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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군의 역사적 배경과 위치, 한반도내 한사군설은 역사 날조이다.
◉한사군(漢四郡) 설치의 역사적 배경
▲ 진개(秦開)와 연오군(燕五郡) 설치
연대 적요
BC350 번조선(番朝鮮)이 북막(北漠)과 함께 연(燕)의 상곡(上谷)을 쳤다 BC343 연이 번조선에 화친을 청해 오므로 조양(造陽)을 경계로 삼다 BC341 연이 자객을 보내 번한인(番韓人) 해인(解仁)을 살해하다 BC339 연이 안촌홀(安寸忽: 安市城)을 돌파하고 험독(험독: 번조선의 도읍)을 치자 수유인(須臾人: 箕子의 후손들) 기후(箕詡)가 5천으로 진한, 번한의 군사와 함께 격파하고, 연의 도읍인 계성(薊城)의 남쪽에 이르니 연이 화친을 청하면서 자제를 인질로 보냈으며 연의 장수 진개가 번조선의 포로가 되었다. BC323 번조선의 왕 수한(水韓)이 죽고 후사가 없어 기후(箕詡)가 계승하여 번조선왕 이라 칭하고 번한성(番汗城)으로 천도하였다. BC305 번조선이 북호(北胡: 東胡)와 함께 연의 상곡을 공격하자 연이 진개를 보내 대항하였다. BC300 닌질로 잡혀 있던 연의 진개가 연으로 돌아간 후 번조선 동호(東胡: 번조선을 비하한 말)를 쳐서 조양에서 양평(襄平)까지 장성을 쌓은 후에 그 안쪽에 상곡군(上谷郡), 어양군(漁陽郡), 우북평군(右北平郡), 요서군(遼西郡), 요동군(遼東郡) 등 5군을 설치하 였는데 장성의 동쪽 끝을 만번한(滿番韓)이라 한다. ***참고:진개가 공격한 번조선을 사기는 동호(東胡: 동쪽 오랑케)라고 하였지만, 진서(晉書) 에서는 조선(朝鮮)이라고 기록하고 있어서, 동호는 곧 조선을 동쪽 오랑케로 비하한 말이다. 또 연과 조선의 경계선인 만번한(滿番韓)은 전에 번조선의 도읍지였던 험독, 진황도시 창려( 昌黎현)으로 추정하는데, 창려는 갈석산 남쪽 진황도시에 위치한 지명이다. 양평현은 평주 노룡현 서남이라고 하였다. 또 북쪽의 조양(朝陽)을 필자는 지금의 북경시 조양구(朝陽區)로 비정하며, 연구 검토기 필요하다. |
***참고: BC 350년 번조선이 연의 상곡을 공격다고 하며, 이후 조양을 경계로 삼았다. BC 339년에는 연이 번조선을 공격하였다가 대패하여 연의 도음인 계성(薊城)까지 진격하자 연은 왕의 자제를 인질로 보냈으며, 이때 연의 장수 진개는 고조선에 포로가 되었다. 이후 번조선왕이 죽은 후 후사가 없자 기후가 왕이되어 기자조선이 되었다.
BC 305년 조선에서 연나라로 돌아간 진개가 번조선을 공격하여 상곡, 어양, 우북평, 요서 및 요동군을 빼앗고, 이곳에 연장성을 설치하였는데, 갈석산 진황도시 부근 양평(陽平)에서 조양까지 지금의 북경시 조양구(朝陽區) 조양(朝陽)까지 연장성을 쌓았다고 하였다.
사기에서는 연나라가 동호(東胡: 동쪽 오랑게)와 싸웠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진서(晉書)에는 연이 조선(朝鮮)과 싸웠다고 기록하고 있어서 동호는 조선의 별칭임을 알 수 있다. 연장성 동쪽끝을 만번한이라고 하였는데, 만번한은 번조선의 수도였던 진황도시 창려현(昌黎縣)를 말하는 것이다.
