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강제병합 100년 - 일제 강점기 한국 천주교 (상)
제1편 독립운동
정교분리 원칙 속 은밀히 독립운동 참여
한국사 연구에서 교회사 평가는 인색한 편이다. 교회 차원의 민족 운동 참여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 천주교회사의 이해 없이는 한국 근현대사의 구조적 인식은 불가능하다. 1910년 한일강제병합 이후 일제 무단정치로 인해 국내에서 독립운동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려운 실정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당시 한국 천주교회의 공식 태도는 '정교분리원칙''정치 불간섭주의'여서 천주교 신자들이 독립운동에 참여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에서도 일부 성직자들과 평신도들은 주요한 항일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주도적 역할을 했다.
한일강제병합 100년을 맞아 '일제 강점기 한국 천주교'를 기획, 2회에 걸쳐 독립운동과 문화운동을 연재한다.
105인 사건
"천주교 신부들이 겉으로는 조선 독립에 관해 아무 상관도 안하고 있는 것 같으나 사실인즉 비밀리에 서로 라틴어로 연락하며 또 신자를 시켜 비밀리에 상해와 연락을 취하고 있으니 거기에는 또한 프랑스 신부들도 있다. 신부들이 이러한 비밀을 감추기 위해 교우들이 독립에 대해 무슨 말을 하면 책망하고 책벌하며 교회에서 내쫓기도 하나 내막으로는 은밀히 독립운동을 하고 있으니 신부들을 철저히 조사하기 바란다."(1920년 12 월9일자 의주본당 주임 서병익 신부 경찰 고발장 내용 중에서)
1910년 한일강제병합 이후 천주교 신자가 관련된 첫 독립운동은 1911년 말 압록강 철교 준공식에 참석하는 데라우치 총독을 암살하려 했다는 명목으로 애국계몽단체 신민회 간부들과 그리스도교 요인들을 체포한 '105인 사건'이다. 이 사건은 일제가 평안도 지역에서 배일(排日)사상이 강한 인물들을 제거할 목적으로 허위 날조해 조작한 사건으로 구속자 700여 명 가운데 105명이 유죄선고를 받았다. 이들 중 1913년 6명만이 형을 선고받았고 나머지는 석방됐다. 이때 석방자 가운데 이기당(안토니오)과 안성제가 천주교 신자였다. 이기당은 석방되자마자 서간도로 망명해 광제회와 병학교를 설립해 본격 무장항일운동을 시도했다.
3ㆍ1 운동
우리 민족의 잠재적 항일 정신은 3ㆍ1운동으로 일시에 거족적 독립운동으로 폭발했다. 교회 지도자들의 반대와 우려에도 한국 천주교회 신자들은 3ㆍ1운동에 적극적이고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대구 성유스티노신학교 신학생들은 1919년 3월 5일 저녁 운동장에 모여 독립 만세를 외쳤다. 이들은 또 3월 8일 대구 시내에서 열릴 만세 행렬에 참가하기로 하고 교사 홍순일의 지시에 따라 신학생 김구정(이냐시오)이 '독립선언서' 등사를, 서정도가 태극기 제작을 분담해 준비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한 학생의 고발로 학교 당국에 발각돼 무산되고 말았다.
서울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서도 1919년 3월 11일 신학생 주도로 만세운동이 있었다. 신학생들은 이날 저녁 교외로 뛰어나가 군중 시위에 가담했다. 용산 신학생들은 또 3월 28일 밤에도 교문 밖으로 뛰어나가 삼호정 언덕과 새남터 노들 언덕에서 벌어진 횃불만세운동에 합류했다.
평신도들도 각지에서 만세운동에 참여했고 일부 지역에서는 만세 시위를 주도하기도 했다. 일제 총독부 자료에 따르면 3월 10일 황해도 해주에서 천주교 신자들이 미리 천도교와 개신교 등 각 종단과 연합해 만세운동을 주도했고, 3월 18일에는 강화에서 천주교 신자인 김용순과 조기신, 신태윤 등이 주도해 군중 1만여 명을 모아 만세운동을 벌였다.
