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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진도 고성중학교 총 동문회 원문보기 글쓴이: 갯바람
고성한벌의 역사
필자 갯바람(제3회 조영남 / 둔전리)
인사 머리말
우리 모교가 1955. 5. 3. 설립허가를 받아 56년 이란 긴 세월 속에 2011년 봄 54회 졸업식을 맞아 8,375명의 졸업생을 배출한 역사 앞에 실로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2011 금년 총동문회행사에서 서로 만난 얼굴들과 그 감회는 우리 모교의 미래역사를 더욱 눈부시게 하는 축포였습니다. 서울과 광주 동문회를 비롯하여 그 어느 때보다 가장 많은 동문들이 참석하여 기쁨을 나눈 날, 화려하고 풍성한 잔치를 준비하신 박영준 하재범 신구회장님과 임원진 동문들께 더 할 수 없는 존경과 감사를 드립니다.
회고할수록 실로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전후 극도로 궁핍하던 1950년대 당시 중학모를 쓴다는 것은 실로 선택받은 일, 부모님들의 특별한 사랑 속에 큰 꿈을 실은 가슴 벅찬 길이었습니다. 특히 1, 2, 3, 4, 5회 졸업생들은 고성초등학교 두 칸 교실 별체와 뒷마당 성벽 곁에 있는 초가집을 빌려 책걸상도 없이 맨 마룻바닥에 엎드려 배우면서도 그보다 행복할 수가 없었습니다. 겨울에 교실의 난로와 이창옥 교장선생님의 사택에 불을 지필 나무를 하기 위해 전교생이 톱과 낫과 지게를 짊어지고 선생님들과 함께 첨찰산을 오르내릴 때는 소풍날보다 더 즐거웠습니다. 그 모든 것이 배움의 집 교정에 울려 퍼진 우렁찬 함성의 교가합창! <첨찰산(尖察山 485m) 정기 받은 고성한벌>의 꿈과 역사였습니다.
그 벅찬 날 우리는 비로소 교과서를 통해서 겨레역사를 배우면서도 정작 그 “역사”라는 것이 우리 자신들이나 모교와는 무관한 자리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겨레의 옛 땅이었다는 광활한 요동만주벌을 질주하며 다스린 고조선과 부여, 고구려, 발해 등 그 구체적인 역사 사실들 앞에서 저는 손을 번쩍 들어 선생님께 “선생님, 이 역사를 과연 누가 기록합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도대체 수천 년 전부터의 이 엄청난 역사 사실들을 어느 누가 이토록 다 낱낱이 찾고 알아 기록할 수가 있을까? 너무 궁금하고 의아스러웠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선생님께서 아주 좋은 질문이라 하시며 대답해 주셨습니다. “역사를 기록하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역사를 찾아나서는 사람에게 역사는 말하고 그 사람들이 역사를 이토록 기록하여 우리에게 전하거니와, 여러분들 자신이 바로 그 역사를 기록할 주인들입니다.” 라고 하셨습니다. 그 날의 선생님 가르침 속에서 비로소 저는 나 자신이 크든 작든 역사의 주인이요, 우리들의 꿈과 현실의 모든 것이 단 하나도 버릴 것이 없는 역사라는 사실을 크게 새겼습니다. 그런 자리에서 2-3학년 때 당시 생물을 가르치신 한만수 선생님의 지도를 받아 학교신문을 발행할 때 저와 같은 3회 김영학이 함께 편집을 맡아 원사지에 줄판글씨로 삽화도 그려 넣으며 발행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당시 시골 섬 끝자리에 오셔 우리를 가르치신 젊은 날 은사님들의 그 열정과 가르치심이 얼마나 크고 거룩했던 것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똑 같은 자리에서도 “역사”를 품은 꿈과 그렇지 아니한 자리는 분명코 다릅니다. 역사의식과 마음을 지닌 자리에선 모두가 그냥 무심코 지나가는 겨울길가의 푸석푸석 메마른 풀포기에서도 푸르른 봄날을 느끼고, 무너진 성벽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에서도 천년 세월을 함께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보통 역사를 지나간 날들과 지나가버린 날의 것들로 여기기 쉽습니다. 우리사회가 신산업화의 꿈으로 줄달음질치던 1960년대 초 저 미국의 역사학자인 헬렛 카가 “역사란 무엇인가?”라고 자신에게 스스로 묻고 그에 스스로 답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그는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정의했습니다. 그로부터 동서의 모든 역사가들과 일반이 역사를 다시 보기 시작하고 역사에 대한 기본인식이 대전환을 일으켜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로써 과거의 역사적 시각이 승리와 영웅 중심이었다면 그로부터 역사는 그동안 역사의 변두리만 맴돌고 역사에서 배제된 패배와 절망의 민중과 가장 평범하고 보편적인 모든 것들의 진실에 있다는 사실로 바뀌었습니다.