번조선(번한)의 영토는 진개의 공경 이전에 상곡, 어양, 우북평, 요서 및 요동까지 포함 되었던 것이다.
***참고: 명도전(明刀錢)을 지금 역사학자들은 한결같이 연나라 화폐라고 하지만ㄴ, 이는 잘못이다. 명도전은 고조선의 영토인 상곡, 어양, 우북평, 요서 및 요동, 천진시 이남까지 광범위하게 분포되어 있는데, 이는 고조선의 영역과 일치한다. 또 고인돌의 분포도 고조선의 영토와 일치하며, 비파형 청동검도 고조선의 영토와 일치한다.
일본인들이 한반도 내의 무덤을 발굴하면서 발견하였다는 세형동검(細形銅劍)은 중국식 동검으로 조선의 비파형 동검과 전혀 다른데, 이 세형동검 등은 일본인들이 무덤을 발굴하면서 끼워넣고 조작한 것으로 보여진다. 지금까지 일본인이나 역사학자들이 주장해 온 명도전이 연나라 화폐라는 주장은 잘못이며, 명도전은 고조선의 화폐가 분명하다.
◉ 위만과 번조선의 멸망
| B BC202 한고조(漢高祖: 유방)가 항우를 멸한 후 연왕인 장다를 없애고 노관(盧綰)으로 연왕을 봉하다. BC195 한고조가 죽자 노관은 흉노로 달아나고 그의 부하인 위만(衛滿)은 번조선으로 망명하였는데 번조선 왕 기준(箕準)이 위만으로 하여금 중국과의 변방인 상하운장(上下雲障)을 지키게 하다. BC194 위만이 당시 이곳에 중국의 난리를 피해 망명하여 수용된 연(燕), 제(齊), 조(趙)의 무리를 이끌고 처들어와 번조선을 멸망시키다. BC 상하운장의 서쪽 중국 국경에는 진나라 당시 초소인 요동외요(遼東外요)가 있었는데 한이 건국된 후에는 너무 멀어서 지킬 수가 없어 옛날 연(燕)과 진(秦)의 옛 요새였던 요동고새(遼東故塞)로 물러났는데 이 곳이 지금의 산해관(産海關)이다. BC 위만은 도읍을 새(塞: 국경지대)→ 패수(浿水)→상하운장(上下雲障)→ 왕검성 (王儉城)으로 옮겨갔다. * 왕검성은 지금의 평양이 아니고 요서지방의 광녕(廣寧)이다. |
연대 적요
***참고: 진시황이 국경 초소인 요동고새는 지금의 산해관이며, 위만이 수도로 삼은 왕검성은 요서 광령(廣寜)이다. 패수는 왕검성의 서쪽에 있었으며, 지금의 영정하라는 주장도 있다.
현재 북경시 경내를 흐르는 주요 하류는 영정하(永定河), 조백하(潮白河), 북운하(北運河), 거마하(拒馬河) 등이 있어 모두 발해로 유입되는데 조선하라는 강은 보이지 않는다. 조하(潮河)는 북경의 북쪽을 흐르는 강이며, 예전의 무경종요에 기록된 조선하(朝鮮河)로 비정하고 있다.<매일신문 심백강의 한국고대사 참고>
이 글을 보면 조하(潮河)와 조선하(朝鮮河)가 같은 강의 다른 이름으로 심백강씨는 보고 있다.
패수(浿水)는 지금의 영정하로 비정되고 있으며,
한나라 건국 초기에는 진시황의 동쪽 국경지역이 너무 멀어서 지금의 산해관 지역 요동고새를 국경으로 삼고 물러나 있었다고 한다. 이 요동고새는 연나라가 번조선을 침략하기 전 원래 번조선의 땅이었으며, 만리장성보다 서쪽에 위치해 있다.
***참고: 위만이 건넌 패수는 역사학자들은 패수(浿水)를 한반도 내의 강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병도와 송호정은 청천강설을, 노태돈, 이종욱, 오강원 등은 압록강설을 주장하여 일반적으로 이병도의 청천강설이 주류학계의 주장이다.
