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가 그 외투를 태워먹었는지 모르겠어요. 초대받아 간 그 집이 유난히 춥긴 추웠더랬죠. 일행들이 맥주를 마시고 식은 낙지볶음을 다시 데우고 생굴과 쪽파를 섞은 전을 한 장 더 지지고 누군가는 고스톱을 치는 사이 사이, 저는 거실 한가운데 놓여 있던 석유난로를 껴안다시피하며 서 있곤 했었답니다. 해가 바뀌었으니 그게 벌써 지난 연말의 일이군요.
한껏 멋을 부리느라 외투 속에 춘추용 검정 원피스를 입고 둥글게 팬 목둘레를 가리기 위해 비로드 목도리를 한 게 전부였습니다. 저녁식사나 하자고 해서 나선 자리였는데 제가 아는 얼굴이라고는 저를 초대한 집주인 내외밖에 없었습니다. 실내에 들어서서 외투를 벗자마자 금방 팔뚝이며 목도리로 여민 목언저리에조차 소름이 돋는 것이 느껴졌어요. 그 집 남편이 카디건을 가져다 걸쳐주었지만 입지는 않았습니다. 검정색 원피스에 털오라기가 일어난 낡은 브라운색 카디건이 어디 어울리기나 하겠습니까. 저는 카디건으로 무릎 위를 덮고는 그냥 버티고 있었지요. 남대문 시장에서 그릇 도매상을 한다는 사람, 몇 년째 영화사를 전전하며 시나리오를 쓰고 있다는 사람, 아, 게다가 집주인 후배라는 변호사도 있었습니다. 저에게 언제 또 그런 부류의 사람들을 만나볼 기회가 생기겠습니까. 게다가 초대를 받아 모인 사람들은 모두 미혼이었습니다. 귓불이 시릴 정도의 추위에도 불구하고 제가 왜 카디건을 걸치지 않았는지 이해하시겠지요.
새벽 두시가 넘어 자리가 파했습니다. 몇몇은 노래방으로 이차를 간다고 했지만 저는 따라가지 않을 작정이었어요. 물론 남대문 시장에서 그릇 도매상을 한다는 사람이나 시나리오 작가 지망생, 그리고 변호사 모두 저에게 같이 가자는 말을 하지 않은 탓도 있었지만 저는 무엇보다 그 집 실내의 추위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어서 나의 방으로 돌아가 따뜻한 온돌방에 언 몸을 녹이고 싶은 생각밖에 들지 않았어요. 외투를 껴입고 구두를 신기 전 한 번 더 난로 쪽으로 바싹 붙어선 기억이 있습니다. 후각이 꽤 민감한 편인데도 왜 냄새조차 맡지 못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날 새벽 일행들과 헤어져 집으로 돌아온 저는 얼굴도 씻지 못하고 잠이 들어버리고 말았지요.
외투 자락이 손수건 크기만큼 타버렸다는 사실을 발견한 건 다음 다음날 오전 아홉시 십오분이었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사거리에 있는 은행과 슈퍼에 다녀올 참이었거든요. 제가 시간까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 건 그만큼 외투에 대한 애정이 컸던 탓일 거예요. 하나밖에 없는 겨울용 외투이기도 하지만 우선 저는 그 외투를 발견했을 때부터 아, 저건 내 옷이구나, 했더랬어요. 왜 그런 옷이 있잖아요. 입어보지 않아도 그냥 저절로 나를 위해 만들어졌다는 느낌을 주는 옷 말입니다. 그 외투가 그랬습니다. 좀처럼 백화점에서 옷을 사는 일은 없었는데 검정색 나일론과 폴리에스테르로 만들어진 외투는 다시 한 번 생각하지도 않고 냉큼 사버렸어요. 옷 한 벌에 그렇게 큰돈을 들이기는 처음이었습니다. 허리 라인이 쏙 들어간 데다가 발목까지 타이트하게 내려오는 그 외투를 입고 외출할 때면 저는 저의 볼품없이 깡마른 몸매가 자랑스러웠고 아주 간혹은 예뻐졌다는 소리도 듣곤 했습니다. 사람을 돋보이게 하는 옷이 있잖아요 왜. 그런데 외투를 태워버렸으니 참 속이 상하더라구요.
불에 덴 자국은 마치 입에서 훅훅 불길을 내뿜는 짐승이 한 번 입을 댔다 뗀 것만 같았습니다. 언젠가 한번 여동생과 말다툼을 하다가 몸싸움까지 이어진 적이 있었습니다. 머리채를 낚아채려는 저를 확 떠다밀며 여동생이 손톱으로 제 왼쪽 뺨을 할퀴었는데 그때 얼굴에 난 상처를 거울로 들여다보며 확인할 때보다 더 속상하고 마음이 아프더라니까요. 버리자니 아깝고 그렇다고 그냥 그대로 입고 다닐 수도 없고…… 외투는 여태 행거 맨 앞쪽에 걸려 있습니다. 그나마 올 겨울이 그닥 춥지 않은 것이 다행이긴 다행입니다. 눈길이 갈 적마다 속상해져서 쳐다보지 않으려고 애쓰긴 하지만 병든 거북을 들여다볼 때처럼 마음이 한없이 불편해지곤 한답니다. 당신은 몇 개의 외투로 이 긴 겨울을 지나고 계십니까.
저는 오후 다섯시의 나른함을 이기지 못하고 느릿느릿 기지개를 펴고 누워버리는 고양이처럼 긴장을 풀고 소파 위에 엎드려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엔 잠이 든 것 같아도 고양이는 언제든지 제가 앉은 자리에서 뛰어내릴 준비를 하고 있답니다. 설령 그곳이 수심 천여 미터가 넘는 바다 위를 세차게 질주하고 있는 대형 어선 갑판 위라고 해도 말입니다. 아니에요, 저는 사실 고양이에 관해서는 아는 것이 없답니다. 그러나 고양이처럼 정확한 이해와 날카로운 판단력을 갖고 있는 짐승이 또 있을까요. 저는 저 병든 거북을 키우는 것을 후회하는지도 모릅니다. 거북은 왜 고양이처럼 자살도 하지 못하는 걸까요.
