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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문규 미술관 원문보기 글쓴이: 미술관지기
오페라 opera
가수의 노래를 중심으로 작품 전체가 표현되는 극. 가극(歌劇)이라고도 한다. 어원은 라틴어의 < opus(작품)>의 복수형이다. 초창기에는 음악에 의한 극(dramma in musica) 또는 음악을 위한 극(dramma per musica)이라고 했으나 뒤에 음악에 의한 오페라(opera in musica)라고 하다가 줄여서 오페라라고 하였다. 오페라의 음악은 독창·합창·관현악 등으로 구성되며, 등장인물의 대사가 그대로 가사가 되어 극이 전개되어 나간다. 따라서 오페라의 상연은 연주를 포함하는 음악적 요소 외에 문학적 요소(대본·가사 등), 미술적 요소(장치·의상·조명 등), 무용적 요소, 연극적 요소(연출·연기 등) 등을 포함하여 종합예술적인 성격을 지닌다. 음악 표현의 중심을 이루는 가창은 각 성역(聲域)의 독창자에 의한 독창과 중창, 그리고 군중의 역을 맡는 합창이 더해져 진행된다. 나폴리파(派) 오페라 이후 근대에 이르는 주류의 오페라에서 독창자의 노래는 선율의 아름다움을 주로 한 각종 아리아(詠唱)와 말하듯이 노래하는 레시터티브(敍唱)로 나뉘는데, 아리아는 하나하나 완결된 독창곡의 형식을 취한다. 이러한 독창·중창 등에는 진행 순서대로 번호가 붙여져 있는 것이 많아 <번호 오페라>라고도 한다. 오페라에서 관현악은 목소리의 반주, 등장인물의 성격·행동·감정·심리 등의 묘사, 무대 분위기 조성 등의 기능을 가진다. 또 첫머리의 서곡이나 전주곡, 혹은 간주곡 등 관현악단의 연주부분도 적지 않다.
0오페라는 16세기에 고대 그리스의 비극을 부흥시키고자 한 이탈리아 피렌체의 문학가·음악가 그룹인 <카메라타>의 창작활동 결과 발생했다. 그들은 등장인물의 대사를 통주저음(通奏低音)으로 반주해서 노래하는 모노디 양식을 오페라의 주체로 삼았는데, 그 최초의 시도는 O. 리누치니의 대본과 J. 페리의 작곡에 의한 《다프네(1594)》였다. 이 작품은 현존하지 않으며, 리누치니가 대본을 쓰고 페리와 G. 카치니가 작곡한 《에우리디체(1600)》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오페라이다. 이것은 그리스 신화의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이야기를 제재로 하여, 반주가 붙은 모노디를 중심으로 마드리걸풍의 합창 등을 덧붙인 형태로 씌어졌으며, 아직도 르네상스시대 목가극의 분위기가 남아 있었다.
0피렌체에서 시작된 오페라는 곧 이탈리아 각지로 퍼졌고 많은 작품이 나왔다. 그 중에서 1607년 만토바에서 초연된 C. 몬테베르디의 《오르페오》는 뛰어난 음악기법과 극적인 구성에 의해서 씌어진 최초의 본격적인 오페라로서 중요하다. 30년대가 되자 로마에서 S. 란디·V. 마초키 등에 의하여 주로 종교적 제재에 바탕을 둔 작품이 상연되었다. 37년 베네치아에 사상 최초의 공개 오페라 극장이 개장되었고, 잇따라 각지에 오페라극장이 들어서면서 그 뒤 17세기 후반에 걸쳐 베네치아가 오페라의 중심지로서 변영하게 된다. 초기 베네치아 오페라 가운데 특히 중요한 작품으로 인간의 성격 묘사에 뛰어난 역사극 몬테베르디의 《포페아의 대관(戴冠, 1642)》이 있다. 뒤를 이어 그의 제자 F. 카발리와 P.A. 체스티 등이 기계장치에 의한 스펙터클성을 중시한 어느 계층이나 즐길 수 있는 오페라를 썼다. 또한 가수의 뛰어난 가창을 좋아했으며, 특히 거세가수 카스트라토가 인기를 끌었다. 이탈리아의 다른 여러 도시에서도 이러한 베네치아 오페라의 특징적 성격들을 공통적으로 볼 수 있었으나, 17세기 말엽부터 오페라의 중심지가 나폴리로 옮겨감으로써 음악 양식도 변화해갔다. 이러한 나폴리파 오페라의 확립에 크게 공헌한 사람이 A. 스카를라티이다. 스카를라티는 급-완-급의 이탈리아식 서곡 형태를 완성했는데, 그를 비롯한 나폴리파의 작곡자들은 레시터티브와 아리아의 분리를 추진하여 다 카포 아리아의 형태를 확립하였다. 또 18세기에는 종래의 오페라 막간에 보여주던 음악희극이 오페라 부파로서 독립했는데, 그 계기가 된 것은 G.B. 페르골레시의 《마님이 된 하녀(1733)》였다. 그 뒤로 오페라 부파에 대하여 종래의 전통적 오페라는 오페라 세리아라고 부르게 되었다.
