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으시는 다산 할아버지
다산 할아버지 휘 정치우(鄭致宇)의사께서는 호수공(湖叟公)의 10세손이시고 삼휴공(三休公)의 8세손이시며 농와공의 증손자이시다. 산남의진에 참가하여 큰 공을 새운 공으로 금년 제68회 광복절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으셨습니다.
<포항시죽장면에 있는 산남의진 발상비>
<영천시 조양각에 있는 산남의진비 >
<정치우의사님의 건국훈장 애족장 훈장증>
< 건국훈장 애족장 훈장>
< 부상 금수저 두 벌>
대전국립현충원에 봉안된 정치우의사님의 묘
산남의진(山南義陣)은 1905년 을사륵약으로 국권상실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하여 경상북도 동북부지역을 거점으로 활동한 의병으로 1906년부터 전후 4차례에 걸쳐 3년간이나 지속적인 활동을 하였다. 그 중심에 고종의 밀지를 받아 의병을 모아 이끄신 휘 정환직(鄭煥直). 정용기(鄭鏞基) 부자분이 있었고 또한 사종간이신 휘 정치석(鄭致錫), 정치우(鄭致宇) 형제분도 참여 하여 많은 활동을 하셨다.
그러나 활동상황은 후손들에게 미칠 일제의 화를 걱정하여 비밀로 하셨기에 아무도 알지 못했다. 피신 중에는 용산리 소재 추모당에서 제자들을 모아 형이신 휘 치석(致錫)과 같이 한문교육과 애국교육을 실시하셨고 또한 항일활동을 음으로 지원하다 1939년 6월에 서거하셨다.
최근 손자인 정연체(鄭淵棣)가 산남의진 문헌에서 휘 정치우 조부님의 활동상황을 발견하여 그 공적을 정리하여 국가보훈처에 신청한 결과 2013년 광복절에 건국포장 애족장을 추서 받게 되었다.
1. 인적사항
o성명 : 정치우(鄭致宇)(음1871년 2월 24일 生-1939년 6월 20일 卒(족보상)
o배위 : 벽진이씨 o택호 : 다산
o본적지 : 영천시 자양면 용산리 971번지
2. 공적사항(요약)
1)을사륵약이 일제에 의해 체결된 직후인 1906년 3월 정환직. 정용기 부자가 중심이 되어 창의 할 때 영천지역 책임자로 활발한 소모(의병을 모집하는 일)를 전개하여 산남의진 결성에 크게 기여하였다.
2)산남의진의 좌익장에 임명되어 활약하였다.
3)1907년 4월 정용기대장에 재차로 의병을 거의할 때 영천지역 책임자로 활동하였다.
4)영천, 영일, 청송 등지에서 전개된 각종 항일 투쟁에 참여하였다.
5)1907년 9월 정용기대장이 입암전투에서 전사하고 그의 아버지 정환직이 대장으로 의병을 지휘할 당시 이두규와 함께 영천지역 군자금 모금 책임자로 활동하였다.
6)정환직대장이 체포되고 순절하자 은신하여 항일활동을 지원하다 1941년 7월 서거하였다.
공적사항 근거자료
o 성명 : 정치우(鄭致宇)
o 본적 : 영천시 자양면 용산리 971번지
o 생몰연도 : 1870년 11월 3일-1941년 7월 15일(호적상)
o 독립운동계열 : 의병(산남의진)
故 정치우는 본적지에서 1870년 11월 3일 父 정유경(鄭裕璟)과 이경이(李敬伊)의 2남 2녀 중 2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집안어른들에게 한학을 배워 학덕이 높았으며 성품이 강직하고 담력이 있어 주위에 따르는 사람이 많았다.
