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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가 카톡 단체대화방에 좋은 정보를 공유하였다.
무심코 들여다보는데 눈에 들어오는 내용이 있었다. 지금은 사용하기 쉽지 않아 무용지물이나 마찬가지가 되어버린 비디오테이프의 내용을 컴퓨터나 스마트폰을 활용하여 보거나 들을 수 있게, 또 별도의 저장 장치에 넣어주는 일을 대신해주는 점포가 시내에 있다는 것이었다.
순간,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40년이 다 되가는 옛날, 우리 가족이 KBS 프로그램에 출연한 것을 녹화해둔 비디오테이프다. 당시에는 가끔씩 꺼내어 틀어보기도 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심드렁해졌고 세월이 흘러 이제는 그 테이프가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다.
여기저기 찾던 중에 아내가 ‘그거 내가 치워놨는데 왜 찾느냐’고 물었다. 대충 이유를 대니 무슨 보물이나 되는 것처럼 깊은 곳에 보관하고 있던 것을 건네주었다. ‘언젠가 막내가 내용을 CD에 담아두었다고 그러던데...’라는 말도 했다. 그 CD를 찾는 새로운 숙제가 생겼지만 다행히 막내에게 물어 쉽게 해결되었다. 그러나 어떻게 동영상으로 변환시킬 것인지가 또 걱정이었다. 느려터진 컴퓨터를 이용하여 겨우 동영상 파일로 만들 수 있었다.
그 점포의 힘을 빌리지 않게 되어서 다행이기는 하였으나 고마운 정보를 준 친구에게는 조금 미안(?)하게 되었다.
동영상을 플레이어로 열어보았다. 당시의 기술 탓인지는 알 수 없으나 화질이 좋지 않아 조금 언짢았다. 더구나 거기에 찍힌 우리 가족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저절로 웃음이 나면서 약간 창피한 마음도 들었다. 카메라 앞에 선 차림새나 인터뷰에 응하는 말솜씨가 너무나 촌스러웠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자랑스럽다면 아주 자랑스러운 우리 가족의 역사가 아닌가, 좋게 생각하기로 하였다.
그때 그 장면을 몇 장의 그림과 함께 아래에 둔다. 내친김에 그 볼품없는 비디오가 찍히게 된 과정을 서툰 글로도 적어본다. 그때로 돌아가 희미해진 기억을 더듬으면서…….
<촌티 가족 상경기>
(권 오 신)
1986학년도의 끝무렵이었다.
교무실에서 하릴없이 교재를 뒤적이고 있는데 교무주임이 옆을 지나가면서 팜플렛 한 장을 건네주었다. 그러고는 ‘어이, 권 선생, 이거 한번 생각해봐’라며 한마디 툭 던졌다. KBS에서 기획하고 있는 제4회 가족동요창작경연대회에 관한 안내 전단지였다. 나는 내용을 대충 읽어보고 옆에 있는 동료들에게 필요하면 보라고 권했지만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럼 필요 없겠구나 생각하며 휴지통에 버리려다 말고 반으로 접어서 도시락 가방에 넣었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 그 팜플렛을 내놨더니 아이들이 관심이 있는 눈치였다. 나는 ‘그냥 그러다 말겠지’라고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아빠, 우리도 한 번 나가봐요.’하는 게 아닌가. 순간 좀 당황했으나 안 된다고 잘라 말하기도 그렇고 하여 ‘그래? 그럼 생각해보자’고 해놓고는 그 팜플렛을 다시 자세히 살펴보았다. 가족 2인 이상이 출연하되 동요는 반드시 가족이 작사, 작곡한 것이어야 한다는 단서가 있었다.
이튿날 아침 식탁에서 ‘어제 말한 거 생각해 봤는데 너희들 생각이 그렇다니 일단 서류라도 내보자. 예심에 붙어야 하니 우선 노랫말부터 의논해서 지어보아라. 곡은 가사의 내용을 보아야 지을 수 있겠지?’라며 나는 예심 응모를 기정사실화 했다.