지난번 편지에 제가 요즘은 뜨개질하며 소일하고 있다는 이야길 쓴 적이 있나요? 이게 벌써 몇 번째 편지인지 기억이 흐릿합니다. 서른일곱번째? 아니면 쉰여섯번째 편지? 아무려나 제가 시내 서점에서 하던 일을 그만두었다는 이야기는 이미 한 것 같은데요. 이제 저는 당신께 하지 않은 이야기는 거의 없을 지경이랍니다. 취면의식이라는 것이 있지요. 잠자기 전 일정한 순서로 일정한 동작을 되풀이하지 않으면 잠이 오지 않는 일종의 강박관념 같은 것 말입니다. 당신에게 편지를 쓰는 일은 제게 있어 그런 의식에 가까운 일이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당신은 스냅 사진을 찍어놓은 것처럼 나에 관한 것은 무엇이든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더군요. 당신의 편지를 받을 때마다 깜짝깜짝 놀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랍니다. 아마 저뿐만 아니라 당신께 편지를 보내는 모든 사람들에 대해 그렇겠지만요.
초록색 담낭과 면사로 바닥 무늬에 나뭇잎 모양을 짜넣은 어린이용 스웨터를 뜨고 있습니다. 취미 삼아 뜨개질을 시작한 지 수 년째이긴 하지만 나뭇잎 무늬는 처음 시도해보는 것이라 뜨개방 주인 아주머니께 새로 방법을 배웠습니다. 게이지를 내느라 방석 크기만하게 떠보기도 했지요. 뜨개질할 때 중요한 건 익숙한 솜씨가 아니라 집중력과 인내심이에요. 잠시만 딴 데 정신을 팔아도 겉코 뜨기 해야 할 때 안코 뜨기가 돼 있고 그러다 보면 무늬는 엉망이 돼버리고 말지요. 사실 뜨개질도 생각처럼 쉬운 것은 아니랍니다. 한 코만 놓치거나 실수를 해도 금방 표가 나고 틀린 자리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니까 말이지요.
뜨개방 아주머니가 제 솜씨를 눈여겨보았던 모양입니다. 제가 뜨개질한 스웨터나 털모자, 숄 같은 것들이 동대문 상가나 남대문 시장으로 팔려나가게 되었습니다. 뜨개방 주인 아주머니하고 실을 대주는 업자가 연결되어 있는 눈치입니다. 아주머니는 동대문 상가나 남대문 시장이라고 말했지만 어쩌면 백화점으로도 유통되곤 하는지 모릅니다. 그만큼 나의 뜨개질 솜씨는 뛰어난 편이지요. 저와 가까운 사람치고 제가 뜨개질한 스웨터를 선물받아보지 못한 사람이 없답니다. 그렇다고 당신도 알다시피 저에게 그다지 많은 친구가 있는 편은 아니구요. 그랬다면 당신께 이렇게 편지할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을 터이지요. 아, 그러고 보니 아직 당신을 위한 뜨개질은 한 적 없는 것 같군요.
솜씨가 좋은 편이기도 하고 또 지금은 다른 직장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닌 터라 아이들 스웨터 같은 것들은 꼬박 나흘 정도면 완성할 수 있습니다. 앉은자리에서 뚝딱 완성할 수 있는 목도리나 털모자 같은 소품들을 제외하고도 열심히만 하면 한 달에 스웨터 서너 벌은 뜰 수 있기 때문에 당분간 먹고 사는 일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듯싶습니다. 뜨개방 아주머니가 그리 인색하게 구는 것 같지도 않고요. 물론 그동안 해놓은 약간의 저축도 있답니다.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뜨개질만 하면서 살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뜨개질도 겨울 한 철 반짝하는 정도니까요. 그래도 올 겨울에 털실로 짠 스웨터나 모자 같은 것들이 인기 상품이니 그것도 다행이지요. 생활비를 벌 요량으로 가을 접어들자마자 뜨개질을 시작한 건 아니었습니다. 뜨개방 아주머니의 권유가 그다지 나쁜 제의는 아니었기 때문이죠. 그리고 사실 특별한 일도 하지 않은 채 하루를 지내기란 정말이지 심심하고 무료합니다. 여느 여자들처럼 독서를 하거나 비디오를 보거나 하는 취미도 없으니 말입니다.
매일 오후 뜨개방에 모이는 여자들은 생김새만큼이나 다양합니다. 대개 중년 여자들이긴 하지만 가끔은 시집간 지 얼마 안 되는 젊은 새색시도 함께 섞여 뜨개질을 하다 가곤 합니다. 그곳은 털실이나 바늘 같은 것들을 팔고 원하는 견본대로 뜨개질을 가르쳐주기도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동네 여인들이 모여 수다 떠는 그런 장소에 더 가까울 듯싶습니다. 나이 든 여자의 수다만큼 재미있는 것이 또 있을까요. 부부관계는 물론이고 이제는 뉘집 남편이 언제 치질 수술 한 것까지도 환하게 알 정도랍니다. 그런 이야기들을 할 때마다 뜨개방 주인 아주머니는 저기 시집 안 간 처녀도 있는데 그만들 해라, 하며 짐짓 저를 한번 슥 건너다보곤 하는 것입니다.
