같은 이름(명사)들이 어떻게 초월적인 방식으로 신에게 적용될 수 있는지를, 그리고 또 어떻게 그것들이 신으로부터의 파생에 의해서만, 신 안에서 발견되는 질들(실체적 통일체로서 신 안에 있는 질들)의 다양한 분유(分有) 정도에 의해서만 피조물들에게 적용되는지를 보여준다.
두 번째 부정의 길은 신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것들, 예컨대 술취함이나 격노 등을 신에 대해 부정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초-본질적 암흑에 이를 때까지 피조물들의 속성들과 질들을 신에 대해 부정해 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적 실체는 그 광대무변함으로 인해 우리 지성이 도달하는 모든 형상(形相)을 넘어선다. 그래서 우리는 신적 실체를, 그것이 무엇인지를 인식함으로써 이해할 수 없고, 그것이 무엇 아닌지를 인식함으로써 그것에 대한 어떤 개념을 갖는다’고 말한다.
예컨대 신은 유형적(有形的) 실체가 아니고 또 그럴 수도 없다는 것을 인장함으로써 신에 대해 무언가를 인식하게 된다. 즉 신에 대해 유형성(물체성)을 부정함으로써 신의 본성에 대한 어떤 개념을 형성한다. 이런 식으로 신에 대해 더 많은 술어를 부정하면 할수록 신에 대한 인식에 더 근접하게 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그러나 요한네스 스코투스 에우리게나에 따르면, 긍정의 방법을 사용할 때는 원인이 결과 속에 현시된다는 의미에서 존재하는 것( ̴ 임)들이 신에 대해서 서술/술어화되고 (다시 말해 신에게 귀속되고), 부정의 방법을 사용할 때는 신의 본질 또는 실체가 존재하는 어떤 것( ̴ 임), 즉 우리에 의해 이해될 수 것임이 부정된다, 그래서 그는 피조물로부터 빌려온 어떤 이름들도 엄격하고 고유한 의미로 신에게 적용될 수 없으므로 (그것들은 비유적 또는 전의적 轉意的으로 신에게 적용된다) 신은 예컨대 진리나 지혜나 본질이라고 불려져서는 안 되고 그보다 초진리․ 초지혜․ 초본질이라고 불려져야 한다고 말한다.
이런 식으로 그는 긍정의 방법의 사용이 말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신성의 특징의 독트린과 모순되지 않는다는 것과 부정의 길이 기본적인 방법이라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
에우리게나에 따른 ‘신은 본질이다’는 긍정되고 ‘신은 본질이 아니라’는 부정이다. 그리고 ‘신은 초본질적이다’는 긍정이면서도 동시에 부정이다. 따라서 정립(테제)과 반정립(반테제)은 종합에서 변증법적으로 조화(지양)된다.
하지만 먼저 원인으로서의 신에 대해 무엇을 긍정해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면 본질로서의 신에 대해 무엇을 부정해야 하는지 어떻게 알겠는가? 따라서 부정 신학은 그것의 역동성에 의해서만 정의될 수 있다.
긍정들은 부정들로 지양되고, 긍정들과 부정들은 베일에 싸인 알 수 없는 탁월성으로 지양된다. 성 토마스의 신학처럼 보다 적극적인 야심을 지닌 신학은 새로운 긍정의 규칙들을 근거짓기 위해 유비에 기댄다.
적극적인 질들은 원인으로서의 신을 지칭할 뿐만 아니라 유비적인 취급을 받는다는 조건에서 신에게 실체적으로 실체 혹은 본질로서의 신에게 적합하기도 하다. 신이 선하다는 것은 신이 악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지도, 신이 선의 원인이라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실은 우리가 피조물들 속에서 선이라고 부르는 것이 신적 실체에 적합한 보다 높은 영상에 따라 신 안에 선재(先在)하는 것이다.
여기서 다시 새로운 방법을 정의하는 것을 역동성이다. 이 역동성은 이번에는 부정적인 것과 탁월한 것의 권리를 유지하지만 그것들을 유비 속에 포함시킨다. 선행적인 부정으로부터 적극적인 속성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그 속성이 신에게 형상적으로 탁월하게 적용된다. 성토마스는 이러저러한 선행적 부정으로부터 어떤 적극적 속성으로 상승하기 위해 특히 위상변환을 사용한다.
신적 운동의 불가능성으로부터 그는 예컨대 신적 영원성의 증명을 끌어낸다. 질료의 배제로부터 그는 신 안에서의 본질과 실존의 일치를 이용해 결정적 논증을 행한다. 아랍 철학과 유대 철학도 동일한 문제에 부딪혔다. 어떻게 이름들은 원인으로서의 신만이 아니라 신의 본질에도 적용되는가?
그 이름들을 부정적으로 취하고 특정 규칙들에 따라서 그것들을 부정해야 하는가? 아니면 다른 규칙들에 따라서 그것들을 긍정해야 하는가? 그런데 스피노자주의의 관점에 선다면 그 두 경향은 잘못된 것으로 보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 두 경향이 따르는 문제 자체가 전적으로 잘못된 것이기 때문이다.
스피노자가 행한 고유성들의 삼분할은 다음과 같은 전통적인 신의 속성들의 분류를 재생산하는 것임이 분명하다.