그런 자리에서 우리는 헬렛 카가 정의한 역사를 다시 말할 수가 있습니다. 역사는 모든 과거와 미래가 창조적이고 실천적인 꿈으로 언제나 오늘 속에 있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결국 모두가 “지나가고, 사라지고, 없으며, 두 번 다시 돌아올 수 없다.”고 하는 그 모든 것들이 단 하나도 없는 실제가 곧 역사라고 말해야할 것입니다. 곧 끊김도 멈춤도 없이 오늘 속에 영원히 흐르는 큰 강물과 같은 것이 역사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서 저는 개인적으로 역사를 상징 대표하는 “역사”라는 말에 늘 부족함을 느끼기 때문에 그 언어를 “역사현실”이라는 말로 대신하곤 하는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보통 지나간 것들을 오늘 속에 다시 생각할 때 “추억을 회상”한다고들 말하지만, 그 자리에서 역사의 눈과 마음을 지닌 사람들에게는 결단코 단순한 회상이나 추억거리가 아니라 “내일” 또는 “꿈”을 향한 창조적 대화와 소통의 자리일 것입니다. 제가 지금 동문들을 향해 모교에 대한 애정과 꿈을 피력함에 있어 “고성중학교”라는 한정적인 울에서가 아니라 그를 좀 더 확대한 <고성한벌>의 역사부터 먼저 말하고 모두가 그를 먼저 알기를 바라는 자리에서입니다. 그토록 우리가 인류사와 겨레역사 속에서의 <고성한벌>을 다시 보고 그 주체적 역사시각을 지녔을 때 비로소 모교를 향한 우리 모두의 꿈은 더욱 눈부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진도역사 연혁
A. <옥주얼>이 정리한 연혁 : 가장 간략 하고 보편적인 것임
○ 삼한시대 (三韓時代) : 마한(馬韓)의 영토(領土)
○ 537년(백제성왕 15년) : 진도군(珍島郡) 창군(創軍)
○ 660년(신라무열왕 7년) : 대방주(帶方州) 속현(屬縣)
○ 909년(신라효공왕13년) : 태봉국(泰封國) 영속(領屬)
○ 940년(고려태조23년) : 재 설군(再 說郡) (珍島郡)
○ 995년(고려성종14년) : 옥주군(沃州郡)으로 개칭(改稱)
○ 1018년(고려현종 9년) : 진도군(珍島郡) 개칭
○ 1269년(고려원종10년) : 사고(史庫)를 진도로 옮김
○ 1270년(고려원종11년) : 오랑국(五狼國) 건국 - 삼별초(三別抄) 군
○ 1271년(고려원종12년) : 삼별초군 패전(敗戰)
○ 1272년(고려원종12년) : 진엄궁(振嚴宮)으로 사고(史庫)를 옮겨감
○ 1350년(고려충정왕2년) : 영암군(靈岩郡)시종면(始終面) 월악(月岳)으로 기군피난(棄郡避難)
○ 1409년(이조태조 9년) : 해남군(海南郡)과 합병(合倂) - (海珍郡)
○ 1437년(이조세종19년) : 진도군으로 분군(分郡) - 8면(面)
○ 1440년(이조세종22년) : 진도읍성 천읍(遷邑)
○ 1597년(이조선조30년) : 명량대첩(鳴梁大捷)
○ 1866년(이조고종 3년) : 진도군을 도호부(都護府)로 승격
○ 1873년(이조고종10년) : 군(郡)으로 환원
○ 1896년(이조고종33년) : 17개면으로 개편(改編) - 面執綱制