이불이며 털실 같은 물건을 진열해놓은 장소를 제외하고 한 평 반쯤 남짓한 방구들 위에서 여자들이 다리를 오그리고 오붓하게 마주앉아 뜨개질도 하고 더운 김이 올라오는 순대를 사다 먹기도 하고 아주 간혹은 겨냥도 없이 털실뭉치나 날카로운 대바늘들을 막 집어던지며 싸움을 하기도 합니다. 너, 거기를 확 뒤집어버릴란다. 그런 욕이 나왔을 땐 싸움을 하는 당사자들을 제외하곤 모두 뜨개질감에 고개를 처박고는 쿡쿡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지요. 뜨개방에 하루 종일 붙어 있다시피하는 노랑 아주머니는 오후 여섯시만 되면 자리를 뜨곤 합니다. 무도학원에 가기 위해서지요. 노랑 아줌마라는 별명이 붙은 건 손톱 끝이 싯누래질 정도로 귤을 까먹어서 붙여진 것입니다. 뜨개방 주인 아주머니와는 한집안 식구와 다름없는 사이라고 들었습니다. 노랑 아주머니가 뜨개방 한켠에 쭈그리고 앉아 염색한 갈색 파마머리를 쓸어넘기며 담배 연기를 날리거나 군에 간 큰아들 스웨터를 뜨고 있는 모습은 참 근사해 보입니다. 큰아들 이야기를 할 적마다 아주머니는 개진개진 젖은 눈을 들어 먼데를 바라보곤 합니다. 제 어머니도 언젠가 저렇게 고개를 숙이고 앉아 손끝이 아픈 것도 모르고 어린 저의 스웨터를 짜거나 하셨을 터이지요.
새우튀김덮밥 같은 따뜻한 음식이 먹고 싶은 오후입니다. 참 그런데, 혹여 저의 편지가 벌써 지루한 것은 아닌가요?
그 거리를 잊을 수가 없답니다. 언젠가 당신도 광화문 사거리에서 YMCA로 이어지는 거리를 자주 산책하곤 한다는 이야기를 한 적 있습니다. 평일 오후에도 수많은 인파로 붐비고 거리에는 각종 전단지와 쓰레기들이 넘쳐나곤 하지만 그래도 퍽이나 정든 거리입니다. 꼭히 제가 육 개월 동안이나 D서점에서 근무했던 탓만은 아닙니다. 서점에서 근무하기 전에도 종종 그 거리에 나가 할 일 없이 쏘다니거나 거리가 환히 내다보이는 패스트푸드점에서 식은 프렌치 프라이를 잘근거리며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쳐다보는 것을 좋아했더랬지요. 그러고 보니 그때 내가 앉아 있던 창가를 지나다녔던 사람들 중에 당신이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당신은 내게 와서 명함을 만들어갔던 손님들 중 한 사람일 수도 있었겠습니다.
스캐너나 고급 기종의 컴퓨터가 일반화되지만 않았더라도 좀더 그 일을 할 수 있었을 거예요. 당신도 알다시피 저는 종로 지하 출입구로 통하는 D서점 한구석에서 스캐너와 프린터, 컴퓨터를 올려놓은 작은 책상에 앉아 하루 종일 즉석 명함을 만들곤 했었지요. 팬시용 명함이라 손님은 대개 젊은 여성들이었습니다. 제가 하는 일은 아주 간단했어요. 진열된 스물네 가지 견본들 중에 손님이 선택한 그림에 간단한 멘트나 이름을 새로 기재하고 프린트하면 되었지요. 스캐너로 사진을 받아 명함에 새겨넣을 수도 있었습니다. 프린터 한 장에 스물여섯 장의 명함이 새겨져 있고 마지막으로 그것을 자를 대고 반듯하게 자르면 그만이었어요. 손님 한 사람의 명함을 만드는 데 약 이십 분 정도 걸렸어요. 그동안 명함을 맡긴 손님들은 옆 코너의 아동용 도서물들을 구경하거나 아니면 지하에 있는 문구점에 들렀다가 명함을 찾으러 오곤 했습니다. 저는 그 단순하고 간단한 일이 제게 아주 적격이라고 여겼습니다.
당신도 혹시 그때의 저를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아동용 도서와 문예물 코너 중간 작은 틈새에 하루 종일 앉아 명함을 만들거나 책을 고르는 사람들을 물끄러미 쳐다보곤 하던, 긴 웨이브 머리의 여자를 말입니다. 서점은 늘상 오전시간부터 붐비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날은 양희은을 닮은 여자가 지나가기도 했고 이름은 욀 수 없지만 텔레비전에서 본 듯한 낯익은 얼굴들이 지나치기도 했습니다. 선글라스나 두꺼운 테의 안경으로 얼굴을 가린 인사들도 있었지만 저는 쌀그릇에서 콩을 가려내듯 단박 그들의 얼굴을 알아차릴 수 있었답니다. 오전에는 비교적 명함을 만들려는 손님이 없는 터라 팔을 겯지르고 앉아 책을 사러 나온 사람들, 그들의 옷차림새며 가방 혹은 구두 모양이며 얼굴 표정들을 늘 유심히 살피곤 했습니다. 마치 아주 오래 전 어디선가 잃어버린 핏줄을 찾기라도 하려는 듯 말입니다. ……제가 지금 핏줄,이라고 썼나요?
언젠가 졸음을 쫓느라 잡지 코너를 서성거리다가 어떤 그림을 본 적 있습니다. 무슨 과학 잡지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6주 된 인간의 태포에 갇힌 태아와 4주 된 여우원숭이 그리고 3주 조금 지난 닭의 사진을 보았어요. 당신, 지금 한번 상상해보시겠어요? 인간과 여우원숭이 그리고 닭의 모습 말이에요. 저는 사진 옆에 붙은 설명을 읽지 않고 사진을 먼저 보았답니다. 그리곤 아주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물론 아직 완벽한 형체가 만들어진 것은 아니지만 글쎄 6주 된 인간과 4주 된 여우원숭이 그리고 3주 된 닭의 사진들 중에서 인간의 것을 확실히 구별해내기 어려웠습니다. 사진 설명을 가렸더라면 저는 3주 된 닭의 모습을 인간의 것이라 선택했을 정도였답니다. 정말이지 잠이 확 달아나버리더군요.