1) 상징적 명칭들, 형상들과 모습(형태)들, 기호와 의식(儀式)들, 감각적인 것의 신적인 것으로의 환유(換喩)들
2) 행위작용의 속성들
3) 본질의 속성들
다음과 같은 신적인 속성들의 일상적 목록들이 있다고 하자. 선, 본질, 이성, 생명, 예지, 지혜, 덕, 지복, 진리, 영원성 혹은 위대함(권세). 사랑, 평화, 통일성, 완전성 들. 사람들은 이 속성들이 신의 본질에 접합한지 어떤지, 그것들을 조건부 긍정들로 이해해야 하는지 아니면 결성(缺性)의 제거만을 표시할 뿐인 부정들로 이해해야 하는지 묻는다.
하지만 스피노자에 따르면 이러한 물음들은 성립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들 속성의 대부분이 엄밀한 의에서의 속성이 아니라 고유성들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은 것은 이성의 존재들이다. 그것들은 적극적으로든 소극적이로든 신의 본성의 어떤 것도 표현하지 않는 신은 그것들에 의해 표현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것들 속에 감추어지지도 않는다.
고유성들은 부정적이지도 긍정적이지도 않으바, 칸트 식으로 말하면 무규정적인 부정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신의 본성을 고유성들과 혼동할 때, 신에 대해 그 자체 무규정적인 관념을 갖는 것을 불가피하다. 그 때 우리는 탁월성에 의한 부정 개념과 유비에 의한 긍정 개념 사이를 왔다갔다 한다.
자체의 역동성 속에서 각각은 다른 것의 일부를 함축한다. 긍정되는 것 간에 유비가 도입되기 때문에 그릇된 부정 개념이 형성된다. 그러나 긍정은 일의적(一義的)이기를 멈추거나 그 대상들에 대해 형상적으로 긍정되기를 멈출 때 더 이상 긍정이 아니다.
신의 본성은 언제나 고유성들과 혼동되어 왔기 때문에 결코 정의된 적이 없다는 것이 스피노자의 주요 테제 가운데 하나이다. 이 테제는 신학자들에 대한 스피노자의 태도를 설명해 준다. 그러나 철학자들은 신학을 추종해 왔다. 데카르트 자신은 신의 본성이 무한한 완전성에 있다고 믿는다.
그렇지만 무한한 완전성이란 신적인 본성을 구성하는 것(속성)의 한 양상일 뿐이다. 오직 그 말의 참된 의미에서 속성들, 즉 사유와 연장만이 신을 구성하는 요소들, 신의 구성적 표현들, 신의 긍정들, 신의 적극적․ 형상적 이유(근거)들, 한 마디로 신의 본성이다. 하지만 정확히 말해 이 속성들이 신학적인 소명(召命)에 비밀에 부쳐지지 않았다면 그것들은 왜 무시되었으며, 왜 신은 변성되었고, 그에 대한 무규정적인 이미지를 주는 그의 고유성들과 혼동되었는가 하는 의문이 들 것이다.
스피노자의 선행자들이 그들의 모든 재능에도 불구하고 왜 특성들에서 그치고 신의 본성을 발견할 수 없었는지를 설명할 수 있는 이유를 찾아야 한다. 스피노자의 대답은 간단하다. 성서를 해석할 수 있는 역사적이고 비판적이며 내적인 방법이 없었다. 그들은 신성한 텍스트들의 기획이 무엇인지 묻지 않았다. 그들은 그 텍스트들을 신의 말씀, 신이 스스로 표현하는 방식으로 간주했다.
그 텍스트들이 신에 대해 말한 것은 모두 신에 의해 표현된 것으로 여겨졌고, 그 텍스트들이 말하지 않은 것은 표현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졌다. 결코 다음과 같은 물음들은 제기되지 않았다. 즉 종교적 계시는 신의 본성을 대상으로 하는가? 그것은 우리에게 신의 본성을 인식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가? 그것은 신의 본성의 규정을 완성하기 위해 신에게 적용되어야 한다고 주장되는 적극적이거나 소극적인 취급들에 의존하는가?
사실 계시는 몇몇 고유성들에만 관련된다. 그것은 결코 우리에게 신적인 본성과 그의 속성들을 인식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물론 성서의 소여들은 이질적이다, 어떤 때는 특수한 의례적 교시들이 주어지고, 어떤 때는 보편적인 도덕적 교시들이 주어지며, 또 어떤 때는 사변적 교시들(도덕적 교시에 필요한 사변의 최소치)까지도 주어진다.
그러나 신의 어떤 속성도 계시되지 않는다. 즉 믿게 하는 능력이 문자에서는 안 나온다는 말이다. 속성에서만 표현이 가능한 것이다. 오직 신적인 계명을 보증하는 가변적 기도, 부대적 명칭만이 계시될 뿐이다. 기껏해야 도덕적 교시를 보증하는 신적인 실존, 통일성, 전지함, 편재함 같은 고유성들이 계시될 뿐이다.
놀라우리만치 경솔하게 모든 사람들은 예언자들이 인간의 지성이 파악할 수 있는 모든 것에 대해 지식을 갖고 있었다고 확신한다. 그리고 성경의 몇몇 구절들은 예언자들이 어떤 것들을 몰랐다는 것을 더없이 명료하게 우리에게 말해 주는 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예언자들이 어떤 것을 몰랐다는 것을 인정하기보다는 차라리 자신들이 그 구절들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하고 싶어한다. 혹은 성서의 구절들을 왜곡해서 성서가 명시적으로 말하려 하지 않는 것을 말하게 하려고 노력한다.
성서의 목적은 우리를 삶의 모델들에 따르게 하고, 우리를 복종시키며, 복종을 근거짓는 것이다. 그렇다고 할 때, 인식이 계시를 대신할 수 있으리라고 믿는 것은 부당할 것이다. 인식된 신적 본성이 어떻게 일상적 삶의 실천적 규칙 구실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계시가 신의 본성 혹은 본질의 무언가를 우리에게 인식시킨다고 믿는 것은 더더욱 부조리한 것이다.