그러나 이후 신용하는 대릉하(大陵河) 설을, 이백일은 조백하(潮白河)설을 주장했다. 현재 북경시를 가로 질러서 흐르는 강은 영정하(永定河), 조백하(潮白河), 북운하(北運河), 거마하(拒馬河) 등이 있어 모두 발해로 유입된다. 위만이 건넌 패수는 한나라 초기 한나라가 국경인 만리장성이 너무 멀어서 만리장성 부근까지 경계로 삼지 못했는데, 위만이 건넌 패수는 팔달령 만리장성에서 가까운 북경보다 서쪽의 강으로 비정할 수 있다.
필자의 견해도 견해도 신용하교수의 의견과 마찬가지로 위만이 패수를 건너 상하운장에서 한나라와 대치하였으므로 이때의 패수(浿水)는 북경을 가로 질러 흐르는 대를하(大陵河)일 가능성도 있다고 보며, 금후 연구가 필요하다.
패수는 이병도나 역사학자들이 주장하는 한반도 내 청천강이 절대로 될 수 없다. 패수는 낙강군 패수현을 지나는 강으로 신용하 교수는 대릉하라고 하였다.
***참고: 기준의 명을 받고 BC 194년 지금의 북경 부근 지역으로 추정되는 상하운장을 지키던 위만(衛滿)이 당시 이곳에 중국의 난리를 피해 망명하여 수용된 연(燕), 제(齊), 조(趙)의 무리를 이끌고 왕검성으로 처 들어와 번조선을 멸망시켰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당시 연(燕)이나 제(齊) 또는 조(趙)의 피난 무리들은 모두 산동성이나 상곡, 어양 등에 살던 무리들이 상하운장에 있는 위만에게 귀순한 것이며, 이들을 이끌고 기준의 왕검성을 공격한 것은 지금의 평양이 결코 아니다. 조백하 부근의 지역에 있는 왕검성이다.
위만의 마지막 도읍지 왕검성(王儉城)은 패수(浿水)의 동쪽에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패수는 지금의 대능하(大凌河)이며, 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에 따르면 왕검성은 광녕현(廣寧縣) 동남에 있다고 하였다.
결코 위만이 터를 잡았던 상하운장에서 수 천리 떨어진 지금의 평양을 공격했다는 일본인이나 이병도 또는 역사학자들의 주장은 결코 진실이 될 수 없다.
◉ 낙랑군(樂浪郡)의 지리적 위치
한무제가 위만조선을 멸하고 설치했다는 한사군은 최초 진번, 임둔, 현도, 낙랑의 4개 군이었다고 한다. BC 108년 설치되었다고 하는 한사군은 26년 후 진번과 임둔이 소멸되었고, 33년 후인 BC 75년에는 현도군 마저 토착민에게 만리장성의 안쪽으로 쫓겨 갔다고 보아야 한다.
이후 서한(前漢)의 낙랑군 25개 현 이었다가 후한(東漢)의 낙랑군은 18개로 줄고, 진서(晉書)에는 6개로 줄고, 둔유현 이남에 설치했다는 6개 현이 대방군 속현으로 나온다. 이때 낙랑군과 대방군은 만리장성의 안쪽 조백하 부근에 밀집해 있었을 것이다.