그러니까 수정란 초기를 거친 후 배(胚)가 만들어지고 태아로 자라나는 동안 인간을 비롯한 생물들은 꽤 오랜 시간 비슷한 형태로 자라나는 것이었어요. 저는 문득 제가 인간이 아니라 인간의 모습을 한 여우원숭이이거나 아니면 배가 발생하는 단계에서 잘못 진화된 닭이나 침팬지는 아닐까 하는 상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건 정말이지 끔찍한 생각이었지만 그래도 저는 얼떨결에 제 몸을 더듬거리며 잡지를 내려놓고 말았습니다. 그 상상이 계속 이어졌더라면 저는 저의 부모나 형제가 배가 발생하는 단계에서 운명이 엇갈려버린 다른 생물들은 아닐까 하는 의혹까지도 했을 게 분명합니다. 그러나 나는 믿고 싶어요. 내가 아직은 사람의 자식이라는 그 불확실함을 말입니다.
우리의 몸을 둘러싼 십만 킬로미터도 넘는 혈관으로 아마도 나는 나의 부모 형제들과 이어져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사진을 본 이후 의심을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정말 한 개의 핏줄로 연결되어 있었을까, 우리가 정말 사람이었을까. 운명이 뒤바뀌었다면 저는 아마도 닭이나 여우원숭이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랬다면 저는 제 앞을 지나치는 혈육들 얼굴이나 내가 사랑한 당신들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을 터이지요. 어쩌면 우리는 지금 사람과 닭이 만나고 있거나 닭과 여우원숭이가 만나고 있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그래요, 그렇다면 사람이 사람을 알아본다는 것은 운명과 운명이 만난다는 말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가끔 서로를 지나치기도 합니다.
저는 아침 아홉시에 출근했고 오후 네시에 교대하곤 했습니다. 점심시간은 고작 삼십여 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옆 코너 아동물 담당 직원에게 자리를 잠시 맡기고 서둘러 끼니를 해결해야 했답니다. 주로 지하에 있는 패스트푸드점에서 치즈 햄버거에 얼음이 가득 든 스프라이트를 마시곤 했습니다. ……아, 스프라이트요? 저는 코카콜라는 안 마셔요. 카페인이 든 탓도 있지만 코카콜라는 너무 평범하지 않습니까.
아무튼 그 짧은 시간에도 어둡고 먼지뭉치가 굴러다니는 지하도를 빠져나와 거리로 나가는 것을 즐겼습니다. 왜, 생각나요? 그 거리에는 먹거리 음식을 파는 노점상들이 유난히도 많이 즐비해 있잖습니까. 중국 호떡이나 오뎅, 떡볶이, 튀김, 샌드위치, 오방떡, 밤과자 같은 것들 말예요. 참 메뉴도 다양했지요. 저는 주로 노점상 한 곳을 골라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 틈에 끼여 한끼를 해결하곤 했습니다 자주 다녔던 노점상은 달걀말이김밥을 주메뉴로 내놓는 곳이었습니다. 왜 기차역이나 공원 입구에서 아주머니들이 파는 조그마한 미니 김밥 있잖아요. 달구어진 팬에 달걀물을 풀고 그 김밥을 다시 둘둘 마는 거예요. 물론 김밥 속에는 달걀이 들어 있지 않지요. 소시지도 없이 고작해야 단무지와 채 썬 당근만 들어 있었지만 그런대로 맛은 있었어요. 노랗게 둘둘 말린 김밥 네다섯 개를 오뎅 국물과 함께 먹고 나면 금세 배가 불러요. 노점상 아주머니는 제가 가면 주문하기도 전에 달걀물을 팬에 휙 뿌려요. 기름이 탁 튀어오르면서 치치직 나는 소리가 그렇게 경쾌하게 들릴 수가 없습니다.
아니, 당신께 달걀말이깁밥 이야기를 하려던 게 아니었는데…… 아무래도 그 남자 이야기를 해야겠어요 오늘은.
그는 일주일에 한 번씩, 그것도 꼭 금요일 오후에 나에게 왔습니다. 나에게 왔다,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그는 그저 명함을 만들고자 온 손님이었으니까요. 다른 손님들처럼 그 남자는 이름 위에 어떤 문장도 원하지 않았어요. 이를테면 손님들이 주로 새겨주길 원하는 <언제든 연락바랍니다>, <건강하세요> 같은 아주 기본적인 문구들 말입니다. 제가 그 남자를 기억하고 있는 것은 단지 남자의 외모나 차림새 같은 것들 때문은 아닙니다. 오히려 남자는 종로 거리 어디에서나 마주칠 법한 아주 평범하고 밋밋한 인상에 가까웠죠. 차림새도 그닥 특이할 것도 없었구요. 구두코가 몹시 낡았다는 것과 오래 전 유행이 지난 군청색 바바리는 기억할 수 있습니다.
남자는 제게 와서 명함을 만들 때마다 이름을 달리 했습니다. 어떤 날은 김철수였다가 또 어떤 금요일에는 박민철, 이석호, 정찬기…… 그 이름들을 지금 모두 욀 수는 없습니다. 제가 그에게 만들어준 즉석 명함만 해도 아마 스무 개는 훨씬 넘었을 테니까요. 남자의 얼굴을 익히게 되었을 무렵, 저는 제 쪽에서 먼저 아, 정찬수 씨죠? 하고 되물은 적이 있었습니다. 남자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어요. 그리고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뇨, 제 이름은 오정숩니다. 오, 정, 수, 그렇게 새겨주세요. 한 자 한 자 찍어누르듯 힘주어 말하곤 했었지요. 저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남자가 원하는 대로 일주일에 한 번씩 새 이름이 새겨진 즉석명함을 만들어주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일주일마다 다른 이름을 가진 남자였던 셈이지요. ……저는 그 이상 남자에게 가까이 다가가지 않았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방법은 저마다 다 다르지 않습니까.
