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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행복을 찾는 사람들(행찾사) 원문보기 글쓴이: 설뫼
중국 관광 겸 산행
참으로 오랜만에 외국을 나가보게 되었다. 1988년도 여름방학에 일본의 동경과 북해도를 4박5일로 다녀온 이후 그 많은 사람들이 중국을 비롯하여 동남아시아 그리고 유럽으로 세계 여러 곳을 많이도 다녀오고 이야기도 많이 들었으며 심지어 중국은 싼 여행경비로 인하여 과하게 말하면 장난처럼 아니 자신의 집 화장실 더나들듯 한 사람들도 있다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고공공포증에 더하여 입까지(식성이 비위가 좋지 못하여)차일 피일 하다 좋은 세월 다보내고 이제 주변에서 권함에 마음을 열고 출발을 해기로 하였다.
산행 및 관광 기간은 2012년 11월 26일에서 이달 30일까지 4박5일 여정이며 상해 황산 황주 다시 상해로 돌아와 귀국하기도 되어 있다. 26일 아침 마산역에서 세분(정인숙 서수정 박은정) 39X 버스 정류소 한분(김봉경) 허&리(서정호) 창원실내체육관 만남의 광장 다섯분(조정무, 윤경희, 황정덕, 성성연, 김순자) 법원 정류소에서 두 분(송규영 박정희) 12명의 회원으로 회원관리에 번거로움이 없는 가족적인 분위기로 차량은 김해 공항을 향하여 달렸다.
차는 달리고 있지만 차중에 회원님들의 인사가 오가고 그런 와중에 난 오랜만에 외국으로 여행을 떠난다는 마음의 설레 임 더하여 비행기가 이륙 할 때의 그 공포심 조바심이 벌써 급하게 내 머리에 신경조직을 산란하게 만들어 놓고 있었다. 또한, 공산주의 국가로 오래 다스려진 나라의 백성들의 삶은 어떠할까? 많은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차는 달리고 있었다.
한 달 전에 8박9일 미국 관광을 다녀오신 분이 다시 우리 일행에 함께 참석하여 글로벌 시대에 살아가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었다. 차는 김해 공항에 도착하여 탑승 절차를 마치고 기내에 배정된 좌석에 앉았다. 12시30분 발 상해로 향하는 B6399 중국 국적의 동방항공 여객기다. 기내는 양편으로 좌석이 세 개 씩 가로로 6명이 앉을 수 있게 되어 있고 모두 약 300명 정도 탑승이 가능해 보였다. 나는 제일 안쪽 스튜어디스 들이 일을 하며 다니는 통로에 앉았다. 비행기 창으로 밖을 볼 수 없어서 다행한 일이다.
기체가 시동을 걸어 움직이기 시작하였고 활주로에 올라서서는 무거운 느낌을 받을 수 있을 만큼 강력한 힘의 엔진소리가 들리면서 가속이 더해서 서서히 여객기 앞부분이 상승하며 드러러럭---럭 그리는 뒷바퀴의 소리가 사라지고 이륙을 하였다는 느낌 기체의 앞부분이 15도 고도를 유지하며 계속하여 창공을 박차고 오르고 있다. 5-10분 쯤 오르고 난 다음에 기체는 수평을 유지하면서 멈춰 서 있는 듯 조용하게 구름위에서 달리고 있었다.
시간이 얼만 되지 않았는데 기내식이 나왔다. 흰 쌀 밥에 따끈한 돼지고기 물기 있는 것을 반쯤 넣어서 고추장 버터 그리고 간단한 반찬 한 가지 그리고 빵 한 개가 식단이다. 식사를 마치고 음료수 한 잔을 마시고 잠깐 비행기를 고도를 낮추고 하강하여 상해 공항에 도착하여 착륙할 준비를 하며 안전벨트를 채우라는 방송이 들린다. 상공에서 내려다 본 상해 공항은 상상을 초월 할 정도로 넓고 큰 비행장이다. 검색을 하고 출구를 나서니 젊은 여성이 피켓을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4박5일 동안 우리를 안내할 가이드(안내원) 이진(李珍)씨 여성으로 영변 조선족으로 상해에 거주하고 있다고 하며 조상은 본래 대구 사람이라고 하였다.
4박5일 동안 우리를 싣고 다닐 차량도 우리나라 소형 버스 정도로 차안이 깨끗하고 그런대로 좋은 차량이 기다리고 있었으며 운전기사는 중국 사람으로 미남이었다.
우리가 내린 비행장은 상해에 있는 두 개의 비행장 가운데 포동비행장(浦同)이라고 하며 그 규모가 대단해 보였다. 그런데 공항을 빠져나오며 보니 치동(致同) 이라는 글이 거의 내 키 높이와 비슷한 글이 간판에 씌어져 있어서 제복을 입은 사람에게 글자를 써서 물어봐도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점심은 기내에서 먹었고 본래 계획을 변경하여 김구 선생님이 빼앗긴 나라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 한 상해임시정부 청사 그 곳을 돌아보려고 하였으나 그곳을 가본 회원이 많아 옛 거리라는 곳으로 변경하여 관광하기로 하였고 차는 달리고 가이드 이진 씨는 쉬지 않고 안내를 하고 있었다.