0프랑스에서는 처음에 이탈리아의 오페라가 수입되었으나, 그다지 환영을 받지 못하였다. 그러나 17세기 후반에 이탈리아 출신의 J.B. 륄리가 프랑스 특유의 고전비극이나 발레 등의 요소를 잘 받아들이고, 또 프랑스어의 억양에 맞춘 낭창(朗唱)을 만들어 궁정의 취미에 맞는 음악비극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함으로써 프랑스의 독자적인 오페라가 확립되었다. 뒤이어 발레 등을 더욱 확대한 오페라 발레의 형식을 전개하여, 18세기 전반에는 J.P. 라모가 《카스토흐와 폴뤽스(1737)》를 비롯한 많은 작품을 상연하여 전통적 프랑스오페라를 더욱 발전시켰다. 영국에서는 16세기 이래 독자적 음악극인 가면극이 줄곧 상연되어왔는데, 여기에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영향이 더해짐으로써 J. 블로와 H. 퍼셀 등이 영국 오페라를 형성, 발전시켰다. 그러나 곧 이탈리아오페라가 지배하여 G.F. 헨델과 이탈리아인 작곡가들의 이탈리아 오페라가 성행하였다. 그러나 민중적인 발라드 오페라가 유행함으로써 이탈리아 오페라는 쇠퇴하였다. 독일에서는 17세기 초에 이탈리아어 대본을 독일어역으로 작곡한 H. 쉬츠의 《다프네(1627)》가 나왔지만, 그 뒤 각지의 궁정에서 이탈리아 오페라가 유행하여 이탈리아인 작곡가들의 활동이 지배적이었다. 한편 1678년 북독일의 함부르크에서 베네치아 다음으로 공개 오페라극장이 개장되어 R. 카이저나 G.P. 텔레만 등에 의해서 함부르크 오페라라고 하는 독일어에 의한 오페라가 만들어졌지만, 1738년에 이 극장이 폐쇄됨과 동시에 다시 이탈리아 오페라가 성행하였다. 에스파냐에서는 17세기에 사르수엘라라고 하는 음악극이 번영하였고, 막간극에서 희가극인 토나디야가 독립하여 18세기 후반에 많이 상연되었다.
1818세기의 중심적인 존재였던 나폴리파 오페라는 아리아 중심의 성악 기교를 과시하는 폐해를 보이고 있었지만 극으로서 다시 구성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그러한 오페라개혁의 선구가 된 것은 N. 욤멜리와 T. 트라에타였으며 뒤이어 C.W. 글루크가 대본작가인 R. 칼차비지와 협력하여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1762)》 등을 발표함으로써 개혁을 추진하였다. 한편 18세기 중엽부터 각지에서 시민계급의 생활감정을 파악한 희극적 오페라가 성행하였다. 이탈리아의 오페라 부파는 B. 갈루피·G. 파이젤로·D. 치마로자 등의 활약으로 오페라 세리아를 능가하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 프랑스에서는 왕비파(王妃派)의 이탈리아 오페라 부파 대 국왕파(國王派)의 프랑스 궁정오페라라는 형태로 예술 논쟁이 일어났으며(뷔퐁논쟁), 이것을 계기로 J.J. 루소를 비롯하여 F.A.D. 필리도르·A.E. 그레트리 등에 의해서 오페라 코믹이 전개되었다. 또 독일에서는 민족적인 징슈필이 J.A. 힐러나 K.D. 디터스도르프 등에 의해서 성행하였다. 이러한 18세기 오페라의 여러 분야에서 독자적인 걸작을 남긴 사람이 W.A. 모차르트였다. 오페라 세리아도 몇 작품 썼지만, 가장 재능을 발휘한 것은 희극적 오페라로서, 오페라 부파의 형태에 의한 《피가로의 결혼(1786)》 《돈 조반니(1787)》 《코시 판 투테(1790)》가 있고 징슈필의 형태로 쓴 《마적(魔笛, 1791)》 등이 있다.
1919세기에 들어와서도 이탈리아에서는 18세기 이래의 전통적 형식이 계승되어 《세빌랴의 이발사(1816)》 등의 오페라 부파로 알려져 있는 G.A. 로시니, 《사랑의 묘약(1832)》 《람메르무어의 루치아(1833)》 등을 쓴 G. 도니체티, 《노르마(1831)》 등 오페라 세리아만을 남긴 V. 벨리니 등이 활동하였다. 그들은 이탈리아에서 전개되어온 아름답고 화려한 목소리로 노래하는 벨칸토 창법을 정점으로 끌어올려 벨칸토 오페라 시대를 이룩했다. 19세기 중엽 이후로는 전통적인 이탈리아 오페라를 극적 표현력이 넘치는 완성된 예술품으로 승화시킨 G. 베르디가 《리골레토(1851)》 《라 트라비아타(1853)》 《아이다(1871)》 《오텔로(1884)》 《팔스타프(1893)》 등의 작품을 썼다. 19세기 말에는 문학의 사실주의운동에 영향을 받아 베리스모 오페라가 나타나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를 쓴 P. 마스카니, 《팔리아치》를 쓴 R. 레온카발로 등이 활동하였다.
1919세기 전반 유럽의 오페라 중심 시장이 된 곳은 파리이다. 여기서는 L. 케루비니 등 이탈리아인 작곡가의 활동 이후 그랜드 오페라가 주로 상연되었는데, 그 중심적 인물은 독일 출생의 G. 마이어베어였다. 한편으로 18세기 이래의 오페라 코미크도 성행해 L.F.M. 오베르 등 많은 작곡가가 활동하였다. 19세기 중엽 이후 오페라 코미크는 희극적인 것과 서정적인 것으로 나뉘었다. 희극적인 것은 오페라 부프 또는 오페레타라고 불렀는데, 대표적 작곡가로는 《천국과 지옥(1858)》으로 잘 알려진 J. 오펜바흐가 있다. 서정적인 것은 오페라 리리크라고도 하였으며, C.F. 구노·C.L.A. 토마 등이 시도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중요한 작품은 G. 비제의 《카르멘(1875)》이다. 또 《트로이의 사람들(1856∼58)》 등으로 독자적인 작풍을 이룩한 L.H. 베를리오즈의 오페라도 특기할 만하다.