그런데도 이 부조리가 신학 전체를 관류한다.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신학이 철학 전체를 위태롭게 한다. 사람들은 어떤 때는 계시의 고유성들에 그것들과 이성과 화해시키는 특별한 취급을 가하고, 또 어떤 때는 계시의 고유성들과 구별되는 이성의 고유성들을 발견한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그들이 신학을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신의 본성을 표현하기 위해서 언제는 특성들과 진정한 본성상의 차이를 알지 못한다. 그런데 신이 갖지 않는 표현적 가치가 고유성들의 것으로 돌려지자마자 신적 실체가 역시 실체가 역시 갖지 않는 표현불가능한 본성이 신적 실체의 것으로 돌려지게 된다.
계시와 표현이라고 하는 두 영역을, 혹은 두 가지 이질적 관계인 기호-기호화된 것(기의)의 관계와 표현-표현된 것의 관계를 구별하려는 노력을 스피노자는 멀리까지 밀어붙인다. 기호는 언제나 하나의 고유성에 결부되고, 언제나 하나의 계명을 기호화하며, 우리의 복종을 근거짓는다. 표현은 언제나 하나의 속성에 관련되고 하나의 본질, 즉 본성을 부정법(不定法)으로 표현하며, 우리에게 그것을 인식시킨다.
그 결과 신의 말은 매우 다른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그 하나는 말이나 기호들은 필요로 하지 않고, 오직 신의 본질과 인간의 지성만을 필요로 하는 표현적인 말씀이고, 다른 하나는 기호와 계명에 의해 작동하는 감각인상적이고 명령적인 말씀이다.
이 후자의 말씀은 표현적인 말씀이 아니라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우리에게 필연적인 순종을 부추기는 것이다. 적어도 계명이 신의 의지를 표현한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이는 의지를 신의 본성에 속하는 것으로 예단(豫斷)하는 것, 즉 이성의 존재, 부대(附帶)적 규정을 신적인 속성으로 착각하는 것이리라.
두 영역을 뒤섞는 모든 혼동은 치명적이다. 기호를 표현으로 삼을 때마다 사람들은 도처에서, 무엇보다도 특히 성서 자체에서 신비를 본다. 모든 것이 아무 조건 없이 신을 표현한다고 생각하는 유대인들이 그렇다. 그 때 그들은 신비적인 표현 개념을 형성한다. 이런 식의 표현은 우리에게는 그것이 표현하는 것을 드러내는 계시하는 만큼 그것을 감추기도 하는 것으로 보인다.
수수께끼 ․ 잠언 ․ 상징 ․ 유비 ․ 환유들이 그런 식으로 드러내고 감추는 방식으로 순수한 표현의 합리적이고 확실한 적극적 질서를 교란한다. 사실 성서는 분명 신의 말씀이지만 계명의 말씀이다. 명령적인 그 말씀은 어떤 신적 속성도 인식시키지 않기 때문에 아무 것도 표현하지 않는 것이다.
스피노자의 분석은 그 두 영역의 환원불가능성을 표시하는 데 만족하지 않는다. 그의 분석은 기호들의 전개를 제시하는데, 그것은 환각의 발생과 같은 것이다. 각각의 사물이 신을 표현한다고 말하는 것을 사실 틀리지 않다. 전(全) 자연의 질서는 표현적이다. 그러나 자연법칙이 곡해되기만 하면 그것은 당장 명령 또는 계명으로 파악된다.
인간들은 수학에서 그 수들에 어떤 조작을 가해야 하는지를 말해주는 기호에 매달린다는 것이다. (+, - ,×, ÷) 즉 법칙에 대한 적실한 인식이 없다면 모든 법칙은 ‘해야 한다’라는 도덕적 형태로 나타난다는 말이다.
기술적인 규칙들조차 우리가 그 의미를 모른 채 매달릴 때는 도덕적이 된다. 자연 법칙들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신은 아담에게 선악과를 먹는 것이 그에게 해로운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계시하지만, 사물들의 구성 관계를 파악할 능력이 없는 아담은 이 자연 법칙을 그에게 과일을 먹는 것을 금하는 도덕 법칙으로, 신 자체를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에 자기를 벌하는 주권자로 상상한다.
기호는 예언자들의 것이지만 정확히 말해 예언자들은 강한 상상력과 약한 지성을 지니고 있다. 신의 표현은 결코 상상의 관할 하에 놓이지 않는다. 상상은 모든 것을 기호와 계명의 측면에서 파악한다.
신은 기호들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지도 고유성들 속에 자신을 표현하지도 않는다. 출애굽기에 신이 아브라함 ․ 이삭 ․ 야곱에게 계시되지만, 여호와로서가 아니라 각인의 요구를 만족시키는 샤다이(전능자 하나님)로서 계시된다는 대목을 읽을 때, 거기서 사람들은 네 글자의 신비라는 결론을 끌어내면서도, 그의 절대적 본성상에서 취해진 신의 초탁월성이라는 결론을 끌어내서도 안 된다.
그보다 계시가 신의 본성 혹은 본질을 표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려야 한다. 반면 자연적 인식은 신의 본질을 함축한다. 그리고 그것은 신의 본질을 실질적인 효과로 표현하는 속성들에 대한 인식이기 때문에 신의 본질을 함축한다.