그것은 제가 기르던 거북한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것이 병의 원인이었는지는 아직도 확신할 수 없습니다. 주먹 쥔 손등만하게 자란 거북의 양쪽 눈이 부어오르다 못해 툭 튀어나와버린 사실을 발견한 건 어항 물을 갈아주다 말고서였습니다. 눈 주위는 백태 낀 것마냥 뿌옇고 끈적거리는 점액들로 뒤덮여 있었습니다. 좀처럼 잘 움직이지 않는 터라 늘 한자리에 꼼짝 않고 있어도 그러려니 하고 여기곤 했습니다. 이를테면 창틀 앞에 놔둔 아마존이라는 다년생 화초의 화분처럼 말입니다. 그렇게 저와 함께 벌써 이 년이나 한 방에 기거하고 있는 동물이었지요. 여름이면 마치 부평초 뿌리가 썩는 듯한 냄새가 진동하긴 했으나 그것은 애완용 개나 고양이처럼 저를 성가시게 하는 일도 없었습니다. 거북은 사각 어항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런 점들이 아주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저 이따금씩 물을 갈아주거나 먹이를 넣어주면 그뿐이었습니다. 저도 모르는 새에 거북은 실명이 된 상태였습니다.
거북의 상태를 한참 들여다본 수족관 주인은 아무래도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 같다는 진단을 내렸습니다. 물을 제때 갈아주지 않은 것이 원인이라고 했습니다. 더러워진 물 속에 기생하고 있던 바이러스가 거북의 눈을 멀게 한 것이지요. 만 원이나 하는 가루약을 한 봉지 샀습니다. 수족관 주인은 그 가루약으로 거북의 눈을 씻기고 물에도 타 넣어주라고 했습니다. 한 삼 개월쯤 상태를 지켜봐야 한다는 조언도 잊지 않았습니다.
당신도 짐작하고 있겠지만 제가 거북을 사랑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다만 저는 너무 가까이 다가가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거북을 잃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남자 또한 말입니다. 그래요. 어느새 저는 또 오래 전 내가 사랑했던 그녀를 떠올리고 말았습니다.
……당신, 아직 저의 편지를 접지 마셔요. 오늘은 당신께 꼭 하지 않으면 안 될 말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당신께 보내는 마지막 편지이기도 하답니다.
전화를 할 때는 밑져야 본전이지, 싶은 심사였을 것입니다. 이미 이 년 전에 산 옷을 수선해줄 거라고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으니 말입니다. 본사 소비자 수선실로 전화를 넣어본 백화점 여점원은 외투 길이를 자르는 방법밖에 없다고 말했습니다. 수선이 가능한 건 다행이었지만 저는 잠시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지요. 제 깜냥으로는 외투 겉감과 비슷한 천으로 덧대는 방법이 있지 않을까 했는데 그건 불가능하다는 이야기였어요. 그러나 불에 탄 자리를 잘라낸다면 발목까지 내려오던 외투 길이가 무릎선까지밖에 오지 않을 터였습니다. 그 외투는 하이웨이스트부터 발목까지 내려오는 라인이 장점이었으니 그만큼이나 길이를 잘라내버린다면 그 옷의 매력이 사라져버리는 셈이었습니다.
백화점 이층 여성 매장을 두 바퀴나 더 돈 후에 결국 옷 수선을 맡겨버렸습니다. 아주 못 입는 것보다는 낫다는 판단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저에게는 하나밖에 없는 겨울용 외투였습니다. 아직 겨울이 지나려면 족히 두어 달은 있어야 합니다. 비오는 날 변변한 우산 하나 없이 거리를 헤매본 적이 있으시다면 아마 제 심정을 헤아리실 수 있을 것입니다. 여점원은 일주일 후에 외투를 찾으러 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날 결혼식장에 저는 얇은 검정색 원피스 위에 뜨개방 아주머니의 주문으로 완성한 숄을 두르고 나갔던 것이지요.
초대받아 간 자리는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친구 결혼식장에서 저는 아주 오래 전, 내가 사랑했던 그녀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올바른 방법 같은 것들은 어디에서도 가르쳐주지 않았습니다. 그때는 겨우 열일곱 살이었고 저는 타인을 사랑하는 데 몹시 서툰 수많은 여자아이들 중 한 사람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녀와 저는 한 반이었고 그 토요일 오후에 결혼한 친구와 그렇게 셋이서 단짝이었지요. 그녀의 이름은 시내,였습니다. 한시내. 수많은 명함을 만들어왔지만 그렇게 아름다운 이름은 들어본 적 없었습니다. 한시내. 저는 교과서 맨 뒷장마다 그녀의 이름을 적어놓았습니다. 그녀가 이름만큼 그렇게 아름다운 얼굴을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약간 여드름이 돋은 발그레한 살빛과 두드러지는 덧니를 갖고 있었지요. 그러나 저는 지금도 기억할 수 있습니다. 늘 한쪽 손에 반듯하게 다린 분홍색 손수건을 쥐고 있던 손가락의 곡선과 0.5밀리도 안 되는 가는 펜으로 원을 그리듯 둥글게 쓰던 필체, 랜드로바 속에 착착 접어 신은 흰 양말이나 포크로 말아올린 칼국수 면발을 오물거리던 입술의 움직임 같은 것들…….
아, 또 기억나는 것이 있군요. 그녀는 역사나 국어 같은 과목은 늘 우수했지만 수학만큼은 유독히 약했습니다. 수학은 제가 가장 잘하는 과목이었어요. 아니 어쩌면 제가 수학 과목을 좋아했던 게 아니라 수학을 못하는 그녀를 위해서 더 열심히 공부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수학 선생님은 수업 시간마다 칠판에 문제를 내서는 번호대로 대여섯 명의 아이들을 지명해 문제를 풀도록 시키곤 하였지요. 그녀는 수학 수업이 든 날은 늘 우울해했습니다. 도시락도 먹지 않았고 가끔은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는 양호실에 가 누워 있곤 했습니다. 어느 날 또 수학 선생님께서 그녀의 번호를 호명했습니다. 그녀는 고개를 떨구었고 저는 침착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칠판 앞으로 나갔습니다. 다행히 아이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운이 나빠 저의 번호가 함께 호명된 날은 결혼식한 그 친구가 대신 나가주었지요. 그날 이후로 늘 그녀 번호가 불릴 때면 제가 그녀 대신 수학 문제를 풀곤 했습니다. 그건 결코 그녀가 시켜서 한 행동이 아니었습니다. 수학이 든 날은 아침에 버스를 타고 한강을 건널 때마다 그냥 강물에 버스가 처박혔으면 싶어. 그녀는 더 이상 그런 말들을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늘 그녀의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도시락도 함께 먹었고 보충수업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갈 때도 혹은 그녀가 화장실 갈 때도 뒤에 서서 그녀가 나오기를 기다리곤 했었지요. 그녀가 교과서를 포장한 포장지와 똑같은 것을 구입하기 위해 혼자 버스를 갈아타고 이대 앞 문구점까지 가기도 했습니다. 어느새 저의 손에는 그녀의 것과 똑같은 손수건이 들려 있었고 랜드로바나 심지어는 양말 브랜드까지도 똑같은 것을 신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녀를 사랑했어요.
