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장 예수가 다시 동방으로 간 이유
서기 30년대는 팔레스티나 지역에서 신흥종교 그리스도교의 교세가 급격히 확장되는 시기였다. 이 새 종교의 교리와 설법은 당시 로마정권의 핍박과 수탈로 너무나 비참했던 유대인의 삶을 바꾸어 놓을 것이라는 희망을 주었다. 또한 소아시아, 지중해 연안 등지의 이교도의 삶까지도 다 구제할 수 있고, 무엇보다도 현재의 삶이 곧 개선된다는 약속이 저변에 깔려 있었다. 이 종교의 창시자격인 예수의 종교적 권위와 그의 정치적 지도력도 널리 인정되게 되었다. 한편 예수의 지지와 종용을 받은 바울은 공격적인 선교활동으로 소아시아와 지중해 연안에서 많은 이교도들을 개종시키게 된다. 이 신흥종교는 그 교리와 종규에 있어서 종래의 유대교에 비해 개방적이고 덜 엄격했기 때문에 이교도가 개종하는 것이 비교적 수월하다는 점이 교세확장에 도움이 되었다. 대표적인 예로, 이 종교는 유대교가 필수조건으로 요구하는 할례를 면제한 것이다.
예수 당대의 인물 중에서 예수와 동격의 권위와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희대의 병 치료사이자 마술사 그리고 엑소시스트인 시몬 마기였다. 그는 유대교의 할례등 형식주의를 반대하는 입장에서는 예수와 동조했으나, 그가 로마와의 무력 투쟁을 주장하고 또 실천하였다는 점에서는 예수와 입장을 달리하였다. 이 시기에 중요했던 인물 중의 또 하나가 예수의 동생 야고보였는데 그는 바라새교인과 똑같이 유대교의 종규를 엄격하게 지키는 것이 옳은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이렇게 서기 30년대와 40년대는 교리와 종규의 차이로 당대 중요 인물들이 때로는 같은 길을 가기도 하였다가 때로는 갈라서기도 하는 일이 빈번하였다.
이런 충동과 대립 속에서 예수는 유대교를 대폭 수정하여 다신교를 포함하는 다른 종교의 신자들을 다 포용할 수 있는 이른바 신유대교, 즉 그리스도교를 창시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곧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기독교, 또는 그의 원형이다. 서기 50년대 와서 예수는 종전과는 다른 어려운 국면에 처하게 된다. 그가 믿었던 종말론 때문이다.
유대인들이 오랫동안 믿어왔던 종말론에 의하면 하나님의 천지창조를 원년으로 하고 그때부터 4,000년이 되는 해에 지구에는 해도 별도 없는 암흑이 오고 엄청난 지각변동을 동반하는 지구 최후의 날, 즉 최후심판의 날이 온다는 것이다. 이 심판 이후에는 모두가 고통없이 잘 사는 지복천년 至福千年이 찾아오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최후의 심판, 브루겔
당시 천문학에서 사용하던 율리우스력을 이용, 천지장조의 해를 영零년으로 하고 4,000년이 되는 해를 계산하면 서기 30년 전후에 떨어진다. 이때가 바로 예수가 팔레스티나 지역에서 살고 활동하던 그때이다. 예수를 포함한 성직자들은 수 차례에 걸쳐 이 예언된 종말의 날을 계산하여 서기 29년 9월, 30년 1월, 31년 등으로 확정하고, 이 날 세상을 뒤집어 엎을 만한 대격변을 기다렸으나 이렇다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계산을 수정하여 다시 날을 잡고 또 기다려도 삼라만상에는 어제와 다른 아무 변화가 없었다. 이러한 상황은 이십여 년이나 더 계속되었다.
누구보다도 종교적이었던 유대인들은 동요하기 시작하였다. 로마의 학정 속에서 어렵게만 살던 유대인의 민심은 점점 흉흉해지고 있었다. 예언된 최후의 날이 오지 않는 것은 무언가가 잘못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에 대한 성직자들의 불경과 부패, 유대인의 신앙의 부족, 왕족의 부정한 행위, 이런 것을 그 원인으로 보고 사람들은 성직자등 관계자들을 질책하고 규탄하였다. 여기저기서 폭동이 일어난다. 이때에는 유대교도이거나 그리스도교이거나 모두 다 불만세력이었고 그들은 다 폭도가 되었다. 결국 종교지도자나 신도들이 고대했던 「유대인의 왕국」의 꿈은 물거품이 되었다.
또한 비슷한 시기에 로마정권은 그리스도교들을 더욱 핍박하기 시작했고 문제가 될 만한 종교지도자들은 구속되거나 감시대상으로 몰렸다. 이러한 사회 혼란 속에서 예수도 무사할 수는 없었다. 로마정권은 물론 예루살렘의 바리새인들도 예수가 십자가형에서 살아나 앞에 나서지 않지만 제자들의 배후에서 지시하고 교리상의 이론적 지원을 하고 있는 것은 알고 있었다. 또한, 로마, 소아시아, 그리스 등지를 돌아다니며 선교활동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를 그냥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예수는 쫓기는 몸이 되었다. 제자들과 측근들은 예수에게 정체가 드러나 붙잡혀 박해받지 않도록 팔레스티나을 떠나라고 설득하고 있었다.