그 후 접수마감일을 염두에 두고 끙끙거리며 노랫말을 다듬고 곡도 마무리하였다. 지정된 양식에 가족사항 등을 적어 악보와 함께 등기우편으로 발송하였다. 전국은 물론 해외에서도 참여할 수 있는 대회, 사실 우리는 기대 같은 건 하지 않으면서 그래도 기왕에 맘을 낸 것이니 경험삼아 응모해본 것이다.
그로부터 얼마 뒤, 장문의 전보 한 통이 집으로 배달되었다. KBS에서 보낸 것이었다. 예심에 통과되었다는 내용과 함께 녹음, 녹화 일정이 적혀 있었다. 상경(上京) 편의를 위해 당일의 열차 승차권 예약에 관한 내용도 있었다. 가족들이 기뻐한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나는 오히려 걱정이 앞섰다. 예심 통과에 대한 기대를 별로 하지 않아서였을까 응모만 해놓고 태평스럽게 노래 연습은 통 하지도 않고 있었던 것이다. 입고 갈 복장도 걱정이었다. 시간이 촉박한데도 뒷일이야 어찌 됐건 이참에 방송국도 구경하고 텔레비전 화면에 나오게도 되었다며 가족들은 기대에 부풀기만 하였다. 참 못 말리는 가족.
방송 출연 준비에 온 신경을 쓰고 있던 어느 날, 대구 KBS에서 연락이 왔다. 출연 가족의 프로필을 찍어서 KBS 본사로 보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예정된 날짜에 방송국 차량이 아파트에 들이닥쳤다. 관리사무소에서나 주민들은 아파트 안에 무슨 일이라도 일어난 줄 알고 더러 놀라기도 했으나 우리집 일로 온 것을 알고는 모두들 안심하였다. 그 일로 존재감 없던 우리 가족은 일약 유명해졌다.
방송국 직원들은 카메라와 조명기구 등을 들고 집 안으로 들어와 가족들에게 이래저래 포즈를 주문하기도 하면서 여기저기를 찍었다. 바깥에서도 몇 컷 찍어야한다는 말에 이제 막 봄이 시작된 쌀쌀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여기저기 끌려 다니면서 주문한 포즈에 맞추어 찍어야했다.
1987년 4월 18일 토요일, 녹음과 녹화를 위해 상경하는 날이다.
간단한 짐을 챙겨 택시를 잡아타고 대구역으로 향하였다. 도착하자마자 안내소 역무원에게 ‘예약해둔 가족 다섯의 서울행 차표를 받으러 왔다’고 말했다. 잠시 사무실로 들어갔다 나온 역무원은 그런 예약은 없었다’는 말을 하였다. 앞이 캄캄하였다. 지금 곧 출발하지 않으면 지정한 시간에 녹음실에 도착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나는 없는 용기를 내어 ‘그러면 역장님께 이 사정을 말씀드릴 수 있게 해주세요’라고 하였다. 고개를 갸우뚱하는 하는 역부원의 안내에 따라 역장실로 들어가 사정을 말했다. 이야기를 들은 역장은 ‘조금만 기다리라’고 하고는 어디론가 전화를 하였다. 아마 KBS일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잠시 뒤, 역장은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불편하지 않게 해드리겠습니다.’라고 친절하게 말했다. 나는 조금 안심이 되어 가족에게로 돌아와 조금만 기다리자고 말해주었다. 녹음 시간에 늦지 않는 승차권을 손에 넣고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오전에 대구를 출발한 열차는 늦은 오후 서울에 도착하였다.
집에서 준비해온 것과 열차 안에서 파는 과자 등으로 입을 다시기는 했지만 모두 시장하였다. 일단 녹음실 근처까지 택시를 타고 갔다. 이른 저녁을 먹고 녹음실을 찾았다.
먼저 도착한 가족이 스튜디오 안에서 녹음 중이고 밖에서는 연습하는 가족도 있었다. 접수를 마치고 기다리는데 녹음 담당 기사가 짜증스럽다는 투로 중얼거리는 것을 듣고 우리는 은근히 걱정되었다. ‘아, 벌써 몇 번째야!’ 지금 진행 중인 녹음이 만족스럽지 못한 모양이었다.