중국 사계절이 한 나라에 있으며 자본주의 공산주의가 함께 공존하며 그에 더하여 공산주의 바탕에서 자본주의 삶이 영위되는 나라, 농사를 짓고 있는 농부들도 농토는 전부 국가의 것이며 땅을 빌려 농사일을 한 뿐인 나라 농사를 짓는 사람도 정해져 있고 단에서 그 신분에 따라 베푸는 제도도 다르게 적용을 한다는 나라라고 한다.
상해 - 100년이 함께 숨 쉬는 도시, 물의 도시, 본래 갯벌 이었던 곳이며 그 갯벌이 쌓이고 쌓여 단단해져 이루어진 도시가 상해 그래서 땅을 파면 바로 물이 나오고 흙이 찰흙이란다. 상해를 기준으로 하여 컴퍼스를 돌리면 200킬로미터 안으로는 산이 전혀 없는 곳이란다. 상해의 시내를 달리는 차량의 번호판에는 戶 글자의 앞에 삼수변이 붙어 있는 차량들이 대부분이었다. 중국은 남선북마(南船北馬)로 남쪽은 배를 많이 타고 이동하고 북쪽은 말을 타고 이동을 많이 한다는 남선북마의 말이 전해오고 있다고 하였다. 안개가 자주 끼며 습도가 높고 비가 자주 온다고 하였다. 상해 인구 2500만 명 그 가운데 2000만 명은 상주 인고 500만 명은 유동인구라고 한다. 참 큰 도시다. 한국에서 재벌이라고 할 정도로 잘 사는 사람들이 중국에는 8000명 정도가 있다고 한다. 상해의 강 황포강은 강의 길이가 긴 강에 비교 할 건 못되지만 114킬로 수로를 통해 많은 물류가 이동이 되고 있다는 사실 강물은 아주 흙탕물 같이 흐리고 깨끗하지 않았다. 황주도 인구가 800만명이라고 하니 중국의 도시는 인구가 몇 백만명이란 것은 예사스러 일이라 생각 된다.
한국도 빈부 격차가 많지만 중국도 그렇게 빈부의 격차가 많다고 한다. 우리가 돌아오는 날 관광할 상해의 야경을 구경하는 그곳 주변의 아파트는 1평에 1억2천만 원이라고 하며 집을 구하기가 그렇게 어렵다고 한다. 가이드도 한 달에 80만원의 아파트 월세를 내며 살고 있다고 하였다. 어디를 가는 들고 나는 집을 구하는 일이 힘든 것 같아 보였다.
상해시는 행정구역상 한국에 비교하면 중국의 한 광역시에 속하며 省에 속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28층 이상의 건물이 6000개가 있고 한 해에 40개 이상이 세워지고 있다는 통계가 시청에서 나오고 있다고 하니 얼마나 큰 도시이며 고속으로 성장하고 발달하고 있는가를 가히 짐작을 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학교 고장선생님의 보수가 시골로 가면 한국 돈으로 80만원 상해에서는 100만원 이라고 하니 보수 면으로 봐서는 한국의 1/4정도의 수입으로 산다고 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다.
옛거리에 도착을 하였다. 멀리 건너편에 동방명주라고 하는 크고 아름다운 건물이 보이고 새롭게 발전하고 있는 곳이 저 멀리 보이며 이곳 우리가 걸을 곳은 당 명 청 대대로 거쳐 오며 세워진 건축물이 빽빽하게 섰고 그 건물에 온갖 장사들이 가계를 벌리고 찾는 손님을 상대로 장사를 하고 있었다. 돌아보니 사람들만 가득하고 건물은 전형적인 텔레비전 화면에서 보았던 그런 중국식 건물이며 호객 행위를 하는 사람들도 있고 외국 사람들 같은 중국 소수민족들 그리고 중국의 국민들이 관광을 와서 와글와글 시끌벅적 온통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소란스럽고 사람으로 와글 그렸다. 30분간의 자유 시간을 주었는데 아는 일행을 떨어질까 봐 어디로 가지도 못하고 함께 간 조 사장님과 가이드와 같이 있으려니 자꾸 골목으로 가서 구경을 하라고 하신다. 그래 윤경희씨와 황정덕씨랑 약간 돌고 제자리로 돌아왔는데 가도 가도 같은 식의 건물과 정원 그리고 호수 작은 정원뿐이었다.