○ 1903년(이조광무 7년) : 면집강(面執綱)을 면장(面長)으로 개칭(改稱)
○ 1906년(이조광무10년) : 명산면(命山面)을 영암군, 삼촌면(三村面)을 해남군에 이속(移屬)
○ 1914년 : 도초(都草), 안창(雁瘡), 기좌(箕佐)를 무안군에 이속(移屬) 7면(面)으로 조정
○ 1963년 : 조도면 마진도(馬津島)리를 신안군(新安郡)에 이속
○ 1973년 : 군내면(郡內面) 서부지역을 진도면에 편입(編入)
○ 1979년 : 진도면이 읍(邑)으로 승격(昇格)
○ 1984년 : 조도면 고사도, 평사도, 만재도를 신안군(新安郡)에 이속
이는 진도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들을 연대순으로 가장 간략하게 요약 정리한 것이다. 그러나 시대구분 없이 연대순으로만 나열하여 시대변천에 대한 연관성의 총체적 시각이 없으므로 진도역사를 총체적으로 빠르게 이해하는데 쉽지 않다. 뿐만 아니라 시대마다 진도역사에서 정작 더 크고 중요한 부분들이 누락되기도 했다. 이러한 역사기술이 곧 지금까지 해온 역사 시각으로서 중앙권력의 정치와 행정 중심적인 사고이다. 따라서 필자는 겨레역사 속에 우리 진도가 역사주체로 선 자리에서 진도의 역사를 다시 보고자하며 가능한 한 그런 시각에서 앞으로 진도의 역사를 정리 기술하고자 한다.
B. 필자가 정리한 연혁
1. 고조선 삼한시대
마한54국 중 1국 보배섬 [인진도 因珍島] : 고성(古城) 고군(古郡)지역이 중심
2. 삼국시대
백제의 진도군. 진도군 창군 백제성왕15년(537년). 읍 고성
<인진도>가 진도군이 되어 서북부 <도산현>과 남부<매구리현>을 거느림
3. 통일신라시대
진도세력 크게 약화.
무열왕7(660년) 대방주(帶方州 : 羅州) 무안군의 속현
진도의 모든 중심인 진도군(고성 고군)이 진도현으로 강등되어 무안군의 속현이 되고 말았다. 곧 가장 부요하고 강한 동북부 고군을 쪼개어 무안군에 빼앗기고 나머지 <도산현>과 <매구리현>만이 진도가 되고 말았으니 그 진도가 도산현을 군으로 승격시켜 매구리현만을 거느린<뇌산군>이다. 그로써 통일신라 때 진도는 가장 큰 번영을 누린 삼한-백제 시대의 해상실크로드 무역권의 중심을 무안군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통일신라는 그토록 적극적으로 진도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무안군을 크게 세워 그 무역권을 무안에게 넘겨주었다.
4. 후삼국시대
909년(신라효공왕13년) 후백제 권에서 나주 금성과 함께 태봉국(泰封國) 편에 서서 영산강 금성전투에서 견훤군을 패퇴시킴으로써 고려건국에 결정적인 공을 세웠다. 그로써 통일신라에서 버림받은 진도가 고려개국과 더불어 다시 원점으로 복귀되었다.
5. 고려시대
해군력이 약하고 열세였던 왕건군을 도와 고려건국에 결정적인 공을 세움으로써 고려건국과 함께 진도는 곧장 백제시대의 원점으로 복귀되었다. 무안의 속현인 <진도현>이 다시 <진도군>이 되고, <뇌산군>이 폐지되었다. 그리고 과거 도산현이자 뇌산군이었던 곳을 <가흥현>으로 바꾸고, 남부의 <매구리현>이 <임회현>으로 개칭되어, 다시 진도군의 속현이 되었다.
