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혁란(오른쪽)·김경화씨 부부가 배송할 당근케이크를 포장하고 있다. 아래 작은 사진은 카페 ‘하우스 레서피’ 내부. 제주=사진작가 서재철
제주시 한림읍 귀덕리. 작은 시골 마을인 이곳의 대로변에는 담배나 라면을 파는 ‘구멍가게’가 있을 법하다. 그런데 한적한 시골마을에 ‘하우스 레서피’란 케이크점이 들어서 있다.
문을 밀고 들어가면 커피향이 손님을 반긴다. 제주시 구좌읍에서 자란 당근을 주재료로 한 당근케이크를 파는 곳이다. 좋은 재료를 골라 만든 케이크와 커피를 낸다. 사교적이고 환경에 관심이 많은 부인 권혁란(60)씨, 아파트에선 도저히 살 자신 없다는 남편 김경화(60)씨가 2009년 5월 문을 연 가게다. 미국의 여러 도시, 멕시코시티, 홍콩에서 25년 생활한 부부가 제2의 인생을 시작한 곳이다. “제주도는 섬이 아니에요. 우리에겐 여기가 세계의 중심이죠.” 부인 권씨의 말이다.
젊은 이주자들도 늘고 있는 추세지만 제주도는 여전히 은퇴 후 제2의 인생을 계획하는 50~60대가 많이 주목하는 곳이다. 권혁란·김경화씨 부부는 이들이 참고할 만한 은퇴 이주의 성공 포인트를 골고루 갖췄다.
부부가 각각 몰두할 일이 있고, 시골생활의 불편함을 명랑하게 받아 넘길 자세가 돼 있다. 불편함은 “흙 밟고 자연을 누리면서 사는 대신 지불해야 할 노력”이라는 설명이다. 자녀들(1남 1녀)은 장성해 제 갈 길 가고 있고, 부부는 건강하다. 봉사활동을 열심히 하고 동네 경조사를 챙기면서 평판을 쌓아 왔다. “동네분들도 우리들이 사기꾼은 아닌지, 거짓말쟁이는 아닌지 알아볼 시간이 필요하죠. 제주도가 타지 사람들한테 배타적이라고 하는데, 그건 이주해 온 사람이 노력해야 해결됩니다. 인사 잘하고 내가 먼저 ‘동네 일에 나도 불러 달라’고 해야죠.”
부부의 이력은 단단하다. 권씨는 77년 결혼하기 전까지 대구 MBC 아나운서로 일했다. 캠퍼스 커플(연세대 69학번)로 만났고, 포스코(당시 포항제철) 과장 시절 미국으로 발령받은 남편을 따라 3~4년에 한 번 이삿짐을 싸고 풀었다. 김씨는 2008년 한·미 합작 회사인 UPI의 수석부사장으로 은퇴했다. “은퇴하면 다시는 이삿짐을 안 싸도 되는 곳으로 가야겠다고 결심했어요. 한국으로 돌아오고 싶었는데, 서울은 정말 아니었고요. 신혼여행으로 딱 한 번 와 본 제주도가 생각나더라고요. 워낙 아름답고 깨끗하잖아요.”
성공적으로 제주도에 정착한 부부는 이제 지역에선 유명 인사다. 이는 부부가 제주도에 도움이 될 만한 일을 찾아 적극적으로 노력한 덕분이기도 하다. 김씨는 이사 오자마자 귀덕초등학교 병설 유치원에서 일주일에 2번씩 영어 강의를 했다. 권씨는 아나운서 경험을 살려 사회자가 필요한 행사가 있으면 가게 문을 닫고 달려간다. 최근엔 부부 모두 제주 세계자연보전총회(WCC) 행사 때문에 바빴다. 영어 번역가로 일하고 있는 남편 김씨에겐 행사에 필요한 정보를 영어로 번역할 일이 자꾸 생겼다. 권씨는 총회 중 열린 워크숍에서 발표자로 나선 해녀 홍경자씨의 강연 원고 작성을 돕느라 분주했다. “우리 나이 되면 지금까지 쌓아 온 것을 꺼내서 나눠야 해요. 벌이가 안 되더라도 지역에 기여해야 함께 행복할 수 있습니다.”
이들의 은퇴 준비는 200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권씨가 입대를 앞둔 아들과 함께 귀국해 서울 송파구에 집을 얻으면서다. 남편은 아직 홍콩에서 근무하고 있었고, 딸은 미국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을 때다. 권씨가 가락시장에서 구좌읍 당근을 사다 미국에서 만들어 먹던 당근케이크를 구웠는데 범상치 않은 맛이 나왔다. “미국 당근과 달리 제주 당근은 수분이 많고 당도가 높아 설탕을 아주 적게 넣어도 맛있어요. 촉촉하고 담백한 레시피가 완성됐죠.”
우연히 동문 바자 행사에서 선보인 당근케이크의 인기는 폭발적이었다. “40분 정도 지나니까 동이 났어요. 사람들이 맛있다고 하니까 제가 신이 났죠.” 이날의 경험은 사업으로 이어졌다. 서울 가락동에 공장을 차리고 청담동에도 매장을 냈다. 입소문이 나 백화점 입점까지 했다. 사업 규모가 커지자 오전 4시에 일어나 하루 종일 일해야 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이건 아니다”는 생각이 들었다. 2009년 3월엔 제주도로 내려와 한 달을 둘러본 끝에 14년째 비워 둬 폐가가 된 현재의 귀덕리 가게를 얻었다. 보증금 100만원, 연세(年貰) 200만원이라는 파격 조건이다. 한 달간 수리해 그해 5월 매장을 열었다. “원래는 당근 산지인 구좌읍에 매장을 내고 싶었는데 적당한 집을 찾지 못했어요. 이곳을 보고 한 3년만 하면 자리 잡겠다는 자신감이 생겨 바로 결정했습니다.”
부부는 제주생활을 “이 이상 좋을 수 없다”고 말한다. 매출이 많았지만 임대료와 인건비 부담이 컸던 서울보다 훨씬 알차단다. 귀덕리 당근케이크가 유명해지면서 찾는 사람도 늘고 있다. 소문을 듣고 직접 찾아오는 사람은 하루에 평균 20~30명이고 전화 주문도 끊이질 않는다. 서울보다는 적게 벌지만 돈 쓸 일도 그만큼 적다.
건강이 허락하는 한 계속할 계획이지만 손님이 늘면서 일도 많아진 것은 걱정거리다. 남편은 “일이 많아져 이 사람 고생하는 게 마음이 아프다”고 말하고, 부인은 “그래도 내가 신나는 데 뭐가 걱정이냐”며 웃는다.
제주도를 인생의 마지막 집으로 골랐다는 부부는 “제주도의 가장 큰 매력은 역시 ‘자연’”이라고 말했다. 세계 어딜 가도 이런 곳은 없단다. “일이 몰려 한참 바쁠 때는 가게 안에만 있어 제주도에 살고 있는 것을 잊기도 하죠. 그러다가 배달하러 우체국 가면서 곽지해수욕장을 보고 ‘와 멋지다, 아 맞다! 내가 제주도 살지’ 이럴 때가 있어요. 이곳에 온 이유를 잊을 정도로 바빠지는 일은 없어야죠.”
첫댓글 경화부부! 두 분 얼굴이 마이 탔는 것 같네, 건강해보여서 보기 좋습니다. 이게 사는 맛 아니겠어요! 경화부부,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