낙랑군 속현
縣名
한서(漢書)의 낙랑군 朝鮮조선, 屯有둔유, 渾彌혼미, 遂城수성, 누方누방, 駟望사망, 帶方대방, 列口열구, 長岑장잠, 提奚제해, 含資함자. 海冥해명, 남邯남감, 浿水패수, 粘제점제(점선), 增地증지, 昭明소명, 呑列탄열, 東시동시(동이), 不而 불이, 蠶台잠태, 華麗화려, 邪頭昧사두매 前莫전막, 夫租부조 |
후한서(後漢書)의 낙랑군 朝鮮조선, 屯有둔유, 渾彌혼미, 遂城수성, 누方누방, 駟望사망, 帶方대방, 列口열구, 長岑장잠 提奚제해, 含資함자. 海冥해명, 남邯남감, 浿水패수, 粘제(黏蟬: 점선으로 읽어야 한다), 增地증지, 昭明소명, 呑列탄열, |
진서(晉書)의 낙랑과 대방군 낙랑군 樂浪郡(朝鮮조선, 屯有둔유, 渾彌혼미, 遂城수성, 누方누방, 駟望사망) 대방군 帶方郡(列口열구, 長岑장잠, 提奚제해, 含資함자. 海冥해명, 呑列탄열) |
***참고: 한무제가 처음 한사군의 동쪽 끝은 지금의 열하(熱河)와 요령성 금서시 서쪽, 서쪽 끝은 연나라 진개가 번조선에서 빼앗은 어양, 우북평, 요서, 요동 지역에 걸쳐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설치 26년 후 토착민 들에게 쫓겨 임둔군은 현도에, 진번군은 낙랑에 병합되었다. 이후 9년 후인 BC 75년에는 현도 마져 서쪽으로 쫓겨갓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전한 말기 고구려 2대 유리왕 때 현도는 조백하 상류 지역이고, 고구려의 영토로 되어 있었으며, 전한말 나라를 빼앗은 왕망(王莽)이 조백하 상류의 고구려 영토 현도를 공격하였다. 이 기록을 보면, 전한 말 당시에도 쫓겨간 한사군이 만리장성의 안쪽에 있었다. 현도는 서한군국도(西漢郡國圖)와 서진군국도(西晉郡國圖 )표시된 것처럼 만리장성의 부근에 있었다.
위와 같이 설치 33년 후 소쪽으로 쫓겨난 서한(西漢)의 낙랑군은 지금의 조백하 부근에 발해만 해안지방에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일제는 그들의 대륙 침략목적을 위하여 평양, 황해도 지역에서 무덤 발국 시 북경에서 구입한 낙랑 유물을 몰래 끼워넣고, 평안도와 황해도에서 낙랑과 대방의 유물이 나왔다고 조작을 한 것이다.
이러한 일본의 역사 날조 내지 왜곡(歪曲)은 일제시대로서 끝난 것이 아니라 해방 후에도 일제 식민사관(植民史觀)을 추종하는 조선사람들에 의하여 계속되었다.
◉ 한사군(漢四郡)의 허실(虛實)
▲ 우리 사학계의 한사군(漢四郡)의 정체
이병도(李丙燾)저「韓國古代史硏究(한국고대사연구)」(1976. 3. 博英社)를 중심으로 한 우리나라 사학계의 한사군에 대한 견해는 '한무제(漢武帝)가 위만조선(衛滿朝鮮)을 멸하고 그 땅에 낙랑군(樂浪郡), 현도군(玄菟郡), 진번군(眞番郡), 임둔군(臨屯郡) 4개 군(郡)을 설치하였는데 이들 대부분은 한반도 중북부에 있었다“ 라고 기술한 것이다.
이는 후술 하겠지만, 심각한 거짓 기술이고, 한국 고대사를 심각히 조작, 왜곡시킨 행위이었다. 일본인 들과 이병도등이 조작 왜곡한 한반도 내 한사군 설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 한(漢)과 위만조선(衛滿朝鮮) 간의 전쟁
사마천의 사기(史記) 조선전(朝鮮傳)에는
”한무제(漢武帝)는 양복으로 하여금 해군을 이끌고 제(齊)에서 발해(渤海)를 건너게 하고, 순체(荀彘)는 육군을 거느리고 요동(遼東)으로부터 위만을 쳤다 '고 하였다.
제(齊)는 산동반도에 있던 나라이고 발해(渤海)는 당시나 지금이나 산동반도와 요동반도 사이에 있는 바다이므로 해군은 산동반도를 출항하여 발해를 건너 위만조선의 마지막 도읍지였던 왕검성(王儉城)으로 향했다는 것이다.