중국대륙의 끝에서 끝까지 가려고 하면 차량으로 7박8일을 달려야 한다고 한다. 한국 국토의 100배 정도의 국토를 가진 나라 인구 13억의 나라 한 자녀를 가질 수밖에 없는 정부의 책이 오래 전부터 실시되고 있는 나라 잠시 어디 다녀온다고 하면 차량으로 두 세 시간 달려야 하는 곳이라고 하니 우리 산악회에서 약간 먼 곳을 가게 되면 차를 타는 시간이 많아서 좋지 않다고 하는 말을 종종 듣는데 중국에서는 그런 정도의 마인드는 생존이 불가능할 정도로 시간이 많이 걸리고 그렇게 시간이 많이 걸리는 생활 패턴이 예사이고 일상이니 사람들의 마음이 느긋하고 세상 바쁠 것이 없는 민족성이 되어버린 것 같다는 나름의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제 상해에서 머물 시간은 끝이 나고 우린 밤길을 다려 황산으로 가야한다. 상해에서 황(黃山)산까지 400킬로미터 상해에서 오후 5시50분에 출발하여 오는 과정에 항주(杭洲)라를 도시를 거쳐 황산이라는 도시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차량은 쉼 없이 달리고 있었고 고속도로는 개설되어 있지만 내가 생각하기에는 한국의 고속도로와는 조금 격이 낮은 고속도로로 보였다. 차량이 질이 떨어지는 것인지 도로가 좋지 않은 것인지 앉아 있는 손님이 많이 덜컥거리고 편하지 않았다. 어둔 밤에 어딘지 모를 곳에서 내러 용변을 보고 이어 달리고 달려 도착한 곳이 황산의 보대반도호텔(광광주점)이라는 곳에 도착하였다. 늦은 밤 시간이라 일행은 몸을 씻고 바로 잠자리에 들어 버렸다.
황산에서 아침이 밝았다. 호텔 창문의 커튼을 열고 보니 안개가 얼마나 끼었는지 한 치 앞으로 분간하지 못할 정도로 짙은 안개가 자욱하였다. 덜컥 걱정이 되었다. 이런 안개 속에 산행이 가능 할까 혼자 걱정이다. 짐을 호텔 방에서 챙겨 호텔 안에 있는 식당에서 중국식 식사를 하였다. 빵과 찐빵이 있으니 걱정 할 것이 없고 함께 간 윤경희씨가 한국 음식 밑반찬을 많이 가져와 같이 먹으며 다른 음식도 먹을 수 있었다. 가이드가 일러준 대로 산행을 하다 간식을 할 셈으로 약간의 빵을 챙겨 가방에 넣기도 하였다. 너무 늠름하게 행동하며 철면피 행동을 하여 나도 가능하구나 하는 생각이다. 하긴 육군 병장으로 만기 제대한 사람이 무엇을 수행하지 못할 것이 있겠는가? 교양 있는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아보려고 하니 그런 것이지 무엇이 두렵고 어려울 것이 있을까?
호텔에서 삼청산으로 가는 길이 또 보통의 길이 아니다. 아마 두 시간은 달렸지 싶다.
삼청산(옥화봉 옥경봉 )이 있으며 중국 도교의 발상지라 하며 중국은 숭산, 화산, 태산, 형산, 그리고 황산을 오악으로 불려 진다고 하였다.
황산으로 가는 길 차창으로 비춰지는 것들이 한국의 그것과 별 다를 것이 없어보였다. 산은 아직 한국의 초가을이 되지 않은 시기로 푸른 잎들이 많이 보이고 간혹 물든 단풍도 보였지만 초가을의 정취라고 할 수 있겠으며 소나무가 많이 보이지 않고 잡목들이 온통 산을 이루고 있으며 산기슭에는 대나무들이 많이 심겨져 있었다. 다음날 황산을 가면서 가이드가 안내를 해주어 궁금증이 해소되었지만 대나무는 한국의 방풍림과 같이 산에 소나무에 번지는 재선 충을 막아주는 식물로 산기슭에 심어 두고 있다고 하였다.
집들은 한 결 같이 벽돌로 지었는지 블록으로 지었는지 모르겠으나 이층 삼층을 이루고 있고 대부분 삼층으로 되어 있으며 집의 벽은 하나 같이 흰색의 페인트로 도장이 되었고 그리고 지붕은 한국과 달리 기와가 아주 작은 것이 꼭 게딱지 보다 조금 큰 크기의 기와를 다닥다닥 끼워서 이어 놓은 지붕 이었다. 곳곳에 흐르고 있는 강물 시냇물은 하나 같이 돌을 갈 때 나오는 물빛을 하고 있었으며 토지는 농지정리가 되어 있기 않아 60년대 한국의 시골 농촌을 연상하게 하였다. 한국의 마을은 산을 끼고 산비탈 또는 평지에 집이 있지만 이곳은 평지에 마음이 만들어져 있었으며 낡은 마을 새로운 희망이 보이는 마을 그러나 마을을 지나며 사람을 보기가 참 어려웠다. 사박오일 동안 차를 타고 마을을 지나면서 본 사람의 수는 10명을 넘지 않을 만큼 적게 보였고 들판에서 일을 하고 있는 모습도 자주 볼 수 없었다. 하긴 농사를 지을 계절이 아니니까 그렇겠지?
집과 물빛과 약간의 다름이 있을 뿐 온전한 한국에 있는 것 같은 느낌으로 여정이 흐르고 있다.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한국에선 아마 군사정권이 정권을 잡고 있었던 시대에도 이렇지는 않았다. 삼청산을 향해 고속도로를 열심히 달리고 있는데 공안이 차를 막아 세우고 대형 짐차도 관광객을 실은 차량도 모두 고소도록 이면지역 도로로 차를 피하게 하였다.
왜 이렇게 하는지 영문을 알아보려고 하니 가이드가 하는 말이 당의 높은 사람이 이 고속도로를 통과하기 때문에 그 높은 분이 통행을 하고 난 다음에 가라고 하는 것이란다. 참 이상한 세상에 살고 있다는 느낌이다. 아마 한국에서 이런 일이 발생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서 생소하게 느껴지지만 남의 나라에서 무슨 수로 어떻게 할 것인가 약 한 시간을 기다렸다가 출발을 할 수 있었다.