신은 그의 속성들 속에 자신을 표현하며, 속성들은 그들에게 의존하는 양태들 속에 자신을 표현한다. 바로 그런 식으로 자연의 질서는 신을 현시한다. 따라서 신의 표현적 이름들, 신적인 표현들만이 속성들, 즉 실체와 양태들에 대해 야기되는 공통 형상들이다. 그것들 중에서 두 가지만 인식한다면, 그것은 다름 아니라 인간들은 연장의 한 양태와 사유의 한 양태에 의해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이 두 속성들은 어떠한 계시도 가정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자연의 빛에 준거한다. 우리는 그것들을 실체와 양태들에 공통적인 그들 존재상에서 신 안에 있는 그대로 인식한다. 스피노자는 그가 일의성의 선언문으로 삼는 바울의 텍스트를 인용하면서 이 점을 강조한다. “세계 창조 이래로 은폐된 신적인 것들은 신의 피조물들의 지성에 의해 포착된다” (로마서 1:20)
속성들은 실체을 표현한다. 왜 신은 생산하는가? 신의 본성은 능산적 자연(자연 자체 속에 자연을 스스로 살아있게 하는 힘으로서의 자연)으로서, 그 자체로(그 자체 내에서) 표현적이기 때문이다. 이 표현은 신에게 본성적 혹은 본질적이어서, 그것은 기성(旣成)의 신을 반영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신적인 것의 일종이 전개를, 신적 실체의 논리적이고 발생적인 구성을 형성한다.
각 속성은 하나의 형상적 본질을 표현한다. 속성들에 의해 표현되는 모든 형상적 본질들은 그로부터 필연적으로 실존이 따라 나오는 하나의 유일하고 동일한 실체의 절대적 본질로서 표현된다. 따라서 이 실존 자체는 속성들에 의해서 표현된다. 이 계시들은 실체의 진정한 계시들이다.
표현은 신 안에서는 신의 삶 자체다. 그렇기 때문에 신이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서 세계나 우주나 소산적 자연(현재 눈에 보이는 대자연)을 생산한다고 말 할 수 없는 것이다. 충분 이유는 (―하기 위해서 신은 생산한다)라는 식의 모든 목적성 논의를 배제하면서 필연적이어야 하며, 뿐만 아니라 신은 그 자신 안에 그 자신의 본성 속에 그를 구성하는 속성들 속에 자신을 표현한다.
그는 아무 것도 결여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생산할 필요가 전혀 없다. 생산되는 세계는 신의 본질에 아무 것도 보태지 않는다는 점을 스피노자는 다음과 같은 예로서 소개한다.
예술가가 머리와 흉부를 조각하고 나서 흉부를 머리에 붙일 때, 이 더함(+)은 머리의 본질에 아무 것도 보태지 않는다. 머리는 동일한 본질, 동일한 표현을 견지한다. 만일 신이 그 자신 안에서 자신을 표현한다고 하면 우주는 두 번째 단계의 표현일 수밖에 없다. 실체는 능산적 자연을 구성하는 속성들 속에 이미 자신을 표현하지만, 속성들은 소산적 자연을 구성하는 양태들 속에 자신을 표현한다. 그러므로 더더욱 다음과 같이 물어야 한다. 왜 두 번째 층위인가? 왜 신은 양태적 우주를 생산하는가?
신은 스스로를 이해하는 대로 활동(작용) 혹은 생산한다. 필연적으로 스스로를 이해하므로 그는 필연적으로 활동한다. 신은 실존하는 대로 생산한다. 필연적으로 실존하므로서 그는 필연적으로 생산한다. 신이 활동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신이 실존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만큼이나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내재성과 표현의 논리적 연결고리들은 어떤 것들인가? 모든 것은 플라톤의 분유(分有-나누어줌)의 문제와 함께 시작되는 것 같다. 플라톤은 가설의 이름으로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분유의 도식을 제시했다. 분유한다는 것, 그것은 부분으로 참여하는 것이고 다른 한편 모방하는 것이기도 하며, 또 다이몬(내심으로 속삭여 주는 영물)을 맞아들이는 것이기도 하다.
플라톤이 이데아들 상호간의 분유를 다룰 때조차 그 분유에 상응하는 역능은 분유되는 역능이 아닌 분유하는 역능으로 파악된다. 플로티누스는 플라톤이 미미한 쪽 (분유자 쪽)에서 분유를 보았다고 비난한다. 실은 분유되는 것이 분유자 속으로 옮겨가는 게 아니다. 분유되는 것은 자기 안에 머문다. 그것은 생산하는 한에서 분유되고, 증여하는 한에서 생산한다. 그러나 그것은 증여하거나 생산하기 위해서 자기 밖으로 나갈 필요가 없다.
이러한 것이 플로티누스에 의해 공식화된 프로그램이다. 가장 높은 것에서 출발하는 것, 모방을 발생 혹은 생산에 종속시키는 것, 폭력의 관념을 증여물의 관념으로 대체하는 것, 분유되는 것은 분할되지도, 바깥으로부터 모방되지도, 그의 본성에 폭력을 가하는 중재자들에 의해 강제되지도 않는다. 분유는 질료적이지도, 모방적이지도, 다이몬적이기도 않다.
증여에 의한, 나아가 생산적 증여에 의한 인과성을, 진정한 능동(활동)성은 분유되는 것의 그것이다. 분유자는 결과일 뿐이며, 원인이 그에게 증여하는 것을 수령한다. 유출인은 증여하는 ‘원인’, 증여하는 ‘선’, 증여하는 ‘덕’이다.