또 요동(遼東)은 서한군국도(西漢郡國圖)에 표시된 바와 같이 만리장성의 안쪽에 위치해 있었고, 한의 육군은 요동고새(遼東故塞)를 출발하여 왕검성으로 향했다는 것이다.
위만의 마지막 도읍지 왕검성(王儉城)은 패수(浿水)의 동쪽에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패수는 지금의 대능하(大凌河)이며, 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에 따르면 왕검성은 광녕현(廣寧縣) 동남에 있다고 하였다.
***참고: 한국의 역사학자들이나 이병도는 패수를 지금의 청천강이라고 하고 평양 왕검성을 지금의 평양이라고 주장하는데, 수경주(水經註)의 기록을 보면 대능하이거나 조백하로 보아야 할 것이다.
사마천의 사기 기록을 보면 한(漢)과 위만과의 전쟁 결과에 대하여,
“우거(위만의 손자)는 지세가 험하고 견고한 것만 믿다가 나라의 대를 끊어지게 하였고, 섭하(涉河)는 공(功)을 도둑질하였다가 적의 군사에게 머리를 잃었으며(戰死), 누선(樓船: 양복)은 장졸이 적은 것을 가지고(핑계로) 어려운 일을 당해서 벗어나려 했다. 그리하여 번우를 잃고 도리어 한무제의 의심을 받았다. 순체는 공손수(公孫遂)와 더불어 전공을 다투다가 다 함께 죽임을 당해서 양쪽(한과 위만)의 군사 모두가 욕되었으며 장수로서 후(侯)에 봉해진 사람이 없었다 '고 하였다.
한과 위만 간의 전쟁은 위만조선의 왕 우거는 죽고 나라는 멸망하게 되었으며, 한(漢)의 장수 섭하는 공에 욕심을 내다가 전사하고, 공손수와 순체는 역시 전공을 다투다가 사형 당하였으며, 양복은 전투에서 꽁무니를 뺏기 때문에 폐 서인이 되는 처벌을 받아 전쟁을 치르고도 포상된 사람이 없으니 결국 이 전쟁의 결과는 한(漢)도 위만조선의 우거도 모두 함께 패한 셈이다.”
***참고: 위의 기록을 보면 위만조선을 침략한 한뭄제의 장수들이 모두 참수형에 해당하는 형벌을 받았는데, 이는 위만조선 침략에 실패하였음을 말한다.
환단고기의 북부여기(北夫餘記) 상편 4대 단군 고우루 13년조에 '한(漢)의 유철(劉철: 武帝)이 평나(平那)를 처들어와 우거를 멸하고 사군(四郡)을 두고자 하여 사방으로 병력을 침략시켰다. 이에 동명(東明) 고두막이 의병을 일으켜 가는 곳마다 한의 침략군을 연파하자 그 지방의 유민들이 사방에서 응하여 도우므로 군보가 크게 떨쳤다 ' 고 하였다.
이 상의 두 기록을 종합하면 한무제가 해로와 육로로 위만조선의 도읍 왕검성을 공격하여 위만조선을 멸하자 동명 고두막이 군사를 일으켜 전의 번조선 유민을 이끌고 한의 군사를 격파하니 결국 이 전쟁의 승자는 번조선의 유민을 이끌고 군사를 일으킨 동명 고두막인 것이다.
또 한무제가 이때 공격한 왕검성(王儉城)은 결코 평양이 될 수 없다.
◉한사군에 대한 설명 요약
한나라 무제는 고조선을 침략한 후 BC 108-107년 고조선 옛 땅에 낙랑, 진번, 임둔, 현도의 4군 설치하고 관리를 직접 파견해 다스렸다. 한사군은 토착세력의 지속적 저항을 받자 이에 한(漢은) 한사군 설치 26년 후인 BC 82년에 4군 가운데 진번과 임둔의 2군을 폐하고 진번의 속현들은 낙랑군에, 임둔의 속현들은 현도군에 속하여 관할받도록 했다고 한다. 또 설치 불과 33년 후인 BC 75년에는 압로강 변과 평안북도에 있던 현도가 토착 세력에게 북쪽으로 쫓겨갓다고 한다. 역사학자들은 현도가 쫓겨간 곳이 압록강 가까운 지금의 무수(撫順) 자욕아럭고 주장한다. 그러나 현도는 압록강변이나 무순 지방에 결코 존재한 사실이 없다.