예수는 돌파구를 찾고 있었다. 예수는 "길 잃은 양을 찾아서 한 우리로 모으는 목자牧者로서의 사명"을 청년시절부터 하나님이 자기에게 준 사명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은 항상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었다. 당시 유대인들은 자기의 모국 즉 이스라엘 땅에서만 살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이미 BC 6세기 구약시대부터 팔레스티나 지역이 아닌 여러곳에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었다. 유대인 대부분이 고국에서 살지 못하고 디아스포라로 전락하여 전 세계로 흩어져 살게 된 연유는 무엇인가?
기원전 1,300년 대 아브라함의 3대손 야곱은 그의 처와 첩으로부터 12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이들의 후손들이 12부족이 되었다. 그 후 모세가 이들을 통합하고 그들에게 10계명으로 집약되는 종교 일신교를 세웠다. 모세와 여호수아 이후 기원전 970년 다윗 왕이 히브리의 12부족을 통일하였으나 그의 아들 솔로몬 왕이 죽자, 이스라엘과 유다의 두 왕국으로 쪼개졌다. 기원전 721년 북 이스라엘 왕국은 아시리아에 정복당하고 많은 유대인들은 메소포타미아 지방으로 두루 흩어졌다. 기원전 597년 남 유다 왕국마저 바빌론의 느부갓네살 왕 Nebuchadnezzar Ⅱ에 점령된다. 솔로몬의 성전은 파괴되고 많은 유대인들이 포로로 끌려가게 된다. 바로 '바빌로니아 포로생활'이다. 유대인들의 대규모 이산은 이때부터 시작된다.
이산 유대인(디아스포라: Diaspora) 의 이주 경로
기원전 539년 페르시아 제국의 고레스 Cyrus (=키루스)대왕이 은혜를 베풀어 바빌로니아에 잡혀있던 유대인들을 해방시켜 주자, 일부는 이스라엘로 돌아왔지만 페르시아나 더 멀리 이주한 유대인들도 많았다. 로마 식민지 당시 이스라엘에는 12부족 중 유다 Judah족과 베냐민 Benjamin족의 2부족이 주류를 이루고 소수의 레위 Levi족만이 팔레스티나에 살고 있었다. 나머지는 모두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10부족이라 불리었으며, 곳곳으로 흩여져 살고 있었다.
이 떠돌이 유랑민족은 서남과 서북쪽으로는 알렉산드리아을 중심으로한 이집트 북부와 예멘, 에티오피아, 아르메니아, 소아시아 등지까지 가서 살고 있었다. 동쪽으로는 아프가니스탄, 인도 서북부, 우크라이나, 그리고 심지어는 중국 서부지역에도 많은 유대인이 살고 있었다. 근세에 와서 이들을 통틀어 '디아스포라 Diaspora, 이산 離散 유대인, 유랑민족이라고 하지만 예수 당시에는 그들을 '베네 이스라엘 the Bene Israel', 즉 '이스라엘의 자식들 children of Israel' 또는 '잃어버린 열 부족 the Ten Lost Tribes of Israel'이라고 불렀다. 당시 이 이스라엘의 자식들의 수는 팔레스티나 지역에 사는 유대인수를 훨씬 초과하였다.
예수는 말하기를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 가라."
예수는 그때 이들을 이제 와서 한 곳으로 모으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그들을 직접 만나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동족애를 고취시키는 한편, 이국 땅에서 고달픈 삶을 사는 그들을 위로해 주는 것이 곧 그의 사명이라고 생각하였다. 미구에 도래할 최후의 날에 메시아가 해야 할 중대한 임무 중의 하나가 이들 잃어버린 10부족을 모두 이스라엘로 귀환시키는 것이었다. 예레미아 같은 선지자는 이것을 마치 모세시대의 출애굽에 견줄 만한 중요한 대규모의 과제로 보았다. 예수는 이제 메시아로서의 이 사명을 이행하기 위해 동방으로의 마지막 오딧세이 Jesus' Final Odyssey를 시작하려는 것이다.
예수는 어느 날 조용히 로마를 떠난다. 그는 유대로 건너와 멀리서 예루살렘 성전에 작별을 고하고, 시리아의 다마스커스를 거쳐 그 수도인 안디옥 Antioch으로 향한다. 그 당시 안디옥에는 가버나움 Capernaum에 이어 두 번째의 선교본부가 있었고, 여기에서 베드로, 바울, 바라바, 누가등 여러 제자들과 추종자들이 자주 모여 교리를 재정립하고 포교전략을 세웠었다. 여기서 그는 제자들과 자신의 거취에 대해서 의논해 본다. 예수의 마음속에는 감수성이 예민한 청년시절을 보냈던 인도가 줄곧 떠오르고 있었다. 이미 탁실라에 가 있는 도마와 합류하는 생각도 해 보았다.
그는 여기서 인도행 결심을 굳히고 야고보가 그의 계승자임을 확인시킨다. 안디옥은 당시 로마제국에서 로마와 알렉산드리아에 이어 셋째로 큰 도시이고 여러 인종과 종교가 섞여 사는 국제적인 항구도시였다. 또 안디옥은 동쪽으로 인도와 중국으로 가는 대상들의 교역로의 출발점이고 실크로드의 서쪽 기종점이다. 예수는 여기서 둔황 敦煌, Dunhuang이나 시안 西安, Xian으로 가는 대상들을 찾아가, 카쉬가르 Kashgar까지 가서 거기서 남쪽으로 꺾어지는 여정에 대해서 알아본다.
[출처] < 예수의 마지막 오딧세이 > ( Jesus' Final Odyssey ) 제18회|작성자 래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