얼마나 달렸는지 삼청산 산문에 도착하여 바로 화장실에 다녀와서 케이블카를 타고 산을 오르기로 하였다. 어디를 가나 손님이 모이는 곳에는 먹을 것 산행에 필요한 스틱 간식 장갑 그 외 많은 것을 판매하는 상인들이 많이 있었다.
케이블카를 타는 시간은 5분정도 두 팀으로 나누어 타고 올랐는데 내가 고공공포증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을 함께한 사파동 박정희 사장님이 장난을 하시던지 약간의 두려움이 있었으나 남자라는 이름으로 차마 표현은 못하고 인내 할 수밖에 없었다.
산길 아주 잘 만들어져 있었다. 우리나라에는 높은 곳은 티크 목재로 계단을 만들어 놓고 있지만 이곳은 정상에도 시멘트를 이용하여 튼튼하게 길이 만들어져있었다.
사장님이 이야기 하는 거망출수 라는 이름의 외롭게 우뚝 솟구친 암봉 굉장한 구경거리였으며 아름다운 여인의 상을 나타낸다는 동방여신 상의 암봉 또한 사람을 놀라게 하였다. 이리를 보아도 저리를 보아도 감탄하지 않을 곳이 없으며 특히 그 암봉을 구경하도록 길을 터놓은 그 길이 더 사람을 감동하게 하였었다. 절벽 암벽에 길을 낸 것이 과연 한국에는 이와 같은 길이 있기나 한가 480회에 가까운 산행을 하여도 설악산 그 어느 산에도 그러한 모습의 산을 만들 곳도 없지만 없다.
청산은 어찌하여 저리도 천연하며
내 마음 어찌하여 이리도 산란할까?
산의 얼굴 마주하고
설레는 나의 얼굴
몇 억년을 다듬은 그 미모를
아니 반길 이 없으니
몰라 라 나도 내 마음
이곳에 두고 가리라
12시20분 하산하여 삼청산 앞 부근에서 중식을 하였다. 중국식 점심 배고프지 않게 이래저래 먹었고 시간은 잘 가고 산행도 만점이고 시간이 갈수록 여행의 기쁨은 업 되고 있다.
어제 밤 묵은 그 호텔에서 하루를 더 묵게 되는데 돌아오는 길에 라텍스를 판매하는 곳에 들러서 돌아왔다. 라텍스를 판매하는 가게에 들른 시간이 벌써 퇴근 시간이 넘어 우리 일행을 기다리고 있다고 할 정도로 늦은 시간이다. 쇼핑을 마치고 또 오랜 시간을 달려 황산으로 돌아와 아침에 출발한 그 호텔에서 하루를 더 묵게 된다. 도착하면 보통 10시 30분을 넘기고 있어 저녁에 회원들이 자리를 같이하여 담소를 나누고 즐거운 시간을 가질 여유가 없다.
07시에 기상을 하여 전부 짐을 챙겨 차에 싣고, 식사를 마치고 08시에 출발하여 황산으로 향하였다. 날씨가 쾌청하지 않아 조금 불안한 마음으로 차량은 달리고 있다. 역시 황산 주변은 삼청산 보다 더 많은 대나무가 산기슭에 큰 숲을 이루고 있었다. 황산은 소나무가 유명하여 황산하면 소나무를 연상 할 만큼 소나무가 유명하다고 하였다. 황산은 연화봉 광명정 천도봉이 있는데 우리가 오른 산은 광명정이다. 황제가 오른 산이라고 하여 황산이라고 이름 불리고 있다고 한다. 황산에는 신안강이 흐르고 항주에는 천당강이 흐르고 있다고 한다.
황산에서 운영되고 있는 케이블카는 운곡케이블카라고 하는데 최신기술로 다른 나라에 기술자가 와서 설치를 하였다고 하며 황산은 황산송과 대나무 비래석(바람에 날아온 바위)황산온천이 유명하다고 한다. 대나무가 많이 대나무 과련 산업도 발달하였다고 하였다.
운곡케이블카를 이용하는 사람이 너무 많이 성수기에 오게 되면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 걸려 황산을 오르고 돌아오게 되면 늦게 도착하는 일이 많다고 한다. 케이블카 안에는 운곡케이블카는 소개하는 과정의 방송이 소상하게 나오는데 특징은 중국어 영어 그리고 한국어를 방속하고 일본 말과 그 외 언어로는 안내를 하지 않고 있었다.
운곡케이블카를 타고 황산으로 오르는 데는 꼭 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나는 느낌을 가질 정도로 아주 높게 설치되어 있었다. 기둥은 16개의 간격에 한 시간에 3000명을 실어 나를 수 있다고 하니 그 속도로 대단하게 빨랐으며 타는 시간은 15분 정도 일까? 황산은 안휘성에 속하며 삼청산은 강서성에 그리고 오늘 이 산행을 마치고 가게 될 항주는 절강성에 속한다고 한다.