한참을 더 기다려 우리 차례가 되었다. 기사는 ‘연습 많이 하고 오셨죠?’라고 잘 해달라는 듯 말하며 몇 가지 유의 사항도 들려주었다. 우선 마이크와의 거리에 끝까지 신경을 써야 되고 ‘동작, 표정은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즐거운 마음으로 신나게 노래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였다.
스튜디오로 들어가기 전 우리는 ‘잘 해보자’고 다짐하는 뜻으로 엄지 척을 하였다. 바깥에서 기사가 지시하는 손짓을 잘 보면서 미리 몇 번 들어보았던 전주와 간주를 의식하며 연습으로 불러보았다. 기사는 만족한 듯 ‘자, 이제 녹음에 들어갑니다. 잘 부탁합니다’라며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밖에서 기사가 오케이 사인을 연속으로 보내는 것을 보면서 ‘즐겁게 신나게’ 불렀고 녹음은 무사히 끝났다. 스튜디오에서 나오자 기사는 ‘한 번 만에 끝난 것은 여러분이 처음입니다. 아주 좋습니다’라고 만면에 웃음을 띠며 양손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워 보였다. 우리도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하고 공손하게 인사를 하였다.
이제 내일의 녹화가 남았다.
수첩에 적어온 주소를 확인하고 택시를 이용해 형님댁으로 향하였다. 늦은 시각에 연락도 없이 갑자기 들이닥친 우리들을 보고 형님 내외분과 조카들이 깜짝 놀란 것은 당연하였다. ‘미리 전화라도 드릴 걸!’ 나도 참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자초지종을 이야기하였다. 꼭 입상을 바라고 온 것은 아니고 경험으로 삼기도 하고 아이들 방송국 구경도 시킬 겸해서 왔다고 말씀드리니 끝까지 들은 형님은 ‘자네들, 꼭 좋은 성적으로 입상할 걸세’라며 덕담을 해주셨다.
넓지 않은 이층 셋방에 객식구 다섯이나 보탰으니 모두들 잠자리가 편할 리 없었다. 그래도 우리는 내일을 기대하면서 잠을 청하였다.
녹화가 끝나면 곧바로 내려가겠다고 인사를 하고 형님댁을 떠났다.
택시 창밖으로 보이는 서울 거리는 정말 눈이 돌아갈 것 같았다. 차도 많고 높은 건물들도 많았다. 오가는 그 많은 사람들은 모두 멋있고 활기차 보였다. 택시 안의 우리 모습과 비교가 되었다.
녹화 장소인 호암아트홀에 도착한 것은 10시가 조금 덜 되어서였다.
입구 근무자의 안내에 따라 너른 홀로 들어갔다. 객석은 벌써 많은 사람들로 꽉 찼고 웅성거리는 소리에 기가 질렸다. 우리는 다시 출연자 대기실로 안내되었다. 거기서부터 우리는 이제 주눅이 들기 시작하였다. 예심을 통과해 오늘 본선에 오른 스물 두 가족들이 모인 대기실, 모두들 화려한 복장과 밝은 얼굴에 대화들도 시끌시끌했지만 거기에 비해 우리들은 초라하기 짝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이왕 내친걸음이니 이제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우리 여기 구경하러 왔지 자랑하거나 상을 받으러 온 건 아니잖아, 마음 편하게 가지자’고 모두를 다독였다.
KBS와 YMCA가 공동 주최하는 이 대회에는 해외 마흔 네 가족을 포함해 모두 천 육십 네 가족이 참여하였다는 것은 대회가 끝나고 알았다.
아나운서 원종배와 박영주의 경쾌한 사회로 경연대회는 시작되었다.
대기실에서 차례를 기다리는 가족들에게는 기대와 설렘을, 노래를 부르고 들어온 가족에게는 환호와 아쉬움을 남기며 대회는 점점 열기를 더해 갔다.
열 번째, 드디어 우리 차례가 되었다.
