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어 키건 소설 『맡겨진 소녀』(다산책방, 2023)을 읽고
“키건은 한 세대에 한 명씩만 나오는 작가다.” - 《타임스》
2022 부커상 최종후보 작가의 국내 초역, 2009 데이비 번스 문학상 수상작, 《타임스》 선정 21세기 출간된 최고의 소설 50, 제95회 아카데미 시상식 국제 장편 영화상 최종 후보 「말없는 소녀」의 원작 소설 등 다양한 홍보 글과 수식어가 있는 소설책이다.
일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아홉 살 여자아이가 화자다. 여름방학 동안 친척 집에 맡겨지게 되는 소녀의 이야기다. 대가족 속에서 마땅히 받아야 할 사랑과 보살핌과 거리가 먼 삶을 살았던 소녀. 친척 집에 맡겨지면서 자신을 대하는 킨셀라 아주머니 부부를 통해 비로소 사랑과 따스함이라는 감정을 배우게 된다. 책 속으로 들어가 보자.
일요일 아침, 아빠의 차를 타고 킨셀라 아주머니 집으로 가면서 자기가 여름 동안 보내게 될 장소와 상황에 대해 온갖 상상을 한다. 킨셀라 아주머니가 아이를 반기며 입맞춤한다. 내 집처럼 편하게 있으라고 말한다. 아이의 엄마는 다섯째를 임신한 상태다. 돌보기 힘들고, 입 하나라도 덜기 위해 친척 집에 맡겨진다. 아빠가 자기를 여기 두고 가면 좋겠다는 마음도 들지만, 다시 데려가면 좋겠다는 생각도 한다.
(방학이면 형제들과 함께 고모 집이나 외가에 가곤 했다. 엄마는 바깥일이 더 중요한 아빠를 대신해 농사일과 아프신 할머니를 봉양하며 우리 오 남매를 돌봐야 했기에 고모들과 외가에서는 방학 때마다 우리를 보내라고 성화였다. 그럴 때면, 어린 마음에도 평소와는 다르게 행동도 마음도 조심스럽곤 했다. 고모 집도 외가도 사는 건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였다. 보통 어린 동생 둘은 집에 두고 위로 세 명의 형제들이 맡겨졌다. 세 명이나 되는 군식구가 그저 반갑기만 하지는 않겠다는 생각도 들었기에 이 책 주인공의 마음을 너무도 잘 알 것 같았다.)
“묘하게 무르익은 산들바람이 마당을 가로지른다.”(p14)
“마당을 가로지르는 묘하게 무르익은 바람이 이제 더 시원하게 느껴지고, 크고 하얀 구름이 헛간을 넘어 다가온다.”(p15)
“모든 것은 다른 무언가로 변한다. 예전과 비슷하지만 다른 무언가가 된다.”(p33)
(시처럼 아름다운 표현과 문체들이 책을 읽는 동안, 곳곳에 숨어 있어서 보물찾기 하는 마음으로 밑줄을 긋게 된다. 이런 문장들에 마음이 떨린다. 로맹가리의 문장을 만난 것처럼 반짝, 별을 보는 듯...)
킨셀라 아주머니는 아이가 잘 모르는 것을 "어리니까 모를 수도 있다"라거나, "이 집에 비밀은 없어" 등 아이의 마음이 편해질 수 있는 말로 대한다. 킨셀라 아주머니를 따라 우물에 갔을 때 맛본 물의 맛일 절묘하게 표현한다.
무심하고 거친 아빠는, “먹을 건 엄청나게 축낼 겁니다”라거나 “대신 일을 시키세요” 등의 말과 허세를 부리다 돌아간다. 따뜻한 목욕물을 받아 씻겨주는 킨셀라 아주머니를 통해 경험해 보지 않았던 마음, 표현하기 어려운 마음을 배워 나간다. 바르게 말하는 법, 글을 읽는 것까지 배우게 된다.
아저씨는 항상, 아이를 다독이고 용기를 주었다. 우체통까지 달리도록 하고 초를 재주면서 "너는 바람처럼 빠르다"라고 칭찬해 준다. 아빠한테서 받아보지 못한 배려를 받은 아이는 어색하면서도 행복해진다. 아주머니의 일을 돕고, 밤에는 찾아온 손님들의 놀이를 구경하기도 하면서 평화롭게 지나간다. 어느 날, 아저씨가 아이의 옷을 사러 ‘고리’에 가자고 한다. 왠지 킨셀라 아주머니는 서두르지 않다가 따라나선다. 시내에 도착해 아이에게 지폐를 주며 아이스크림을 사 먹으라고 한다.