가이드 말을 빌리면 이번 우리 산행 및 관광코스의 거리가 대한민국을 4바퀴 도는 정도의 거리를 커버하게 되어 있다고 하였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아마 세 번은 도는 정도의 시간이 걸리는 것 같다. 그래도 이동은 주로 밤에 하였기에 주간에 구경을 많이 할 수 있었으며 아주 알차게 기획된 여정의 관광이었다.
황산 뭐라고 표현을 할까? 내 능력이 딸려 표현하기 어렵다. 산을 아름답게 가꾸는 사람들 즉 황산정화인민공(대충내가 붙인 이름)이라는 이름을 붙은 조끼를 입고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으며 쓰레기통을 길에 바로 바위나 돌을 이용하여 만들어 놓고 그곳에 쓰레기 담배꽁초를 버리면 치우는 인민공이 산 정상까지 그렇게 관리를 하고 있었으며 길은 두 세 사람이 다닐 수 있을 정도로 넓은 길에 전부 시멘트나 돌로 계단을 만들어 놓아 다니게 좋게 만들어 놓았었다.
가이드가 길을 잘 알아 힘든 곳은 지름길을 이용하여 걸었고 길이 막혀있는 곳에서는 철책으로 된 곳을 남녀 전부 용감하게 월장을 하여 걸었다. 그 곳을 담당하는 사람이 늦게 열쇠를 가져 나와 열어 주려고 하다가 그냥 다시 돌아가는 만만디 느리고 게으른 표정을 읽을 수 있었고 대체로 하류층의 사람들은 표정이 어둡게 보였다.
광명정 정산에 오르는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았다. 잘 걷지 못하는 회원이 처지는 일이 발생할까봐 걱정이었으나 한 분도 낙오 없이 정상에 올랐고 그러나 안개가 시야를 가려 광명정에서 볼 수 있는 경치를 볼 수 없는 아쉬움에 모두 안타까운 마음 그러나 광명정 표지석 앞에서 사진을 한 장씩 촬영을 하고 하산 하는 수밖에 없었다. 도중에 만난 비래석의 장관 있으며 서부대협곡으로 가는 길과 운곡케이블카를 타러 가는 삼거리 사거리에서 우리 일행은 망설이다 의견을 같이하여 서부대협곡을 가도록 하였다.
좋으면 모두 좋고 나쁘면 모두 나쁜 것은 없는 것이 사람의 일이라 서부대협곡을 찾았을 때도 시시대대로 안개라 경치를 가리고 보이고 순간순간에 달리하고 있었으나 우리가 통행하는 동안은 시야 맑게 서부대협곡을 볼 수 있어서 다행한 일이었다.
서부대협곡 우리가 걸으며 위치한 곳이 아마 800-900고지가 될까? 그러한 곳에서 내려다 보는 협곡의 암봉 들과 건너편의 산의 암봉 그리고 저 멀리 보이는 암봉과 운무 그리고 우리가 서서 걷고 있는 길이 보통 길이 아닌 절벽에 붙여 세운 길을 아슬아슬하게 걸어야 하는 길이니 머리 손 발끝까지 아찔하지 않는 것이 없고 잠시 잠깐 마음 줄을 놓으면 낭떠러지에 떨어져 큰 낭패를 당 할 정도로 위험한 길이다. 시간이 넉넉하면 오래 머물러 많이 오랜 시간 구경을 하고 싶지만 시간에 쫒게 또 다른 곳을 향해야 하니 떠나는 나의 마음 안타깝기 그지없다.
황산 참으로 절경이요 환상의 산이로다. 내 산을 많이 돌아다녀도 이 같은 산은 보질 못하였다. 산에 올라 산 사람이 되고 산과 같은 마음으로 내 마음 다스려 살면 되지만 그 산도 산 나름으로 감동에 정도가 있는 것 대둔산에 오른 것과 천주산에 오름이 다르듯이 금강산과 설악산에 오른 것과 황산에 오름이 다름이 있기 마련이다.
나도 한국 사람이니 말하진 않으리다. 좋은 건 좋고 우열이 있지만 그건 순간에 그치는 것이 아니니 나도 참고 말하지 않으리라 우리 설악산 단풍이 얼마나 좋으며 한라산 백록담이 백두산 천지가 얼마나 좋은가? 내 손에 내 것이 제일인 것을 남의 것 아무리 생각하고 생각해본들 무엇 하리 남의 수중 백만금이 내 손 땡전 10원 만도 못한 것이니 눈감도 살리라.
운곡케이블 카를 타고 하산을 하며 그 절경의 암봉과 황산의 소나무 숲을 감명 깊게 감상하고 차에 올랐다.
중국의 역대 미인은 서씨 양귀비 왕소군 있는데 서씨의 성씨는 시씨라고 하고 서태후는 항주에 있는 서호의 모양을 따서 만든 호수가 북경에 있는 송호 라고 한다.
중국의 명 관광지로는 북경의 만리장성 서안의 병마용 진시황의 무덤 그리고 항주의 서호라는 말이 있다고 하는데 우리도 이번 관광코스에 서호를 들러 게 되어있다. 서호에 관련된 전선도 많이 들려주어 한국이나 중국이나 문화의 형태가 닮은 데가 너무 많으니 그렇겠지 한다. 고대의 문화는 중국에서 한국으로 그리고 일본으로 건너가고 현대의 발달된 과학문화는 외국에서 일본 한국 중국을 방향으로 전달되었다고 하니 옛 우리 조상들의 문화는 중국의 그것과 닮아 있다고 할 것이다.