또 3월 27일 경기도 고양에선 천주교 신자들이 "우리는 조선 독립운동에 관해 이렇게 활동하고 있다. 그런데 너희 면 직원은 태연히 사무를 집행하고 있으니 조선인으로서 부당하다. 속히 사무를 파하고 우리에게 가담하라"는 독려문을 면장과 면서기들에게 보내기도 했다. 만세 시위에 참가한 구산공소 청년 5~6명이 일본 경찰에게 체포됐고, 이들 중 남 마태오 회장 아들은 독립 선언 벽보를 붙인 혐의로 징역 10개월 형을 받기도 했다.
아울러 3월 27일에는 경기도 광주군 망월리에 사는 천주교 신자 김교영이 면사무소 앞에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3월 29일에는 용인군 내사면 남속리에 사는 천주교 신자 한영규와 김운식이 마을 주민 100여 명을 이끌고 태극기를 들고 행진하며 만세운동을 벌였다.
4월 3일 수원에서는 천주교 신자 이순모가 선두에 서서 군중 2000여 명과 함께 우정면 사무소와 화수리 경찰 주재소를 습격, 집기류를 부수고 불을 지르고 일본인 순사를 격살하는 등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이날 만세운동으로 이순모와 김선문, 안경덕, 김여춘, 김광옥, 최주팔 등 천주교 신자들이 체포됐다.
4월 7일 황해도 신천에서 만세운동을 벌이다 체포된 천주교 신자 김경두는 "자기 나라를 보존하는 것은 국민으로서의 의무이니 한국인으로서 한국 독립을 희망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한국 독립 만세운동에 참여하는 것도 한국인으로서 당연한 의무이므로 죄가 안 된다"고 주장했다.
대구에서도 해성학교 교사 김하정과 대구본당 신자 김찬수가 신자 20여 명과 함께 독립선언문을 배포하다 체포됐고, 전라도 나바위본당 신자 박노익(아우구스티노)은 태극기를 제작해 계명학교 학생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체포돼 모진 고문을 당했다.
일본측 통계에 따르면 1919년 3월부터 5월말까지 각지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된 후 구금된 천주교 신자는 모두 53명이었다. 이 숫자는 불교도 95명, 유교도 55명과 비교해 볼 때 적은 숫자는 아니다. 학자들은 만세운동에 참여했으나 체포되지 않았거나 체포된 후 실제로 천주교 신자이지만 교회 처벌이 두려워 그 신분을 밝히지 않은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하며 이 숫자 보다 훨씬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만세운동에 참여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3ㆍ1 운동을 지지하는 프랑스 선교사도 있었다. 당시 안성본당 주임 공베르 신부는 사람들이 만세운동을 어떻게 전개할 지 묻자 "낮에는 국기를 들고, 밤에는 등불을 들고 만세를 부르라"고 조언했다. 그리고 "일본인을 죽이지 마시오. 당신들은 지금 맨주먹이니 일본인을 한 명이라도 죽이면 당신들은 수백 명이 죽을 것이오. 건물도 부수지 마시오. 독립을 해도 당신들이 짓게 되고, 못해도 당신들이 짓게 되는 건물도 아예 부수지 마시오"라고 충고했다.
또 만세운동을 질서있게 전개하기 위해 천주교 신자인 김중묵을 지휘자로 추천하기도 했다. 그리고 공베르 신부는 일본군에 쫓긴 만세 군중이 안성성당으로 몰려오자 성당 마당에 프랑스 국기를 내걸고, 국제 분쟁의 위협을 들어 성당에 피신한 한국인들을 보호했다.
