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와 묵상>
톰 라이트가 설명하는 ‘성만찬’
* 이 글은 톰 라이트의 책, 마침내 드러난 하나님 나라(Surprised by Hope, 양혜원 번역)에서 발췌한 것이다(407~411쪽). 편의상 나는 소제목을 달았다. 괄호 안의 내용은 내가 번역을 수정한 것이다.
우선 성만찬에 대한 세 가지 관점을 대략적으로 제시한 후에, 지금 여기서 우리와 만나는 새 창조의 신학이 어떻게 성만찬에서 일어나는 일을 더 분명하게 보여 주는지 설명하겠다.
1. 성만찬, 마술 공연?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성례전은 마술 공연과도 같은 것이었다. 마술사 같은 어떤 거룩한 사람이 나와서 주문을 외우고 마술의 행위들을 하고 나면, 평범한 음식이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하는 놀라운 마법이 일어난다.
다시 한번 악은 물러가고, 속죄가 이루어지며, 하나님의 진노가 가라앉는다. 특별한 효과를 지닌 기도가 드려지고, 사회적 권력과 통제가 강화되며(공동체의 친교는 강화되고 관리되며), 모두가 기뻐한다.
물론 이것은 진정한(실제) 신학자들이 믿는 내용을 희화한 것이다. 그러나 많은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성만찬이 실제로 그런 모습으로 비춰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그러한 차원에서 보자면 교회의 성례전은 이교의 의식과 별다를 것이 없다.
2. 개혁신학의 극단적인 상징화
물론 종교개혁 때 성례전의 체계 전체가 도전을 받았다. 어느 극단적인 개혁 신학에서는 마술이나 이교주의의 냄새를 풍기는 것이나 사제 계급의 권력을 인정하는 것은 무엇이든 거부했고, 로마 가톨릭이 가르치는 것은 무엇이든 다 부인하고자 했다.
따라서 급진적인 스위스 개혁가들은 성만찬을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셨다는 역사적 사실만을 상기시켜 주는 단순한 상징으로 여겼다. 그 사실만 묵상하면 떡을 떼어먹는 행위에서 얻는 것과 똑 같은 영적 유익을 얻을 것이라고, 사실 그러한 묵상 없이 떡을 떼어 먹어도 그 때보다 더 많은 영적 유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사실 그러한 묵상 없이 떡을 떼어 먹을 때보다 더 많은 영적 유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그들은 말했다.
3. 유월절 전통에서 바라본 성만찬
거의 마술과도 같은 의식과 그저 기억만 하는 것 사이에는 좀더 역사적인 근거를 가진 관점이 있는데, 유대인들이 유대교의 성스런 식사(특히 성만찬이 원래 기원하는 유월절 식사)가 어떤 식으로 기능한다고 생각했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오늘날까지도 유대인들은 유월절을 기념할 때, 자신들이 원래의 사건과 본질적으로 다른 어떤 의식을 행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늘밤 하나님이 우리를 이집트에서 끌어내셨다”라고 그들은 말한다. 식탁에 둘러 앉은 사람들은 광야 세대의 후손이 아니라 바로 그 광야 세대의 사람들이 된다.
시간과 공간이 겹쳐지는 것이다. 성례전의 세계에서는 과거와 현재가 하나다. 그 둘은 함께 미래의 사건으로 남아 있는 해방(the still-future liberation)을 지향한다.
성만찬에서 일어나는 일
성만찬에서 일어나는 일은 이렇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미래의 영역이 분명하게 작용한다(미래의 영역이 격렬하게 무대에 올려진다). 떡을 떼면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에 동참하게 되고, 그분을 기억하면서 그 떡을 뗀다(우리는 그처럼 떡을 떼면서 주님을 기억한다). 그 순간 우리는 최후의 만찬 식탁에 둘러앉은 제자들이 된다.
그러나 거기에서 멈춘다면 절반의 진실만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성만찬에 대한 이해를 진척시키려면 우리는 그것을 단지 하나님의 과거가 (혹은 예수님의 과거가) 우리의 현재로 확장된 것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미래가 우리의 현재로 들어온 것으로도 보아야 한다.