그렇게 사랑했던 그녀를 십이 년 만에 친구 결혼식장에서 만나게 된 것입니다.
열여덟 살이 될 무렵, 책가방에서 그녀의 편지 한 통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녀의 짤막한 문장들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지만 우리는 헤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녀 곁에는 결혼식한 그 친구가 함께 있었고 저는 혼자가 되었습니다. 혼자 도시락을 먹고 혼자 자율학습을 하고 버스 정거장까지의 긴 길을 혼자 걸어다녔습니다. 우리들은 졸업을 했고 그 이후 다시 그녀를 만날 수 없었습니다.
아주 이따금씩 그녀 생각을 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내게 왜 그런 편지를 쓰지 않으면 안 되었을까 하는 생각도 말입니다. 그녀의 것과 똑같은 손수건이나 양말, 블라우스, 교과서를 싼 포장지 때문이었을까요. 아니면 어느새 그녀의 것을 닮게 되어버렸던 나의 말투와 표정 때문이었을까요. 당신은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녀와 내가 헤어졌던 이유 아니, 그녀가 제게 결별을 선언했던 이유들 말입니다. 저는 그녀를 제 방식대로 사랑했을 뿐 결코 그녀의 모든 것들을 흉내내려 했던 게 아니었을 겁니다.
신부 대기실에서 마주친 그녀가 저에게 한 첫 말은 이랬습니다.
숙자? 너, 박숙자 맞지?
저는 아연한 얼굴로 그녀를 돌아봤습니다. 그리고는 오래된 책갈피에서 묻어난 얼룩의 무늬를 손끝으로 만져보는 심정으로 천천히 그녀를 마주보았습니다. 그녀가 설핏 웃고 있었습니다. 예의 그 입술 왼쪽의 덧니를 드러낸 채 말입니다. 더 이상 예전에 저를 쳐다보던 배타적인 눈빛이 아니었습니다. 그녀의 손에는 분홍색 손수건이 들려 있지 않았고 착착 접어 만 면양말 같은 것도 신고 있지 않았습니다. 우리 그렇게 서로 어색하게 마주선 채 아주 짧은 시간이 흘렀다고 생각됩니다. 제가 기억하고 있던 그녀의 고유한 이미지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그녀는 이 도시 어디에서나 마주칠 법한, 어깨를 부딪치거나 발을 밟아도 한 마디 인사 없이 지나쳐버리는 그런 낯선 얼굴이었습니다.
결혼식이 끝난 후 여고 친구들 서넛이서 근처 카페에 가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 자리에는 한시내도 함께 있었습니다. 그리고 서른 갓 넘은 그녀들의 긴 수다가 시작되었지요.
이윽고 그녀가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한 육 개월 전에 모임을 하나 만들었어. <편지를 전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라고. 생활 정보지에 광고를 냈었는데, 정말 믿기지 않을 정도였단다. 일주일 만에 수십여 통의 편지가 날아오는 거야.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나한테 말이지. 그 정도로 반응이 올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어. ……좀 힘에 부치기는 하지만 약속한 대로 그 사람들한테 꼭 답장을 하긴 해. 아주 일상적인 이야기들로 말이야. 그들이 원하는 건 의외로 아주 간단해. 그건 바로 타인과 교통(交通)하고 있다는 느낌이야. 이 세상에 혼자가 아니라는 것 말이지.
저는 그 옛날 그랬던 것처럼 줄곧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며 그녀의 이야기에 귀를 잔뜩 곧추세우고 있었습니다.
……사는 게 너무 지루하지 않니? 그냥 다른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어.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보거나 소설을 읽는 것처럼 말이야. 그리고 사실 내게는 그것과 별로 다르지 않고. ……편지를 읽을 때는 흥미롭지만 막상 답장을 쓰는 일은 생각처럼 쉬운 게 아니란다. 그들은 늘 지쳐 있거나 몹시 고독해. 무엇보다 그들을 격려하고 위로하고 그리고 중요한 건 어떤 희망적인 메시지를 줘야 하는 거야.
그녀는 제법 엄숙하고 진지해 보였습니다. 마치 이웃 나라의 옴진리교 교주나 이 땅의 종말론을 전파하는 수많은 사이비 교주 같은 표정을 하고서 말입니다.
당신, 잠깐만 기다려주시겠습니까? 갈증이 나는군요. 물 한 잔 마시고 와서 다시 이야기를 계속하고 싶습니다.
그곳은 북마트라는 염가도서 매장으로 바뀌어져 있었습니다. 삼십에서 육십 퍼센트까지 할인된다는 플래카드가 서점 기둥에 길게 나붙어 있습니다. 그때 옆 코너였던 아동용 도서 판매장까지 터서 염가도서 매장을 만든 셈입니다. 아동용 도서 매장은 북마트 바로 앞 코너에 새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하루 종일 앉아 명함을 만들던 자리는 서점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서점 안은 여전히 낯선 사람들로 붐비고 그 중에 제가 아는 얼굴은 아무도 없습니다.