만세운동 이후 독립운동
3ㆍ1 만세운동은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으로 승화됐다. 한국 천주교회 내에서도 일부 한국인 성직자와 평신도들이 독립 운동에 적극 가담했다. 황해도 은율본당 주임 윤예원(토마스) 신부는 성직 박탈이라는 위협을 감수하면서도 신자들에게 독립 사상을 고취시켰고, 상해 임시정부로 보낼 독립 자금을 모금했다. 프랑스 선교사로서 안중근(토마스) 의사에게 고해성사를 집전했던 빌렘 신부는 상해 임시정부 대표로 김규식이 파리 강화 회의에 '한국 독립 청원서'를 제출하는 데 큰 도움을 줬다.
또 당시 교황 베네딕토 15세는 상해 임정파리위원부에 "한국 교회의 자녀들이 받는 핍박을 우려하며, 속히 자유와 행복을 누릴 수 있기를 기원한다"는 서한을 보냈다. 이러한 상해 임정에 대한 천주교측의 일련의 협조로 한국 천주교회에 대한 일제의 감시가 심해졌다. 일부 한국인 신부들은 일제 경찰에 의해 몸수색을 당하기도 했다.
한국인 천주교 신자들의 무장 독립운동은 간도를 중심으로 활발히 전개됐다. 3ㆍ1운동 이후 간도 지방으로 이주한 천주교 신자들은 무장 독립운동 단체인 '의민단'을 조직, 독립운동을 펼쳤다. 명월구성당과 대장 방우룡의 집을 군사령부로 쓴 의민단은 무장병력 300명, 군총 400정, 권총 50정 정도로 무장, 청산리 전투에도 참전했다.
일제는 간도 지역 성당을 한국인 독립운동 근거지로 인식하고 종교 탄압에 주력했다. 이때 천주교 신자들이 많이 살던 금당촌과 동포대, 현성 등이 큰 피해를 입었다. 특히 교우촌 대교동에선 신자들이 학살되고 부녀자들이 폭행 당하는 피해를 입었다.
현대 신학자들과 민족사학자들은 일제시대 한국인 천주교 신자들의 민족 활동에 대해 독립운동과 신앙 가운데 어느 것도 저버리지 않고 '국적없는 식민주의적 신앙관'과 '민족의 고통을 외면한 현실초월주의적 신앙관'을 탈피하고자 했던 '암울한 시대의 예언자들'이라고 평가했다.
▲ 대구 성 유스티노 신학교 신학생들이 공놀이를 즐기고 있다. 이들 신학생들은 3.1 만세 운동에 적극 참가해 교내 운동장에서 독립 만세를 외치고, 거리 시위를 위해 독립선언서를 등사하고 태극기를 제작하기도 했다.
▲ 1933년 대구교구에 파견된 최초의 성골롬반외방선교회 소속 10명의 아일랜드 선교사들과 드망즈 주교가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전라도와 제주도 지역에서 사목한 이들은 프랑스 선교사들과 달리 신자들과 주민들에게 배일사상과 독립운동 의식을 고취시켰다. 이들 중 도슨(앞줄 오른쪽 두번째) 라이언(앞줄 왼쪽 첫번째) 스위니(뒷줄 왼쪽 두번째)신부는 일제로 부터 간첩 혐의로 체포 구금돼 옥고를 치뤘다.
▲ 3.1만세운동은 독립운동으로 승화됐다. 특히 간도로 이주한 천주교 신자들은 교우들만으로 구성된 무장독립단체 의민단을 조직해 청산리 전투에도 참전했다. 사진은 의민단원으로 활동을 많이한 간도 대령동 성당에 1929년 9월17일 연길지목구장 테오도르 브레허 신부가 사목방문해 견진성사를 집전하고 있는 모습.