19독일에서는 K.M. 베버의 《마탄의 사수(1821)》가 등장함으로써 독일 낭만주의 오페라가 확립되었다. 그 뒤 A. 로르칭·O.C.E. 니콜라이 등이 나왔는데, 19세기의 중엽 이후 W.R. 바그너에 의하여 새로운 독일 오페라가 나왔다. 바그너는 《탄호이저(1845)》 《로엔그린(1850)》에서 낭만주의 오페라의 정점을 이루었고, 그 뒤 《트리스탄과 이졸데(1865)》 《니벨룽겐의 반지(4부작, 1876년 전곡 초연)》 등으로 종합예술작품으로서 독창적인 음악극을 만들어냈다. 바그너는 희곡과 음악이 유기적으로 결합된 극의 창조를 지향하여 스스로 대본을 쓰고, 또 극의 통일성 확보를 위하여 극중의 인물·사물·이념 등에 일정한 음악적 위기를 부여한다는 라이트모티브(示導動機) 수법을 썼다. 또한 극의 계속성을 유지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조성(調性)을 바꿔 나가는 무한선율의 수법을 도입함으로써 신비하고도 관능적인 세계를 만들어냈다. 바그너의 작품은 19세기 후반의 유럽 음악계 전체에 큰 영향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문학계와 철학계에도 파문을 던졌다. 한편 19세기 후반에 민중적인 오페레타가 빈에서 성행하여 J. 슈트라우스 2세 등이 활약하여 20세기의 F. 레하르 등으로 계승되었다.
019세기에는 민족주의적 오페라가 등장했는데, 그 선구가 된 것은 러시아로서 M.I. 글린카·M.P. 무소르크스키·A.F. 보로딘·N.A. 림스키코르사코프 등이 민족주의적인 작품을 발표하였다. 그 중에서도 무소르크스키의 《보리스 고두노프(1874)》가 유명하다. 또 서유럽의 음악을 터득한 P.I. 차이코프스키의 작품도 빠뜨릴 수 없다. 그 밖에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B. 스메타나가 《팔려간 신부(1866)》 등의 민족주의 오페라를 썼으며, 20세기에 걸쳐서는 에스파냐에서 M. 팔랴 등에 의한 활동이 있었다.
20바그너의 출현으로 정점에 달한 독일의 오페라는 20세기에 들어와 갖가지 경향을 띠게 되었다. 먼저 바그너의 영향을 받은 R. 슈트라우스는 초기에 강렬한 관능에 넘친 낭만적 오페라를 썼지만 《장미의 기사(1911)》 이후 신고전주의적 경향을 보였다. 12음기법에 의한 오페라를 쓴 A. 쇤베르크의 제자 A. 베르크는 표현주의적인 작품 《보체크(1925)》와 《룰루(1937)》로 20세기 오페라의 한 정점을 이루었다. 또 P. 힌데미트나 K. 바일 등의 활동도 주목할 만하다. 프랑스에서는 C.A. 드뷔시의 《펠레아스와 멜리잔드(1902)》가 나옴으로써 20세기의 막이 열렸는데, 독특한 성격을 지닌 이 오페라를 직접 이어받은 작품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M.J. 라벨을 비롯하여 D. 미요·A. 오네게르 등이 각기 개성적인 작품을 잇따라 발표했다. 이탈리아에서는 19세기 말에 베리스모 오페라의 영향을 받은 G. 푸치니가 20세기에 들어와서 《토스카(1900)》 《나비부인(1904)》 등의 서정적인 오페라를 발표하고, 그 뒤 F.B. 부조니·G.F. 말리피에로 등이 여러 가지 수법에 의한 작품을 썼다. 러시아 태생의 I.F. 스트라빈스키, 소련의 S.S. 프로코피예프·D.D. 쇼스타코비치, 체코의 L. 야나체크, 헝가리의 B. 바르토크, 미국의 G. 거슈윈 등의 작품도 주목받았다.
0E.B. 브리튼, 미국에서 활동하는 이탈리아 출신의 G.C. 메노티, 독일의 H.W. 헨체·G.E. 아이넴 등의 활동이 눈에 띈다. 최근에 와서는 독일의 B.A. 치머만 등의 작품을 제외하고는 전체적으로 새로운 오페라에 대한 창작 의욕이 쇠퇴하고 있다. 현대의 각지에 있는 오페라극장이 레퍼토리의 중심으로 삼고 있는 것은 모차르트 이후의 평가가 고정된 작품이며, 현대의 오페라 활동으로서 주목받고 있는 것은 지휘자나 가수들의 연주, 새로운 연출 등에 대한 평가이다.