이토록 고조선 삼한시대에 마한 1국으로서 해상무역 십자로에서 독자적으로 바다를 누비며 번영을 누렸던 <인진도> 시대를 넘어 국가체제 곧 중앙집권체제가 됨으로써 그로부터는 국가의 운명과 권력이동에 따라 진도의 역사운명도 변화를 겪을 밖에 없었다.
통일신라가 백제를 멸망시킨 후 그토록 진도의 세력을 철저하게 약화시킨 것으로써 백제에게 진도가 얼마나 크고 중요한 해상무역의 전진기지이자 십자로였던 것임과 더불어 진도가 화려한 번영을 누렸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백제재기라는 목표 아래선 서남권이 모두 후백제 편에 설 수밖에 없는 자리에서 진도가 오히려 태봉국 왕건 쪽에 섰던 것도 이해되는 것은 견훤과 궁예가 당초와는 달리 변심하고 반면 왕건의 모든 것이 신망을 받은 것과 더불어, 삼한시대로부터 영산강유역의 황해바다 무역에서 가장 큰 중심이었던 영암과 나주 금성 중 특히 진도와 관계가 깊고 신뢰가 두터운 나주 금성이 왕건 쪽에 선데 있으리라. 그 부분을 역사기록은 왕건이 먼저 진도와 무안을 공략하여 복속시킨 후 금성전투에 투입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바로 그게 통치자와 승리자 중심의 과거 역사이다. 삼별초 필사항몽의 자주국권 진도 오룡국 역사에서 보듯이 만약 왕건이 그토록 군사력으로 진도를 굴복시키려 했다면 과연 진도가 그렇게 호락호락 넘어가고 금성전투에서 결정적인 공을 세우고 또 고려건국과 즉시 옛 영화를 회복할 수 있었겠는가? 삼척동자라도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다.
아는 바처럼 고려는 당초 개성의 예성강을 통한 해외무역으로 선 자리, 개국과 더불어 그 깃발이 “고려(高麗) 코리아”를 세계 속에 확고하게 심으며 아라비아반도까지 세계바다를 누볐으니, 그 자리는 고조선 삼한-백제-통일신라시대보다 훨씬 눈부신 돛폭이었다. 그런 자리에서 진도가 어떠했으리라는 것을 불을 보듯 하거나와 고려사와 고려시대 진도역사의 다른 부분들에 분명하게 확인된다.
여전히 아니 더욱 눈부시게 번영을 누리는 보배섬나라 진도인데다가 바다를 누비는 해상군사력을 확보한 섬이었기 때문에 그런 배경에서 1270년 겨레 영원한 자주주권의 기치 필사항몽의 남도해상 <오룡국 五龍國>이 섰을 것이다.
○ 940년(태조23년) : 재설군(再說郡) (珍島郡) : 2현-가흥현과 임회현
○ 995년(성종14년) : 옥주군(沃州郡)으로 개칭(改稱)
○ 1018년(현종 9년) : 진도군(珍島郡)으로 환원
○ 1269년(원종10년) : 사고(史庫)를 진도로 옮김
○ 1270년(원종11년) : 항몽 겨레자주 남도해상 오룡국(五龍國) 건국
○ 1271년(원종12년) : 오룡국 도성 진도멸망-제주탈출
○ 1272년(원종13년) : 진엄궁(振嚴宮)으로 사고(史庫)를 옮겨감
○ 1274년(원종15년) : 제주성 함락과 오룡국 멸망
○ 1350년(충정왕2년) : 왜구침입에 영암군(靈岩郡) 시종면(始終面) 월악(月岳)으로 이주하여
영산강 중류 삼호강 시종 월악에 내륙의 <진도군>건설
○ 연대미상(공민왕-우왕시기?) : 월악에서 같은 영산강 중류 삼호강 유역 시종 땅 구산으로 이주.