소주에서 태어나고 항주에서 자라고 광동에서 먹고 유주에서 죽으면 아주 잘 산 것이라고 한단다. 한국에도 그와 비슷한 것이 살아 (진천) 죽어( )이라고 하는 말이 있다. 왜 그런지 설명을 들었는데 기억하지 못하겠다. 항주는 잘 사는 사람이 많아 친구가 잘 사는 사람이 많으면 입신출세가 좋을 것이라는 것 그리고 항주에는 미인이 많이 나며 중국의 미인에 첫째가는 서씨도 이 항주 출신이란다. 광동은 먹는 문화가 발달 된 곳이라고 하고 유주는 관목이 아주 좋아 죽으면 자신이 입고 갈 관을 좋게 마련 할 수 있다고 하든가? 그렇다.
서안은 50년 북경은 100년 항주는 500년의 고도라고 하였다. 항주는 송나라 시대에 남송의 도읍지로 고도로 이름이 나 있는 도시라고 한다.
관광 프로그램 옵션에 발 마사지가 들어있다. 세상에 나는 마사지라고 해본 적이 없다. 목욕탕에서 젊은 사람도 누워서 때를 미는 사람에게 자신의 몸의 때를 벗겨달라고 벌러덩 누워 있는 청년 들을 보면서 속으로 저놈은 손도 없는 가? 그래서 제 몸도 제 손으로 씻기가 싫어서 저러고 있는가? 하는 생각을 하고 사는 사람이다. 하긴 세상이 발달하여 살기 좋아지니 직업도 세분하여 내가 하는 일이 전문가가 되고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사회가 지금 같은 사회니 때를 밀든 말든 잔소리 할 것은 없고 너 나 잘 해야 할 것이 아닌가 말이다.
되면 더 되고 싶다고 발마사지를 하면 옵션이고 전신 마사지를 하면 한화 2만원을 더 추가하여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겁도 없이 회원들 전부가 전신 마사지를 하려고 하니 빠질 수도 없고 같이 하기로 했는데 여기서 한 가지 폭소
연세는 많지만 나와 같은 사고방식으로 살아온 분이 회원으로 계시는데 보청기를 사용 하며 듣는 힘이 좀 떨어지는 분이 계셨지? 그분도 나처럼 마사지를 한다는 것이 조심스럽고 걱정이 되었던 모양이다. 곁에 계신 분에게 전신 마사지를 하면 한국에서 이상한 퇴폐 업소에서 하는 것을 연상을 하신 모양이시다. 그래서 걱정이 되어 조박사님께 어떻게 하냐고 물었던 모양인데 조박사님 한술 더 떠서 장난기가 발동하여 전신마자시를 하는데 “그시기가 서지 않으면 벌금 10만원을 내야 한다.”고 하니 그분 말씀 활 다 같을 낀데 하드라고 얼마나 웃었는지 여행이 끝나는 시간까지 10만원이 유행되어 우리는 웃고 또 웃고 배꼽이 빠지는 줄 알았다. 실제로 전신 마자시를 하여도 아주 건전하게 건강에 도움이 되게 하는 마사지 인데 그분과 나는 괜히 걱정을 하였던 모양이다.
대나무에서 섬유를 추출하여 만들지 못하는 것이 없이 다양한 물건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대나무가 많이 생산되니 그와 관련한 산업을 발달시킨 모양이다. 몇 가지 선물을 마련하였는데 준비한 것이 집에서 보니 작아서 쓸모가 없는 것이 되어버려 마음이 편하지 못하다. 오래 만에 점수를 좀 따려고 노력하였지만 평소에 부부간에 몸의 치수도 잘 알고 그래야 하는데 전혀 모르니 그럴 수밖에 없다.
또 밤길을 따라 달리고 달려 항주 라는 곳에 하루를 묵게 된다. 천림(天林)상고주점 중국은 호텔이 주점으로 이름이 붙여진 것이 특징이다. 가이드의 설명을 빌리면 호텔이라는 말은 미국의 언어이고 중국에 적당한 말을 차용한 것이 먹고 술 먹고 잠자는 곳이라 주점이라고 이름을 부른다고 한다. 가는 곳 마다 주점이 큰 빌딩이고 호텔이었다.
상해 모양으로 운하가 발달되어 있고 일기가 모두 비슷하여 습도가 높고 안개가 자주 끼며 큰 강과 호수가 있어서 이런 현상이 일어난다고 한다. 농사는 삼모작을 한다니 그 쌀의 미질이 아주 한국 보다 떨어지고 바람이 불면 날아갈 것 같이 팔팔한 밥이 나왔던 기억도 있고 그렇지 않은 곳도 있다.
경항대운하(북경과 항주를 연결하는 운하)길이 1974킬로미터 선원이 한번 나가면 보름은 집에 들어오지 못하고 일을 한단다. 그리고 역류의 강이 되어 정월에는 그 강의 역류와 바다와 접하는 곳의 파도를 구경하기 위해 전국에서 아주 많은 사람이 모이고 기자들이 진을 치고 특종을 잡기 위해 노력한다고 한단다. 전담강 역류의 강, 강이 바다의 수위에 의하여 거꾸로 물이 흘러 역류의 강이 되는 시기가 있다고 한다.