0한국에서 오페라는 1948년 1월 G.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椿姬)》를 이인선(李寅善)의 국제오페라사에서 공연한 것이 시초이다. 49년 5월에는 C.F. 구노의 작품 《파우스트》의 일부가 한규동(韓昑)을 중심으로 한 한불협회(韓佛協會)에 의해서 공연되었고, 50년 4월에는 G. 비제의 《카르멘》이 이인선의 국제오페라사에 의해서 공연되었다. 이 《파우스트》와 《카르멘》의 공연은 한국오페라를 진흥시키는 데 큰 구실을 하였다. 한편 50년 한국 최초의 창작오페라인 현제명(玄濟明)의 《춘향전》이 서울 시민회관에서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주최로 공연되어 큰 호응을 얻었다. 그 뒤에도 계속 창작오페라가 나왔는데 51년 김대현(金大賢)의 《콩쥐 팥쥐》, 53년 《사랑의 신곡》, 54년 현제명의 《왕자호동》 등이다. 55년에는 한국교향악협회 주최로 비제의 《카르멘》이 서울시공관(市公館)에서 공연되었고, 58년 5월 베르디의 《리골레토》가 초연되었으며, 같은 해 10월에는 G. 푸치니의 《라 토스카》가 국립극장에서 한국오페라단 주최로 초연되었다. 59년 10월 푸치니의 《라 보엠》이 공연되었고, 11월 국립극장과 한국오페라단 공동으로 《카르멘》이 초연되었다. 60년에는 베르디의 《일 트로바토레》 《오텔로》, 61년 6월 이화여자대학교 음악대학 주최로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체》가 초연되었으며, 12월 프리마오페라단에 의해 《마르타》가 초연되었다. 62년 3월 G.B. 페르골레시의 《하녀 마님》과 G.C. 메노티의 《전화》가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주최로 공연되면서 대학오페라가 본격적인 궤도에 오르기 시작하였다. 그 밖에도 서울오페라단·프리마오페라단·대한오페라단 등이 창단되어 몇 편씩의 오페라를 공연하였고, 지방에서도 오페라단이 창단되어 활동하였으며, 각 대학에서도 오페라를 공연하였다. 그러나 아직은 국립오페라단과 김자경오페라단에 의한 공연이 주가 되고 있다. 또한 국립오페라단·서울시립오페라단·국제오페라단 등에서 주로 외국의 작품들을 레퍼토리로 하여왔는데, 근래에는 국내 창작오페라를 발전시키기 위하여 국내 작곡가의 작품을 공연하는 현상이 점차 두드러지고 있다. 한국인에 의해서 공연된 오페라 작품은 약 60여 편, 공연횟수는 400여 회에 달한다(1984). 이 가운데 한국 작곡가에 의한 창작오페라가 12편, 공연이 80여 회이다. 국내 오페라단의 공연 이외에도 외국 오페라단의 내한공연과 외국인 성악가와 한국인 성악가가 합동으로 공연하는 경우도 있다.
아리아 〔이〕 aria
오페라·오라토리오·칸타타 등 대규모이고 극적인 작품 속의 독창가곡. 음악용어로서 나타난 것은 16세기부터였고 원래는 유절적인 형식을 가지는 곡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오페라·오라토리오·칸타타 등 대규모이고 극적인 작품 속의 독창가곡. 음악용어로서 나타난 것은 16세기부터였고 원래는 유절적(有節的)인 형식을 가지는 곡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오페라의 독창곡을 나타내는 가장 초기의 예는 C. 몬테베르디의 《오르페우스(오르페오, 1607)》 제 2 막 첫 부분에서 볼 수 있는데 17, 18세기에는 변주곡의 주제나 모음곡의 완서악장(緩徐樂章) 등을 가리키는 일도 있었다. J.S. 바흐의 《골드베르크변주곡》의 주제나 관현악모음곡 제 3 번인 속칭 《G선상의 아리아》는 이러한 예이다. 아리아는 일반적으로 레시터티브와 짝을 이루는데 가수는 레시터티브로서 이야기의 상황을 설명한 뒤 아리아로서 자신의 심정을 토로한다. 아리아의 형식은 17세기 중엽에 정형화되어 ABA의 구조를 가진다. 이것을 다 카포 아리아(da capo aria)라고 한다. 18세기 오페라가 번성했던 나폴리에서는 벨 칸토창법의 발달과 함께 가수가 자신의 기교를 과시하기 위하여 즉흥적으로 꾸밈음을 붙이기도 하고, 음을 자유로이 바꾸기도 하여 노래하였다. 18세기 중엽부터 다 카포형식이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아리아의 형식은 다양화되었고, 19세기 이탈리아에서는 18세기 이래의 콜로라투라를 중심으로 한 아리아가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독일에서는 W.R. 바그너의 악극이 생겨나게 되어 아리아와 레시터티브는 융화하여 단락감 없는 무한선율로 모습을 바꾸었으며 M.P. 무소르그스키·C.A. 드뷔시 이후 아리아는 거의 사라졌다.
프리마돈나 〔이〕 prima donna
오페라 제1 여가수 또는 주역을 담당한 여가수. 인기있는 여성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18세기 오페라에서는 기본 역할을 설정하는 데 있어 프리마돈나와 세콘다돈나가 중요시되었다. 상대역 남자는 프리모우오모라고 한다. 프리마돈나는 가장 중요한 소프라노가수이고, 프리모우오모는 테너가수인 경우가 많다.
오페라 제1 여가수 또는 주역을 담당한 여가수. 인기있는 여성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18세기 오페라에서는 기본 역할을 설정하는 데 있어 프리마돈나와 세콘다돈나(seconda donna;제 2 여성)가 중요시되었다. 상대역 남자는 프리모우오모(primo uomo)라고 한다. 프리마돈나는 가장 중요한 소프라노가수이고, 프리모우오모는 테너가수인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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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의 종류
오페라에는 대략 다음과 같은 종류가 있습니다. 물론 학자에 따라서는 다른 견해가 있을 수 있겠지만 가장 보편적이라고 생각되어지는 분류를 나름대로 정리 해 보았습니다.
1.오페라 세리아 ( Opera seria ; 正歌劇 )
18세기 이탈리아 오페라로서, 레시타티브와 아리아를 중히 여기며,중창이나 합창은 간혹 사용한다.소재로는 신화나 영웅적인테마를 주로 사용하는 오페라이다.
2.그랜드 오페라 ( Grand Opera )
17세기초 이탈리아의 오페라 세리아에 대해 프랑스에서 나타난 대 가극이다. 이것은 19세기 프랑스의 특징 있는 양식으로, 서사적이고 역사적인 성질의 비극을 테마로 한다. 합창을 중히 다루고, 발레를 넣어 프랑스사람들의 기호에 알맞게 했다.
