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 사라진 위친계(爲親契)>
우리 민족은 토지를 기반으로 하는 농경문화가 대종을 이루어 왔다. 농사는 한정된 계절에 파종 재배 그리고 수확이 바쁘게 이어지기 때문에, 농기계가 없고 일손이 아쉬웠던 시절에는 상부상조 문화가 자생적이었다. 지금도 농촌에는 어머니의 손길처럼 이런 풍습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대표적인 형태로는 계 향약 울력 품앗이 그리고 두레 등이 있다. 기능별로는 관혼상제(冠婚喪祭)를 돕는 혼상계(婚喪契)와 서민들의 금융적 성격인 푼돈을 모아 목돈을 모아주는 쌀 계 등도 있었다.
위친계(爲親契)는 부모님을 위한 계이다. 우리 마을은 마을 이름을 딴 “부상위치계(扶桑爲親契)”였다. 지금부터 56여 년 전으로 기억된다. 그 시절 나는 광주에서 대학에 다녔던 20대 초반이었다. 마을은 50여 호로 시골치고는 큰 마을이었다. 부모를 모시는 장남 위주로 계원을 결성했다. 나처럼 외지에 있는 사람은 부모가 우선 가입하고 아들에게 위임했다. 이렇게 장남 위주로 선발하다 보니 가장 윗사람과 아랫사람의 나이 차이는 20세가 훨씬 더 넘었다. 그리고 생활이 넉넉한 부잣집 장남들은 계가 아니어도 넉넉한 가정이어서 부모님 상을 치를 수 있어서 예외 시켰고, 장남이지만 중학생 나이에도 못 미치는 집도 제외하다 보니 50호 동네에서 계원은 15명으로 기억된다. 초창기 계원 당 백미 1두(斗)씩 갹출하여 종자돈으로 출발했다.
동네 어르신이 사망하면 제일 먼저 부고장(訃告狀)을 작성하여 기동력이 있는 젊은이들은 인근 마을로 가서 사람들을 만나면 사망경유를 대충 말하며 직접 전달하거나, 집안에는 절대 들어가지 않고 대문이나 울타리에 꽂아 놓고 부고를 전달했다.
부모가 상(喪)을 당했을 때 우선 필요한 것은 관(棺)과 수의(壽衣)이다. 물가 기준이 쌀값이었던 시절이기에 부모상에는 백미 1 가마를 값으로 쳐서 주고, 계원들은 상가에 조문하고 화톳불 가에서 화투(花鬪) 놀이로 날밤을 새워가며 상주를 위로했다. 고인(故人)의 생전 업적과 명복(冥福)을 추도하는 만사(輓詞)는 기다란 천에 붓글씨로 써서 대나무 장대에 매달아 상가 에서부터 마을 어귀까지 세워 놓아 숙연한 분위기를 자아내게 했다. 발인 날에는 상여 뒤를 따라 추모하면서 들고 걸어가 장지(葬地)에서 소각했다. 마을에서 상을 당하면 계원들은 상여꾼의 조를 짜서 운구(運柩)에 참여하고 산소 일 까지 마무리했다.
온 마을 사람들은 농한기는 물론 농번기에도 출상(出喪)일 까지는 농사일을 전폐하고 애도하면서 상가 일을 돕는 것이 마을의 불문율이었다. 이처럼 마을의 애사(哀事)에는 환난상휼(患難相恤) 정신으로 마음을 같이했던 위친계였다.
농한기에 하루는 야유회 날을 정하여 살아 계시는 부모들은 관광버스로 모셔서 화전(花煎) 천렵(川獵) 단풍놀이 겸 음식을 대접했다. 정기 곗날에는 유사(有司)를 정하여 당일 식대를 부담케 했다. 그리고 수고했다는 의미로 유사 집 아주머니에게는 하얀 고무신 1켤레를 사서 드렸다. 그날 계방에 들어가면 방은 쩔쩔 끓어 아랫목은 앉을 수도 없어 찜질방처럼 뜨거웠다. 계원 간의 세대 차이는 20여 년이 되지만 1년에 한 번씩 고향마을에서 오순도순 모여 이야기꽃의 열풍은 아랫목의 뜨거운 열기처럼 식을 줄 몰랐다.
몇 년 사이에 장례문화도 변곡점을 맞았다. 이제는 장례식장이 등장하여 장례 절차 일체를 대행하고 있다. 화톳불 대신 쾌적한 냉난방이 마련된 빈소에서 조문객을 맞이하며, 부고장도 휴대전화 등 SNS를 이용하여 신속하게 전달되고 있다. 만사(輓詞) 자리에는 근조화환(謹弔花環)이 대신하고 있다. 상여 대신 영구차가 운구하고 있으며, 산일도 굴착기가 도맡아 하고 있다.
나는 학창 시절과 공직 근무는 대부분 객지에서 보냈다. 그래서 향수를 느끼고 달래주는 곳은 고향 위친계였다. 더구나 고향에는 노부모님이 홀로 계셨을 때 마을 주민이나 계원들의 보살핌이 이 아들을 대신해 주었다. 그래서 마을과 계원들에게는 마음의 빚을 언제나 지고 살았다.
그렇게 56여 년의 세월 동안 계원들 부모들은 모두 다 돌아가셨다. 그리고 몇몇 계원들도 유명을 달리했다. 많은 계원은 고향을 떠나 새로운 삶을 객지에서 살고 있다. 우선 부모님을 모시는 위친계의 목적이 종료되었기에 올해 정기 총회 때는 반세기 이상을 고향의 사랑방이며 쉼터였던 위친계가 마을 뒷산 너머로 사라져 해산되었다.
서산 넘어간 해는 아무리 힘들고 주위 사람들이 미워도 밤새 생각하고 또 생각하여 늦게라도 아침에는 동녘 산 등에 얼굴을 내미는데, 위친계의 얼굴은 무엇이 그리 토라져서 올라오지 않는다. (2024.1.21) (이 당시 고향에서는 위친계가 결성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