분유되는 쪽에서 분유의 내적 원리를 찾을 때, 우리는 필연적으로 ‘너머에서’ 혹은 ‘위에서’ 그것을 찾지 않으면 안된다. 분유를 가능케 하는 원리 자체가 분유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모든 것이 그 원리로부터 유출되며, 그 원리가 모든 것을 증여한다. 하지만 그 원리 자체는 분유되지 않는데, 왜냐하면 분유는 원리가 증여하는 것에 따라서면, 원리가 증여하는 것에게만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로 프로클루스는 그의 심오한 ‘분유불가능자’ 이론을 구상했던 것이다. 그 자체는 분유불가능하지만 다른 것에게 분유할 것을 증여하는 원리에 의해서만 분유가 있다, 그리고 그전에 이미 플로트누스는 일자(一者)가 필연적으로 자신의 증여물보다 상위라는 것, 그는 자기가 갖고 있지 않는 것을 증여한다는 것, 혹은 그는 자기가 증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유출은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삼항일조의 형식으로 나타난다. 증여자, 증여되는 것, 수령하는 자. 분유한다는 것, 그것은 언제는 증여되는 것에 따라서 분유되는 것이 분유된다는 그 사실을 설명해 주는, 분유되는 것 자체의 발생에 대해서도 말해야 한다. 증여되는 것과 수령하는 자의 이중적 발생은 자기에게 증여되는 것을 온전하게 소유할 때, 자신의 실존을 결정한다.
그러나 그는 증여자에게 의뢰함으로써만 그것을 온전하게 소유한다. 증여자는 자기가 증여하는 것에 따라서는 분유가능하지만, 그 자체로서는 혹은 그- 자신에 따라서는 분유불가능하기 때문에, 그리고 그로써 분유를 근거짓기 때문에 그의 생산물들로서의 그의 증여물보다 상위하다.
플로티누스에 따르면 모든 사물에 공통적인 형상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유비적인 의미로 해석되어야 하는 목적성의 형상, ‘선’의 형상이다. 그것이 곧 선 자체는 아니다는 말이다.
그래서 유출은 그것의 순수한 상태에서는 존재보다 상위 ‘일자’의 체계와 분리될 수 없는바, 파르메니데스의 첫 번째 가설이 신플라톤주의 전체를 지배한다. 그리고 유출의 원리 혹은 원인의 탁월성을 존중하는 유비의 방법 혹은 부정 신학과도 분리될 수 없다. 프로클루스는 일자 자체의 경우에 일자가 증여하는 것과 일자로부터 발생되어 나오는 것에 적용되는 긍정들의 동력은 부정임을 보여준다.
더 나아가서 유출의 각 단계에서 사물들이 그로부터 발생되어 나와서 그것으로 귀일하는 분유불가능자의 현존을 인지해야 한다. 따라서 유출은 위계화된 우주의 원리 구실을 한다. 거기서 존재들 일반의 차이는 위계적 차이로 사고된다. 각 항은 그에 선행하는 상위 항의 상image과 같아서, 제1월인은 혹은 제1원리로부터 그것을 분리시키는 원격의 정도에 의해 정의된다.
따라서 유출인과 내재인 간의 두 번째 차이가 등장한다. 내재성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순수 존재론, 즉 ‘일자’가 실체와 존재자의 특성일 뿐인 ‘존재’ 이론을 함축한다. 게다가 순수 상태의 내재성은 존재의 동등성 원리, 혹은 동등한- ‘존재’의 자리를 요한다.
존재는 자체 내에서 ‘자체로’ 동등할 뿐만 아니라, 모든 존재들 속에 동등하게 현존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원인은 어디든지 동등하게 가깝다. 원격 원인은 없다. 존재들은 위계상의 서열에 의해 정의되지 않고, 즉 일자로부터 더 혹은 덜 멀리 떨어져 있지 않고, 오히려 각각은 존재의 동등성을 분유하므로, 다시 말해 멀고 가까움에 관계없이 자기 본질의 소질(유능성)에 따라 신으로부터 수령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직접 수령하므로 신에 직접 의존한다.
내재성에서는 모든 것이 긍정이다. 원인은 결과보다 상위이지만 그것이 결과에 증여하는 것보다 상위는 아니다. 아니 차라리 그것은 결과에 아무 것도 증여하지 않는다. 분유는 탁월한 증여물로부터가 아니라 본질의 구별을 존속시키는 형상적 공통성으로부터 완전히 적극적인 방식으로 사유되어야 한다.
플로티누스는 존재가 합일상태의 수와 동일하며, 존재들은 전개 상태의 수(즉 ‘펼쳐진 수)와 동일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플로티누스에게는 이미 일자의 초탁월성과 접합되는 존재의 동등성이 있다.
이러한 것이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의 철학들을 통해서 점점 더 중요해진다. 만물은 그들을 복합하는 신의 현존(출석)하며, 신은 그를 펼치고 함축하고 접어들이는 만물에 현존한다. 계시적이고 종속적인 유출의 계열이 상관적인 두 운동의 공-현존으로 대체된다. 왜냐하면 신이 사물들을 복합하기 위해 자기 안에 머무는 것처럼 사물들 또한 신을 펼치거나 함축하는 한에서 신 안에 머물기 때문이다.
신의 사물들에의 현존이 신의, 사물들 안에의 함축을 구성하는 것처럼 사물들의, 신에의 현존은 사물들의, 신 안에서의 내속을 구성한다. 기본존재들의 위계성이 존재의 동등성으로 대체된다. 왜냐하면 사물들이 그에 현존하는 바 존재와 그 자체 사물들 속에 현존하는 존재는 동일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내재성은 복합과 펼침, 내속과 함축의 앙상블에 의해 정의된다. 신이 그를 펼치는 사물들에 의해서 함축된 채로 머무는 것처럼 사물들은 그들을 복합하는 신의 내속한 채로 머문다. 모든 사물들을 통해서 스스로를 펼치는 것은 복합하는 신이다. 신은 모든 것이 그 안에 있다는 의미에서 보편적 복합이고, 그가 모든 것 안에 있다는 의미에서는 보편적 펼침이다.