3.오페라 부파 ( Opera buffa ; 喜歌劇 )
18세기초 이탈리아에서 생긴 희가극으로서, 차차 유럽 여러나라에 퍼졌는데 19세기 중엽까지 성행하였다. 소재는 서민생활이나 인정미담을 주로 하였고, 그 취재나 형식을 확립한 것은 페르골레지였다. 모차르트의 "여자는 모두 이런 것"과 롯시니의 "세빌리아의 이발사"등이 이에 속한다.
4.오페라 부프 ( Opera bouffe )
프랑스의 희가극으로, 어원적으로 오페라 부파와 비슷한 점이 있으나 양자사이에는 다소 차이가 있다. 오페레타와 비슷한 가벼운 음악희극으로, 대화의 부분에 대사를 사용한다. 뒤니(Duni)가 창시자이다.
5.오페라 코미크 ( Opera comique )
희가극의 일종으로, 음악사이에 대화와 독백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코미크라 하지만 줄거리가 희극적이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이는 18세기 후반,프랑스에서 생긴 것으로 처음에는 희극적이었지만, 후에는 상관없이 대사가 있는 오페라가 되었다. "카르멘"이나 "마농" 등의 오페라를 오페라 코미크라 부르는 작가들이 있다.
6.오페레타 (Operetta ; 輕歌劇 )
오페레타를 경가극이라고도 하며, 극적인 진행에 있어서 대사를 동반한다. 여기에 노래와 무용이 들어 가기는 해도, 음악적인 내용은 낮은 편이며 또한 오케스트라도 소규모적이다. 이러한 작품의 예로는 요한시트라우스의 "집시의 남작", "박쥐"등이 유명하며, 밀뢰커의 "거지학생"등이 이에 속한다.
오페라의 개혁
(가) 오페라 세리아의 개혁
파르마에서 프랑스 오페라가 보여준 현실이 메타스타지오의 미학적 주장에 대해 다시 따져묻는 촉매의 역할을 한다. 메타스타지오의 주장에 대한 추궁은 이미 1740년 이후 이탈리아의 여러 작곡가, 비평가에 의해 행해지고 있었다. 감독관 뒤 틸로 du Tillot가 파르마의 프랑스 궁전으로 두니를 고용해 파바르의 대본을 주었고, 이어서 골도니를 초청하여 두니를 위해 <파멜라>를 번안시켰다. 1757년에 이미 그는 루벨이나 프랑쾨르, 그리고 라모의 오페라를 상연시켰는데 이들 작품은 이탈리아어로 번역되고, 이어서 같은 착상을 바탕으로 한 오리지널한 번안도 생겨났다. 그런데 몇 년 전의 요멜리와 마찬가지로 트라에타도 이 부흥의 필요성을 예언하고 있었다.
트라에타(1727-79)나 요멜리(1714-74) 외에도 이탈리아의 몇 사람의 음악가들이 이 부흥에 나서게 되었다. P. A. 굴리엘미, 안포시, 사키니 및 피치니, 다비데 페레스(1710/11-78), 그리고 페르골레지의 뛰어난 제자의 한 사람이며 특히 오케스트라의 역할을 중시한 도메니코 테라델라스(1713-51) 등의 이름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테라델라스의 <벨레로폰테 Bellerofonte>(1747)에서는 이미 크레셴도의 수법이 보인다. 잔 프란체스코 디 마요 Gian Francesco Di Majo(1732-70)는 나폴리 사람이며 종교음악과 오페라 세리아를 작곡가로서, 그 작품은 빈에서도 연주되었다. 그의 양식은 글룩과 모짜르트 사이에 다리를 놓았다고 할 수 있다.
그 밖에 몇 가지 혁신이 이 오페라 세리아의 개혁을 보충하게 된다. 이 개혁은 청중에 의해 계속 거부된 구성들로서, 결말에서의 파국의 재도입, 드라마 세리아의 2막 구성법, 그리고 특히 전통이 되고 있는 솔리스트의 아리아의 연속을 대신하여 2중창, 3중창, 앙상블 및 합창을 사용하는 것 등이다. 이러한 몇 개의 중창이 잘 통합된 작품으로는 예를 들면 트라에타의 <안티고네>(1772 페테스부르크)가 있다. 여기서 트라에타는 눈부신 기교를 가지고 대화 형식의 레치타티보 및 2부 또는 3부 형식의 아리아를 다루고 있다.
크리스토프 빌리발트 글루크
(나)글룩의 개혁
글룩(Gluck, C. W. 1714∼1787)은 이탈리아 오페라에 불만을 품고 오페라를 개혁하려고 했다. 그는 처음에 이탈리아 양식의 오페라를 작곡하였고 얼마 후, 프랑스풍의 오페라 양식을 배웠다. 거기에 덧붙여 독일것인 특성인 관현악법을 한데 어울려 첨가시켜 아주 색다른 국제적인 오페라를 창안하였보다는 극이 중심이 되어 음악은 극에 종속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1762년 오페라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체』를 빈에서 발표하여 근데 오페라의 첫발을 밟은 그는, 1767년 빈에서 오페라 『알체스테(Alceste)』로 그가 생각하는 개혁의 방향을 확고히 하였다. 그러나 그의 이념이 실현되기는 모짜르트·베토벤·베버를 거쳐 19세기 중엽 바그너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이를 구현시켰다
밀라노에서 배운 독일인 글룩은 이미 1741년에 메타스타지오의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이윽고 그 <시끄러운 독자성> 때문에 비난을 받았다. 이탈리아 양식에 길들어 있었으나 바로 오케스트라와 독일 취미의 전형인 고성음의 콜로라투라에 대한 관심을 나타낸 글룩은 빈에 파견되어 그곳에서 파바르의 텍스트에, 프랑스 오페라 코미크의 음악가들과는 아주 다른 모양의 스케일이 큰 음악을 붙였다. 또 그는 빈에서 1761년에 라니에로 데 칼차비지(1714-95)를 만났다. 이 아르카디아의 시인은 파리에서 부풍 논쟁을 체험하고 그런 종류의 문학 논쟁을 야유한 풍자적 작품 라 륄리아데를 발표하고 있었다.