우리는 (단지) 오래 전에 죽으신 예수님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주님의 현존을 축하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부활을 통해, 변화된 새 세상인 새 창조 안으로 앞서서 들어가신 분으로서 그리고 그 새 창조의 원형으로서 살아계신다.
떡과 포도주로 자기 자신을 우리에게 주시는 예수님은 바로 하나님의 새로운 세상의 시작이다. 성만찬 때 우리는 약속의 땅에서 딴 열매를 맛보는 광야의 이스라엘과 같다. 미래가 현재로 들어와 우리를 만나는 것이다.
화체설의 오류
이와 같은 관점에서 성만찬 때 그리스도가 현존하는 방식을 이야기하는 것이, 이전의 화체설을 이런저런 식으로 다시 정의해 가며 이야기하는 것보다 훨씬 더 도움이 된다. 화체설은 그것이 오답이어서가 아니라 잘못된 질문에 대한 정답이어서 오히려 문제가 된다.
그리스도의 진정한 현존을 주장한 것은 옳았다. 그러나 당대의 철학이었던 실체와 우연을 구분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에서 그 현존을 설명한 것과, ‘우연’(무게, 색감, 화학적 구성과 같은 사물의 외적 성질-원래 본문)은 건드리지 않으면서 ‘실체’(빵 한 조각과 같은 사물의 내면적, 비가시적 실재)를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사제에게 있다고 가정한 것은 틀렸다. 이것은 중세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필요한 설명을 하는 한 가지 방식이었지만, 그 후로 온갖 오해와 남용을 낳았다.
새로운 세상에 동참하도록 우리를 이끄는 운반체
그것보다 더 나은 설명은 새 창조에 대한 신약성경의 언어에서 얻을 수 있다. 로마서 8장이 좋은 출발점이 될 것이다. 창조계가 자신의 구속을 기다리며 고통 가운데 신음하고 있다. 그러나 옛 창조의 일부가 이미 변화되었고 부패의 속박에서(썩어짐의 종 노릇 한데서) 해방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십자가에서 죽었으나 이제는 죽음이 건드릴 수 없는 생명을 가진, 살아있는 그리스도의 육체다.
예수님이 앞서서 하나님의 새 창조 안으로 들어가셨고, 예수님 자신이 마련해 주신 렌즈 – 즉 그 분이 배신당하던 날 밤에 함께 하셨던 식사 –를 통해서 그분의 죽음을 돌아볼 때 우리는 창조의 상징인 떡과 포도주를 통해서 그분이 우리를 만나러 오시는 것을 보게 된다.
그리고 그 상징은 그리스도 이야기 안에, 새 창조의 사건 안에 취합되어 하나님의 새로운 세상과 그 세상에 우리를 동참시켜 주는 구원의 사건을 전달하는 운반체가 된다. (그리고 그 상징은 그리스도 이야기 즉, 그 자체로 새 창조의 사건인 그 이야기 속으로 전달되며,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새로운 세계와 구원의 사건에 동참하고 누릴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운반체가 된다).
어린 양의 결혼식 만찬, 작은 부활절, 작은 성탄절
이와 같은 틀 안에서(즉 부활절의 진정한 의미인 창조와 새 창조라는 틀 안에서-이 부분이 번역에서 누락됨) 우리는 하늘과 땅이 새롭게 만들어질 때의 만찬, 즉 어린 양의 결혼식 만찬을 예견하는 사건으로서 성만찬을 가장 온전하게 이해할 수 있다. (몇몇 전례들이 이것을 표현하려고 했지만 슬프게도 단순히 ‘천국’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으로 후퇴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것은 요점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다. – 원문 글)
성만찬은 하나님의 미래, 강림의 미래가 우리의 현재 시간 안으로 뚫고 들어오는 것이다. 모든 성만찬은 작은 부활절일 뿐만 아니라 작은 성탄절이다.
성만찬의 진정한 유익
이것은 마술이 아니다. 마술은 (무엇인가?) 하나님이 믿음을 위해서 또한 거룩(함)과 사랑을 북돋아 주기 위해서 은혜로 주시는 개인의 권력이나 쾌락을 위해 교묘한 방법으로 얻으려 한다.