분유는 이제 일자를 자기의 더 혹은 덜 가까운 원천으로 삼는 유출에서가 아니라 모든 존재들을 포함하고 그 각각의 본질에 의해서 스스로를 펼치는 절대적 존재의 직접적이고 적합한 표현에서 그 원리를 얻는다. 표현은 이 모든 측면들, 즉 복합․ 펼침․ 내속․ 함축 모두를 포함한다. 표현의 이 측면들은 또한 내재성의 범주들이다. 그 두 개념이 상관적인 것으로 있는 논리적 관계의 체계에서 내재성은 표현적임이, 표현은 내재적임이 드러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표현 관념은 분유되는 것의 진정한 능동성과 분유의 가능성을 설명해 준다. 새로운 내재성 원리가 긍정되는 것은 표현관념에서이다. 표현은 다자의 통일로, 다자의 복합과 일자의 펼침으로 나타난다. 신 자신은 세계 속에 스스로를 표현하며, 세계는 신-존재 혹은 존재하는 일자의 표현, 펼침이다.
세계는 신으로 격상되고 그 결과 세계는 그의 한계들 혹은 유한성을 상실하여 직접(매개없이) 신적인 무한성을 띤다. 그 중심은 도처에 있고 원주는 어디에도 없는 원의 은유는 세계 자체에 적합하다. 신과 세계간의 표현 관계는 본질의 동일성이 아니라 존재의 동등성을 근거짓는다. 왜냐하면 동일한 존재가 그 자신의 본질에 따라서 만물을 복합하는 신 안에도, 그들 자신의 본질 혹은 그들의 양태에 따라서 신을 펼치는 사물들 속에도 현존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신은 복합적 ‘자연’과 동일한 것으로, 자연은 펼치는 신과 동일한 것으로 정의되어야 한다. 그러나 구별상의 이 동등성 혹은 동일성은 표현의 앙상블에 대해 두 계기를 구성한다. 신은 그의 말씀 속에 스스로를 표현하고, 그의 말씀은 신적 본질을 표현한다. 그러나 그 말씀은 제 차례에서 우주 속에 스스로를 표현하고, 우주는 모든 사물들을 그 각각에 그들 몫으로 본질적으로 돌아가는 양태에 따라서 표현한다.
말씀은 신의 표현이고 표현-언어이다. 우주는 이 표현의 표현이고, 표현-얼굴 혹은 표정이다. 이 고전적인 이중 표현의 테마는 에카르트에게서 다시 볼 수 있다. 신은 내면적이고 침묵의 발화인 말씀 속에 스스로를 표현한다. 말씀은 외화된 발화 혹은 얼굴인 세게 속에 스스로를 표현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표현주의적 경향이 온전하게 결실을 맺지 못한다는 것은 확실한데, 이는 말씀이론에 의해서, 그리고 무엇보다 무가 아니라 존재를 제1원리로 삼는 존재론적 요청들에 의해서 표현주의적 경향을 조장하는 것은 기독교이다. 그러나 신적 존재의 초월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훨씬 더 강력한 요청에 의해서 그것을 억압하는 것 또한 기독교이다.
그래서 언제나 내재성과 범신론이라는 비난이 철학자들을 위협하고, 철학자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이 비난을 모면하는 데 몰두하게 된다.
사실상 창조주 신의 초월성이 구제되는 것은 유비적 존재개념 덕택이거나, 아니면 적어도 동등한-존재의 사정거리를 제한하는 탁월한 신 개념 덕택이다. 존재의 동등성 원리 자체가 유비적인 방식으로 해석되며, 온갖 상징주의의 방책들이 초월성을 보존한다. 따라서 ‘표현불가능자’가 표현 자체의 한복판에 유지된다.
이는 플로티누스에게로 회귀하는 것도, 존재보다 상위의 말할 수 없는 일자 자리로 회귀하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내재인으로서 세계 속에 스스로를 긍정(주장)하고 스스로를 표현하는 존재와 ‘그의 내재성에 대해 긍정되는 모든 것을 그 신에 대해서는 부정하는 부정 신학의 대상으로서 표현불가능하고 초월적인 것으로 머무르는 존재’는 동일한 신, 동일한 무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조건들에서조차 내재성은 유출의 관점이나 창조의 관점에 의해 수정된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표현적 내재성은 일의성의 온전한 개념화, 일의적 존재의 온전한 긍정이 수반되지 않는 한 그 자체만으로는 충분할 수 없기 때문이다.
표현적 내재성은 부분적으로는 그것을 조장하고 부분적으로는 그것을 억압하는 유출의 테마에 접목된다. 그러나 그것은 유비적인 조건들에서는 창조의 테마와 뒤얽힌다. 창조는 한 측면에서는 유출과 동일한 관심에 부응하는 것같다. 유출의 관점에서와 마찬가지로 창조의 관점에서도 문제는 항상 분유되는 것 자체 쪽에서 분유의 원리를 구하는 것이다.
분유는 일종의 모방이지만, 그 모방의 원리는 모델 혹은 모방되는 것(모방 대상) 쪽에 있다. 이데아들은 신과 관련해서는 서로 구별되지 않지만 그것들의 이데아들이 신 자체의 가능적 분유(신 자체에의 가능적 참여)를 근거짓는 사물들과 관련해서는 서로 구분된다.