[평화신문, 2010년 8월 22일, 리길재 기자]
한일강제병합 100년 - 일제 강점기 한국 천주교 (하)
제2편 민족문화부흥운동
교육 출판 활동 통해 민족계몽운동 헌신
일제 강점기 3ㆍ1 만세 운동은 일제의 탄압으로 활기를 잃어가던 우리 민족에게 민족정신을 고취시키고 민족 문화를 부흥시키는 도화선이 됐다. 민족문화부흥운동은 한국 천주교 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일제는 1910년 한일강제병합 이후 우리 민족에 대한 착취와 억압 정책을 전개하면서 특히 한국 천주교에 대한 압력을 가중시켜 나갔다. 그러나 모진 박해에도 불구하고 끈질긴 생명력으로 성장을 지속해온 한국 천주교는 강제병합 이후에도 교세를 더 확장해 나갔다. 그 결과 1911년 4월 조선대목구가 서울대목구와 대구대목구로 분할됐고, 1920년 8월 원산대목구, 1927년 3월 평양지목구, 1928년 7월 연길지목구, 1937년 전주지목구와 광주지목구, 1939년 춘천지목구가 설정됐다. 1940년 1월에는 원산대목구가 다시 덕원자치수도원구와 함흥대목구로 분할됐다. 일제 강점기 시대 특히 3ㆍ1운동 이후 한국 천주교의 민족문화운동을 정리했다.
출판 및 한글 운동
민족문화부흥운동은 전국 각지 종교 단체에서 민족 언론 기관을 설립, 신문ㆍ잡지를 연이어 창간하면서 활발히 전개됐다. 한국 천주교도 가톨릭 문화 활동을 촉진하고 대 사회활동을 위한 새로운 돌파구로 출판물 보급 사업을 확장했다.
특히 서울대목구가 1933년 6월에 창간한 「가톨릭 청년」은 가톨릭의 사회 문화 매체물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 「가톨릭 청년」은 순수 종교지 입장을 취하면서 문예ㆍ언어ㆍ사회ㆍ법률ㆍ과학ㆍ미술ㆍ의학 분야 등 민족 문화 발전을 위한 지식 전달에 힘써 명실공히 계몽지로서의 역할을 다했다.
「가톨릭 청년」은 억압받고 가난한 우리 민족 현실에 대해 사회 정의를 구현해야 한다는 내용을 게재해 민족의식을 부추겼다.
"전 조선 인구의 80%가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그중 60%가 소작인이다. 이런 소작인의 연평균 수입이 250원이며 그 결과로 인해 그들은 힘이 미치는 데까지는 남에게 돈을 빌려 쓴다. …이러한 사람들을 우리는 구해야 한다. 이러한 대중의 행복을 위한 시설이 있어야 한다. 즉 지주는 정당한 보수를 받음과 동시에 소작인의 노동에 적응한 정당한 생활의 보장을 주어야 한다"(「가톨릭 청년」 1934년 11월호 중에서).
이처럼 「가톨릭 청년」은 사회 구조의 모순이나 식민지 하에서의 일제 착취에 대해 강한 내용을 다루진 못했으나 민중 생활이 극도로 피폐하고 있는 현실에 초점을 맞춰 사회 정의를 부르짖었다.
한국 천주교 잡지는 우리 민족을 위한 한글 운동에 노력했다. 일제는 한국의 민족성을 말살해 일본 민족의 최하층으로 동화시키려 했다. 이러한 가운데 한국 천주교는 우리 민족의 문화를 보존하기 위해 한글 전용 원칙을 고수하며 「경향잡지」를 간행했다. 한국 천주교는 1933년 조선어학회에서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발표하자, 새 철자법을 즉시 「경향잡지」에 적용했다. 그리고 한글에 대한 일제 탄압이 자행되던 1940년대에도 「경향잡지」 한글 전용 원칙을 고수했다.
학자들은 "한국 천주교회가 한글을 사용하고 한글 보존에 앞장섬으로써 일제의 동화 정책과 민족 말살 정책에 대항하고 민족 고유 언어를 보존 발전시킴으로써 민중들에게 민족의식을 갖게 했다"고 평가했다.
교육 사업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일제의 국권 침탈에 대항해 국내에서 애국계몽운동이 확산됐는데 한국 천주교는 비교적 온건한 교육과 출판 활동을 통해 애국계몽운동에 참여했다.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는 최초로 한국 천주교회 내에서 여성 교육을 전담했다. "한국인이 일본인으로 동화되는 데 있어 제1의 첩경은 여성 교육의 진보 발달에 있다"고 말할 만큼 민족 주체성 말살에 최종 목표를 두고 있던 일제의 한국 여성 교육 목표와 달리 수녀회는 훌륭한 모성애를 가진 주부로, 모범적 신자로 양성하고자 국문ㆍ한문ㆍ산술ㆍ역사ㆍ지리 외에도 세탁ㆍ육아법ㆍ자수ㆍ직물법ㆍ종교 교육을 실시했다.