예수님의 부활과 새롭게 만들어진 세상에 대한 약속(세상이 새롭게 될 것에 대한 약속)은 우리에게 존재론적이고 인식론적인, 무엇보다도 종말론적인 틀을 제공해준다. 이런 틀 안에서 우리는 성만찬을 새롭게 이해할 수 있다.
현재를 사는 우리를 지탱해주기 위해서 하나님의 미래로부터 오는 희망을 박탈하지 말자. (하나님의 새로운 세상은 시작되었다. – 이 문장이 번역에 누락됨) 그것이 현재의 세상 안으로 뚫고 들어오는 것을 우리가 보지 못한다면, 우리는 기독교적 삶에 동력을 주는 토대를 부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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톰 라이트가 설명하는 성만찬을 읽고 느낀 점과 요약
지난 2016년 2월에 설교한 성만찬의 의미는 삼중적 의미였다. 그것은 과거, 현재, 미래라는 의미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라는 의미요, 삼위일체적 공동체라는 의미였다.
설교안: http://cafe.daum.net/Wellspring/6zBK/213
그 외에 내가 했던 성만찬 설교는 다음과 같다:
(1) 성찬, 하나님의 새 언약 백성이 되는 축하 피로연(披露宴)-2016년 2월 1일
http://cafe.daum.net/Wellspring/6zBK/142
(2) 성찬, 주님과 함께 하는 식사 2016년 3월 1일.
http://cafe.daum.net/Wellspring/Uf3M/2
위에서 한 설교는 주로 프랭크 바이올라의 책을 참조한 것이다. 그런데 톰 라이트의 설명을 읽으면서 새롭게 깨달은 사실이 있다. 톰 라이트는 철저하게 하나님 나라를 창조와 재창조의 관점에서 설명한다는 사실이다. 특별히 위의 책에서 그는 사후영혼천당 사상에 대하여 우려와 반대를 표방하면서 하나님이 새롭게 만드시고 완성하시는 새로운 세상을 하나님 나라로 소개한다.
그런 점에서 성만찬이 천국에 들어갈 사람으로 죄를 사해주는 의미라기보다는 부활절처럼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행하신 새로운 창조와 앞으로 완성하실 새로운 세상을 미리 맛보게 하는 의미라고 톰 라이트는 소개한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하나님의 새 창조의 시작이라면, 성만찬은 바로 그것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톰 라이트에 따르면, 성만찬이 귀하고 실제적인 까닭은 그 때 먹는 떡과 포도주가 예수님의 살과 피로서 우리의 죄를 사하며 우리를 천국으로 들어갈 자격을 갖추게 해 주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완성하실 하나님 나라, 곧 새로운 창조세계를 기대하면서 이미 그리스도께서 시작하신 그 새로운 세상을 맛보고 누릴 수 있다는 보증이 되기 때문이다.
이전 구속적 신학 패러다임으로 성만찬을 보면, 그것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다는 표증이요 약속이다. 그러나 새 창조의 패러다임으로 본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이미 우리 가운데서 새로운 창조를 시작하셨으며 주님이 우리 가운데서 그 일을 계속하시며, 장차 반드시 세상을 새롭게 창조하실 것이라는 확실한 보증이며 약속이 된다. 거기에서 기독교인이 현실의 부조리를 해결하고자 하는 의지와 소망이 나온다.
가나안 땅의 약속을 확신한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하나님의 새 창조를 확신한 그리스도인들은 대담하고 용감하게 주님의 일에 동참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성만찬은 일종의 출정식이며 승리를 미리 맛보는 축하의 잔치다. 물론 그것은 우리와 그리스도의 결혼 즉, 연합을 기리는 피로연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언제나 우리 개인의 관점과 함께 하나님의 거시적 관점에서 생각하는 연습을 할 필요가 있다.
<끝>.
참고 자료:
언약의 식사: 성만찬 - 존 마크 힉스
https://cafe.daum.net/Wellspring/8RdW/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