1755년에는 메타스타지오를 찬양하는 에세이를 쓰고(20년 뒤에 그의 시구의 끊는 법만을 비판한다), 또 카사노바와 함께 수상쩍은 복권판매소를 경영한 후 파리에서 추방된 칼차비지는 빈에서 트라에타의 오페라를 통하여 개혁파의 움직임을 알았다. 그는 이미 알가로티 Algarotti가 요약해 놓은 규범을 자기가 쓴 것처럼 보여서 고스란히 그대로 유명한 알세스트 서문으로서 조심스럽게도 글룩으로 하여금 서명하게 한 것이다. 칼차비지는 글룩을 이상적인 협력자로 찾아냈으며 그들은 함께 가수의 남용에 맹렬하게 반대했고 발레나 무대장치, 합창에 붙일 중요성 등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두 사람의 공동작품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1762)의 중요한 장점은 이야기에서 조역을 모두 배제하고 지옥의 장면에서는 독창과 합창 및 시각적 효과를 완전히 상호 침투시킴으로써 성공을 거두었다.
(다) 드라마 지오코소와 오페라 세미세리아
18세기에 있어서의 오페라 세리아에 대한 오페라 부파의 승리는 등장인물의 자연스러움에 따른다고 여겨졌다. 멋있고도 비장한 새로운 양식은 거드름을 피우는 비극의 영웅보다 희극적인 마을 사람이나 후작에게 잘 어울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욱 중요한 것은 그 구성의 유연성과 다양성이 낡아 빠진 오페라 세리아의 굳어버린 형식을 이겨냈다는 점이다. 콜로라투라에 의한 아리아나 카스트라토가 서정적 희극에서 시민권을 얻게 되자 순식간에 귀족의 관중까지도 중창이나 발랄한 피날레로 더욱 매력이 넘치는 이 형식을 좋아하게 된다.
<드라마daram>와 <유쾌한giocoso>이라는 두 형용어의 대립성을 강조하는 것은 잘못이다. 드라마라는 말은 이탈리아어에서는 어떠한 비극적인 뜻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먼저 문학적 야망이나 등장인물의 사회적 신분을 강조하고 귀족에게는 아직 믿을 수 없는 것으로 비치고 있던 오페라 부파보다도 높은 품위를 나타내려고 한 대본이 드라마라고 정의되었다. 그러나 오페라 부파가 유산으로 남긴 것은 레치타티보 세코와 중창을 포함하는 그 구성이었다. 그 결과 오페라 부파라는 용어는 총칭으로써 오랫동안 코메디나 드라마 지오코소, 오페라 세미세리아에 적용되었다. 그러나 1789년의 파이지엘로의 <니나>를 모델로서 정의되는 오페라 세미세리아라는 장르는 특별한 사회적 문맥의 뜻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이 새로운 나폴리 양식의 가장 훌륭한 대표자는 조반니 파이지엘로(1740-1816)와 도메니코 치마로사(1749-1801)이다. 이 두 사람은 모두 남부 출신으로 오페라 세리아와 기악 작곡의 교육을 받았다. 또 두 사람 모두 빈과 페테스부르크에 초빙되었다. <세빌리아의 이발사>(1782 페테스부르크)와 <라 몰리나라>(1788)로 오늘날까지 이름높은 파이지엘로는 <니나 또는 사랑에 의한 광기>에 의하여 광기의 장면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만들어내고 오페라 세리아 <페드라 Fedra>(1788)에서는 2막 구성법에 동조하였으며, 칼차비지의 대본에 따른 <엘프리다 Elfrida>(1792 나폴리)에서는 최초로 비극적 결말을 가지는 중세극을 작곡했다. 또한 카스티 Casti 신부의 대본에 따른 베네치아의 <테오도로 왕>(1784 빈)에 의하여 에로이코미코(영웅 희극)의 장르에서 그 자신의 최고의 명성을 얻었다. 치마로사는 오늘날 파아지엘로보다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의 이름도 코메디에 이어져 있다. 그 하나인 <비밀 결혼>(1792 빈)은 실제로는 멜로드라마(즉 오페라)라는 제목이 붙여졌고 그 구성에 매우 가까운 작품이다.
그러나 오페라의 활동이 가장 화려하게 전개된 것은 모짜르트가 있었던 빈에서였다. 최고의 시인과 음악가가 빈에 모여 서로 대립하고 표절했던 것이다. 그리고 <연극 속의 극>이라는 피란델로를 앞선 듯한 미학적 유희에 열중하였다. 이 연극 속의 연극이라는 구성은 모짜르트나 치마로사, 그밖의 많은 흥행사들에게 착상을 주고 마침내 1814년에는 로마니 Romani와 롯시니에 의한 매우 해학적인 작품 이탈리아의 터키인이 되어 열매를 맺게 된다. 칼차비지는 1769년에 플로리안 L. 가스만(1729-74)을 위하여 <오페라 세리아 L'opera seria>를 썼는데 거기에서 지배인은 이름이 파산(破産), 시인은 광기(狂氣), 카스트라토는 리토르넬로, 그리고 프리마돈나는 빗나간 사람이었다.