서호라는 호수를 배를 타고 구경을 하였다. 담긴 전설이 하도 많아 모두 기억하기 어려웠다. 그 전설이 유명하여 극으로 만들어 공연을 한다고 한다. 그리고 악비 장군의 내용도 공연에 나온다고 한다.
중국의 전국에서 상해와 항주를 관광하기 위해 몰려드는 사람의 수도 한정도 없이 많은 것으로 생각이 된다. 우리나라에서 서울 구경 간다고 한 적이 오래전에 있었는데 지금은 그런 말은 없다. 워낙 교통이 발달하고 거리도 짧아지고 하루에 다녀올 수 있는 거리이니 중국 같이 어디를 구경 간다며 일정을 잡아 가는 일은 그렇게 많지 않지만 중국은 아직 그런 류로 전국에서 찾아드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이 서호에 몰려드는 관광객도 비수기 있는 겨울에도 많은 사람들이 붐비고 있었다. 호수의 넓이와 환경에 대하여는 소상하게 알 수 없다. 하지만 아주 넓은 면적의 호수에 배를 타고 약 20분 간 선상 관광을 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양귀사 인지 양기사로 이름하는 사찰을 관광을 하였다. 이 사찰의 특징은 순금으로 된 만개의 불상이 있는 곳으로 유명한 사찰이라고 한다. 사찰의 건물의 크기가 대단하였으며 무엇이나 크고 웅장하였다.
그리고 서기 970년도에 만들어 다는 탑에 올라 항주의 일부분을 구경 할 수 있었다. 본래를 전탑으로 된 것을 오래되어 무너짐을 막기 위해 나무를 사용하게 되면서 전탑과 목탑의 기술이 혼합이 되어 세워졌는데 7층으로 되어 있고 그 탑의 정상까지 조박사 그리고 김청년(노인) 나 셋이 끝까지 올라보고 내려왔다. 일행이 많이 가버려 따라 가는데 힘이 들었다.
그럭저럭 빨리 지나간 시간은 여행의 마지막 단계로 치닫고 있다. 황산 서해대협곡에서 여정을 하루 더 늦추 자고 하였고 회원이 많지 않아 가족적인 분위기에 노소가 의기투합이 되어 장난 끼의 말이 오고 말 즈음 여행의 끝이 보이고 있었다.
송성가무단의 쇼를 고가의 관람료를 주고 관람을 하였다. 그런데 중국에서 제일 잘 사는 도시 심천에서 구경한 쇼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의 수준이 낮은 쇼라고 하였다. 하지만 처음 보는 쇼라 무대의 크기가 아주 대형이며 무대가 이동하고 무대의 바닥도 이동하며 하늘에서 비가 내리고 연출자가 앞뒤 좌 우 상 하 에서 나타나며 스펙터클한 생동감이 잠깐 사람을 감동하게 하였다. 화려하고 많은 연기자가 출연하여 화려하게 무대를 장식하였다.
돈의 가치는 그 사람의 느낌 수준 정도에 따라 다를 것이라는 생각이다. 100만원 관람료의 구경을 하여도 1000원짜리 구경 보다 못할 것이 있고 말이다. 특징은 한국 사람이 얼마나 많이 관람을 하기에 무대의 화면 자막에 연출되는 내용을 한글 자막으로 소개를 하여주고 있어서 과연 조금 잘 살아 외국에 많이 나들이 한 사람들의 덕분에 도움을 받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할 시기가 왔다는 생각도 한다.
차가 출발을 하였다 하면 두 세 시간을 달려야 목적지에 닿으니 이제 이력이 나서 어느 정도 달려도 말이 없다. 이제 우리가 마지막 묵을 상해 어느 호텔을 향해 달려야 한다. 긴 시간 달리고 달려 상해에 도착하였다.
거리에 가로수는 향장목으로 한국의 녹나무란다.
어느 곳에 도착하였는데 온통 한국어로 음식점을 소개하는 골목에 들어섰다. 그 곳에서 한식으로 저녁을 맛있게 먹었고 그리고 우린 상해의 야경을 구경하러 가야한다. 상해 물의 도시 상상을 초월하는 인구 많은 건물 상해를 보면 마음속으로 아하! 중국이라는 한 마리의 용이 하늘을 오르기 위해 꿈틀거리고 요동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하였다. 굉장한 도시였다.
중국에는 아주 낭인이 되어 길거리에서 죽어 연고를 찾을 수 없어도 그 사람을 찾아 내려가면 자신이 죽었을 때 사용할 관목을 구할 만큼의 재산을 꼭 은익 하여 저축하여두고 있다고 한단다. 그만큼 중국 사람들은 검소하게 살면서 자신의 내일을 위해 저축하는 마음이 강하다고 한다. 중국의 그 넓은 대지를 3개 성을 차를 타고 다녀도 산에는 전혀 무덤이 보이지 않았다. 궁금하여 물어보았드니 거의 대부분이 아니라 전부가 화장을 하는 장례문화라고 하고 신기한 것은 그 화장한 것을 산기슭에 자그마한 돌집을 짓고 그곳에 모시는 집도 있고 그보다 더한 것은 자신이 살고 있는 집에 최고로 높은 곳에 우리나라 같으면 옥탑방 같은 시설을 지어 그곳에 조상을 모신다고 하였다.