또 역사학자들은 미천왕 때인 AD 313년에는 낙랑군이, AD 314년에는 대방군이 고구려에 멸망함으로써 한반도 내의 중국 군현은 소멸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저들의 이같은 한반도 내 낙랑과 대방군 멸망설은 심히 잘못된 것이며, 왜곡된 것이다.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수많은 대방이나 현도와의 싸움이 한반도 내에 있지 않앗고, 요서 지방에서 있었다. 따라서 낙랑군의 수현(首縣)인 조선현(朝鮮縣)은 괄리지에 노룡현 동쪽에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역사학자들의 주장인 평양이 아니다.
낙랑군 점제현(秥蟬縣, 점선현)도 수양제의 우12군 첫 번째 침략경로이며, 일본인과 이병도가 주장한 평안도 평강이 아니다. ·수성현(遂成縣)도 진황도시 부근 갈석산 있었으며, 이병도가 주장한 황해도 수안(遂安)이 아니다. 둔유현(屯有)도 이병도는 둔유현을 궤변으로 황해도 황주(黃州)라고 왜곡하였지만 수양제의 고구려 침략경로에 있었으며, 이병도가 주장하는 황해도 황주(黃州)가 아니다.
이병도는 진번군의 위치에 대방이 설치되었고, 대방은 황해도라 왜곡했지만,
이병도의 황해도 대방군설은 거짓이다. 대방군 역시 고구려 서쪽 국경지역 수양제의 침략 경로에 있었다. 이병도가 주장한 낙랑, 진번, 임둔,현도 등의 한사군 속현이 한반도 내에 있었다는 왜곡된 주장은 모두 거짓이며, 이들 한사군의 속현은 모두 고구려의 서쪽 국경지역 수양제 침략경로에 있었다.
***참고: 당태종의 이세적 군대가 요수(遼水: 지금의 조백하)를 건너 바로 진격한 곳이 바로 현도(玄菟)이며, 고구려에 속한 현도군 고구려현(高句麗縣)이다. 수경주(水經註)의 기록을 볼 때 현도는 조백하의 상류 지방에 위치해 있었다.
◉ 요령성 금서시 태집둔에서 임둔태수 인장 발굴
2008. 9. 2자 국제신문 기사를 봄면,
“임둔태수(臨屯太守)의 인장이 랴오닝성(遼寧省) 금서시(錦西市) 태집둔(邰集屯) 소황지(小荒地)에서 발견되었다고 하였다. 이곳은 요서(遼西)의 중서부로 발해만에서 약 30㎞ 떨어진 곳이다. 요서 땅은 남북으로 길게 누운 노노아호(努魯兒虎) 산맥을 중심으로 동쪽으로는 광활한 평원지대가, 서쪽으로는 해발 500m 이상의 고원지대가 펼쳐진다. 역사적으로는 동북아시아의 인후부 역할을 한 곳이다. 임둔군이 한사군 설치 25년 후 폐지되었는데, 임둔 태수의 인장이 요령성 금서시 태집둔에서 발굴된 것은 단기간 존재했던 임둔군이 요령성 금서시 지역임을 증거하고 있다.”
복기대 교수도 한사군은 기원전 108년 한(漢)나라가 고조선(위만조선)을 무너뜨리고 그 영역에 설치했다는 4개 행정구역 중에서 임둔의 위치는 요령성 금서시임을 말한다고 하였다.
이는 한국 고대사의 뇌관이자 아킬레스건이었다. 그 위치를 어디로 보느냐에 따라 고조선사가 왔다 갔다 한다. 그런데 임둔군이 요서 땅에 있었다는 증거가 나온 것이고, 임둔군은 요서 집방에 있었다고 하면서 서한군국도에서도 임둔군의 위치 지도를 만리장성 안쪽의 요서에 그려놓고 있다.