이 놀이는 다시 콜텔리니나 카스티 신부(1724-1803)에 의해서 발전된다. 카스티 신부는 <음악이 첫째, 말은 둘째 Prima la musica e poi le parole>(1786)를 썼으며 안토니오 살리에리(1750-1825)가 작곡했다. 모짜르트의 맞수이자 뛰어난 기악 작곡가이기도 했던 살리에리는 1778년에 밀라노 스칼라 극장의 낙성식을 위해서 <발견된 에우로파>를 썼고, 이어 파리에서 글룩의 뒤를 잇고 보마르셰의 <타라르>(1787)에 작곡했으며 나아가 셰익스피어의 <팔스타프>(1799 빈)에 작곡했다. 살리에리는 다 폰테의 협력자의 한 사람이기도 했다. 다 폰테는 모짜르트나 마르틴 이 솔레르(1754-1806), 스토라스 등의 대본을 쓴 인물이지만 당시의 가장 독창적인 오페라 시인의 하나인 조반니 베르타티 Giovanni Bertati(1735-1815)와 대립하여 그의 <비밀 결혼>을 자기 작품이라고 하는가 하면 <석상(石像)의 손님 Convitato di pietra>으로부터 <돈 조반니>를 위해서 적지 않게 차용하기도 했다. <석상의 손님>은 1787년에 베르타티가 주제페 가차니가(1743-1818)를 위해서 썼던 대본이다.
내용출처 : [인터넷] http://usoc.snu.ac.kr/lecture/ch-12/12-99m.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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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이탈리아의 오페라
17세기 이탈리아의 오페라의 변천은 로마의 오페라, 베네치아의 오페라, 나폴리의 오페라로 3단계로 나눈다. 세 중심지가 차례로 해낸 주도적 역할에 바탕을 둔 매우 편리한 분류법이지만, 오페라의 양식이나 시대의 상호 영향 및 다른 여러 도시로의 보급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단점을 지닌다. 로마가 초연의 중심지가 되었던 것은 1619년부터 1643년에 걸쳐서, 그리고 1660년부터 1685년에 걸쳐서이며, 베네치아는 1637년부터 17세기 말까지, 나폴리는 1650년 이후이다. 한편 볼로냐(1605), 토리노(1608), 파르마(1628), 베네치아 및 페자로(1637), 페르라라(1638) 등의 관중에게도 오페라는 받아들여졌다. 사적이건 공적이건 극장들이 베네치아의 모범을 본받아 대도시에서는 모두 40개 이상의 극장이, 이탈리아 전역에서는 약 100개의 극장이 잇달아 문을 열게 된다.
1. 로마
로마는 전속 예술가 몇 사람을 피렌체 악파에 보내게 되지만 그 예술 옹호자들, 특히 우르바누스 7세와 친교가 있던 바르베리니공 등의 덕택으로 힘을 되찾게 된다. 이미 1600년에 데 카발리에리는 로마의 발리첼리 교회의 기도소에서 자작의 <영혼과 육체의 극>을 상연했다. 이 오페라는 신화에서 제재를 찾지 않고 우의적인 등장인물(시간, 부, 악, 덕 등)로 이루어진 것으로 악기편성이 풍성하고 레치타티보의 장식성 또한 매우 뛰어났었다. 이 작품에서 오라토리오와 칸타타가 파생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오페라는 로마 악파의 싹을 포함하고 있다.
후의 이탈리아 및 프랑스 오페라를 융합하게 되는 이 로마의 오페라는 현재 보존되어 있는 얼마 안 되는 자료만으로는 충분히 판단할 수 없지만, 창의로 가득 차 있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그 이유는 100곡이 넘는 작품이 왕후들의 궁전과 이미 그리스 신화의 내용에도 구애되지 않는 관중들 앞에서 상연되었기 때문이다. 사투리를 사용한 몇 번의 새로운 시도 뒤에 신화 혹은 역사의 영웅, 나아가서 코메디아 델라르테의 주인공을 당시의 인물들로 바꾸어 비꼰 등장인물이 나오는 장르는 높이 평가받게 되었다. 이러한 패러디의 정신은 2세기 반 가량 뒤에 오펜바흐가 재발견하게 된다. 희극적 측면, 진지한 측면, 신성한 측면의 세 가지가 깊이 어울어져 의상과 무대장치를 화려하게 꾸민 이 오페라는 당시의 퇴폐적인 귀족계급의 취미를 만족시켰다. 이 일종의 거창한 오페레타에서 음악은 자주 부수적인 역할을 하는 데 멈추고 레치타티보가 주요한 기초를 형성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란디의 패러디풍의 작품 오르페오의 죽음(1619)에는 3개의 아리아 밖에 들어 있지 않으며, 비탈리의 아레투사 Aretusa(1620)에는 단 하나뿐이다. 반대로 레치타티보는 차츰 더 선율적인 아리오소가 되어가고 고도로 기교적인 패시지를 가지게 되었다.