○ 1392년(공양왕3년) : 진도군이 구산에 있을 때 고려멸망
진도 오룡국(五龍國) - 별도 후술
내륙유랑 87년 진도 - 별도 후술
요약 : 오룡국 도성 진도멸망(1271년 5월 15일)과 함께 진도는 처참한 떼 주검 몰무덤터가 된 데다가 주민이 2만 명이나 몽고로 끌려가고 말았다. 분루를 삼키며 그 무주폐허에서 채 일어서기도 전에 이번엔 왜구들이 득세하여 서남해안은 물론 예로부터 보배섬으로 알려져 언제나 그들의 제일표적이 되곤 해 온 진도는 그 더욱 다시 왜구들의 도륙장이 되어 불길 속에 휩싸이고 말았다. 아우성치는 백성들 앞에 이미 몽고에게 모든 기력을 다해버린 고려는 그들을 막을 아무런 힘도 방책도 없어, 서남해의 모든 섬 주민들에게 섬을 버리고 내륙으로 피하라 했다. 바로 그때 흑산도 주민들은 과거에 오르내리며 익숙한 영산강 영산포와 구진포에 터를 다진 것이다. 그때 폐해가 가장 컸던 진도 주민들은 조정으로부터 <진도군>의 내륙이주 명령을 받고 모두가 섬을 비우고 관헌들을 따라 내륙으로 나섰다. 아마 뱃길과 육로로 나누어졌을 것이다. 전 군과 군민이 이주하는 길에 국가는 분명코 새로운 진도군의 터를 명시했을 것이리라. 그곳이 곧 오늘의 영산강 중류의 삼호강 중류지역, 나주와 영암의 경계지역이자 당시에 나주령이었던 오늘의 영암군 시종면 월악이다.
월악에 이른 진도군 주민들은 즉시 그곳에 진도군을 건설하고 전답을 일구어 씨를 다시 뿌렸다. 죽을지언정 버릴 수 없는 영원한 본향섬을 국명 앞에 부득불 버리고 떠난 타관 땅에서 월출산 남쪽 하늘만을 쳐다보던 진도사람들은 그 그리움 앞에 단 한 발짝이라도 고향섬 가까운 남쪽을 향해 모두가 월악을 떠난 곳이 삼호강이 영산강 본류로 들어가는 같은 시종면 구산일대에 다시 터를 다졌다.
그러나 고려는 진도를 본향섬에 다시 세울 기미라곤 전혀 보이지 아니한 채 아예 진도를 버려 잊고 말았다. 그렇게 본향섬을 떠난 지 월악과 구산에서 42년을 보내는 사이, 고려는 끝내 침략자 몽고와 함께 스러지고 말았다. 1392년 공양왕 3년 여름에.
6. 조선시대
진도를 버린 고려가 망하고 새 나라 조선이 서자 2대를 걸친 타관살이 42년의 영암 시종 삼호강변 <진도군> 군민들은 비로소 소망을 확신했다. 이미 고려 말에 남도해안 권을 침해하는 왜구들을 물리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우고 그에 대한 특히 남도 백성들의 신망이 도타운 이성계 장군이 조선태조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로 진도군과 모든 군민들이 조선개국과 함께 바로 그해 여름 즉시 구산을 떠나 일제히 남쪽의 긴 행렬에 나섰다. 그리고 이른 곳이 본향섬이 마주보이는 마로해협 고천암 원진포(院津浦) 원진이다.
진도의 역사와 왜구를 잘 아는 이태조는 개국과 더불어 왜구들에 대한 국방의지를 가장 분명히 했을 것이요, 40여 년 동안 고려가 버리고 비워 둔 섬 진도를 다시 국방요새로 세울 계획을 지녔으리라. 국가로부터 군에 내리는 분명한 교지기 없고서야 어찌 바로 그해 여름 그동안 터를 다지고 씨 뿌려 무성한 들녘 곡식들까지 모두 그대로 다 버리고 무작정 구산을 떠날 수 있을까. 그러나 또 왜 곧바로 본향섬으로 들어가라 하지 않았을까? 개국 초기 산적한 중앙정치와 여전히 설치는 왜구들 앞에 국가가 직접 앞에 나서서 진도를 다시 곧바로 세우기는 어려웠던 때문이리라.
