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의 내란 시도와 20-30 청년들의 폭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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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욱(인하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윤석열 대통령의 돌발적 비상계엄은 심각한 헌정위기를 낳았다. 이는 내재된 위기의 분출이자 새로운 위기의 확대재생산이기도 하다. 대통령 체포와 구속에 이어진 지지자들의 법원 난입 폭동은 섬뜩하고 불길하다.
윤석열 대통령은 주장하기를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비상계엄이며, 절박한 상황에서 대통령의 비상대권인 통치행위였다고 한다. 한국 정치에서 여야의 대립은 지난 총선 이후 더욱 가중되었다. 다수당인 야당의 대여 공세는 맹렬했으며 탄핵소추가 빈발하였다. 그러나 야당이 총선에서 2/3선에 육박하는 다수 의석을 확보한 결과를 상기할 필요가 있다.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가 교차로 실시되는 경우 국회의원 선거는 정부에 대한 중간평가로 이해된다. 대통령 임기가 채 반도 안되어 총선에서 참패를 한 것은 대통령에 대한 정치적 문책이었다. 대통령은 그때 사임을 해도 이상하지 않은 것이었다. 사임을 하지 않더라도 총선의 결과를 겸허히 수용하고 야당의 공세를 견뎌야 했다.
그러나 윤석열 대통령은 김여사의 추문, 채해병 사건 등 대통령의 권력 남용, 명태균 게이트, 의료 혼란 등 국정의 실패에 대하여 솔직하지 못하였다. 아마도 관련 특검 공세에 자신이 없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결국에는 특검법이 통과될 것이고, 수사가 진행되면 대통령의 범법 사실들이 명확해지고 종국에는 탄핵으로 이어질 것임을 우려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대통령은 야당의 공세에 대하여 일찍부터 대통령의 비상대권을 얘기했다고 한다. 군대라는 막강한 물리력에 위안과 유혹을 느꼈던 것으로 생각된다.
윤석열 대통령은 군을 동원하기 위해 남북 위기를 활용하였다. 정치투쟁에 이데올로기적 전선을 끌어들였다. 판문점선언과 9.19 군사합의를 폐기하여 남북 적대관계를 악화시켰다. 심지어 군에서 직접 무인기를 북파하여 북한을 자극하였고, 서해 NLL 인근에서 대규모 포 사격 훈련을 실시하여 2010년 연평도 포격과 같은 북한의 맞대응을 유도하였다. 야당 및 정부 비판 세력을 종북 좌익으로 규정하고, 나아가 미중의 대립 국면을 악용하고자 하였다. 대통령은 군내 친위조직을 구축하고 마침내 비상계엄을 강행하였다. 지금까지 드러난 바로는 여야를 막론 대통령에 반대하는 인사들은 모두 체포, 심지어 처단하고, 국회 자체를 폐지하고자 시도하였다.
소위 ‘부정선거론’이 비상계엄의 또 하나의 명분이 되었다. 윤 대통령이 과연 부정선거론을 진실로 믿었을까? 그보다는 국회와 야당 타격을 위한 쓸모에 주목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부정선거론은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위한 행동에 그럴듯한 근거가 될 것이었다. 그에 몰두하고 있는 극우 대중 세력의 동원 가능성이 큰 이점이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장악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부정선거 비슷한 조그마한 꼬투리라도 나온다면 ‘성공’일 것이었다.
이번 비상계엄은 대통령의 친위 쿠데타, 즉 내란행위였다. 대통령과 그 추종자들은 대통령의 통치행위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통치행위가 되기 위해서는 정당한 계엄이어야 한다. 헌법과 법률에 부합하는 계엄이어야 한다. 정당하고 합헌적인 계엄이라면 그에 수반된 절차적 위법 등은 통치행위로 면책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번 계엄은 노골적인 헌법 파괴의 친위 쿠데타였다. 주지하듯이 우리 헌법에서 계엄은 전시ㆍ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에만 발동할 수 있다. 그리고 행정과 사법을 대신할 수 있어도 국회를 대신할 수는 없다. 계엄 선포시 대통령은 국회에 통고해야 하며, 국회의 판단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대통령은 국회의장 및 여야 당대표를 체포하려 하였고, 국회 자체를 무력화시키고자 하였다.
윤석열 대통령은 야당의 횡포에 맞서는 최후의 방어 수단임을 말한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야당의 ‘화력’은 전시 사변 등의 비상사태가 아니라 총선의 결과였으며 대통령이 견뎌야 할 일이었다. 대통령에게는 여전히 거부권의 권한이 남아 있었고, 야당의 탄핵 ‘남용’은 헌법재판소의 심판으로 견제될 수 있는 것이었다. 만약에 참으로 야당의 정치공세가 부당한 권력남용이라고 판단했다면, 그리고 헌정 수호의 최후 수단을 생각했다면 그것은 비상계엄이 아니라 국민투표가 되어야 했다. 국민들에게 다시 한 번 심판을 구하고, 재신임을 구하는 방법을 취했어야 했다.