2. 베네치아
작은 책이란 뜻의 리브레토(오페라 대본)라는 말이 등장한 것은 1571년 베네치아에서이다. 리브레토를 보고 관객은 <노래로 만든 이야기>의 줄거리를 알 수 있게 되었다. 트론 집안이 소유하고 있던 테아트로 누오보가 1629년에 폐관되자 베네치아 공화국은 대신 공개적인 유료 극장을 세운다. 이것은 예술사에서 분명한 혁신인 산 카샤노 극장의 낙성 축하로서 1637년에 마넬리 Fr. Manelli(1595-1667)의 안드로메다 L'Andromeda가 상연되었다. 더구나 그 오케스트라와 무대의 호화로움은 볼 만한 것이었다. 그리고 10개 가량의 극장이 이 세기 동안에 일반 대중에게 열리게 된다. 그들은 신화 따위는 아랑곳없이 복잡한 줄거리에 수많은 사람이 등장하고 변화가 많고 이국 정서가 끼워있는 희극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로마 악파의 오페라와 마찬가지로 일상적인 등장인물이 익살과 진지함이 뒤섞인 이야기에서 신화나 역사상의 인물을 빗대어 빈정거리는 것이 많았다. 그렇기는 하지만 노년의 몬테베르디는 거기에 그의 타고난 재능을 새겨 넣었다. 그는 <율리시즈의 귀환>(1641)이나 <포페아의 대관>(1642)에서 몇 명의 등장인물의 우스꽝스러움을 음악으로 표현하였다.
베네치아에서 성악의 유형은 로마에서보다 추상적이었던 것 같다. 카스트라토가 영웅이건 여신이건 무차별하게 그 역을 노래한다. 비비에나 Bibiena나 토렐리 Torelli, 타카 Tacca의 손에 의한 무대장치의 호화로움은 주로 서곡이나 발레, 묘사적인 장면(사냥, 뇌우, 폭풍 등)에 사용되는 오케스트라의 빈약함을 메꾸어 주고 있다. 오케스트라는 아리아나 레치타티보에서는 거의 쓰이지 않았다. 몬테베르디와 마찬가지로 카발리는 그의 비극에서 우의적인 프롤로그로 시작하는 로마 악파의 형식을 채용했다. 베네치아의 오페라도 차츰 레치타티보와 아리아를 확연하게 나누게 된다. 이것은 대본의 질이 떨어진 결과다.
당시 유일한 참다운 주요 인물이라 할 수 있는 조반니 레그렌치(1626-90)는 스펙타클한 미학에 동조하여 토틸라 Totila(1677)에서 코끼리와 150개나 되는 트럼펫을 무대 위에 올려 놓았다. 체스티(162369)는 침울한 레치타티보를 중단시키고 나타나는 사랑스런 아리에타에서 거침없는 기교를 보여 주었다. 또한 그는 1667년에 빈을 위하여 호화로운 <금 사과>를 음악화하였다. 이것은 파리스를 판결하는 장황한 패러디로서 사람들은 특히 그 24개의 눈부신 무대장치에 감탄했다.
요약하자면, 로마에서나 베네치아에서나 구성의 다양함, 종종 성공한 장르의 혼합, 한동안 과도한 기교에서 벗어나 있던 노래의 아름다움 등에 의하여 매력적인 오페라로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오페라는 분명히 웅변적인 변호자를 갖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 환상과 비이성적 측면에 있어서 바로크의 미학에 접근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륄리의 오페라가, 다른 한편으로는 18세기 이탈리아의 과도한 합리화가 이 아름다운 평형을 뒤엎게 된다. 그러나 후에 많은 사람들이 이 평형을 바람직한 것으로 찾게 된다.
3. 나폴리
오늘날의 음악사가들은 이 시기의 <나폴리 악파>의 유형을 정의하기를 포기하고 있다. 사실, 이탈리아 반도의 작곡가들이 나폴리에 모여든 원인은 로마에서는 오페라를 제한하는 움직임이 보이고, 베네치아에서는 오페라가 진부해졌기 때문이다. 더우기 나폴리는 인구가 로마와 베네치아와 밀라노를 합친 것보다 많았고, 그 언어나 연극제에 의하여 확고한 문화적 전통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스페인의 지배 아래 작곡가나 음악가, 연주자들을 끌어들이는 음악원이 있는 유럽 유일의 도시로 번창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나폴리 악파의 아버지로 간주되고 있던 프란체스코 프로벤찰레 Francesco Provenzale(1627경1704)는 무엇보다도 베네치아 악파의 양식에 관한 완벽한 지식을 빌라넬라의 예술에 이어 놓았다. 그는 12편 가량의 오페라를 썼는데 그의 재능은 당시의 뛰어난 나폴리의 대본 작가 페루치 A. Perucci의 대본에 의한 희극 <아내의 노예 Lo Schiavo di sua moglie>(1672)나 보복당한 스텔리다우라 Stellidaura vendicata(1678)에서 잘 발휘되었다. 그러나 연극이 대중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도시 고유의 진정한 양식은 태어나지 않았다. 대부분 사투리를 사용한 작품이나 스페인 연극의 유산이고, 코메디아 델라르테의 연극, 종교극 등이 병존하고 있었다. 후에 로마에서 교육받은 시칠리아인 알레산드로 스카르라티가 몇 가지 이탈리아 오페라의 원형을 나폴리에 남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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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룩 /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 中 "에우리디체를 잃고"
Gluck의 오페라 Orfeo와 Euridice에서 Orfeo가 잃어버린
아내 Euridice를 찾아 헤매면서 부르는 노래입니다.
Che faro senza Euridice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내가 에우리디체도 없이
Dove andro senza il mio ben.
어디로 갈 것인가 나의 님도 없이.
Euridice, o Dio, risponde
에우리디체여, 오 하느님, 대답하오
Io son pure il tuo fedele.
나는 온전히 당신의 충실한 사람이요.
Euridice! Ah, non m'avvanza
에우리디체여! 아, 내게 부여해 주지 않아요
piu socorso, piu speranza
어떤 도움도, 어떤 희망도
ne dal mondo, ne dal cel.
이 세상에서도, 하늘나라에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