그로 <원진 진도>에서 다시 <해진군>을 거쳐 <진도군>이 본향섬에 복귀되기까지는 다시 45년의 세월이 걸렸다. 그리고 세종 때에 북으로 여진족을 평정하여 육진을 세우고, 남쪽 바다로 왜구들의 소굴인 대마도를 정벌하여 복속시킨 후 비로소 세종19년(1397년) <진도군>을 복귀시키고, 조선의 새 진도건설의 대역사를 국가가 직접 실천하고 나선 것이다.
○ 1392년(태조원년) : 고려멸망과 조선건국과 함께 그해 여름 영암 시종 땅 <진도>는 즉시
해남 땅 원진(院津)으로 이주하여 새 <진도군 원진> 건설
○ 1409년(태조 9년) : 원진 진도군과 영암군 속현인 해남현을 합병하여 해진군(海珍郡) 창설. 진도군민은
즉시 또 원진에서 해진군으로 이주하여 <해진군>건설에 참여.
○ 1437년(세종19년) : 조선은 비로소 진도군을 해진군에서 분리하여 섬에 다시 복귀시키고,
진도군과 군민들은 섬을 비우고 떠난 지 87년 만에 비로소 귀향회도-8면(面)
조선의 특단 의지 : 서남해역 제일국방요새군 진도건설
복군 귀향과 함께 불과 2-3년 사이에 진도가 구축한 대역사는 새 읍성, 철마 산성, 급갑포와 남도포 수군만호 해안진성, 조도맹성, 지력산국영목장, 조 도와 해남 문내 화원속장, 울돌목 전라우수영(유명무실한 무안의 고려우 수영을 울돌목으로 이전) 등이다.
○ 1440년(세종22년) : 천년 읍 고성(古城)에서 새 진도읍성으로 천읍(遷邑)
서남해역 최고최대 국방요새가 된 진도
○ 1597년(선조30년) : 명량대첩(鳴梁大捷)
○ 1866년(고종 3년) : 진도군을 도호부(都護府)로 승격
식민제국주의 열강들의 침략파고가 높을 때 실권자인 대원군에 의해 진도군을 도호 부로 대폭 승격시켜 당시 전라우수영 관할 지역인 무안 군(목포포함)과 오늘의 산안군 비금도초, 안좌팔금 지역까지 그 이남의 모든 도서지역을 관할 통치함.
○ 1873년(고종10년) : 대원군이 실각됨으로써 도호부 진도는 7년 만에 다시 군(郡)으로 환원
○ 1994년(고종31년) : 동학혁명 진도의 최후
○ 1896년(고종33년) : 면집강제 실시로 진도군 17개면으로 개편(改編) -본도 10개면/조도권 2면/ 내륙-2면영암<명산면>, 해남<삼촌면>/신안권 3면 -도초면, 안창면, 기좌면
○ 1903년(광무 7년) : 면집강(面執綱)을 면장(面長)으로 개칭(改稱)
명량대첩 - 별도 후술
7. 일제시대(1905-1945년)
○ 1905(을사년) : 을사보호조약, 한일 강제합방, 국권상실
○ 1906년(광무10년) : 명산면(命山面)을 영암군에, 삼촌면(三村面)을 해남군에 이속(移屬)
○ 1910년 : 일제 조선총독부 설립
○ 1914년 : 총독부에 의한 대대적인 행정개편.
도초(都草), 안창(雁瘡), 기좌(箕佐)를 무안에 이속.
가사면과 제도면을 병합하여 조도면으로 개칭하고
본도의 10면을 6면으로 조정하여 7면이 됨.
8. 대한민국
○ 1963년 : 조도면 마진도(馬津島)리를 신안군(新安郡)에 이속
○ 1973년 : 군내면(郡內面) 서부지역을 진도면에 편입(編入)
○ 1979년 : 진도면이 읍(邑)으로 승격(昇格)
○ 1984년 : 조도면 고사도, 평사도, 만재도를 신안군(新安郡)에 이속
<다음으로 연속 됨>
첫댓글 잘 보았습니다. 좋은 자료, 자부심이 느껴지는 자료 입니다.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 잘읽었습니다. 계속 좋은글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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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틀거리는 진도의 섬들...
젊은이의 꿈들...
알고가는 우리의 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