이 길은 성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해 그려졌다. 그런데 거기서 다시 범형적 유사와 모방적 유사의 지위를 동시에 결정하기 위해 표현 개념이 부상된다. 성 보나벤투라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뒤를 이어 이 이중적 결정에 최고의 중요성을 부여한 인물이다. 두 유사는 표현적 유사의 구체적 앙상블을 형성한다.
신은 그의 말씀 속에, 혹은 범형적 이데아 속에 자신을 표현하지만, 범형적 이데아는 창조가능한 사물들과 창조된 사물들의 다양성(다자성)을 표현한다. 그러한 것이 그 자체로서의 표현의 역설이다.
본래적이고 영원하기 때문에 표현은 스스로를 표현하는 것(신)과 관련해서는 하나이고, 표현되는 것과 관련해서는 여럿(다자)이다. 표현은 스스로를 표현하는 신으로부터 표현되는 것들로 우리를 인도하는 방사선과도 같다. 그 자체가 표현하므로(표현되지 않고) 그것은 신적인 본질 자체로서 제한 없이 모든 것에 동등하게 미친다(닿는다).
우리는 동등성 원리와 다시 맞닥뜨리는, 성 보나벤투라는 그 원리에 따라서 신 안에 있는 이데아들 간의 모든 위계를 부정한다. 실제로 표현적 유사 이론은 특정한 내재성을 함축한다. 이데아들은 신 안에 있고, 따라서 사물들은 그들의 버명적 유사물들에 따라 신 안에 있다.
그러나 사물들 자체가 이데아의 모방물로서 신 안에 있을 필요가 여전히 있지 않는가? 복사물의 모델에의 특정한 내속이 있지 않는가? 엄격하게 유비적인 존재 개념을 유지함으로써만 그런 귀결을 피할 수 있다.
성 보나벤투라 자신은 표현적 유사와 일의적 유사 혹은 일의화의 유사를 항상 대립시킨다. 즉 ‘유사’는 두 개의 것이 제3의 것에서 일치함(일의적 또는 분유적 유사)을 의하든가 또는 어떤 것이 다른 것과 유사하나 제3의 것에서는 일치하지 않음(모방적 또는 표현적 유사)를 의미한다. 피조물들이 신의 유사물이라고 말하는 것은 후자의 의미에서이다. 그가 말하는 것은 신과 피조물은 존재를 일의적으로 분유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는 일의적 공통성을 배제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상에서 거론된 저자들 대부분은 두 가지 전통에 동시에 결부된다. 유출과 모방, 유출인과 범형인, 위-디오니시우스와 성 아우구스티누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두 갈래 길이 표현 개념에서 다시 만난다는 것이다. 이는 어떤 때는 유사적이고 어떤 때는 유출적인 표현의 철학을 버려내는 스코투스 에리우게나에게서 이미 나타난다.
유출은 우리를 표현-펼침으로 이끈다. 창조는 우리를 표현-유사로 이끈다. 그리고 표현에는 실제로 이러한 이중적인 측면이 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거울과 모델과 닮음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씨앗과 나무와 나뭇가지다. 그러나 이 은유들은 결코 결실을 맺지 못한다. 표현 관념은 떠올려지자마자 억압 상태에 놓인다.
창조의 테마나 유출의 테마는 표현주의가 그것이 함축하는 내재성의 끝까지 가는 것을 막는 최소한의 초월성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내재성은 정확히 표현 개념과 분리되지 않는 철학적 착락(현기증)이다. 스스로를 표현하는 것에 표현의 내재함과 표현에 표현되는 것의 내재함이라는 이중적 내재성을 말한다.
스피노자주의의 의의는 다음과 같은 것으로 보인다. 내재성을 원리로서 긍정하는 것, 표현을 유출인 또는 범형인에 대한 모든 종속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 표현 자체는 모델을 닮는 것도 순수 일자로부터 유출되는 것도 멈춘다.
그런데 그러한 결과는 일의성의 관점에서만 획득될 수 있다. 신은 자기 원인이라는 바로 그 동일한 의미에서의 만물의 원인이다. 그는 형상적으로 실존하는 대로, 혹은 표상적으로 스스로를 이해하는 대로 생산한다.
따라서 신은 그 자신의 본질을 구성하는 바로 그 동일한 형상들로 사물들을 생산하며, 그 자신의 본질의 관념 속에 관념들을 생산한다. 따라서 신의 본질을 형상적으로 구성하는 바로 그 동일한 속성들은 양태들의 모든 형상적 본질을 감고 있고, 신의 본질의 관점은 모든 표상적 본질들 혹은 모든 관념들을 포함한다.
사물들 일반은 신적 존재의 양태들이다. 다시 말해 신적 존재의 본성을 구성하는 속성들 자체를 함축한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유사는 원인과 결과에 공통적인 질(質)의 현존에 의해 정의되는 일의화의 유사이다.
관념들이 모델들이 아니듯이 생산된 사물들 또한 모방물들이 아니다. 신 관념조차 그 자체 그 형상적 존재 상에서 생산되므로 전혀 범형적이지 않고 역으로 관념들은 사물들을 모방하지 않는다. 그 형상적 존재상에서 관념들은 사유 속성으로부터 따라 나온다. 그리고 그것들이 재현적이라면, 그것은 단지 그것들이 절대적 생산 혹은 활동 역능과 그 자체로써 동등한 절대적 사유 역능을 분유하는 한에서만 그렇다.