1909년 한국에 진출한 독일 상트 오틸리엔 성 베네딕도회는 한국 천주교 최초의 고등교육기관인 '숭신사범학교'와 실업학교인 '숭공학교'를 설립했다.
1910년에 문을 연 숭공학교는 △실업교육을 통해 가톨릭교회가 사회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있다는 것을 정부와 한국 국민에게 보여준다 △자립 가톨릭 수공업자 계층을 탄생시켜 지금까지 가난했던 교인들은 중산층으로 발돋움하도록 하는 받침목이 된다 △가톨릭 신앙 전파에 기여한다 △유능한 한국인 수사를 양성한다는 데 목적을 뒀다. 3년 교육과정으로 목공부ㆍ정밀 금속부ㆍ철공부ㆍ제차부ㆍ재단부ㆍ원예부 등을 운영한 숭공학교는 매일 이론 2시간 실습 8시간 독일 도제제도 방식 교육을 실시, 뛰어난 장인들을 배출했다.
명동성당을 설계한 포와넬 신부는 1912년 숭공학교에 편지를 보내 "본당의 여러 가족이 벌써 거기서 소중한 생계를 찾았습니다. 바라건대 이 사업이 발전해 다른 젊은이들도 무위도식으로부터 구해 불안 상태에서 좀 더 벗어나 보다 그리스도교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어떤 직업을 배울 수 있기를 바란다"고 고마움을 표했다.
숭공학교는 조선 총독부가 폐교시키려고 갖은 압박을 가하면서도 서울을 방문하는 모든 고위층 일본인에게 자랑스럽게 견학시킬 만큼 우수한 학교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결국 1921년 문을 닫고 말았다. 성 베네딕도회가 양질의 교사 양성을 위해 1911년 설립한 2년제 사범학교인 '숭신학교'도 개교 2년 만인 1913년 9월 폐교했다.
이 두 학교가 문을 닫게 된 근본 원인은 교육을 통제하고 특히 한국인이나 외국인이 교사를 양성하는 것을 허용치 않으려는 일제 식민지 교육 정책에 있었다. 일제는 1911년 8월 23일 식민 교육 지침인 '조선 교육령'을 공포하고 어느 정도 치외법권을 누리던 천주교 사립학교에 대해 종교와 교육의 분리를 지시했다. 숭신학교와 숭공학교가 바로 이 식민교육 정책의 직격탄을 맞은 것이다.
이들 두 학교가 폐교된 이후 한국 천주교가 운영하는 정규 중등교육기관은 전국에서 단 하나 '동성상업학교'뿐이었다. 안타깝게도 이로 인해 한국민 상당수가 개신교 학교나 일본인 학교에서 교육을 받게 돼 한국 천주교 발전에 커다란 걸림돌로 작용했다.
학자들은 일제 강점기 당시 한국 천주교는 정부에 의한 근대 교육 추진이 부진했던 상황에서 교육 발전에 일정한 영향력을 미쳤다고 평가했다.
이들은 한국 천주교가 서유럽식 근대 교육 제도를 도입해 신학문을 수용했고, 계급의식을 타파하고 교육 기회 균등의 원칙을 내걸고 여성 교육을 실시해 남녀평등을 지향했으며 빈곤ㆍ근로 학생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한 것에 큰 점수를 주었다.
아울러 사범학교를 설립해 교육의 질적 수준을 높이려 노력했고 운동회ㆍ연설회ㆍ토론회 등을 장려해 전인 교육의 새 방향을 제시한 점도 높이 평가했다.
[평화신문, 2010년 8월 29일, 리길재 기자]