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사람에게는 두 개의 자존심이 있습니다. 하나는 유신 독재체제를 무너뜨린 부마민주항쟁이고 또 하나는 부산양서협동조합을 만든 일이지요. 책을 매개로 하는 협동조합은 세계에서 처음이었습니다. 강제 해산된 지 36년 만에 재건하기로 해 감개무량합니다."
78년 책방골목서 문 연 협동조합
70·80년대 민주화운동 산실 활약
79년 부마항쟁 배후 지목 강제 해산
9월 15일 양서협동조합 창립총회
부산 시내 북카페 형태 서점 운영
"부산, 지식분야 협동 구심점 되길"
1970년대 말 부산 지역 민주화운동의 산실이자 교육장 역할을 했던 부산양서협동조합. 78년 4월 중구 보수동 책방골목에서 첫걸음을 뗀 양서조합은 한때 조합원이 600명에 육박할 정도로 규모가 커졌지만 부마항쟁 배후로 지목돼 79년 11월 19일 강제 해산됐다. 김형기(당시 중부교회 대학부 교사) 목사와 함께 창립 핵심 인물이었던 최준영(63) 부산양서협동조합 재건준비위원장을 책방골목 인근에서 만났다.
"지난 4월 23일 부산YMCA에서 발기인대회를 열었습니다. 한 60명 참여했지요. 모임 구상은 1년 전부터 했습니다. 지난해 부림사건 무죄 판결로 형사보상금이 나왔는데 그중 일부를 떼 양서조합 재건하는 데 쓰자고 제의했습니다. 맨 처음 아이디어를 낸 김 목사님을 찾아가 설명했더니 흔쾌히 해 보자고 하시더군요."
최 위원장은 현재 2천400만 원가량의 발기인 출자금이 모였다고 귀띔한다. 출자금은 1계좌 5천 원에 가입비 1만 원으로 정해졌다. 앞으로 9월 창립총회를 거쳐 조합원을 1천 명 모으는 게 1차 목표다. 양서조합은 어떻게 운영될까.
"역시 '좋은 책 읽기 운동'이 핵심일 겁니다. 좋은 음악, 좋은 영화, 좋은 그림 등을 포함하는 문화운동도 병행할 겁니다. 예전처럼 소모임도 만들고 강좌 프로그램도 운영할 겁니다. 물론 아이들이나 성인들을 위한 좋은 책 목록을 꾸준히 선정하고 책을 재미있게 접하도록 유도할 계획입니다."
최 위원장은 북카페 형태의 서점 방식으로 운영할 생각이다. 이 모두가 예전에 다 했던 것이란다. 실제로 78년 양서조합을 시작할 때도 4평 규모의 '협동서점'을 보수동에서 개소(1년 뒤 서라벌호텔 쪽으로 확장·이전했다)했고 매주 1차례 금요세미나를 열었다. 또 노동·도시·농촌 문제 학습 소모임과 함께 일어·중국어·영어 등 어학 학습 모임, 꽃꽂이·사진·연극반 등 취미 모임도 있었다고.
"지금 생각해도 상당히 선진적인 방식이었지요. 양서조합 이용 계층은 대학생·직장인·주부 등 20~30대가 80%를 넘었습니다. 일신산부인과 간호사였던 구성애 씨는 동료 간호사를 상당수 데려와 인상적이었습니다. 김광일·이흥록 변호사 등이 물주 역할을 했지요. 최열 환경운동가·김남주 시인·황석영 소설가 등도 부산 오면 반드시 들렀습니다."
황석영 씨는 술이 한잔 들어가면 허리띠를 풀어 노처럼 저으면서 '처녀뱃사공' 노래를 신명나게 잘 불렀고 김남주 시인은 시낭송을 하거나 양공주의 애환을 담은 '순이'라는 노래를 잘 불렀다고 회상한다.