저는 수선 맡겼던 외투를 찾아 입고 있었습니다. 발목까지 내려오던 긴 외투였던 터라 짤막하다 못해 깡총한 것 같은 길이가 여간 어색한 게 아닙니다. 그러나 숄을 걸친 것보다는 한결 따뜻했습니다. 그래도 마치 남의 옷을 빌려 입은 것 같은 느낌은 떨쳐버릴 수 없었습니다. 찬바람이 몹시 불어대던 그때도 저는 이 외투를 입고 앉아 명함을 만들곤 하였습니다. 아마도 남자는 이 외투만큼은 기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책을 고르거나 약속한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서 있는 낯선 사람들 틈을 비집고 다니며 매장을 두어 바퀴나 더 돌아봤습니다. 그러나 역시 그 자리는 찾을 수 없었습니다. 한 손에는 어림짐작으로 치수를 맞춰 완성한 남자의 낙타색 스웨터 한 벌이 든 불룩한 종이가방을 들고 있었습니다. 남자의 스웨터엔 뜨개질하기 까다로운 솔잎뜨기 무늬를 뒤판까지도 촘촘히 떠 넣었습니다. 뜨개방 아주머니의 주문을 받은 옷들을 짜는 틈틈이 완성한 것입니다.
실을 사기 위해 며칠 만에 뜨개방에 들렀더랬습니다. 소매 한 짝을 남겨두고 실이 떨어졌던 때문이었습니다. 어쩐 일인지 뜨개방 문이 굳게 닫혀 있더군요. 남자의 스웨터도 스웨터이지만 여성용 털모자 세 개를 토요일까지 완성해주기로 돼 있었습니다. 뜨개방 옆 옷 수선집 주인에게서 노랑 아주머니가 뜨개방 아주머니의 곗돈을 떼먹고 달아나버렸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옷 수선집 아주머니는 뭔가 켕긴 표정으로 저에게 물었습니다. 아가씬 뭐 걸린 것 없수?라고 말입니다. 그날, 버스로 네 정거장이나 되는 이웃 동네 재래시장에 가서 새 실을 사와야 했습니다. 같은 낙타색 면사임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실 색깔이 다른 것만 같아 스웨터 앞, 뒤판, 오른쪽 소매와 꼼꼼히 비교해보기도 했습니다. 그 밤으로 나머지 한쪽 소매를 떠서 스웨터를 완성했습니다.
김태주,라는 이름으로 새 명함을 만들어가던 날 그는 저에게 저녁식사를 하자고 말했습니다. 아주 무뚝뚝한 얼굴을 하고서 말입니다. 그때도 그는 제 얼굴을 정면으로 쳐다보지 않고 제 정수리나 그 어디쯤에 시선을 둔 채였습니다. 저는 남자의 가슴과 목도리로 친친 동여맨 목덜미를 지나 얼굴을 올려다보곤 얼른 표정을 수습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깨달았습니다. 우리들 사이의 긴장은 이미 깨어져버렸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침착하고 담담한 어조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네시에 퇴근해요.
손에 쥔 한 장의 그림엽서를 들여다보듯 여태도 그날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남자가 김태주라는 이름의 명함을 건네받고 돌아간 시간은 오후 두시 오분이었습니다. 외투 속에 두꺼운 회색 폴라 티셔츠를 입고 있었고 그날 점심식사로는 달걀말이김밥 다섯 개와 오뎅 국물을 먹었습니다. 남자가 오기 바로 얼마 전에 직원들 사이에서 사서라 불리는 사내들이 책 훔치다 들킨 젊은 여자 두 명을 영업관리 사무실로 끌고 가는 것을 묵묵히 바라보았고 아주 잠깐 정전이 되기도 했습니다. 두꺼운 커튼을 둘러친 것마냥 사위가 금세 희슥해지고 말았지요. 짧은 시간이었지만 정전된 서점은 창졸간에 아수라장같이 변해버렸습니다.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고 출입구 쪽에서는 뭔가 우당탕 무너져내리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습니다. 저는 진도 3.6의 지진을 만난 사람처럼 얼떨결에 책상 밑으로 기어 들어갔습니다. 그곳 역시 어둡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만 어쩐 일인지 저는 저 먼 곳, 이를테면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오를레앙 섬의 고요 속으로 침잠해 들어가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그건 일종의 고절감 같은 것이었을까요. 금세 불이 들어온 것이 천만다행이었습니다.
일 년 중 어둠의 길이가 가장 길다는 동지(冬至)였습니다. 그래요, 저는 아주 환하게 그날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남자는 오후 네시, 제 퇴근 시간에 맞춰서 종로 쪽 출입구 앞에서 기다리겠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화장실에 가 입술 화장을 고치고 손등에 바셀린 로션을 발랐습니다.
……남자는 오지 않았습니다. 그날따라 저와 교대할 직원은 십 분이나 늦게 도착했습니다. 허겁지겁 가방을 집어들고 서점 종로 쪽 출입구로 갔습니다. 십 분이 늦긴 했지만 남자가 이미 다녀갔을 거란 짐작은 들지 않았습니다. 남자가 늘 다니던 길로 다녔더라면 저는 제가 앉은 자리에서도 남자의 모습을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남자는 늘 광교 쪽 출입구를 통해 서점에 들어와 나에게 명함을 부탁하고 명함이 완성되면 저의 책상을 지나 종로 쪽 출입구로 나가버리곤 했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그날 남자는 저녁 일곱시가 넘도록 오지 않았습니다. 그날 밤부터 감기가 치밀어오르기 시작했습니다. 한 이틀인가 결근을 해야 했습니다. 저는 우울이 제게 달려들어 심장을 꽉 깨물지 않도록 온몸을 웅크리고 오래 앓았습니다.
보름 후 직장을 잃게 되었습니다. 제가 그 일을 그만두게 될 때까지 남자는 다시 서점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아, 이 스웨터요? 글쎄요. 딱히 무슨 작정을 하고 뜬 것은 아닙니다. 다시 남자를 만날 수 있을 거란 생각도 해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렇게 가끔 한때 근무했던 서점에 나와 공연히 어슬렁거리거나 지나가는 사람들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곤 합니다. 저는 우연을 믿지 않습니다. 다만 오랜 시간이 흐르긴 했지만 혹시라도 남자가 마음을 바꿔 약속 장소로 나오지는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 때도 있답니다. 그 남자는 여태도 이 도시 어딘가를 떠돌며 매일 다른 이름으로 바꿔가며 살고 있을까요.
