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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구만선생 묘(용인 향토유적 5호) written by 한국의 능원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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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구만선생 묘역 뒤에서 내려다 본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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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구만(南九萬, 1629~1711)은 본관이 의령이며, 호는 약천(藥泉)·미재(美齋)다. 조선 초기의 개국공신 명재상 남재(南在)의 후손 이다. 한동안 뜸했던 의령남씨 가문을 다시 일으켜 세운 걸출한 정치가 남구만은, 현령 일성(一星)의 아들로, 충청도 충주 누암(樓岩) 외가인 안동권씨 댁에서 태어나, 부호군이던 할아버지 남식의 고향 충청도 홍성 구항면 내현 거북이마을에서 자란 것으로 알려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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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을의 묘역 초입에 세워진 남구만선생 시가비 모습. 동창이 밝았느냐.... 이 시조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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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구만은 당대의 성리학자 송준길(宋浚吉)문하에서 배워, 효종 7년(1656) 28세때 문과에 올라, 첫 관직으로 가주서(假注書)를 받았다. 가주서는 승정원의 정7품관 주서직에 사고로 자리가 비었을때, 보충하여 앉혔던 직위였다. 이리하여 관직을 시작한 남구만은 출중한 자질로 승차가 매우 순조로와, 정언·교리·이조정랑·승지·대사간·이조참의·대사성 등, 촉망 받는 자리를 두루 섭렵하고, 안변부사를 거쳐 전라도관찰사로 나가 선정을 베풀었는데, 나이 불과 30대 초반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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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가비에서 안쪽으로 쭉 들어가면 묘역 입구에 차를 세울 곳도 있으며, 우측 편에 약천산소라는 돌 표석이 있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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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3년(1662) 기근이 심해진 영남지방의 영남방어사로 나가, 적극적인 진휼사업으로 백성들을 구제하였고, 현종15년(1674)에는 함경도관찰사로 나가 변방 수비를 튼튼히하는 한편, 학문적 바탕이 낮은 관북지방에 유학을 보급 진흥시켜 백성들을 교화하고자 애를 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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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표석을 지나서 돌계단을 오르면 남구만선생 묘역이 나타납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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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즉위년(1675) 다시 대사성으로 내직에 들어와 곧 형조판서를 거쳐 한성부좌윤이 되어서는, 정적 윤휴(尹휴) 등의 방자함을 들어 탄핵했다가, 반대파 남인들의 거센 공격에 밀려 끝내 남해로 유배당하고 말았다. 그 이듬해 경신대출척으로 정치판이 헤까닥 뒤집어지니, 남구만은 도승지로 화려하게 재기했다. 이후 대사간 등을 거쳐 두 번이나 대제학을 역임하고, 병조판서가 되어 국방개혁에 괄목할 훈적을 남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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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구만선생 묘역 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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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10년(1684) 남구만은 우의정에 이어 좌의정이 되고, 숙종13년 7월 59세 나이로 영의정에 올랐다. 이때는 당파에 들지 않으면 자리 보존이 안 될 때라 남구만은 자신도 모르는 새 소론의 영수가 되었는데, 이듬해 터진 기사환국으로 그만 실각, 그해 7월 강능에 유배당했다가 11월에 풀려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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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구만선생 묘역 측면 모습과 묘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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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20년(1694) 4월, 숙종의 폐비 민씨 복위문제로, 소론과 남인간에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을 때, 숙종이 민씨의 복위를 주장한 소론편을 들어, 큰 정변 갑술옥사(甲戌獄事)가 일어나 남인들이 패하자, 남구만은 두 번째 영의정에 오르고, 이듬해 7월 물러났다가 그해 10월 다시 세 번째 영의정이 된 뒤, 숙종22년(1696)년 영중추부사로 실직에서 물러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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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비 지붕돌인 가첨석 상단 좌우로 해태를 조각한 것이 특이합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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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에 장희빈을 죽여버린 숙종과 뜻이 달라 고향에 은거해 버렸더니, 끈질긴 정적들의 공박이 뒤따라 파직당하는 수모도 겪었으나, 숙종은 그의 인품을 헤아려 원상으로 삼았다. 