서로 손을 잡고 등장할 때부터 사회자는 우리 가족을 소개했다. ‘경상남북도에서 단 한 가족’이라는 말이 귀에 쏙 들어왔다. 소개에 이어 간단한 인터뷰도 있었다. 4학년인 막내에게 몇 번의 질문이 있었지만 수줍어하며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는 것을 옆에서 보고 있으려니 몹시 안타까웠다. 이런 장면을 미리 예상하고 준비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다른 가족들도 한 차례씩 질문을 받았지만 역시 대답들이 서툴렀다. 경상도 억양이 그대로 나오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이제 노래를 부를 시간이다. 리허설을 거치지 않아 악단과 호흡을 잘 맞출 수 있을지 우선 걱정이 되었지만 어제 녹음실에서 기사가 말해주던 ‘아주 좋습니다’를 떠올리며 최선을 다해 노래했다.
관중들의 손뼉 소리를 뒤로 하고 대기실로 다시 들어섰을 때는 큰 짐을 벗은 것처럼 가볍고 홀가분하였다. 주어지는 결과에는 신경 쓰지 않기로 이미 작정한 터라 더 편하기도 하였다.
마지막 순서까지 경연이 모두 끝나고 결과를 발표할 시간이 되었다.
열 한 가족에게는 참가상이, 나머지 열 한 가족에게는 본상인 장려상, 은상, 금상, 최우수상이 주어진다고 사회자가 말할 때 우리는 ‘이렇게 방송에도 나오고 참가상에 든 것도 어디냐’ 차분하게 발표를 기다렸다.
그런데 참가상, 거기에 우리는 호명되지 않았다. 그럼 장려상은 되겠다 싶어 더 기뻤다. 장려상에도, 이어지는 은상에도 우리 가족은 부르지 않았다. 이제 남은 세 가족 중에서 최우수상과 금상 두 가족이 결정되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은 참으로 알 수 없는가 보다. 순간 내 마음에 동요가 일었다. 참가상으로 족하다던 생각은 벌써 까맣게 잊어버리고 여기까지 왔으니 이왕이면 최우수상을 받았으면 좋겠다는 과한 욕심이 생겼던 것이다.
그런데 그 욕심이 현실이 되었다. 최우수상에 호명된 순간 우리 가족은 서로 끌어안고 감격하였다. 관중석에서 다시 우레와 같은 손뼉 소리가 올라왔다.
우리에게 이런 일이 생기다니 정말 꿈만 같았다. 서울 구경, 방송국 구경이나 하자던 소박한 바람이 이런 뜻밖의 큰 기쁨으로 바뀔 줄은 감히 짐작도 못했기 때문이다. 상장, 트로피, 부상을 받을 때는 정신이 없었다.
시상식을 마치고 귀갓길에 올랐다.
서울역 대합실, ‘꼭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고 덕담하시던 말씀도 생각나고 은근히 자랑도 하고 싶어 공중전화를 이용하여 형님께 전화를 넣었다. '최우수상을 받았다'는 내 말에 몇 번이고 되물어 확인하고는 그제서야 ‘내 뭐라던가? 그럴 줄 알았네. 이사람아, 축하하네, 축하해!’라고 기뻐해주셨다. 형님의 환한 얼굴을 떠올렸다. 하루 묵어가라는 말씀도 빼놓지 않았지만 내일은 출근해야 하니 그럴 수가 없었다.
늦은 저녁이 돼서야 겨우 집에 도착했다.
힘든 이틀이었지만 그래도 이보다 즐거운 날은 다시는 오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더욱 잊지 못할 날이었다. 촌티가 줄줄 흐르는 가족의 서울 나들이었지만 기대 밖의 좋은 결과를 안고 왔으니 그 촌스러움도 이제는 꼭 부끄러워할 필요없다고 스스로 위로하기도 하였다.
녹화한 것은 5월 5일 어린이날에 전국에 방영되었다. 텔레비전을 보면서 부상으로 받은 비디오레코더를 이용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녹화하였다. 나중에 복사하여 친지들에게 돌리기로 하였으나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였다. 녹음실에서 미리 주문한 카세트테이프도 며칠 뒤에 도착하였다. 가까운 친지들에게 하나씩 나누어주면서 듣는 축하 인사와 칭찬에 다시 그때의 흥분에 들떴던 것이 지금도 생생하다.
세상일이 뜻대로 되기 어렵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전혀 불가능하다고 생각할 필요도 없겠구나 다시 깨달은 그때, 그때를 떠올리면서 지금도 그냥 그렇게 살고 있는 우리들을 확인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