- 1892년부터 본적지 소재 추모당에서 훈장으로 문중 및 지역민 자제들의 유학교육에 몰두하고 있던 중 사종형인 정환직(鄭煥直)이 1905년 12월 고종황제의 밀지를 받고 아들 정용기(鄭鏞基)와 의논하여 영남지방에 의병을 조직하여 관동으로 진군 할 것을 결의하고 정용기로 하여금 창의할 것을 명하자 정용기는 곧바로 고향인 영천으로 내려와 영천창의소를 마련, 경고문 및 통문을 작성하여 각지에 배부하고 내부창획 담당자와 지역의 연락담당 및 각 지역 활동 책임자를 선정하는 등 본격적인 의병모집에 착수하였다. 이때 정치우는 친형인 정치석(鄭致錫)들과 함께 영천지역 소모(召募)활동 책임자로 임명되어 적극적인 소모활동을 전개하였다.(<산남창의지> 하, p35)
- 1906년 3월 정용기를 대장으로 추대하고 산남의진(山南義陣)이 결성되자 정치우는 좌익장에 임명되어 활약하였으며 정용기대장의 지휘 하에 신돌석(申乭石)의병진을 돕기 위해 영해방면으로 이동 중 경주진위대의 신석호(申錫鎬)의 간계로 정용기대장이 체포되자 중군장 이한구(李韓久)의 지휘하에 영일. 청송. 영덕 등지에서 항일활동을 전개하다가 1906년 6월 후일을 기약하고 의병진을 일단 해산하자 고향으로 돌아와 재차 거의를 위한 준비에 전념하였다. (<산남의진> 하, p37, 102 <산남의진유사> p259,470)
- 정환직의 주선으로 석방된 정용기가 1907년 4월 전열을 가다듬어 다시 창의할 때 영천지역 책임자로 임명되어 영천. 영일. 청송 등지에서 전개된 여러 차례의 항일전투에 참전하였으며 산남의진이 관동지방으로 북상 결의하고 군수준비와 지방연락 및 감시책임자를 파견할 시 정치우는 영천지역 책임자로 파견되어 임무를 수행하였다. (<산남의진유사> p294-296, 배용일,<산남의진고>,<산남의진충효유적>p79)
- 산남의진이 관동지방으로 북상을 준비하던 중 1909년 9월 입암전투에서 정용기대장을 비롯하여 중장군 이한구, 참모장 손영각(孫永珏), 좌영장 권규섭(權奎爕) 등이 전사하자 서울에서 급히 내려온 정환직이 제2대 대장으로 취임하여 남은 장령들과 군사를 수습하고 다시 북상 준비를 위해 각 지역으로 흩어져있던 부대들에게 합류를 통보하는 한편 여러 부장들을 각지로 보내어 군사모집과 군수품 및 군자금을 모금하도록 하였다. 이때 정치우는 이두규(李斗圭)와 함께 영천지역 군자금 모금 책임자로 임명되어 활동하였으며 영천. 영일. 청송 등지에서 전개된 항일투쟁에 참전하였다. (<산남의진유사>p167)
- 1907년 11월 7일 4종형인 정환직대장이 체포되어 대구로 압송되었다가 다시 영천으로 이송되어 1907년 11월 16일(양력 12월 20일) 총살, 순국하자 고향으로 돌아와 은신하며 항일운동을 지원하다가 1941년 7월 15일 광복도 보지 못한 채 한 많은 인생을 마감하였다. (<산남의진유사> p470)
<참고자료>
*다음 명단은 각종 관련문헌의 발췌자료에서 찾아 등재하였습니다.
山南義陣 參加者 名單
o山南倡義誌 下 (영천출신)
鄭煥直. 鄭鏞基. 鄭淵浩. 鄭致烈. 鄭致錫. 鄭致宇. 鄭鎭久. 鄭鎭鶴. 鄭完成
o山南義陣遺史
鄭致于. 鄭來儀(흥해). 鄭春日
o大邱慶北 抗日獨立運動史(광복회대구경북연합지부)
鄭來儀. 鄭完成. 鄭致宇.
o韓國獨立運動史事典(1) 총론편(상권)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독립기념관)
o山南義陣忠孝事績(산남의진기념사엽회) 部署
大將- 鄭鏞基. 召募將- 鄭純基 左翼將- 鄭致宇. 右翼將- 鄭來儀. 右砲將 - 鄭完成
義兵- 鄭鎭鶴(지방연락책임자). 鄭煥鳳(청하책임자). 鄭致勳(군자금). 鄭鎭英. 鄭釜基. 鄭致化(軍資金). 鄭鎭韶(軍資金). 鄭致錫(召募). 鄭鎭郁(連絡). 鄭煥集 鄭致翼. 鄭鎭燾. 鄭鎭漢.
o鄕土慶北(제7집) (영천출신)
鄭煥直. 鄭鏞基. 鄭淵浩. 鄭致烈.. 鄭致錫. 鄭致宇. 鄭鎭英. 鄭鎭久
첫댓글 농와공(휘 하주)구기이 할아버지의 네분아들 성휴,진휴,체휴,정휴중
정휴 할아버지의 끝에 손자 형제분이 삼남의진에 활동 하셨다니
늦게나마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으시니 가문의 영광이요,
후손으로서 긍지를 걎게 해주셨습니다,
형님이신 토골(진석) 할아버지께서도 같이 추서 받으시지 못해 아쉽습니다,
내년에 같이 추서 받이시길 기원하면서
손자이신 봉동할배(연체)께 진심으로 축하을 드립니다,,
훈장증, 훈장, 부상등 사진을 다시 올려주셨네요.
숙부님 수고많이 하셨습니다,,
훈장증과 훈장이 더욱 빛이나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