아주 이른 시간이었습니다. 아침 다섯시나 여섯시쯤 되었을까요. 아직 골목에는 출근하는 사람 하나 보이지 않았고 새벽녘에 청소차가 지나간 골목길은 가는 겨울비가 쓸고 간 것처럼 청결하고 젖은 풀 냄새 같은 것이 풍겨나기도 했습니다. 눈앞을 가로막는 그 어스레함을 뚫고 누군가 불쑥 저쪽 골목 어귀에서 나타나 제 앞을 가로막을 것만 같은 조바심이 일기도 했습니다. 저는 거북이 든 어항이 깨지지 않도록 손아귀에 단단히 힘을 주고는 골목길을 타박타박 걸어 내려갔습니다.
수족관집 문은 굳게 닫힌 상태였습니다. 저는 굳게 내려진 셔터를 공연히 잡아 흔들어보거나 네온이 꺼진 간판을 올려다보곤 했습니다. 거북은 그때껏 사각 어항 속에 든 작은 바윗돌 위에 올라앉아 꿈쩍도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찬 기운 때문이었는지 팔과 다리를 몸통 안으로 잔뜩 우겨넣고 말입니다. 약을 발라주고 물에 타 넣어주긴 했어도 거북의 눈을 둘러싼 점액은 조금도 얇아지거나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이즈음은 먹이의 양도 부쩍 줄어든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거북이 아니라 개나 고양이 같은 엽렵한 짐승들을 키울 걸 그랬습니다. 수족관 주인은 한 삼 개월쯤 경과를 지켜보자고 했었지요. 어쩌면 그동안 거북은 완전히 두 눈이 멀게 되거나 아니면 그예 죽게 될지도 모릅니다. 제 방 한구석에서 거북은 아무도 모르게 죽어가고 있는 듯 성싶습니다. 육안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바이러스는 점점 더 거북의 몸을 에워싸고 있을 것입니다. 저는 아무것도 자신이 없습니다. 죽은 거북의 시체를 치워야 할 일도 눈을 뜨게 된 거북의 파열된 눈동자를 들여다볼 자신도 말입니다.
양손에 사각 어항을 든 채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수족관집 앞을 서성거리다가 셔터 밑 시멘트 바닥 위로 슬그머니 어항을 내려놓았습니다. 물이 출렁거리며 어항의 전으로 약간 흘러 넘칩니다. 생혼(生魂)을 잃어버린 거북은 이미 죽어버린 듯 미동도 하지 않습니다. 머리까지 몸통 안으로 집어넣은 거북은 한 개의 푸른 돌 같아 보입니다. 한 개 핏줄도 생명도 없는 돌멩이 말입니다. 미혹에 사로잡힌 것마냥 얼마쯤 더 그 자리에 움치고 앉아 있다가 자리를 떴는지 알 수 없습니다.
거북은 눈을 뜨게 될까요.
……여기까지 쓴 후에 다시 앞장부터 꼼꼼히 편지를 읽어보았습니다. 혹여 당신께 아직 하지 못한 말이 있는가 하고 말입니다. 언제 다시 우리가 만나게 된다면 그때 당신은 제 얼굴을 알아볼 수 있을까요.
뜨개방 문은 열려 있지 않았습니다. 털모자 세 개를 떠주기로 한 약속도 지킬 수 없게 되었고 새 실을 살 수도 없습니다. 열 정거장이나 되는 먼 길을 가 실을 사야만 합니다. 저는 남자의 낙타색 스웨터를 천천히 풀기 시작했습니다. 앞판도 풀고 뒤판, 양쪽 소매 두 개 모두 풀었습니다. 열흘이나 걸려 애써 뜬 솔잎뜨기 무늬도 제 눈앞에서 서서히 사라져갔습니다. 실뭉치가 엉킬 만큼 잔뜩 풀었다가 한쪽 실 끝을 잡고는 둥글게 말았습니다. 앞판의 실 끝과 뒤판의 실 끝, 그리고 양쪽 소매 실 끝도 이음새가 표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털실을 이었습니다. 주전자에 한소끔 물을 끓인 후 그 훈김에 실을 쬐었습니다. 고불거렸던 털실은 다시 새 실처럼 곧게 펴졌습니다. 이 정도 파운드의 실이면 외투 양쪽 자락은 충분히 완성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외투 주머니에 넉넉한 주머니도 달고 단춧구멍도 만들 것입니다. 아마도 그때쯤이면 뜨개방 문도 다시 열릴 터이고 저는 모자라는 실을 다시 살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제 옷을 뜨개질하기는 처음입니다. 그리고 커다란 외투를 떠보는 것도 말입니다. 무늬를 고르는 것이나 게이지를 내는 일도 마치 생전 처음 대바늘을 잡아본 듯 서툴기만 합니다. 언제쯤 저의 겨울 외투를 완성할 수 있을지 가늠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곧 낙타색 긴 니트를 둘러 입고 속이 오른 배추를 사러 가거나 눈 내리는 날이면 먼 길을 걸어 산책도 할 것입니다. 겨울은 상기도 두어 달이나 더 남았습니다.
……편지를 접으려다 말고 저는 새로 펜을 고쳐잡습니다. 아직도 저에게는 남겨진 일이 있습니다.
어떤 문구가 좋을지 영 알 수 없습니다. 언젠가 당신이 그랬던 것처럼 <잎이 지고 나면 꽃이 피고, 꽃이 지고 나면 잎이 지고 마는 식물이 있습니다. 잎과 꽃들은 서로를 그리워하지만 결코 만날 수 없습니다. 여기‘편지를 전하는 사람들의 모임’으로 연락주시겠습니까.>라고 해야 할까요. 제가 당신의 그 글월을 본 것이 벌써 언제였던가요. 모든 것이 까마득하기만 합니다. 그래요. 물론 당신도 그랬던 것처럼 저도 제 이름이 아닌 새로운 이름 하나를 더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일 것입니다. <또 하나의, 편지를 전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라고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