그래서 모든 모방적 혹은 범형적 유사가 표현적 관계로부터 배제된다. 신은 그의 본질을 반영하는 관념들 속에 스스로를 표현하는 것과 같이 그의 본질을 구성하는 형상들 속에서도 스스로를 표현한다. 표현은 존재함과 인식함에 대해 동시에 얘기된다. 그러나 오직 일의적 존재, 일의적 인식만이 표현적이다.
실제와 양태들, 원인과 결과들은 전자의 본질을 현실적으로 구성하고 후자의 본질을 현실적으로 담고 있는 공통 형상들에 의해서만 존재하고 인식된다. 그래서 스피노자는 이전의 전통들에서는 항상 혼동되어온 다음 두 영역을 대립시킨다.
유일하게 적합한, 표현과 표현적 인식의 영역과 기호와, 기호나 위상변환이나 유비에 의한 인식의 영역의 대립이 바로 그것이다.
스피노자는 다음과 같은 상이한 종류의 기호들을 구별한다. 즉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신체 상태에 따라서 무언가 결론을 끌어내게 하는 지시적 기호와 우리로 하여금 법칙을 도덕 법칙으로 파악하게 하는 명령적 기호, 즉 우리를 그것 자체에 복종시키고, 기껏해야 신의 몇몇 고유성들을 우리에게 드러내 줄 뿐인 계시의 기호와의 구별이다.
그래서 신은 각 본질을 다른 모든 본질들과 더불어 직접 생산한다. 결국 실존 양태들 자체는 신을 직접 원인으로 갖는다. 각각의 양태에 대해서 신은 원인이 모종의 결과를 낳도록 결정하는 힘(역능)이다. 우리는 결코 무한 역행에 진입하지 않는다. 어느 한 양태를 그것의 원인과 함께 고려하기만 하면 그 원인이 모종의 결과를 낳도록 결정하는 원리로서의 신에 직접 도달하게 된다.
각각의 양상으로 신은 직접적으로 즉각 스스로를 표현하거나 혹은 그의 결과들을 직접(매개없이) 생산한다. 그래서 모든 결과는 신 안에 있고, 신 안에 머물며, 그래서 신 자신은 그의 결과들 각각에 현존한다.
실체는 우선 자기 자신 안에서 스스로를 표현한다. 이 첫 번째 표현은 형상적 혹은 질적이다. 실체는 형상적으로 구별되는, 질적으로 구별되는, 실재적으로 구별되는 속성들 속에 스스로룰 표현한다. 각 속성은 실체의 본질을 표현한다. 여기서 복합과 펼침이라는 이중 운동을 볼 수 있다. 실체는 속성들을 복합하고, 각 속성은 실체의 본질을 펼치며, 실체는 모든 속성들을 통해 스스로를 펼친다.
실체가 모든 속성들과 동등할 뿐만 아니라 모든 속성이 다른 속성들과 동등한바, 어떤 것도 우월하거나 열등하지 않다. 실체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스스로를 표현한다. 그것은 모든 속성들을 포함(이해)하는 신의 관념 속에 스스로를 표현한다. 신은 스스로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스스로를 표현하지(펼치지) 않는다.
실체는 스스로를 재-표현하고, 속성들은 양태들 속에 스스로를 표현한다. 이 표현은 양태들 자체의 생산이다. 신은 스스로를 이해하는 대로 생산한다. 신은 무한히 많은 사물들을 생산하지 않고서는, 그가 생산하는 모든 것 역시 이해하지 않고서는 스스로를 이해하지 않는다.
신은 그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들과 동일한 속성들 속에 만물을 생산하며, 그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과 동일한 관념으로 그가 생산하는 모든 것을 사유한다. 그래서 모든 양태들과 그 양태들에 상응하는 관념들은 표현적이다. 신 ‘관념’이 모든 관념들을 포함하며(이해하며), 그것들을 통해서 스스로를 펼친다.
(평가)
신은 자신의 이름을 통해서 자신의 속성을 표현하고 그 표현을 통해 신의 창조 역량이 발휘하면서 삼라만상이 나누어지듯이 형성되었다는 것은 마치 ‘성령의 은사론’을 철학적 용어로 설명하는 듯 하다.
스피노자의 주장은 다음과 같이 물음에서 비롯된다. 왜 이 세상은 많은 것들이 실제로 존재하며 누가 그 많은 것들을 존재케 했느냐 하는 것이다. 결코 인간 자체를 자연과는 대립되는 특별한 존재인양 간주해서 신의 자리에 앉아서 설명케 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절대적인 주체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인간에게 자리를 비켜나게 난 다음, 신의 활동성으로 이 모든 것이 설명되어야 당연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을 볼 줄 모른다. 십자가는 세상 지혜로봐서 항상 어리석은 것이다. 총명함과 치밀함과 명석함과 거리가 멀다. 도리어 세상 철학이나 지혜로 보면 분노를 자아낼 만한 소식이 복음이다. 하나님은 인간들의 모든 지혜를 비켜가는 방식으로서 십자가를 소개하고 계시다.
즉 피조물이 왜 있느냐가 아니라 왜 예수님으로부터 심판받아야 하느냐의 관점에서 세상 만물을 보아야 한다. ‘있음’에서 지혜가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심판받음’에서 지혜가 출발해야 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활동성이란 다름 아닌 세상의 의와 죄과 심판에 대해서 정죄하는 내용을 담고 움직이는 것이다.(요한복음 16:8-12) 성령의 은사란 신이 속성의 우호적인 나누어주심이 아니라 늘 우리를 심판하고 오직 주님의 이름에 부르는 약속에 의해서만 구원하시는 반복적인 증거하게 하시는 능력으로서의 선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