그 조상을 모시는 곳의 모양이 사각형이면 남자의 집이고 동그란 원형으로 되어 있으면 여자의 집이라고 하던데 중국에는 한 가정에 한자녀 밖에 생산을 하지 못하니 아들이 있는 집과 딸만 있는 가정이 있을 수 있으니 그럴 것 같기도하고 그리고 한국과 같이 아이들을 너무 귀히여겨 버릇이 없는 아이들 때문에 중국도 걱정 꺼리가 될 날이 멀지 않았다고 하고 그리고 딸만 있는 집으로 장가를 가면 물러 받을 수 있는 재산이 많아 횡재를 할 수 있다는 말도 신기하였다.
상해의 야경 화려함의 극치를 보는 것 같았다. 가이드의 말에 의하며 상해는 다른 도시와 달리 고대의 수도가 되어 역사적인 문화재를 간직한 도시도 아니고 그렇다고 특별하게 사람들을 불러들일 요소가 없단다. 그래서 호수의 주변에 있는 큰 빌딩에 국가에서 전기세를 주면서 불을 밝히게 하여 호화스런 야경을 만들어 세계인들이 관광으로 찾아들게 의도적으로 만들어 보여주고 있다고 하며 건물에서 불을 켜지 않으면 국가에서 제재를 가한다니 국가 조직의 움직임이 유명한 관광코스를 만들어 내고 있는 모양이다.
그 가운데 동방명주라고 하는 118층이라고 한 건물이 아주 화려하고 좋게 보였으며 그 외 다닥다닥 붙어 있는 건물들의 창에서 흘러나오는 불빛 야경이 너무 아름다워 황홀하게 하였다. 그리고 우리는 중국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을 한국에서 거의 70% 먹고 살고 있는데 수입을 해오며 방부제를 사용하지 않은 농산물을 한번 구해 먹어보자고 하여 농협에 들러 이것저것을 구입하여 호텔로 향하였다. 이 시간도 11시를 넘기고 있어 만나 이야기 할 시간이 없었다. 관광을 하는 일도 힘든 일이라 피곤하고 힘이 들어 씻고 바로 잠자리에 들어 버렸다.
상해에서 마지막 날은 호텔에서 잠만 자고 비행기를 타기 위해 비행장과 가까운 곳에 기숙하고 있을 뿐이다. 일찍 기상을 하여 조식을 하고 짐을 챙겨 비행장으로 향하였다. 수속을 마치고 4박5일 힘이 되었던 가이드와 운전기사와 헤어지고 비행기에 올랐다. 날씨가 비가 조금 내리고 좋지 않은 기상이나 타고 왔던 회사인 중국동방항공 MU5043 편을 이용하여 09시 5분에 출발하여 기내세서 중식을 하고 11시 조금 지나 김해비행장에 착륙을 하였다.
여행, 여행은 말이 없는 스승이다. 라는 말이 있다. 그래서 영국의 처칠은 영국인들에게 많은 여행을 권했던 모양이다. 이번 중국 산행과 관광을 통해 느끼고 배운 내용이 있다면 중국 사람들을 만만디라고 하는데 만자를 느리다는 표현이라 느리고 느리다는 민족성을 말하는 것으로 생각이 되나 자연환경이 그렇게 민족성을 길러 낼 수밖에 없다는 것이라고 생각이 되었으며 그 이유라고 하면 그 넓고 넓은 광활한 대륙에서 한 한사람의 움직임이 무슨 큰 영향을 미치며 나 하나의 힘으로 가능한 일이 별로라고 생각 한다면 여럿이 같이 해야 한다는 사고가 몸에 배일 것이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혼자 서둘러 바삐 한국처럼 빨리빨리 문화가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
급하고 바쁠 것이 없다는 뜻이다. 그러니 느긋하게 마음을 먹고 천천히 하는 것이 잘 되는 것이며 대륙의 기질로 무엇 이던 크고 웅장하고 스케일이 큰 건축물 대형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바쁠 것이 없다. 크게 성질 낼 것도 없다. 큰마음으로 두 세 박자 늦추어 생각하고 배려하는 마음으로 대륙의 기질을 배움을 받아 살아 볼 일이다.
그래 젊은 사람들이 견문을 넓히기 위해 외국에 많이 나가보아야 하겠지만 늙은이도 자주 외국에 나가 보아야 할 일이다.
또 다른 내일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되자.
함께하신 11분의 회원님 그리고 아시아나여행사 조 사장님과 모든 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감사하였습니다.” 또 기약합니다.
첫댓글 상해의 황포강, 임시정부 청사,동방명주,,거지닭 등 몇년전에 여행했던 기억이 새롭게 납니다. 좋은 기억을 되새기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특히 서호의 아름다움은 오랫동안 생각이 납니다.많은 것을 보고 느끼신것 같습니다. 다음에 재미있는 이야기 듣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