최 위원장은 민청학련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고 부산에 내려온 김 목사와의 만남이 양서조합을 만든 계기가 됐다고 밝혔다. 서울대 공대 71학번인 최 위원장은 74년 입대 뒤 부산 군수사령부에 배치됐는데 대학 선배 소개로 김 목사를 만났다. 협동조합 운동에 관심이 많았던 김 목사는 최 위원장에게 '협동조합과 민주화운동을 결합하면 좋겠다'고 제의, 양서조합 운동을 시작하게 됐다고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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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78년 4월 처음 문을 연 4평 크기의 양서협동조합. 부산일보DB |
"77년 여름 전역한 뒤 78년 서울로 올라가 4학년에 복학했습니다. 서울 양서조합을 만드는 데 깊숙이 개입했지요. 특히 서울 지역 출판사마다 다니면서 필요한 책을 구해 부산으로 많이 보냈습니다. 당시 한길사는 설립 초창기였는데 김언호 대표가 직접 책을 끈으로 묶어 주기도 했습니다."
최 위원장은 부산 양서조합이 성공을 거두면서 마산(78년 8월 결성) 대구(78년 9월) 서울(78년 11월) 울산(79년 1월) 광주(79년 3월) 수원(79년 5월) 등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고 밝힌다. 당시에는 의식 있는 대학생이나 지식인들이 만날 수 있는 공간이 극히 제한적이었는데 양서조합이 사랑방 역할을 했다고 설명한다.
"양서조합 내 소모임에 부산대·동아대 학생들이 많이 참여했습니다. 77학번이 주축을 이뤘는데 이들이 자연스레 학내 스터디 그룹을 만들고 학생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했습니다. 양서조합을 통해 금서도 은밀히 유통됐지요. 신동엽 시인의 '신동엽전집', 조태일·김지하 시인의 '국토' '오적' 등이 대표적인 것들입니다."
최 위원장은 78년 11월 동방생명(현 삼성생명)에 합격한 뒤 부산 근무를 자원, 79년 다시 부산으로 내려왔다. 그런데 입사 이전인 78년 여름 전주서 열렸던 기독교장로회 청년연합회 전국 수련대회(실제 책임자였다) 일부 문건이 뒤늦게 문제가 돼 중앙정보부에 보름간 연행되는 바람에 회사를 그만두게 됐다. 그 후 81년 부림사건이 발생, 양서조합 핵심 멤버와 함께 구속됐다. 모두 19명이었다.
"부림사건은 부산 지역 활동가가 다 잡혀 간 사건입니다. 전두환 정권이 집권 초기 방해 세력을 제거할 목적으로 일으킨 사건이지요. 저는 83년 광복절 특사로 석방된 뒤 86년까지 한국교회사회선교협의회(社宣) 부산지역 총무로 활동하며 부산 인권위원회 설립 지원 등 역할을 했습니다."
최 위원장은 86년 9월 컴퓨터 관련 회사를 창업했다. 90년 부도 뒤엔 교육 사업을 하다 2007년부터 동북통상이라는 기업체를 운영하고 있다. 사촌 형의 자동차부품 생산회사 계열사로 이후 경제적으로 안정됐다.
"재건되는 양서조합은 상징성을 따지면 책방 골목 언저리에 개소해야 하는 것이 맞지만 교통이 불편하고 접근성이 떨어진다는 의견이 많아 서면이나 해운대 쪽도 고려하고 있습니다. 다른 지역으로 가더라도 보수동 책방문화관을 적극 활용, 정체성은 계속 유지할 계획입니다."
최 위원장은 본래 세계협동조합의 날인 7월 4일 창립총회를 하려 했지만 메르스 때문에 9월 15일로 연기했다고 밝힌다. 협동조합을 통해 자라나는 세대들이 민주적 토론과 상향식 결정 방식을 배울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인다.
"약간 비겁했으면 편안하고 무난하게 살아왔을 텐데 굴곡이 좀 많았습니다. 소중했던 인생의 한 부분을 저보다는 남을 위한 고민을 하며 살았다는 데 보람을 느낍니다. 양서조합을 통해 부산이 지식·정보·교육·문화 분야에서 협동과 상생의 도시가 되었으면 합니다. 출판산업에도 활력을 불어넣는 등 선순환 역할을 기대합니다." soney97@busan.com
최준영 준비위원장은
1952년 경남 밀양 출생. 초등학교 3학년 때 부산으로 이사. 71년 부산고 졸업, 서울대 공대 응용수학과(나중에 산업공학과로 전과) 입학. 78년 11월 동방생명(현 삼성생명) 입사. 81년 9월 부림사건으로 투옥. 83년 한국교회사회선교협의회 부산지역 총무. 86년 ㈜화일시스템 창업. 95년 ㈜아키정보기술 경영사장 취임. 2007년 동북통상 창업. 2008년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