우리 헌법 제72조는 대통령은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에는 외교ㆍ국방ㆍ통일 기타 국가안위에 관한 중요정책을 국민투표에 붙일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물론 우리 헌법의 국민투표는 국가의 중요 정책에 대한 것(referendum)이어야 하며, 대통령의 재신임을 묻기 위한 것(plebiszit)이 되어서는 안된다. 이른바 ‘플레비시트’는 위헌적 행위로서 그 자체가 대통령 탄핵사유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일정한 국가 정책에 대통령의 신임을 결부하는 방식은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선거 제도 혹은 국회 운영이 문제라면 그에 대한 국민의 판단을 구하는 국민투표가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아가 헌법개정의 국민투표도 합헌적 방식의 대통령 신임투표가 될 수도 있다. 대통령의 개헌 제안은 국회 야당의 문턱을 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과정을 통하여 국민적 여론을 환기시킬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윤석열 대통령은 그러한 헌법적 용기를 보이지 않았다. 대신 대통령은 군대를 동원하여 국회를 제압하는 반헌법적 야만을 택하였다. 대통령의 진정한 관심은 헌법수호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그 자신과 김여사 일신의 안위였던 것이다. 어떻게든 관련 특검법을 막고자 한 의도였다고 생각한다.
더욱 끔찍한 것은 그러한 개인적 탐욕을 국가안보의 문제로 만들었다는 점이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윤대통령은 남북 대립과 위기를 격화시켰고, 이데올로기 십자군의 선봉을 자처하였다. 우리 사회 전통의 반북반중세력을 우군으로 삼고자 하였다. 60-70 세대 반공의 유훈을 체화한 이들의 자부심을 만족시켰다.
윤석열 대통령은 ‘자유민주주의’를 주문처럼 구호처럼 되뇌었다. 그러나 그의 자유민주주의는 자유와 공존, 평화와 인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윤 대통령의 자유민주주의는 북한의 위협에 대한 방어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자유민주주의는 북한의 정복을 위한 것이었고, 그를 위해 식민 제국주의 그리고 군산복합 군사주의와 결탁하는 것이었다. 그의 자유민주주의는 자유라는 외관의 근본주의(fundamentalism)였다. 흔히 얘기되는 ‘이슬람 근본주의’만 위험한 것이 아니다. 자유의 전파, 민주주의의 확산, 그 강제적 개입을 말하는 근본주의도 위험하다.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은 일단 실패하였다. 북한을 향한 호전적 결의, 국군의 날 위용의 과시, 친위 군부대 동원 등에는 성공했지만, 일선 지휘관들, 특히 일반 사병들의 진심을 얻는 데에 실패하였다. 비록 병력 동원에 이용되었지만, 일선 지휘관들, 그리고 일반 사병들은 차마 그들의 치명적 무기를 시민들에게, 문민 정치인들에게, 우리 민주 헌정에 겨눌 수 없었다. 그들은 군인의 제복을 입었지만, 그 이전에 민주 시민들이었다. 그들은 군사 무장을 하였지만, 그들의 용기는 민주헌법을 향하였다. 이러한 일선 군인들의 헌법 양심적 거부는 국민 개개인들이 헌법 수호의 주권자임을 각인시킨 우리 헌정사의 위대한 성취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윤석열 대통령은 청년들의 극우적 충동을 사는 데에 성공하였다. 20-30의 청년 세대, 암울한 시대에 억눌리고, 어두운 미래에 좌절한 그들의 억하심정을 붙잡았다. 적과 동지의 음험한 구조 속에 청년들의 피해의식을 적개심으로 치환시키는 데 성공했다. 바야흐로 반공, 반북, 반중의 젊은 파시즘이 태동하고 있다. 60-70 세대 우파가 실제적 위협에 대한 방어기제였다면 지금 20-30 세대 우파는 과장된 공포에 기인한 공격기제에 가깝다. 그러나 종종 환상은 현실보다 더욱 강력하다.
누가 역사는 반복된다고 말했던가. 우리 파시즘의 고통의 역사가 되풀이될 것인가. 파시즘은 증오를 먹고 산다. 그 증오는 정치적 적들에 그치지 않고, 모든 연약한 이들을 제물로 삼을 수도 있다. 나는 윤대통령의 비상계엄 시도보다 이번 법원 폭동에서 보인 20-30 청년들의 전도된 호전성이 더욱 두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