◉ 세키노의 낙랑 평양무덤 발굴품은 모두 가짜이며, 오염되었고, 폐기되어야 할 이유
황해도 장무이 무덤과 평양 낙랑군 유적 발굴에 최고로 기여한 자는 세키노 타다시(関野 貞)이다. 그는 수차 북경의 유리창(琉璃廠)이라는 골동품 판매 중심지를 방문하고 많은 낙랑군 유물을 구입했다는 일기 기록이 남아 있다. 특히 그의 일기장에는 북경 유리창에서 다량의 한 대(漢代)와 낙랑(樂浪) 유물을 구입했다고 했다. 그가 북경에서 낙랑 유물을 구입했으며, 낙랑이 북경부근에 있었다고 해야 마땅한 일이다.
그러나 그는 구입한 유물들을 평안도와 황해도 무덤 발굴 시 끼워 넣고, 평안도에서 낙랑 유물을 발견했으니, 평안도가 낙랑 지역이라고 날조 왜곡함을 서슴치 않았다. 그는 고고학을 오염시킨 범죄자이었다.
“그의 일기장에는,
”대정 7년(1918) 3월 20일 맑음 북경
서협(西脇)씨의 소개로 중산용차(中山龍次氏)씨(중국: 지나 교통부 고문, 월후 출신)를 방문했다. 그의 소개로 우편국장 중림(공백) 씨를 방문하여 우편국 촉탁인 문학사 흑전간일(黑田幹一) 씨의 동도(東道)부터 유리창( 瑠璃廠)의 골동품 점을 둘러보고, 조선총독부 박물관을 위하여 한나라 때(漢時)의 발굴품을 300여 엔에 구입했다.
(大正七年三月二十日晴 北京西脇氏ノ紹介二ヨリ中山龍次氏(支那交通部顧問, 越後 出身)ヲ訪ヒ,同氏ノ紹介二ヨリ郵便局長中林(空白)氏 ヲ訪ヒ,郵便局囑託文學士黑田幹一ノ東道ニヨリ瑠璃廠ノ骨董店ヲ廻覽シ, 朝鮮總督府博物館ノ爲メ漢時ノ 發掘品ヲ三百餘円ヲ購フ.)
대정 7년(1918) 3월 22일 맑음
오전에 죽촌(竹村) 씨와 유리창에 가서 골동품을 샀다. 유리창의 골동품 점에 는 비교적 한 대(漢代)의 발굴물이 많아서, 낙랑(樂浪) 출토품은 대체로 모두 갖추어 져 있기에 내가 적극적으로 그것들을 수집했다. (二十二日晴 午前, 竹村氏 瑠璃廠 往古玩購. 瑠璃廠 骨董鋪 比較的漢代 發掘物多, 浪出土品大抵皆在, 余極力之蒐集.)라고 기록 되어 있었다(자료 출처: 문성재 교수 (인하대 고조선연구소)
세키노 타다시 (関野 貞 , 1868년 ~ 1935년)”
또 평양 낙랑군 태수의 봉니라고 주장한 유적이 현장에서 발굴한 게 아니고 조선총옥부 박물관에서 사들인 것이란 기록도 있다.
“1922년 10월 30일, 조선총독부 박물관에서 ‘낙랑태수장’ 봉니를 고가인 150원에 매입”
“1931년 12월, 조선총독부 박물관에서 ‘낙랑태수장’ 봉니를 100원에 매입”
“1934년 2월, 조선총독부 박물관에서 ‘낙랑대윤장’ 봉니를 100원에 매입” (자료 출처: 문성재 교수 (인하대 고조선연구소))
***참고: 위의 대방과 낙랑군유적 발굴에 최고로 기여한 자는 세키노 타다시(関野 貞)는 북경 유리창을 찾아가 조선총독부 박물관을 위하여 한나라 때의 골동품을 첫날 300여 엔(円) 어치의 엄청난 양을 구입하였다고 하였다.