숙종33년(1707) 남구만은 모든 관직을 벗고자 했으나, 왕은 그를 대접하여 봉조하로 기로소에 들게하니, 그는 집에 가만히 앉아서 대신급 봉록을 받을 수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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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방 측면에서 바라 본 남구만선생 묘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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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슬에서 물러나 전원생활의 풍류를 즐기며 문장을 일삼았는데,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소치는 아이는 상기 아니 일었느냐. 재 너머 사래 긴 밭을 언제 갈려 하나니"는 이때 지은 그의 작품이다. 글씨로는 좌상남지비(左相南智碑)·개심사(開心寺)·양화루(楊花樓)·영송루(迎送樓)등의 액자(額字)를 남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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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구만선생 묘역 좌측 하단에는 선생의 장남인 남학명(南鶴鳴)의 장남, 즉 선생의 장손자인 남극관(南克寬)의 묘가 있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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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37년 3월, 마침내 남구만은 파란만장했던 이승에서의 삶의 끈을 놓으니 향년 83, 왕은 그에게 문충공(文忠公)으로 시호를 내리고 진심으로 애도하였다. 피폐한 강토, 목숨을 건 파쟁 가운데서 나라를 붙들려고 애쓴 남구만은, 숙종의 묘정에 배향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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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극관(1689~1714)은 젊은 나이에 사망하였으며, 묘비 좌측에는 남극관의 처인 대구서씨 열녀비도 함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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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구만(南九萬)의 묘소는 본래 양주(楊州)의 불암산 화접동(花蝶洞)에 초장(初葬) 되었다가 뒤에 모현면 초부리 하부곡마을에 이장한 것이다. 당시의 봉분은 원형이었으나, 1970년대 후반 후손들이 묘역을 확장하면서 방형의 지대석 기단을 둘러 봉토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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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구만 초상(보물 1484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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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구만(南九萬)의 초상은 모현면 갈담리 파담마을 남춘희씨댁에 전한다. 본래 남구만의 초상은 5본이 전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충청도 해미(海美)의 영당(影堂)에 임진년(壬辰年)에 봉안하였다는 초상은 실전되었다.
현존하는 것은 국립박물관 소장본 1본과 갈담리의 가묘본(家廟本) 3본 뿐이다. 가묘본은 유복(儒服) 차림의 반신상(半身像)과 전신상(全身像), 녹포단령(綠袍團領) 차림의 전신교의좌상(全身交椅坐像)이 있다.
이 초상은 그가 영의정에 재임시에 모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유복차림의 반신상은 가묘본의 전신상을 이모(移模)한 것으로, 상단의 좌측에는 최석정(崔錫鼎)의 찬문(讚文)이 있다.
현손(玄孫) 남진화(南進和)가 추서(追書)한 것이다. 현존하는 초상의 상용(相容)은 모두 정면상(正面像)이나 포치안배(布置安配)에 있어서는 국립박물관 소장본과 가묘본이 약간 다르다. 가묘본 중 녹포단령 차림의 전신교의좌상은 전신이 규각선(圭角線)으로 포치되고, 흉배의 쌍학(雙鶴)이 요대(腰帶) 위로 노출되어 있다.
이에 반하여 박물관 소장본은 방형(方形)으로 나타나는 흉배의 쌍학 중 아래의 것은 각대(角帶)로 가리워져 있으며, 팔소매가 복부 아래로 치우쳐 하반신의 폭이 어깨부위의 넓이보다 더 크게 양변으로 돌출되어 있다.
안정감에 있어서는 가묘본에 미치지 못하는 것 같다. 호피(虎皮) 문양의 반점도 가묘본은 간결하게 표현되고 단령(團領)의 문양이 세필(細筆)된 점에 비하면, 박물관 소장본은 등 좌우에만 나타나며 조밀하게 표현되었다.
그밖에 좌대의 발모 양에 있어서도 상이점이 나타나고 있어 동일인의 작품으로 보기는 어렵다. 대부분의 초상이 7,8분면 상인데 반하여 남구만의 초상은 정면필법(正面筆法)으로 안모(顔貌)를 사출하였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회화사(繪畵史)에서 중요시된다. - 용인시청 홈페이지 내용 발췌 - ◀ 사진(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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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구만선생 묘역 위치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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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경기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초부리 산1-5 화살표 ↑ 주변에 남구만선생 묘역이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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