(매사에 아이의 마음을 먼저 읽고 배려하는 말과 행동. 어떤 행동을 해도 너그럽게 받아주는 넉넉한 품이 정말 참 어른이란 이런 것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호들갑을 떨며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깊고 세심하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심이 전달된다.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무언가를 가르친다는 명목으로 늘 잔소리와 큰소리를 앞세웠던 행동이 부끄러워졌다.)
어느 날, 장례식에 따라갔다가 밀드러드 아주머니네 집에 잠깐 있게 되었을 때, 그 아주머니는 킨셀라 부부와는 다르게 수다스럽고, 지칠 만큼 곤란한 질문을 하고, 아이의 걸음을 기다려 주지 않는다. 어른의 여러 모습들이 그려진다. 밀드러드 아주머니는 킨셀라 부부에게 아들이 있었고, 그 아들이 죽었으며, 여태 아이가 입고 다녔던 옷이 죽은 아이의 옷이었다는 말을 한다.
(킨셀라 아주머니와 아저씨와 달리, 수선스럽게 지껄이는 낯선 아주머니를 아이는 혼란스러워했을 것 같다. 아빠가 아이를 맡기던 날, 아이의 옷 가방도 내려주지 않고 돌아가서 킨셀라 아주머니가 깨끗하게 보관되어 있던 옷을 입게 되었는데, 잘 대해주는지, 부부의 관계는 어떤지 시시콜콜한 호기심에 사로잡혀서 하지 않아도 될 말을 내뱉는 수치스러운 어른의 모습을 본다.)
그날 밤, 새 구두를 길들여야겠다며 킨셀라 아저씨가 아이의 손을 잡고 바닷가로 간다. 아빠가 한 번도 자기의 손을 잡아주지 않았다는 것을 안다. 손을 놔줬으면 싶다가도 이내 편안해진다. 아저씨는 “입 다물기 딱 좋은 기회를 놓쳐서 많은 것을 잃는 사람이 너무 많아”라는 말을 해 준다.
(모래밭을 뛰게 하고 발에 묻은 모래를 털어 신발을 신겨 주는 따스한 보살핌은 집에서는 받아보지 못한 지극한 환대의 감정에 주인공 아이도 구체적으로 어떤 마음인지 생각했을 것 같다. 아이를 보살피는 사람으로서, 아이의 잠재력을 키우고 편안함을 느낄 수 있도록 세심한 마음을 아끼지 않는 사람들이다. 부모는 어떠해야 하는지 되돌아보게 하는 책이다.)
여름이 끝나갈 무렵, 엄마에게서 편지가 온다. 개학이라 주말까지 데려다 달라는 내용이다.
“나는 그 자리에 선 채 불을 빤히 보면서 울지 않으려고 애쓴다. 울지 않으려고 애쓰는 건 정말 오랜만이고, 그래서 울음을 참는 게 세상에서 제일 힘든 일이라는 사실이 이제야 떠오른다.”(p79)
(행복했던 곳에서 다시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이 참기 어려울 만큼 슬펐을 거라 짐작된다. 늘 “아가”라고 불러주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자랑삼아 말해 주던 어른들. 너무 정이 든 킨셀라 아주머니와 아저씨와 헤어져야 한다는 이 부분에서 책을 읽는 나도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킨셀라 아주머니네 집에 오기 전, 평소 자신의 집에서는 자주 있었을 눈물을 참는 게 세상에서 제일 힘든 일이라는 것을 잊을 만큼 행복한 여름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저씨는 책을, 킨셀라 아주머니는 비누, 수건, 빗 등 물건을 하나하나 모으면서 아이와 함께 떠날 준비를 한다. 아이는 킨셀라 아주머니를 위해 혼자 우물에 물을 길으러 갔다가 우물에 빠진다. 감기 기운이 남은 상태라 아빠는 킨셀라 부부를 향해 잘 돌보지 못했다고 원망한다. 무슨 일이 있었냐고 아이를 다그친다. 아이는 절대로 말하지 않는다.
아이를 두고 돌아가는 아저씨의 차를 따라 달리는 아이. 아저씨의 품에 안긴다. 아빠가 지팡이를 들고 쫓아온다. 아이는 아저씨 등 뒤로 다가오는 아빠를 보며 자기를 자상하게 돌봐 준 사람들을 위해 비밀을 말하지 않겠다고 생각하면서 아저씨의 품에 안긴 채 꼭 잡고 놓지 않는다.
“아빠.” 내가 그에게 경고한다. 그를 부른다. “아빠.”
(아빠가 다가오고 있다고 알려주는 말 같기도 하고, 따뜻하게 자기를 보살펴 준 아저씨를 ‘아빠’라고 부르는 것으로 읽혔다. 먹먹한 결말. 할 수만 있다면 킨셀라 아주머니네 부부가 아이를 다시 데리고 가면 좋겠다. 아니, 집에 있었던 형제들도 그토록 따뜻한 사랑 속에 자랄 수 있다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