당시 300엔은 “1922년 조선총독부 박물관에서 ‘낙랑태수장’ 봉니를 고가인 150원에 매입”했다는 기록에서 볼 수 있드시 어마어마한 금액으로 한 대와 낙랑 유물을 매입하였던 것이디.
세키노 타다시(関野 貞)는 이틋날인 1918년 3월 22일에도
“유리창의 골동품 점에 는 비교적 한 대(漢代)의 발굴물이 많아서, 낙랑(樂浪) 출토품은 대체로 모두 갖추어 져 있기에 내가 적극적으로 그것들을 수집했다”아고 일기에 기록하고 있는데, 이날 낙랑의 출토품이 대체로 모두 갖추어져 있다고 한 낙랑 유물을 적극적으로 구입한 수량이 얼마나 되어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세키노 일기에 엄청난 양의 낙랑 유물을 북경 유리창에서 구입했다고 기록산 사실을 볼 때 세키노는 마땅히 낙랑이 북경 부근에 있었다고 주장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이같이 세키노가 구입한 한 대와 낙랑 유물이 평양의 낙랑군 유적 발굴 시 유리창에서 구입한 낙랑군 골동품을 평양 무덤에서 출토된 것이라고 슬쩍 집어넣어서 날조 조작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필자는 세키노가 이같은 수법으로 낙랑과 대방의 골동품을 황해도 대방의 고고학적 유물이라고 위조하고, 평양의 냑랑계 유물이라고 위조하였다는 것이 역사적으로 틀림없는 사실임을 확신한다.
그 이유는 대방과 낙랑이 황해도나 평양에 있었던 적이 역사적으로 없었고, 모두 만리장성 안쪽 조백하 부근에 있었으며, 수양제와 당태종의 최초 침략 목표 지점이었기 때문이다
◉ 결론
연나라 진개가 진번조선을 침략하고 상곡, 어양, 우북평, 요서 및 요동을 빼앗고 이곳에 연오군(燕五郡)을 설치하고 연오군의 동쪽에 연장성(燕長城)을 설치하였다. 진시황은 이 연장성을 연결하여 만리장성을 쌓았다. 한나라 초기 위만은 한나라가 진나라 때의 국경 부근을 지키지 못하자 패수(浿水: 지금의 영정하)를 건너와 진번조선의 벼슬을 받고 상하운장 지역을 지키다가 진번조선을 빼앗고, 위만조선을 세웠다.
한무제는 BC 108년 위만조선을 멸하고 낙랑, 진번, 임둔, 현도 4개 현을 두었는데, 한사군의 동쪽은 열하와 요령성 금서시까지 이었다. 이곳에 위치해 있떤 진번과 임둔은 설치 33년 후 완전히 멸망하고 요수 상류의 현도와 만리장성 안쪽에 위치한 낙랑만이 남게 된 것이다.
낙랑군 및 그 속현과 대방군 및 그 속현은 평안도나 황해도에 설치된 역사적 사실이 전혀 없다. 그 이유는 낙랑군과 그 속현이나 대방군과 그 속현 및 현도가 모두 수양제 및 당태종의 최초 침략 목표지점으로 설정되었기 때문이다.
일본인 세키노 타다시(関野 貞)와 일본 총독부는 북경의 유리창(琉璃廠)이라는 골동품 판매지역에서 수많은 낙랑계 유물을 엄청난 금액을 들여서 구입하였다. 그들이 낙랑계 유물을 북경 유리창에서 구입했다면, 그들은 고고학적 입장에서 낙랑이 북경 부근에 있었다고 해야 마땅한 일이다. 그러나 이들은 평안도 및 황해도의 무덤 발굴 시 북경 유리창에서 구입한 골동품을 끼워넣고 평안도와 황해도에서 낙랑과 대방 유물을 발굴했다고 위조한 것이다.
위와 같은 한사군의 여러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 한반도 내 한사군설은 반드시 폐기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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